슬픔장애재활클리닉
한차현 지음 / 박하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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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일이나 나쁜 일이나 그것이 타인의 것일 때에는 작게 보이지만 내것일 때에는 무척 크게 느껴지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가족을 혹은 가까운 이들을 먼저 떠나 보내는 아픔을 겪은 이들은 타인의 고통을 나누어 가지는 일에 어찌보면 좀더 능숙해질 수 있다고 본다.한번 겪어 보았기 때문에 좀더 고통 대처에 처음인 사람보다는 의연함이 있다.하지만 큰 일을 처음 겪는 이들은 슬픔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헤매이는 이들도 있는게 그 슬픔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슬픔으로 자신의 생을 가두는 이들도 종종 보게 된다. 실례로 친정아버지를 보내 드리며 나 또한 심한 고통에 시달렸고 바로 몇 달 후에 애견이 갑자기 죽는 일이 발생해서 그 해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게 몸과 마음이 몹시 고통에 시다렸다.마음이 괴로우니 몸에서 여기저기 빨간불이 들어와 타인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친정엄마가 몹시 힘든 시간을 보내셨는지 갑자기 혈압이 생겨 약을 드시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약을 드시고 계시다. 엄마는 아버지를 보내드린 큰 아픔에서 몸과 맘이 많이 상하셨다.이제 어느 정도 단련이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그 후유증은 몸이 기억하고 있는 듯 하다.

 

슬픈 일을 한번 겪고 다시 겪게 되면 단단해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슬픔 안에 자신을 가두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내것이 아닐 경우에는 잊어버리라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쉽게 잊혀지지 않는 슬픔이 있다. 평생 가슴에 남아 자신을 짓누르는 슬픔에 아파하고 치유가 되지 않아 슬픔장애에 빠졌다면 누군가는 치유를 해줘야 할텐데 그런 일을 하는 일들이 여기 있다. [애도와 위안의 사람들] 일명 '애위사' 에 차연은 슬픈 일을 겪은 이들을 찾아가 그들의 슬픔을 달래주는 일을 한다. 자식을 먼저 보냈거나 혹은 부모님을 보내드렸거나 죽음이라는 이유에도 가지가지가 있다. 누군가는 먼저 떠나보낸 이들은 한동안 슬픔에 빠져 자신의 일상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걷도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이들이 '애위사'에 일을 맡긴다. 영혼을 불러내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편안하게 보내주는 형식적이지만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슬픔을 다독여 준다. 그렇게 삶과 죽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듯 장례식장을 밥먹듯 드나들면서 보내는 차연,그의 눈에 어느 젊은 죽음 앞에서 의연하게 혼자 지키고 있다가 꾸역꾸역 밥을 잘 챙겨 먹는 젊은 여자를 발견,그녀는 손예진을 닮았다는 이유로 쫒아가게 되고 그녀와 밥을 먹고 그녀의 원룸에까지 찾아가게 된다. 그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차연이 '애위사'라면 손예진을 닮은 여인은 자살을 하는 이들의 마지막을 지켜 주고 마지막 가는 길까지 끝까지 지켜주는 모임의 한 여자라고 해야하나.암튼 그렇게 하여 둘은 묘하게 얽혀가게 된다. 그가 내민 명함의 '애위사'를 알아 보게 해주었던 인물이 있다고 말한 그녀,그렇다면 애위사를 말해준 여자는 누구일까? 원형이 그녀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하여 찾아갔던 곳에서 뜻하지 않은 일을 겪게 되고 그녀의 '성이연'을 찾아 헤매이다 자신의 고객이기도 하면서 그녀와 함께 잠을 잤다는 것을 생각해 내면서 그녀를 '자살'이 아니라 동생과 남은 삶을 살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 그녀가 자살을 택하게 된 것일까? 거기에 혹시 자신의 술버릇 때문에 함께 잔 과거가 한몫을 하는 것은 아닌지. 차연은 애위사 일을 하면서 '슬픔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는 일이,그럼 쉬울 줄 알았어요? 이번 기회에 알아둬요. 슬픔은 삭히는게 아니라 떠나보내는 거라고." 라고 말하며 슬픔을 떠나보내지 못하여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삶의 희망을 찾아 주기 위하여 부던히 애를 쓰다가 만난 자신의 과거속 인물인 성이연을 꼭 삶의 희망의 그늘로 끌어 들이려 노력을 한다.

 

슬픔 한가지 간직하지 않은 이들이 어디 있을까? 길을 막고 물어보면 모두가 슬픈 일 한가지 안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모두가 슬픈 것은 아니다 삶의 희망을 찾아 죽음이 아니라 삶이라는 바다에서 유영하기 위하여 열심히 담금질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지 못한 이들이 가끔 있다. 성이연처럼 아직 어린 동생이 있지만 엄마가 폐암으로 돌아 가시고 자신에게 안겨진 슬픔을 이기 못해 자살을 꿈꾸는,아니 실행에 몇번 옮겼지만 아직 기회가 오지 않은 이들. 그들이 삶을 마감하게 도울 수는 없다.어떻게 해서든 살게 해야한다.죽음이 불러 온 빈 공간을 다른 무엇으로도 채우지 못하고 슬픔에 허덕이는 슬픔장애증후군이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던 애위사 차연과 자살하는 이들의 마지막까지 지켜보는 일을 하는 네일아트 원형이 러브라인이 그려지는 듯도 하고 미스터리식으로 풀려 가는 것도 갔았지만 결론은 아니라는 것.가끔 어느 프로에서 보면 가족이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서로에게 골을 만들어 가족을 단절시키는 경우도 종종 보았다.그런 가족에게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연습을 시키듯 서로의 입장에 되어서 과거와 현재의 상황극을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단절의 벽을 허무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 아주 자그마한 슬픔이나 그외 일들이 얼마나 큰 단절을 혹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 그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연습이나 재활클리닉이 현대인들에게 필요한지도 모른다.요즘 흔하게 힐링이나 치유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많은 이들이 공감을 하는 단어일 듯 하다.그만큼 현대는 알게 모르게 마음의 병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시대인데 큰 슬픔을 간직하고 있으면 마음이 병은 더 클 듯 하다.

 

물도 고이면 썩게 마련이다.슬픔도 마음에 고이면 병이 된다. 슬픔을 삭히지도 못하고 떠나보내지도 못하고 마음안에 가두어 병을 만든 이들이 마지막 탈출구처럼 '자살'을 선택하게 놔두어서는 안된다.그러지 않아도 우리는 자살율이 제일 높은 나라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데 흥을 많이 간직하고 살아왔던 우리가 왜 이렇게 변해 버린 것일까? 너무 '빨리빨리' '대충대충'을 외치면서 냄비처럼 빨리 끓었던 것은 아닐까.로또 하나에 인생역전을 꿈꾸며 인생한방을 꿈꾸는 이들이 과연 로또로 인생역전을 만들었을까? 쉽게 얻은 정상은 쉽게 내려오기 마련이고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게 마련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남이 내린 결론에 편승하여 '빨리빨리'를 외치던 우리들은 너무 빨리 달려가려고만 했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며 슬픔을 떠나보낼 시간적 여유를 갖기 보다는 그냥 지나쳤던 것은 아닐까? 현재가 고통스럽다고 슬프다고 죽음이 답일 수는 없다. 한번 현실에 부딪혀 보지도 않고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는 다는 것은 너무 허무한 일이다.성이연이 자신이 내린 결론에서 벗어나 차연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한번 다시 살아보겠다는 의지로 보인다.자신의 죽음에 반기를 든 애위사 차연이 그리고 차연에게 성이연이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희망이길 바래본다.사랑은 사랑으로 치유하고 사람은 사람으로 그 아픔을 달래는 것이다.모두에게 슬픔장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치유의 시간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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