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체
이규진 지음 / 책밭(늘품플러스) / 201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에 본 영화 <역린>에서는 정조가 즉위하고 그를 암살하려던 하루 24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역린'은 '임금의 분노'인데 영화에서는 다른 누구를 믿기 보다는 스스로 자신을 지키려 노력했던 그를 만날 수 있다.스스로 몸도 단련하고 잘못된 일은 찾아 벌하는 일까지 그가 도맡아서 한다.누구를 시킬 수 없었던 시대,스스로 단단해지기 위하여 선왕에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해져야만 했다.그런 왕의 분노를 역린에서 보았다면 이 작품은 '수원화성'과 '천주교박해'라고 들 수 있을 것이다. 수원화성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하여 지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작품의 제목처럼 '파체'란 '슬픔을 기쁨으로 돌리어 생각함' 이란 뜻처럼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은 슬픔이었지만 수원화성으로 인하여 기쁨으로 바뀌길 바란것은 아닐까.

 

"높은 자나, 낮은 자나, 가진 자나, 없는 자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강하거나, 약하거나, 잘 났거나, 못났거나, 그 어떤 이라 해도 이 성안에 다 살게 하라. 복되게 살게 하라."

 

그런데 소설은 슬프다고 해야하나.슬픔이 기쁨으로가 아닌 슬픔으로 끝난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한기만 했다. 작가 이규진은 습작만 하다가 이번에 <파체>로 처음 책을 냈다고 하는데 이런 역사소설 정말 좋아하는데 그의 다음 행보가 기다려질 정도로 빠져들며 읽었다. 정조에 대한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는 정말 많이 있는데 이 작품은 다른 작품보다는 좀 특이하지 않았나싶다. 여자이면서 남자로 살아야 했던 '정빈'이나 왕의 자손이면서 자신의 과거를 알지 못하고 노비로 산 '유겸' 이란 인물은 어쩌면 그시대를 잘 나타내주는 인물들이지 않을까. 자신들의 신분을 속이며 살아야 했으니 얼마나 슬픈 인생인가.그렇다고 그것이 행복한 삶도 아니고 슬픔으로 끝나서 더 슬프고 먹먹한 작품이었는데 그래도 참 재밌게 읽었다.역사소설은 어떻게 풀어내는가에 따라 이야기가 무궁무진한 듯 하다.

 

서출이라 재주도 많고 학식을 갖추고 있어도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던 태윤,그런 태윤의 광대노름을 보고는 그런 인재를 쓰기위한 시험이 있고 태윤은 잘못되긴 했지만 정조의 눈에 들어 수원화성 공사를 맡게 된다.화성에는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염원도 담겨 있지만 사학이라 하는 천주교가 곳곳에 담겨 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천주교는 사학이라 하여 금지된 것이기 때문에 그와 관계된 것을 믿거나 가지고 있어도 안되던 시대,하지만 태윤과 유겸 뿐만이 아니라 왕도 사학에 관한 책을 읽었음을 시사한다.그만큼 쉬쉬하면서도 많은 이들속에 존재하던 신앙이지 않았나 생각되며 뜻 하지 않은 무원당의 사고로 인해 정연을 구하러 연못에 빠졌던 정빈이 죽고 정연만 살아 남았던 것을 아버지 차원일은 가문을 살리기 위하여 딸을 아들로 키우며 정빈을 딸도 아닌 아들로 아닌 괴물처럼 키우면서도 그녀의 아픔을 알아주지 않는다. 그런 정빈을 옆에서 달래는 것은 이집 무원당에 오게된 노비 유겸,그의 과거는 드러난 것이 없다.부모가 다 죽었다는 것 밖에.그는 풀과 꽃을 좋아하는 그야말로 선한 사람인데 정빈의 비밀을 알게 되고 그를 달래주는 인물로 정빈과 함께 한다.

 

궁인이 자신의 아이를 배임하지만 궁에서는 진실을 밝힐 수 없었던 정조, 아버지를 위해 건설한 화성은 자신의 아들인 유겸과도 천국을 거닐 듯 조우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어떻게 보면 그곳에서 자신의 자손이 살아갈 수 있는 밑바탕을 건설한 것이기도 했다.모두가 평화롭기를 바랐던 왕이었고 그런 곳으로 화성을 건설하였는데 어떻게 보면 그곳은 사학을 눈감아 준 곳이기며 드러내기도 한 장소라 볼 수 있다.왕도 자신을 모두 드러내고 살지 못했지만 어떻게 보면 백성들도 살아남기 위하여 자신을 백프로 드러내 놓고 살지 못했던 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딸을 아들로 만들어야 했던 차원일도 그의 딸이며 아들로 살고 있는 정빈도 그렇고 유겸이나 정빈의 아내로 들어왔던 영신은 자신의 신분을 속이면서라도 동생들을 보살펴야 했고 유겸의 어머니 자운향 또한 자신의 드러낼 수 없었던 인물이었다. 모두가 자신들을 성에 가두고 살아가는 인물들처럼 자신들을 둘러 싸고 있는 성이 무너진 날에 모두가 죽음에 이르는 그야말로 슬픔이 넘쳐 흐르지만 정빈과 유겸의 죽음처럼 죽음후 그들의 이루지 못함이 더 가슴아프고 구구절절함처럼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인지.

 

"혹 파체破涕라는 말을 아느냐."

"어려운 말은 모르옵니다."

"눈물을 거두란 뜻이다.슬픔을 이기고 기쁨을 얻으란 뜻이니 내 오늘 너에게서 그 말의 뜻을 알겠다."

"......

"제게도 한 뜻이 떠올랐나이다."

"오 그러한가.무슨 뜻이련고?"

"먼 데 나라말로 그것은 평화를 부르는 말 이라고 합니다.그 나라사람들은 마음이 곤고할 때 하늘을 우러러 이렇게 소원을 빈다고 합니다.도나 노비스 파쳄.도나 노비스 파쳄."

 

엉킨 실타래처럼 모두가 매듭을 풀지 못한 삶에서 죽음에 이르는 순간 맺힌 매듭이 하나 둘 풀리면서 그들이 천국에 이르렀는지 모르지만 '모두에게 평화가 깃들기를...' 이란 기도를 해야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만약에 정빈이 자신이 남자가 아니고 여자라고 당당히 밝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의 삶이 정빈이 누렸던 것만큼의 힘을 얻는 삶을 살았을까? 여자도 남자도 아닌 삶 속에서 살아야했던 어떻게 보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여자보다는 남자와 같은 힘이 필요했던 시대는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힘도 권력도 다 필요없다는 것을.인생에 어떻게 기쁨만 있을까,슬픔도 있고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탄생이 있으면 죽음도 있는 것이 인생인데 모두가 평화롭기를 기원한 곳이 어떻게 보면 서학이라는 것으로 평화가 한순간 깨져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하고 화성 또한 인간의 삶처럼 그렇게 세월을 이겨내며 견디어낸 것은 아닐까.그곳에 가면 이제 태윤이나 유겸 정빈등의 이야기가 생각날 듯 하다.그들이 다 이루지 못하고 남겨 놓은 삶이 어딘선가 헤매이고 있을 것만 같은.영화 <역린>에 이은 이야기처럼 연결되어 '역린'후의 이야기를 읽은 느낌이 든다.문화부흥기였던 정조,이야기도 많고 회자되는 이야기도 많은데 모두 특색이고 그나름 다 재밌는 듯 하다.정조가 아버지를 위하여 화성을 건설하였다면 소설은 더 나아가 그 다음 아들로 이어져서 좀더 폭넓은 화성과 그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나싶다.

 

 

 

*한우리 북카페에서 받은 책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