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여동생
고체 스밀레프스키 지음, 문희경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정신분석학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프로이트,그의 가족의 삶은 어떠했을까? 전쟁으로인해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 프로이트,그는 자신의 가족과 아내의 동생들과 하인들 그리고 자신의 애견까지 데리고 가면서 그의 누이들은 한명도 망명자 명단에 올리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자신이 먼저 망명한 후에 누이들을 데려가려 했던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누이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던 것인지.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 프로이트 누이들의 삶에 대하여 그리고 그 시대 그들과 관계한 이들의 삶과 함께 하며 시대와 함께 역사 속으로 스러져간 여인들의 기구한 삶에 대하여 조명해 본다.

 

 아돌피나를 둘러싼 침묵이 매우 요란해서 나는 이 소설을 그녀의 목소리로 쓰지 않을 수 없었다.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생에 관해 알려진 사실들은 소설의 배경이나 내가 몇 년씩 헤매던 미로의 벽과 같았다. 나는 미로 속에서 아돌피나의 목소리가 들리는 통로를 찾아다니며 그녀의 목소리를 글로 옮기면서 소설을 통해 역사 속에 사라져간 수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을 구제할 수 있었다. -작가의 말 중에서

 

'현실은 언제까지나 알 수 없는 채로 남을 것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이 말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그 현실을 살지 않았지만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여동생 아돌피나의 삶은 역사 속에 존재한다. 정신분석학자의 여동생이면서 정신병원 생활을 하기도 한 그녀의 삶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스러져갔지만 프로이트의 여동생으로 그리고 언니들과 그가 사랑했던 첫사랑인 라이너까지 그녀에게도 삶이 있었지만 기억되는 것은 없다. 인생 전반에서 의지하고 믿고 따랐던 정신적 지주였던 프로이트가 망명자 명단에 올리지 않아 영국에서의 안정된 삶이 아니라 수용소에서 마침표를 찍은 삶이라고 해서 프로이트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삶인가 하고 씁쓸했는데 그보다는 한 여인의 삶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 아돌피나라는 '여자의 일생'을 읽다보니 그녀와 마찬가지로 여자의 일생을 살아가고 있어서일까 가슴이 먹먹했다.

 

태어남 자체로 부담이 되었던 아돌피나 그녀가 어머니에게서 늘 듣는 말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데' 라는 그녀의 탄생자체가 부정적인 말이었다. 아이에게 칭찬을 해주어도 될까말까 하는데 늘 부정적인 말에 병약해서 늘 다른 자식들과는 비교되었던 아돌피나, 그는 학교에서의 공부가 아니라 오빠인 프로이트에게서 더 많은 것을 얻어 듣고 의지하게 된다.그런 오빠에게서 사춘기 때 자신과는 다른 성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기도 하여 잠시 서먹한 관계에서 그림공부로 그리고 이성에 눈을 뜨며 다시금 관계를 회복해 나가기도 한다. 자신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프로이트마져 아돌피나의 말에 귀 기울이기 보다는 자신의 삶에 더 매달리다 보니 그녀는 세상에 홀로 떨어진 존재처럼 마음 둘 곳이 없던 삶,그런 그녀에게 첫사랑은 그녀의 모든 것을 바치게 만들었지만 첫사랑은 그 나름대로 상처를 가지고 있어 현재라는 시간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물이라 그녀를 채워주는 존재가 되지도 못했고 그와의 관계에서 얻게 된 아이마져 그의 죽음으로 인해 지워야 했던 가슴 아픈 여인의 삶은 그 혼자 짊어지고 나갈 멍에였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

 

살다 보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이 찾아온다. 어떤 고통은 이내 수그러들지만 어떤 고통은 죽는 날까지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 겪는 고통만이 진정한 고통이다. 나머지는 모두 처음의 고통을 통한 아픔이다.

 

아돌피나의 삶을 읽으며 자식에게 엄마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부모가 해줄 수 있는 칭찬의 말들이 자식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깨닫게 되었다.자식이 부모의 욕심에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나부터 녀석들에게 칭찬보다는 늘 녀석들의 기를 꺾는 말들을 일삼은 듯 하다. 믿고 의지하게 해주기 보다는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는 것을 아돌피나의 삶을 읽으며 반성하게 되었다. 엄마의 부정적인 말이 얼마나 그녀의 마음을 병들게 했는지 그녀 인생전반을 걸쳐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그렇다고 곁에서 언니들이 그녀에게 힘이 되어 준 것도 아니다. 그녀가 의지하고 믿게 된 삶은 정신병원을 드나드는 클림트의 여동생인 클라라정도다.가족이 힘이 되고 의지가 되어야 하는데 타인에게서 받는 위안이 얼마나 그녀 삶에 도움이 되었을까. 무엇보다 힘이 되는 것은 가족일 것이다.

 

"그래서 더 맞는 말 아닙니까.아이러니가 없으면 삶이 얼마나 심심하겠어요. 무섭도록 견딜 수 없겠죠."

 

태어남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그 기로에 서게 된 삶처럼 그녀를 붙잡고 늘어졌던 사랑과 광기 그리고 죽음까지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누워서 몸 위로 한 뼘 띄워 이불로 만든 하얀 하늘처럼 그녀의 삶은 공중에 떠 있는 삶처럼 뿌리가 없는 나무처럼 부유하는 기구한 삶이었다.어머니가 그녀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힘이 되었더라면 그녀의 삶은 어떠했을까? 아니면 첫사랑 라이너가 자신의 뿌리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좀더 그녀와 행복한 가정을 일구며 자살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일구어나갔더라면 아돌피나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가정도 이루어보지 못했고 어머니가 되어보지도 못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녀와 함께 한 우울증,괴테 박사는 우울증이라고 하기 보다는 광기라고 했다. 정신병원에 갇힌 여인들은 어떻게 보면 사회가 만들어낸 광기 속에 갇혔다고 볼 수도 있듯이 그녀 또한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광기 속에 갇혔다고 볼수도 있을 듯 하다.그런 그녀의 삶이 가련하고 안쓰럽다.

 

나는 거울을 피해 다녔는데 뒤러의 판화 한 점을 볼 때마다 나와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판화 속 여인은 망연히 아무대도 아닌 어딘가를 쳐다보는 순간에 포착되었고 날개가 있지만 천사는 아니다. 우울증을 형상화한 인물이다. 머리를 안쪽으로 기울이고 있어서 주먹 쥔 손으로 받치지 않았다면 가슴으로 떨어졌을 것이다......다른 한 손은 축 늘어졌는데 어차피 지푸라기를 잡아도 가라앉는 것을 막지 못할 걸 알아서였다.-뒤러의 멜랑콜리아 표현

 

프로이트는 모든 것을 누렸다고 본다면 그 그늘에 가려져 있던 누이동생 아돌피나의 삶은 너무 기구하다. 그녀의 삶에서 그녀가 손에 쥔 것은 없다. 그녀의 것이 된 것은 어느 것도 없는 것 같다. 엄마도 오빠도 첫사랑도 아이도.죽는 그 순간에는 모든 것을 버리듯 '잊어버릴 거야.' 라는 한마디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여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듯 했던 한 여인의 삶을 재조명해 보니 분명 그녀의 삶에도 족적은 있다. 프로이트의 착한 여동생으로 라이너의 첫사랑으로 클라라의 친구로 그리고 자신이 평생 꿈이었고 가지고 싶었던 아이의 모자가 꼭 필요한 이에게는 소중한 것이 되었을 것이며 그녀도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는 존재로 거듭났다는 것.삶과 죽음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연장선상에서 떼어내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삶이 중요하다고 죽음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태어나는 순간에도 결코 행복하지 못했던 아돌피나의 삶이 어쩌면 프로이트가 망명자의 명단에 올리지 않아 죽음도 수용소에서 맞이해야만 했다. 씁쓸한 삶이지만 잊히기엔 선명하게 역사와 함께 머물렀던 한 여인의 삶이 무겁게 가슴 밑바닥을 헤집는다.'잊어버릴 거야' 라고 했지만 그녀는 반대로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듯 하다.영화 속 비련의 주인공처럼 그녀의 삶은 잊지 못하고 오래도록 남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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