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귀신의 노래 - 지상을 걷는 쓸쓸한 여행자들을 위한 따뜻한 손편지
곽재구 지음 / 열림원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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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이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그래 지금은 모두들/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자정 넘으면/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이 시가 나온 지 삼십년이 넘었다고 한다. 그를 알리게 해준 이 시 '사평역에서'는 실제 '사평역'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찌보면 그가 여행에서 보았던 세계를 꾸밈없이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린 나이에 자신의 꿈이 '소설가'라고 했던 것 때문인지 선생님의 도시락을 깔고 앉는 행운을 누리며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었고 고등학교 때까지 모든 시간을 시를 위해 보내듯이 시를 썼던 그가 이십대 써 놓았던 '나전칠기'와 같았던 것을 '허드레 나무로 엮은 사과 궤짝' 처럼 다듬어 슬쩍 끼어 넣듯 신춘문예에 마지막날 응모한 것이 당선이 된 것이다. 사평역에서와 같은 시가 나오기까지는 '시간과 길'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그가 여행에서 만나는 것들을 허투로 버리지 않고 그 안에서 다시금 시로 재탄생시켜 놓는 것은 시라고 보기 보다는 한 편의 그림이나 이야기처럼 여행지에서 만났던 인연이나 이야기 풍경을 그려 놓고 있다. 시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기 보다는 느낀것들을 솔직하게 뱉어냄으로 하여 우리가 쉽게 읽고 진실되게 느낄 때 그게 바로 시인의 마음이 아닐까.

 

검은 안경을 낀 여자는 완전히 그에게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그가 "아내가 좋아해요" 라고 말했을 때 움찔했지만 이번에는 가슴이 먹먹했다.그에게 아내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 아내 또한 앞을 보지 못하리라는 생각은 상상력밖의 일이었다. 둘은 길을 더듬어 목욕탕 앞길에서 왼쪽 길로 사라졌다. 달방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길.그가 가슴에 안고 오던 프리지어 꽃다발이 골목길의 입구에 싱싱하게 걸려 있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그가 능숙한 솜씨로 목욕을 끝내는 것을 조심스레 지켜보면서 나는 삶이란 그것을 가꿔갈 정직하고 따뜻한 능력이 있는 이에게만 주어지는 어떤 꽃다발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시인에게 여행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그는 어린시절 자신이 여행이라고 느끼지 못했던 것에서부터 여행을 풀어낸다. 아니 여행에서 만났던 인연들에 대하여 이야기한다.여행은 낯선 것과 만남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낯선 사람과의 만남인 듯 하다. 낯선 곳에서 만났던 사람,말,풍경, 무엇하나 그에겐 소재가 되지 않은 것이 없다. 처음 만나며 나누었던 인삿말 한마디도 소중하다고 생각되면 되새김질하듯 하여 자신의 언어처럼 만들듯 익숙함으로 바꾸어 놓았던 이야기를 들려 준다. 여행의 소중함이란 이렇게 말 한마디라도 주어 담아야 한다는 것을 들려 주는 기분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 떠나보면 내 집, 내 것에 대한 소중함이 더 밀려 오겠지만 떠나보아야지만 다른 것의 소중함도 알게 된다. 그것이 값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흔하게 지나칠 수 있는 별볼일 없는 것이라 해도 어느 누군가에게는 가슴에 박혀 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길귀신은 내게 시의 신의 다른 이름이다.

그가 지상의 내 모든 여행을 따뜻이 지켜주었다......

 

삼십여 년 전 그를 있게 해 준 '사평역에서'가 시인으로 우뚝서게 해 주었다면 삼십년 후 그에게 이 시가 그를 발목을 잡는 시이기도 하다는,사평역에서 후에 그자리를 대신 할 어떤 뒷받침이 없었다는 말이 왜 가진 자의 욕심처럼 들릴까? 이렇게 한 편이라도 정말 멋진 시를 우뚝 세워 놓았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가.많은 시가 더 유명했더라면,더 열심히 詩作을 했더라면 아쉬움이 남겠지만 세상에 나와 한 편의 시도 쓰지 못하고 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저자의 전작인 <포구의 기행>을 딸이 생일선물로 여행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선물로 사주어 읽게 되었다. 유독 포구에 대한 그의 이야기가 많다. <포구기행>을 제대로 읽지 않았는데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이 책을 읽다보니 갑자기 그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봤다. 이 책에도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우리나라 순천만 여수바다,와온 바다,여자도 등 그가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과 풍경을 한 편의 시에 담아 정성들여 쓰는 손편지처럼 수묵화처럼 담아냈다. 이런 따뜻한 편지나 글을 받아 본 다면 잊고 있던 마음의 고향을 찾은 것처럼 감성에 젖게 된다. 그런 시간이 이어졌다.책을 읽는 내내.

 

詩란 무엇일까? 저자의 삶을 옭아매듯 그의 삶을 온통 한 길만 달려가게 만든 詩란.누군가는 인생은 소설이라 했지만 그의 글을 읽다보면 그의 모든 것들은 그에게서 '시'로 승화되는 듯 하다.어느 바닷가에서 만난 이국의 여인이나 그녀와 도라지꽃, 처음 만난 이의 문패와 그 집 앞에 있는 오래된 나무에 걸린 새집에 있는 말들이 모두 시어처럼 그에게 와서 꿈틀 거린다. 삶의 모든 시간들이,여행에서 만났던 시간 공간 그 속에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그를 시에 가두기 보다는 이렇게 행과 행 속에 감추어 두었던 말로 되살아나 더 공감이 간다. 그가 건져 올리려던 시어들보다 소중한 인연,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값지게 다가오는 것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놓고 보면 시처럼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는 것이다.겨울의 어느 시간 순천만에 한번 가봐야지 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순천만 뿐만이 아니라 와온 바다도 여자도도 질퍽질퍽한 뻘밭에서 캐 올린 찰진 조개살처럼 삶의 여정이 담긴 시어처럼 만나게 될 시간과 공간을 여행하고 싶어졌다.어느 한 시공에 갇혀 있기 보다는 자유롭게 삶을 여행하듯 인생을 여행하듯 풀어낸 진실한 여행이야기와 그 속에서 만났던 이들의 이야기가 어느 시간보다 따뜻한 온기를 전해준다.시란 그런 것 같다.한 줄의 언어로도 마음을 데울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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