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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프랑수아 가르드 지음, 성귀수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흰둥이 야만인' 왜 '나르시스 펠티에' 그가 흰둥이 야만인이 되어야 했을까? 이 이야기를 사실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나르시스 펠티에라고 하는 인물이 실제 겪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여졌는데 그는 19세기 중반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흰둥이 야만인'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온 몸에 문신을 한 흰둥이 야만인,백인이지만 그는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하지 못했고 바람소리와 같은 소리를 내며 옷이라고는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섬을 지나는 이들에게 발견되었다.발견될 당시에도 야만인들과 함께 어우러져 있어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섞여 있었으니 그가 섬에 남겨진 후 얼마나 그들과 환경에 잘 적응하고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듯 하다. '나르시스 펠티에' 그는 구둣방을 하는 아버지와 형과 누이를 둔 집안에서 구둣방은 형에게 물려질터이니 자신은 다른 일을 선택해야 해서 뱃일을 하게 된다. 사춘기 나이에 홀로 거친 뱃일에 뛰어 들게 되고 원양어선도 타게 되었나 보다.그런 그가 왜 야만인들이 사는 섬에 홀로 남겨지게 된 것일까?
소설은 나르시스 펠티에가 섬에 남겨지게 된 경위와 섬에서 그를 발견하여 물과 먹을 것을 주며 함께 살아가는 야만딘들과의 생활이 그려지는 한편 지리학자 옥타브 드 발롬브룅의 편지와 함께 씨실과 날실처럼 엮이며 그의 인생 이야기를 엮어 나간다. 그가 배를 타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문명인이었던 문명생활을 했다. 뱃일을 하니 거친 그들의 삶을 잘 보여주듯 항구에 들러 여자들과도 밤시간을 보내는 일들이 표현되기도 하고 배에서 물을 구하지 못해 죽어 나가는,그야말로 거친 뱃사람으로의 일들과 함께 그가 발을 딛게 되는 섬에서는 물을 구하고 바로 떠나려 했는데 그만 혼자 남겨져 죽음도 삶도 아닌 시간 속에서 야만인과 같은 노파의 도움으로 근근히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는 혼자 남겨졌기에 당연히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자신을 구하러 올것이라 생각을 한다. 실제 펠티에는 사춘기 나이에 섬에 들어와 17년간을 로빈훗 아닌 로빈훗과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현대판 로빈훗이 아니라 그야말로 야만인아니 원주민들과 어울려 그들과 함께 하나가 되듯 자연을 배우고 익히며 그곳에서 '살아내야' 하는 삶을 견디며 살아간다.
문명인에서 야만인아니 자연의 삶으로 돌아간 그에게 그가 간직했던 '문명'이란 것은 겉옷처럼 다 벗어버리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과 하나가 되 듯 그렇게 그들의 삶을 익혀 나가야 했다. 나르시스의 시선에서 보는 '섬에서의 삶'은 그가 어떻게 원주민들과 하나가 되어 살아갔고 어떻게 견디어 나갔는지 작가의 입장에서 그려 놓은 것인데 사실감 있게 다가온다.그런가 하면 시드니 해변에서 발견되어 지리학자 옥타브의 손에 넘겨져 그가 프랑스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프랑스로 돌아가기 위한,부모 형제를 찾아 가기 위한 길과 자신의 뿌리를 찾지만 그들에게는 이미 17년 전에 죽은 생명과 같은 남과 같은 존재,거기에 문명을 모두 잃어 버려 야만인과 같은 존재이니 가족에게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가족에 돌아간다는 것도 고향에 남겨진다는 것도 별 의미가 없는 상태가 된다. 지리학자 옥타브가 그에게 유아와 같은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치면서 그의 기억 저 편에 남아 있는 문명이 다시금 자신도 모르게 몸이 기억하고 있는 상태로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오게 되지만 결코 '섬'에서 '야만인'들과의 삶은 밖으로 꺼내려 들지 않는 나르시스,그에게 섬에서의 삶은 무엇이고 왜 자신의 야만의 삶을 꺼내 놓지 않으려는 것인지.
문명인들은 야만인들을 만나면 문명으로 야만을 흡수하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야만 야생성이 사라진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도 했지만 지금도 우리 가까이에서도 그런 일을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고 야생성을 잃은 이들은 야만도 아닌 문명도 아닌 삶을 살고 있는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혹시 나르시스는 그들의 그런 삶을 존중해서 지켜주려고 더 함구한 것일까? 자신의 과거가 고스란히 묻혀 있는 정글의 삶의 문을 잠금으로 하여 그들을 보호하고 그곳을 그들만의 세계로 남겨 놓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이 이야기를 읽다보니 나르시스의 삶은 정말 누구도 두번 다시 겪지 못할 희한한 삶을 살았지만 정말 인간의 작은 실수에 의해 또한 그런 삶을 살았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문명에서 야만으로 그리고 다시 문명으로. 인간이 얼마나 환경 적응에 탁월한 존재인지 몸소 그가 보여주는 것처럼 문명인으로 뱃사람으로 나르시스가 야만에서는 그야말로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고양이 눈을 가지고 야만에 잘 적응한 반면에 다시 문명으로 나오게 되면서 다시 자신의 몸에 저장된 문명인의 삶을 하나 하나 끄집어 내는가 하면 문명 속에서 야만인의 삶을 발휘하여 누구보다 밝은 눈으로 정교한 도구를 만들어 식량을 확보하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야만에서의 능력 또한 가진 두 문명의 함께 공존하는 전천후의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 놀랍다.
그런 나르시스에게서 야만에서의 삶을 끄집어 내고 싶었던 옥타브,그는 나르시스의 후견인처럼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문명으로 다시 돌아 온 그에게서 야만의 시간을 끄집어 낸다는 것은 어떤 아픔을 들쑤시는 일과 같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부단한 노력으로 미지의 세계였던 부분들이 더 많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나르시스 또한 문명에서의 삶이 좀더 야생성을 간직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옥타브가 아니었다면 그는 '구경거리' 로 삶이 마감되었을 수도 있다. 온 몸에 야만인의 문신을 하고 자신의 모국어도 잃어버린 그야말로 흰둥이 야만인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이슈가 되었을 듯 하다. 그런가하면 나르시스와 함께 했던 뱃사람들 또한 그가 섬에 남겨지게 된 일을 은폐하려던 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그가 문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면서 문명과 야만의 세상은 그의 존재 하나로 모두 시끄럽게 되었지만 인류학적으로는 큰 족적을 남기지 않았을까.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는 나와 다른 반문화를 받아 들이고 인정하길 꺼려 하는 이들이 있다.선입견이나 오만함에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생각한다던가 나와 다른 것은 한낱 구경거리로 밖에 여기지 않는 이들 속에서 나르시스가 과연 문명으로 돌아 온 삶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