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여행가방 - 박완서 기행산문집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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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책들을 일주일에 한 권은 읽어보자는 나름 계획을 세우고 요즘 한 권씩 읽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데 그것도 잘 되지 않고 있다. 그래도 생각하고 있다는 것으로 만족을 하며 가끔 한 권씩 읽어 쌓아 놓은 책들 중에 내 안에 담긴 책이 한 권 한 권 늘어간다는 뿌듯함에 읽고 있는데 이 책에는 지난번 읽었던 단편집에 같은 글이 두 편 실려 있어 더 반갑다. 읽은 것을 바로 기억해 낼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그래도 읽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다시 읽다가 혼자 살며시 미소를 지어 보았다. [남도 기행]과 [섬진강 기행] [백두산 기행] 이 그것이고 다른 것들은 처음이라 그냥 읽어 나갔다. 작가가 생존해서 읽었다면 어떠했을까? 생존과 상관없이 좀더 일찍 읽어보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긴 해도 그래도 지금 읽는 것을 만족한다.

 

친구의 잘못이었는지 고의였는지 광주에서 해남까지의 장거리도 직행버스도 못 타고 수도 없이 정거하는 그냥 시외버스를 타게 됐다. 그러나 그동안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조금도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내가 지금까지해온 여행은 과정을 무시한 목적지 위주의 여행이었다. 그게 얼마나 바로 여행이었던가를 알 것 같았다.

 

늘 다정한 어머니 현역으로 글만 쓰시던 분 같은데 국내여행은 물론 해외도 많이 다니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자의든 타의든 가게 된 여행에서 세월이 많이 흘러서인지 지금과는 조금 다른 아날로그적인 느낌을 많이 느낄 수 있어 좋고 사실감 있고 작가라 그럴까 감상적인 면들도 있어 쏠쏠한 재미를 느끼며 읽을 수 있다. 여행기를 읽다보니 내가 하는 여행과 비교를 하게 되기도 했는데 우리 또한 늘 '목적지 위주의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목적지만 생각하며 여행지에 갔다가 '에이, 이게 아닌데 뭐이래..'하고 돌아섰던 여행도 있었다.그럴 때는 다른 곳을 연계하며 올라오다가 처음 생각했던 목적지에서 느끼지 못했던 보람을 느끼기도 해서 그것으로 만족하기도 했는데 여행이란 정말 목적지가 아니라 과정이고 추억이라 생각한다.숙박지를 정해지 못해서 헤매었다던가 밥을 제때 먹지 못하고 쫄쫄 굶다가 겨우 컵라면 하나로 떼웠는데 그게 정말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 주기도 한다. 여행은 정말 예기치 못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고 낯선 곳에서 분명 낯선 것들과의 만남이 주는 예기치 못한 느낌으로인해 내가 있는 자리의 소중함을 더 깨닫게 되는것 같다.

 

파스텔조로 사위어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그날 온종일 한 번도 공장이나 고층아파트의 회색빛 직선을 보지 못하였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아,바로 그러였구나. 오늘 하루 누린 평화와 행복의 원인이 바로 그거였구나. 그건 소리라도 지르고 싶게 놀랍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국내 여행인 <남도 기행>이나 <섬진강 기행> <오대산 기행><하회마을 기행> 등을 보면 계획적인 여행이라기 보다는 무작정 친구와 함께 떠나거나 가족과 함께 떠나도 모든 것을 틀에 맞추어 놓은 것이 아니라 현지에 가서 현지에 맞게 여행을 하여 더 잔잔함을 안겨준다. 지금도 그런 인심이 있는 곳도 있겠지만 그때하고는 분명 많이 달려졌다.지금은 스마트폰시대이고 지자제로 인해 전국은 축제의 현장에 트레킹 코스가 여기저기 잘 정리되어 있기도 하고 아날로그적인 맛이 떨어직도 하는데 저자의 여행기는 구수하면서도 된장국 같은 맛과 냄새가 나서 좋다. 언어의 감칠맛도 있고 저자의 소설에서도 느끼는 그런 생동감이 넘치는 맛이 기행산문에도 넘쳐나 재밌게 읽을 수 있다.그것이 국내 뿐만이 아니라 해외 여행을 하면서도 느껴진다.

 

그 고장의 황혼이 그토록 길고 유정했던 것은 달빛 때문도 낙화 때문도 아니라 섬진강의 물빛, 모래빛 때문이었구나,비로소 알 것 같았다.

 

<백두산 기행>에서는 고향이 이북이라 더 북에 대한 남다른 감정을 가지고 계셨을텐데 자신보다 다른 이들이 더 통곡을 하듯 북녁땅을 앞에 두고 느끼는 감정 앞에서 어쩌지 못해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것은 꼭꼭 눌러 왔던 감정이었을까 한뿌리로 느끼는 감정이었을까.고향이 그곳이 아니라고 해도 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는 괜히 그쪽 땅만 바라보아도 서늘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섬진강 기행>은 나 또한 작가가 거닐었던 그 곳을 나도 거닐어 보았다는 것이 기분 좋았다. 섬진강변 벚꽃길이며 '운조루'등 정말 좋았던 곳을 다시 글 속에서 만나는 것은 포근함이고 '공감' 이라 표현해도 되려나.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같은 곳을 거닐었다고 하면 왠지 모르게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기분,내가 걸어 왔던 그 길과 시간이 남다르게 느껴지게 된다.

 

책의 제목이 되는 <잃어버린 여행가방>은 어느 나라에서는 '잃어버린 여행가방'을 경매에 부친다는 것이다. 그 가방에는 별거 별거 다 들어 있겠지만 여행가방에는 다른 무엇보다 여행하며 입었던 꼬질꼬질한 것들이,삶의 애환이 가득 담긴 것들이 냄새를 폴폴 풍기며 들어 있을 것이다.작가 또한 자신의 여행가방을 딱 한번 잃어버렸던,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잃어버렸지만 그 가방에 들어 있던 그동안 자신을 감싸고 있던 '애환' 에 대한 것을 토로한다. 여행가방에 귀중품을 싸가지고 나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나 또한 여행가방을 싸면서 느끼는 설레임과 가방안에는 온통 여행지에서 필요한 것들 ,옷가지나 생필품을 챙기게 되는데 돌아 오는 길에는 가방안에서 나는 케케한 냄새,그것이 삶이고 여행이리라. 떠 날 때는 설레임으로 가득했던 여행가방이 돌아오는 길에는 낯 익는 냄새로 가득하고 다시금 익숙한 삶으로의 회귀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내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육신이란 여행가방안에 깃들었던 내 영혼을, 절대로 기만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숨을 곳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내는 순간이 아닐까.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내가 일생 끌고 온 이 남루한 여행가방을 열 분이 주님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여행가방을 잃어버릴지라도 여행가방을 싸고 싶을 때가 있다.맘만 있고 떠나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늘 시간이 없다고 한다.하지만 시간은 내가 만드는 것이고 여유도 내가 만드는 것이다. 내가 내 삶에 그런 여유의 시간을 내지 못하다는 것은 한번 내 삶을 뒤돌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문득 저자의 기행산문집을 읽다보니 오랜 친구와 함께 혹은 가까운 이와 함께 계획없이 무작정 기차에 올르거나 시내버스에 올라 목적지를 두지 않는 차창밖 풍경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과정과 추억이 더 알토란 같은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늘 친구와 '언제 얼굴좀 보자.밥 한번 먹자'하고 살지만 일년에 한 두번 보기도 힘들다. 잘 살아 가고 있는 것일까? 삶은 곧 여행이다. 낯선 곳으로 떠나야만 여행이 아니라 오늘 하루 내게 주어진 시간이 여행일텐데 목적지만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행이란 누구와 떠나든간에 익숙한 것보다 낯선 것에서 만나는 '낯섬' 의 설레임과 한편으로는 실망감이 주는 여운인지도 모른다. 뭐든 좋다.누군가와 혹은 나 혼자라도 떠나고 싶다. 그곳에서 내 남루한 영혼과 마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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