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날아간 집오리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28
이상권 지음 / 자음과모음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내가 산을 가기 시작한 것은 몇 년 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산을 잘 오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상을 꼭 밟고자 가는 것도 아니었다. 시작은 아주 낮은 울집 뒷산부터 시작을 했는데 그것도 헉헉 이었다.하지만 한 발 한 발 천천히 더 진행하다보니 '야생과 자연'이 보이기 시작하여 타의가 아닌 내 스스로 철마다 자연을 찾게 되었고 그렇게 산에 가는 재밌는 들이게 되었지만 역시나 지금도 산을 잘 오르지 못한다.하지만 남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온다고 자부할 수 있다. 천천히 쉬엄쉬엄 가다보니 더 많은 것을 보게 된다. 그렇게 산에 갈 때마다 꼭 '다람쥐'를 만나고 와야 그날 기분이 좋다.산을 다녀온 듯한 기분이 난다. 울집 뒤산에도 두어해 전까지는 늘 다람쥐를 보았는데 요즘은 다람쥐를 보지 못했다. 다람쥐를 만날까 하고 찾아 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뒷산 주변에는 대단지 아파트 들이 많이 들어서고 더 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는다. 새는 늘 시끄럽게 지저귀는데 다람쥐는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의 소리 때문일까.사람과 야생 동물이 공존하려면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야 한다. 산에 간다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집을 방문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용히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저자의 책을 한 권 읽고 동물과 인간에 관한 소설이라 빠져 들었다. <고양이가 기른 다람쥐>,인간과 가까이 하거나 함께 사는 동물과 인간의 이야기라면 이 책에 있는 이야기는 '야생'을 가진 동물들이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동물들 입장에서 혹은 사람의 시선으로 쓴 소설이지만 세세하니 잘 그려져 정신없이 읽다 보면 '에효' 하고 한숨을 쉬게 된다. 우리는 점점 자연과 멀어지며,자연을 해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문명의 발전으로 인해 우리 동네만 해도 아주 작은 뒷산만 남겨지고 모든 산이 허물어져 아파트 단지가 되었다.자연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보다는 허물어 인간의 욕심을 채우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그 속에서 점점 야생의 동물들이 설 자리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지난 겨울에 뒷산에 갔다가 노루를 만났다. 나 한사람의 발자국 소리였는데 녀석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산은 정말 얼만 되지 않는다.그들이 살아갈 공간이 있기라도 한 것인지 의심이 되었다.

 

이렇듯 점점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야생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는데 그런 속에서 지리산 산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서른이 넘은 양갑수씨는 오리를 키우기 위하여 집 앞에 연못을 파고 오리를 야생처럼 키운다. 하지만 그곳이 산 속이니 오리를 노리는 동물들이 많다. 그만큼 생태계가 아직 살아 있음을 보여 준다.오리를 살리기 위하여 인간도 노력을 하지만 오리 스스로도 노력을 한다. 하지만 약한 것들은 모두 오리보다 더 위에 존재하는 동물들에게 잡혀 먹고 저돌적이고 강한 검은 오리 한마리만 남았다. 녀석은 스스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끝까지 살아남게 되고 그 연못에 날아 온 청둥오리와 짝을 이루어 새끼까지 낳는다. 그렇다면 그 새끼들은 야생을 물러 받았으니 야생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아무리 강한 야생의 청둥오리라도 그 위에는 천적과도 같은 동물군이 있어 살아 남지 못하자 검은 오리는 새끼들에게 날아 남는 방법인 하늘로 날아 오르는 법을 가르친다. 그렇게 하여 검은 오리가 죽고 살아 남은 집오리는 청둥오리들과 하늘로 날아 오르는,그야말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닭이나 집오리는 날지 못한다고 알고 있다.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퇴화되어 날지 못하는 조류,하지만 자신들이 살아 남기 위하여 그들은 날개를 다시 재생시킨다. 언젠가 티비에서도 높은 나무 위에 날아 올라가서 자는 '닭'이 나왔다. 그 닭은 야생동물에게 잡혀 먹지 않기 위하여 조금씩 올라가다가 높은 나무게까지 올라가서 자고 알고 까치집에 알도 낳는다. 자연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모두 생존을 위한 방법이다.

 

그런가 하면 <나산강의 물귀신 소동>에는 우리가 잘 볼 수 없는 '수달'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사람 눈을 피하여 맑은 물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수달,그 수달을 나산강 주변의 사람들은 '물귀신'이라고 한다. 언젠가는 인간과 함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인간에 의해 멸종 단계에 접어 들었고 '그런 동물이 살았었나?' 하고 모두 가물가물 할 때 나타난 것이다. 자연은 자연에 있게 놔 두어야 하는데 그것을 인간이 인간들에게 어디에 사는지 말해 놓으면 더이상 그곳은 수달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인간 지배의 공간이 되고 만다. 인간은 욕심을 부려 희귀한 것을 '돈'으로 환산한다. 야생과 동물은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어야 야생이 살아가는데 인간이 침범을 하면 살아갈 수가 없다. 야생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동물로 취급하여 덫을 놓거나 그물을 쳐 놓는 사람들,모두가 다 똑같다. 하지만 개중에는 자연을 야생 그래도 지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해남 할아버지는 수달이 살았던 그 오래전 시절도 기억하고 있지만 야생이 어떻게 해야 지켜지는 지도 잘 알고 있다. 인간의 욕심에 의해 또 한번 수난을 당하고 고난의 시간이 오지만 지키고자 노력하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수달은 다시 자신의 집과 같은 공간을 가지게 된다. 자연은 자연에 있을 때가 가장 빛이 나고 오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어릴 때에는 동네에서도 가끔 '족제비'를 보곤 했었다. 다람쥐보다는 약간 큰 것이 노르끼리한 색을 띠고 있으면서 무척 몸짓이 날렵했던 녀석이 족제비다. 오래전 우리집에 할아버지의 유품처럼 있던 붓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것이 족제비꼬리털 이라고 하셨다. 믿을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털이 좋다는 말로 이해를 했다. 그래서 내겐 족제비가 더 가깝게 느껴지곤 했다. 문태형은 족제비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인지 누구보다 족제비를 잘 잡고 가죽도 잘 벗겨낸다.그러니 비싼 값에 팔 수가 있다. 족제비란 족제비는 씨가 마르도록 그가 다 잡는다. 생태계에서 어느 한 동물만 죽이면 다른 동물군이 무너지며 생태계 교란이 오는 것이다. 이작품에서는 그렇게 문태가 족제비를 잡게 되고 족제비중에 최고와 같은 <두 발로 걷는 족제비>와 엎치락 뒤치락 하며 그것을 잡기까지,아니 죽음에 이르게 하기 까지 우여곡절이 담겨 있다. 인간은 족제비를 잡으려고 했지만 족제비 또한 인간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 자연이 그런 것 같다. 그리곤 복수를 한다.인간이 키우는 닭이며 그외 동물을 죽게 한다. 정말 복수일까? 그 족제비가 죽음으로서 비로소 그와 동물에 대한 줄다리기는 끝이 난다. 어느 한쪽이 죽음에 치달아야 인간의 욕심도 끝이난다.죽기 전까지는 자신의 욕심인지 모르지만 죽고 나서야,자연의 질서가 무너지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저자가 그리는 야생의 동물과 인간이 공존하는 법칙에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야생이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오면 영락없이 인간의 욕심이 작동을 하여 야생을 죽이게 된다. 야생은 인간에 의해 길들여질 수가 없다. 길들여진다고 해도 '집오리'처럼 자신 안에는 야생이 감추어져 있다.자연이라는 것이 인간만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동물만 살아가는 세상도 아니다. 모두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가끔 생태계 질서가 무너져 서로 곤란에 처하게 된다. 도심에 가끔 멧돼지가 출몰하여 시민들을 곤경에 처하게 하는가 하면 산 주변의 밭이나 그외 농가들의 농작물에 극심한 피해를 준다. 개체수가 늘어나서이기도 하지만 서로 있어야 할 침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인간의 욕심에 의해 자연이 너무 허물어져 가고 있다. 성냥갑처럼 인간만 들어가 살 수 있는 아파트숲이 여기저기 들어선다고 우리가 행복을 누리고 사는 것은 아니다. 자연이 있어야 살아가는 것인데 점점 인간의 욕심이 이 땅을 지배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 책은 그런 자연 파괴에 경고를 하듯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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