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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의 모든 것
델핀 드 비강 지음, 권지현 옮김 / 문예중앙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할머니 말이야......말하자면 자살한 거야?" 저자는 아이의 질문에 당황한다.질문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 때문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라는 가정이나 추측,아이는 무엇을 질문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머니가 돌아 가시고 5일이 지난 후에아 비로소 엄마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침대위에 웅크린 자세로 라디오를 들어가며 죽어 있는 엄마,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결코 화려한 삶이 아닌 정말 비극적이면서도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이는 엄마의 삶을 어디까지 알고 있고 어디까지 이해해야 하나.왜 엄마는 죽음을 선택한 것일까? 그리고 자신들은 그 죽음을 막지 못하고 일이 발생한 후에야 알게 된 것일까.
분명 죽음도 삶의 일부분이지만 우리는 '삶'만 보려고 한다. 죽음은 받아 들이려하지 않고 놓으려 하지 않는데 엄마는 어찌하여 죽음을 선택한 것일까.자식인 자신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말이다. 도대체 엄마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나. 엄마와 딸로 그들은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 18살에 결혼을 하여 두 딸을 얻었지만 엄마는 곧 이혼을 하였고 엄마의 남자 관계는 복잡했고 이혼후에 마약 정신질환및 정신병원신세까지 지는 일을 당했다.그런 엄마가 재활을 꿈꾸었고 다시금 새로운 삶을 살아 보려 했는데 왜 엄마는 삶에 마침표를 찍은 것인지.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다. 사람이 떠나고나면 남겨진 것은 살아 있는 자의 몫이다. 그렇다면 엄마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자신이 알고 있던 엄마가 어디부터 비극으로 치달은 삶을 살게 된 것이고 아직은 어쩌면 엄마의 죽음을 받아 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금 엄마의 삶을 재조명하고 해보고 싶다. 그렇다면 어떻게 엄마의 삶을 재조명해야할까? 저자는 많은 자료와 인터뷰자료를 통해 엄마에 관한,자신의 가족에 대한 '자전적 소설'를 쓰기로 한다. 외할머니 리안과 외할아버지 '조르주' 그리고 그의 아이들의 어린시절부터 조명하며 엄마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 왔는지 한걸음 떨어져 보게 된다. 어린시절 외모가 출중하여 모델일을 하게 되고 그녀가 모델일을 해서 번 것은 생계비로 들어가기도 했고 그런 삶 속에서 일찍 어른이 된 듯 하다. 그리고 어린 앙토냉의 갑작스런 죽음과 마주하며 비극을 감지하게 되고 남보다 먼저 비극을 감지하는 자신을 알게 된다. 아마도 이런것은 저자의 생각이 많이 반영된듯 한데 이런 부분은 뭉크의 <절규>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곁에서 늘 맴돌던 비극,앙토냉의 죽음과 장 마르크의 죽음 그리고 밀로의 죽음까지 이어지며 집안에 감도는 비극과 불행의 기운,그 모든 기운이 그녀에게 기울은 것일까.
가족들의 자살과 죽음이 꼭 그녀에게 향한 비극이라고 볼 수 없는 듯 하였는데 근친상간이라는 것이 드러나며 아버지 조르주의 이중성이 드러나게 된다. 왜 식구들은 아니 어머니는 딸의 근친상간을 알면서 함구했던 것일까? 가족 누구도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도 않았으니 그녀 혼자 짊어지고 가야할 삶의 무게가 되었다. 그것이 그녀가 정신질환으로 가는 이유였을까? 화려함 속에 감추어져 있던 어머니 뤼실의 수면위로 떠 오르지 않았던 삶을 알게 되면서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어머니와 딸은 애증의 관계다.영원히 풀리지 않는 문제처럼 애증의 관계는 우리집도 마찬가지다. 친구인듯 하다가도 라이벌인듯 하기도 하고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밖으로 표현은 딱딱하여 꼭 싸움으로 끝나게 되고 뒤돌아서면 서로 애틋하게 찾는 그런 사이가 엄마와 딸의 관계인듯 하다. 저자와 엄마는 더욱 관계가 소원했던 듯 싶다. 엄마에 대하여 거리감을 가졌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소설을 통해 비로소 엄마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받아 들인다. 이제 비로소 엄마를 자유롭게 놓아준다.
그렇지만 가족을 주제로 '자전적인 소설'을 쓴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꼭 이야기를 '해피'로 꾸며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잘 안다고 생각하는 존재들이지만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함께 하는 사람의 속마음을 말이다. 가깝지만 어쩌면 남보다 더 멀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 가족이고 아주 작은 일에 서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존재가 가족이기도 하다. 그런면에서 그녀도 이 소설을 완성하며 무척 힘들었다는 것을 중간중간 토로한다. 잘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가족들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정말 힘들고 또 다른 면을 보기도 한다. 자신의 어머니 또한 잘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료를 통하여 객관적인 입장에서 만나는 '엄마'의 모습은 상처투성이다. 보듬어 안아주지 못했고 그러안아주지 못했다. 상처에 또 상처를 주며 그렇게 살아 온지도 모른다.이제 잘하고 싶지만 내 곁에 엄마가 없음을 인정해야만 한다.나 또한 친정아버지를 보내 드리고 보니 친정아버지가 더 보이는 것이다. 정말 너무 못해고 살았다는,해 드린 것보다 못해 드린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느끼며 친정엄마께는 잘해드리며 살아야지 했지만 늘 생각뿐이다.늘 후회뿐이다. 저자는 이렇게라도 어머니를 담아놓고 용서하고 싶었을 것이다. 진정으로 진정으로.
'하루가 갈 때마다 엄마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게,언어로 엄마라는 인물을 그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닫는다.엄마의 목소리가 그립다. 엄마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준적이 거의 없다.엄마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지금은 그것이 모든 가족들이 품고 있는 신화를 피하고, 허구,그리고 서사의 재구성을 거부하려는 엄마의 방식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