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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 개정판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월
평점 :
'환자가 자기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 생명의 시한까지도 - 에 대해 주치의가 알고 있는 것만큼은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의사와,가족애를 빙자하여 진실을 은폐하려는 가족과,그것을 옹호하는 사회적 통념과의 갈등이 될 것이다...' 시한부 생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의 운명은 얼마가 남았다' 라고 말해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될 때도 분명 있다. 그것이 좋게 작용할 수도 있고 나쁘게 작용할 수도 있고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난 자신의 생을 정리할 수 있는 책임을 당사자에게 주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하지만 나 또한 친정아버지가 '폐암'판정을 받고 나서는 가족이 모두 모여 의논을 한 결과 부모님께 더 큰 고통을 주지 않는 방향으로 병에 대하여 말해주지 말자를 택해야만 했다.가족은 물론 친척분들과 함께 해야만 했다. 그렇게 병에 대하여 은폐를 했지만 부모님들도 약간은 눈치를 채고 있었고 옆에서 병간호를 하듯 하신 엄마는 알고 계신 듯 했다. 한 집안에 큰 병을 앓는 환자가 있게 되면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말처럼 어느 틈엔가 가족간에 틈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것은 '돈'과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인다. 모든것이 걱정이 없다면 괜찮지만 만약에 병을 뒷받침할 돈이 없다거나 누군가 떠 안을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저자의 다른 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에 보면 할아버지나 오빠의 죽음등이 나온다.죽음으로 인하여 가부장제에서 여인네들이 생활전선에 뛰어 들어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굿건하게 일으켜 세워야 하는,그야말로 여인네들의 임을 지고 일어선 꿋꿋한 삶이 잘 나타나 있다.이소설에서도 영빈과 영준의 아버지는 자신이 책임도 아닌것을 떠 안고 죽음을 맞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태어난 여동생 영묘는 그렇게 하여 집안에서 요상한 존재가 된다. 생과 사는 일직선상에 있는 것처럼 이렇게 태어나고 죽음이 함께 공존하는 가운데 그래도 꿋꿋하게 어머니는 아들들을 부족하지 않게 공부를 시키지만 영준은 어머니의 뜻에 따르지 않고 미국으로 가게 되고 영빈은 의사가 되어 어머니 곁에 남아 영묘와 함께 만족하는 삶은 아니지만 남들에게는 부러운 삶을 이어간다.그리고 영묘 또한 Y건업의 맏아들에게 시집을 가서 남들눈에는 재벌가의 며느리가 되어 살아가게 되지만 그들의 행복도 잠시 영묘의 남편 송강호는 집안의 가족력인 '폐병인 결핵'인줄 알았던 병이 '암'이서 시한부 생을 선고받게 되지만 겉치장과 형식과 자신들의 사고방식을 굽히지 않는 시댁의 뚯에 의해 장작개비처럼 점점 말라가며 죽어간다. 하지만 누구도 그에게 시한부 생,병을 이야기 해주지 않는다.
의사이며 박사에 교수인 영빈은 아내 모르게 '현금'이라는 초등 친구를 애인으로 두고 살아가는 이중 삶을 사아야 했고 자신의 집안과는 너무 다른 '송 회장' 네 맞써 싸우듯 살아야 했다. 송회장네집은 돈으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물질만능주의 집안처럼 맏아들이 죽음직전에 있는 것 또한 남의 눈을 의식하고 자신들 겉치례에만 신경을 쓰고 의학이 아닌 미신이나 그외 민간요법에 더 목을 맨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보면 그들이 맏아들이 남겨지는 식구들을 위하여 '유언'을 남기지 못하게,재산에 대한 권한을 주지 않기 위한 계략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재벌가의 맏며느리이지만 수중에 돈 한 푼 없고 아무런 힘도 없는 영묘, 두 아들을 두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하나도 없고 그럴 힘도 없고 친정의 세력도 없다. 권력과 돈이면 모든 것이 다 된다고 생각하는 시댁에서 영묘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삶에서 오빠인 영빈 또한 아무것도 못 해주게 된다. 그런가 하면 영빈의 아내는 남편 몰래 '아들'을 갖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드디어 늦둥이로 아들을 낳게 된다. 여인네들의 삶이란 뒤웅박팔자라고 하는데 그녀가 누가 권해서 '아들'을 낳으려고 한 것이 아닌 자책에서 아들을 원한다.그것도 의사인 남편을 속여가며 두번씩이나 유산을 하며 갖게 되는 '아들'에 대한 의미는 무엇일까?
이 소설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영빈의 능소화가 핀 집의 추억속의 소녀인 '현금'의 생과 영빈의 여동생인 '영묘'의 생과 영빈의 아내 '수경'의 삶인 듯 하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세 여인의 삶은 너무도 다른 방향을 향해 달려간다. 영빈에게 일탈을 꿈꾸게 했던 능소화를 연상시키는 현금의 삶은 자신이 혐오하던 것을 즐기며 살게 되고 목말라 하게 된다. 음식을 하기 싫어했고 임신을 하지 않기 위해 피임을 했던 그녀가 음식만드는 것을 조하하게 되고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가 하면 뒤늦게 아이를 가지고 싶어했지만 그녀에게 그런 능력은 이제 더이상 기회가 없다. 그런가 하면 수경은 아들이 없다고 누가 구박을 하지도 않았는데 자책에 아들에 잡착을 하는가 하면 영묘는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을 얽매고 있던 시대의 권력과 돈으로 떡칠하는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찾게 된다. 그녀들의 삶에 과연 '돈'이란 돈은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영묘의 남편 송강호의 죽음이 '아주 오래된 농담'처럼 된다는 것은 '시간'만이 안다. 돈으로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하려던 송회장은 영준이 나타남으로 인해 돈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가하면 치킨박의 삶은 남은 식구들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스스로 포기한다. 그들의 삶에 돈은 또 어떤 의미일까?
돈과 사람의 생명을 저울에 올려 놓고 저울질을 하면 어느 쪽으로 기울까?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의 저울은 다 다른 눈금으로 기운다. 배부르게 가졌어도 하나 모자람으로 인해 늘 허기를 느끼듯 서로 다른 '욕망'으로 불타오르는,현재의 행복과 현재를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그 속에서 여인네들은 돈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 꿈을 꾸며 '현재'에서 자신을 본다. 그 중에서 현금이 제일 현실적이면서도 자신에게 알맞는 옷을 찾아 차려 입을 줄 아는 여인네인듯 하다. 영빈과의 관계로 먼저 깔끔하게 정리할 줄 알고 또 무너져 내릴 수도 있는 삶인데 그 속에서 자신이 열정을 다할 수 있고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을 찾아 현실에 안주한다. 그런가하면 수경이 '아들'에 집착하는 것은 그녀를 존재하게 하는 힘이 되어준다. 딸만 낳고 시어머니와 함께 한 삶이서도 자신과 남편의 오롯한 삶이 없다고 느낄 수 있는 삶에 늦둥이 아들은 새로운 끈을 이어주고 가정을 온전하게 디시 서게 해주는 힘을 준다. 여인네들의 삶은 정말 무엇인가?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묻고 싶다. 자신으로 존재하기 보다는 어느 일부분처럼 있는 듯 없는 듯 투명인간처럼 존재하며 또 한편 슈퍼우먼으로 존재해야 하는 삶,지나고 나면 농담처럼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지만 그 속에 자신은 없다. 저자의 소설을 읽다보면 유독 여인네들의 강한 삶이, 좀더 깊숙히 여인네들의 삶을 파헤치 들어가며 어느 한편으로는 일탈을 꿈꾸는 여인을 꼭 한명 등장을 시킨다.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에서 저자와 춘희의 삶이 비교되듯 이 소설에서는 수경과 현금의 삶이 또 비교된다. 인생에 정답은 없지만 정말 뒤웅박팔자를 보여주듯 속시원히 풀어 놓는 여인들의 인생 이야기에 내 삶은? 물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