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양장) - 성년의 나날들 소설로 그린 자화상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 아버지 살아 생전에도 우리들 앉혀 놓고 하시는 말씀중에 제일 많은 것은 당신이 겪으신 고난의 시간,한국전쟁과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프시던 일찍 가셨던 그 어려웠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잊지도 않고 몇 번을 하셔도 꼭 같은 말씀이지만 어쩜 그렇게 재생을 잘해시는지.그런 아버지의 말씀을 엄마는 옆에서 지겹다며 자식들에게 그런말해서 무엇하냐고 했지만 난 듣기 좋았다.물론 그 모든 말씀이 내가 겪지 못한,할아버지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호기심에 대한 것도 있지만 아버지가 고난의 시간을 거쳐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있음이 거져 얻어진 시간들이 아니라는 것을 소설을 읽듯이 옆에서 가만히 앉아 잘 들었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자신이 힘든 기억은 잊을래야 더욱 잊을수가 없다.그것이 개인사이기도 하지만 역사의 소용돌이와 함께 51하는 것이라면 더욱 기억되고 기록되어 더 많은 이가 나눈다고 해도 흠이 되기 보다는 더 생생이 그 시대를 이해하고 기억하는 기록이 되지 않을까,그런면에서 전작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를 단숨에 읽고 이 책을 망설임없이 집어 들게 되었다.

 

전작은 스무살까지의 기억에 대한 기록이라면 이 소설은 한국전쟁부터 53년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개인사와 맞물려 힘겹게 돌아가던 한국사와 함께 하여 생생함은 물론 그 시대를 좀더 깊숙히 안으로 들어가 혼란의 시대를 이겨냈던 사람들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적골의 유년시절에는  겉껍질만이라도 양반이었던 할아버지와의 기억으로 인해 풍족하고 아버지를 일찍 여읜 설움보다는 할아버지를 기둥으로 박적골이 좀더 풍성하게 그려졌다면 이 소설은 할아버지에서 장손인 '오빠' 로 정신적이 지주가 옮겨짐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오빠로 인해 보여지던 세상이 오빠가 인민군에 끌려가 도망쳐 오게 되고 시민증을 얻지 못해 다니던 학교에서 도민증을 얻으러 갔다가 함께 숙직질에 있었던 군인이 쏜 오발탄에 다리에 맞게 되면서 기울어 가는 오빠와 그런 오빠로 인해 피난을 가지 못해 서울에 와서 처음 뿌리를 내리게 되었던 현저동 집에서의 피난생활,집 앞에 있던 마르지 않던 우물이며 빈집털이를 하여 근근히 이어가던 생활및 어쩔 수 없이 인민위원회에 나가야만 했던 오점의 시간들및 월북을 종용당하고 올케와 어린 조카와 함께 북으로 향하며 마주하는 피난민으로의 생활을 생생히 담아 놓았다.

 

오빠의 다리에 총알이 박히고 팔개월의 삶은 저자의 정신적 지주였던 '오빠'라는 영혼이 서서히 스러져가듯 그렇게 곁에서 점점 빈쭉정이처럼 매말라 간다. 변변한 약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먹는것 또한 부실했으니 환자가 그만한 세월을 이겨냈다는 것도 참 대단한 일인듯 한데 환자와 함께 그 시간을 함께 하고 소리소문없이 오빠의 죽음을 덮어야만 했던 오열의 시간은 그녀를 갑자기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위치로 우뚝 서게 한다. 어린 조카들을 위해서도 한집안의 가장으로 나서야 했던 스무살, 인민위원회에서 만난 인연으로 근처에 살던 언니의 도움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피엑스에서의 생활은 이미 작품 <나목>으로도 만났던 이야기지만 그 세세함을 다시 소설을 통해 들여다 보게 되니 먹먹하게 되기도 하고 남편을 일찍 사별하고 하나뿐인 아들에게 기대었던 엄마의 모든 것이 저자에게로 향하는 엄마와 딸의 애증의 시간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올케 또한 든든한 생활꾼으로 일어서는 오뚝이 같은 삶을 통해 혼란의 시간들이 잘 표현되어 있어 그 시간속을 잠시 여행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현저동 피난생활을 이어나가게 해 주었던 집 앞에 있던 겨울에도 마르지 않고 흘러 나오던 우물과 빈집에 남겨져 있던 먹거리와 힘든 세월이지만 동토에도 봄이 오듯 피어나던 하얀 목련, '미쳤어' 라고 밖에 뱉어낼 수 없었던 계절의 만남은 동토에도 봄이 오듯 피난민의 삶에도 한반도에도 봄이 올 수 있을까? 라고 되묻고 있는 듯,아니 희망은 꼭 올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다 주기도 했지만 더불어 그동안 기대왔던 오빠의 죽음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집안의 가장으로 생활전선에 뛰어 들어 생계유지를 위해 자신에게 맞지 않은 옷인듯 해도 그 생활에 길들여지며 돈을 벌어야 했고 어머니는 그동안 등지고 있던 집안의 대소사를 떠안게 되시고 올케 또한 든든한 버팀목으로 당찬 생활꾼으로 이어나가는 여인들의 삶에서 전쟁의 무서움보다는 배고픔의 서러움에서 벗어나려는 삶과 그 속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저자의 모습을 통해 저자의 이십대를 통해 더 나아가 소설가로서의 삶 또한 살짝 엿보는 기회를 만나볼 수 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이 작품 속에 이어지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그녀의 소설가로서 맥을 이어준 것은 '어머니'가 아니었을까? 물론 파란만장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을 헤쳐나온 저저의 삶 또한 소설의 좋은 소재가 되었겠지만 그녀사 소설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게 해 준것은 '어머니'의 존재인듯 하다. 어머니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소설가 박완서가 있었을까? 어머니와 그녀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이면서도 억척스럽게 힘든 세월을 이겨낸 어머니의 삶을 통해 그녀 또한 세월과 역사를 보는 눈이 달라진 듯 하다. 홀로 누구보다 억척스럽게 자식들에게 신문학을 공부시키며 '자존심'으러 버티어낸 어머니,자신이 힘든 시간을 이야기로 풀어내면 고난한 시간을 잊으려 했던 그 모든 시간들이 서서히 저자에게는 영양분으로 자리하지 않았을까. 현저동의 마르지 않던 우물과 같은 분이 '어머니' 이기도 하면서 동토의 땅에서 맞 본 '미쳤어' 라는 백목련의 개화는 '소설가로서의 저자의 삶'에 비유하고 싶다.

 

꾸며낸 이야기가 사실적이라 믿고 싶은 소설도 있지만 자신의 생생한 이야기가 이처럼 소설로 재탄생하였으니 믿고 싶지 않아도 한 조각 한 조각 이어진 이야기가 멋진 조각보로 다시 태어난것처럼 저자의 소설들은 읽음과 동시에 믿음이 가는 생생함이라 더욱 편안하고 그녀의 마르지 않는 '우물'에 더 기대고 싶은가보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 또한 오래전에는 모두가 '산' 이었다. 하지만 오래전에는 산동네라고 부르던 곳은 지금은 산은 온데간데 없고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하여 제일의 동네가 되었다. 이곳이 산동네라는 것은 아파트 바로 곁에 있는 작은 동산이 말해주고 있다. 그 또한 좀더 큰 산으로 이어져 있었지만 얼마전에 모두를 허물어 내고 일부분만 남겨져 있다. 지금의 동산을 보는 사람들은 오래전 그 형상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곳이 '산'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대부분 힘들거나 어려웠던 시절을 더 빨리 잊고 싶어한다. 자신에게 좋은 기억과 행복한 것만 기억하려 하는데 기억이란 것은 그렇지 않다. 나쁜 것일수록 더 오래 더 많이 기억해낸다. 세 잎의 행복 속에 네 잎의 '행운' 이 숨겨져 있듯이 우리네 기억 또한 힘들고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속에 행복이 있다는 것을 잊으려 한다. 어쩌면 그런 우리의 기억의 편린을 조각 조각 이어준 '조각보'와 같은 저자의 소설들이 있어 참 다행이고 그런 역사의 날실이 있었기에 그녀의 개인사와 병합한 씨실과 함께 멋진 소설로 탄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저자의 불행한 개인사만 놓여 있는 소설이었다면 참 밋밋하고 재미없었을 것이다. 분명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한국전쟁이라는 큰 획이 있어 그녀의 개인사와 씨줄과 날줄로 만나 그녀의 삶과 역사를 탈바꿈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할아버지 이후로 기대었던 오빠의 삶,'오빠도 살아 돌아온 게 아니라 그때 무참히 죽은 것이다. 지금 아랫목에 누워 있는 건 오빠의 허깨비일 뿐 진정한 그는 아니다.' 오빠의 삶이 그러하지 않았다면 어머니와 저자 또한 중심을 자신에게 놓을 수 있었을까. '세상만 자반 뒤집기를 안 하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적응하고 먹고살게 돼있었다.' 오빠의 죽음으로 인해 더이상 미성년자가 아닌 이젠 한가정을 책임질 의무를 짊어진 일꾼으로 그리고 자신을 중심에 놓게 된 삶을 통해 고난의 시간 속에서 활짝 피어나는 백목련처럼 자신의 고난의 개인사를 솔직하게 끄집어내어 '백목련'처럼 활짝 피게 한다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했을 터인데 멋진 작품으로 기록되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참 행운이라 여겨진다. 이 기회에 저자의 다른 작품들을 좀더 만나는 기회를 만들어봐야 할 듯 하다. 소설속의 '어머니'도 저자의 삶도 좀더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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