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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의 어머니
김용택 지음, 황헌만 사진 / 문학동네 / 2012년 5월
어머니,가장 위대하면서도 가장 눈물겨운 이름이지 않을까 한다. 나 또한 두 아이의 어머니이지만 아직은 그런 '어머니' 라는 단어보다는 '엄마' 가장 먼저 녀석들이 부르는 이름일 듯 한데 내게도 이년전에 홀로 되신 친정엄마가 저자의 어머니와 연세가 비슷하신듯 하고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시며 사시기에 얼른 읽고 싶었다. 친정엄마는 아버지가 두어해전에 먼저 가셨기에 아직은 아버지의 빈자리가 낯설고 혼자 그 농사를 다 지으신다는 것은 무리다. 허리와 다리가 안좋으셔서 구부정한 정말 쪼그라들어서 더 작아지셨지만 그래도 쫑쫑거리시면서 동네를 휘젓고 다니시는 것을 보면 눈물겹다. 어쩌면 작가는 우리네 어머니들을 대표해서 당신의 어머니의 모습과 일생을 담담하게 담아 냈는지 모른다. 어머니의 일생 속에서 또한 작가의 모습 또한 엿볼 수 있음이 좋았다. 숨김없이 토속적인 이야기들이 내가 살아온 이야기처럼 왜 그리 먹먹한지.
부모님이 연로하시면 마음의 준비를 한두번쯤은 해야한다. 아버지를 암으로 보내 드리게 되었을 때 정말 청천벽력과 같았다. '왜 내게 이런일이..' 하지만 어쩔 수 없는것이 인간의 길인듯 하다. 태어나는 길은 그렇다해도 가는 길은 정말 순서 없다고 받아 들여야 하지만 그것이 내게 일어난 일이나 더욱 크고 감당이 되지 않았다. 큰 병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아버지 앞에서 담담하게 말하고 웃어야 하는,아무일도 아닌것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고 이해가 안되었지만 사시는 동안 웃는 얼굴을 더 많이 보여드리자고 생각하며 늘 입술을 깨물듯 웃었더니 그래도 그것이 연기라고 아버지 앞에서는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친정엄마 앞에서 '아버지'라는 단어만 나와도 눈물이 솟아난다. 어쩔 수 없는 감정인가보다. 그동안 울지 못하고 담아 두었던 눈물이 솟아 나는 것인지.그런 친정엄마가 혼자 농사일을 하시면서 시골에 계시니 신경이 쓰이면서 생각만큼 잘하고 살질 못하는게 또한 현실이다.
그의 어머님 또한 어린 나이에 신랑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시집을 오셨다. 먼 길을 꽃가마 타고. 그렇게 오셔서 갖은 고생을 하시며 진메의 사람이 되어 가셨고 지금 또한 꼿꼿하게 사시는 모습을 보니 친정엄마 생각이 나서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 에고 나도 이럴 때 있었는데 하며 공감하는 부분들이 나 또한 시골에서 자라서일까. 나 또한 중학교를 한시간여 넘게 걸어 다녔다. 정말 산넘고 산 넘어 다녔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멀리 외지로 나가게 되었는데 원서를 써주시지 않는다고 부모님을 모셔 오란다.집까지 걸어가는 것도 한나절인데 다시 부모님을 모셔가는 것이 문제였다. 농사철이라 어디에 가서 찾는단 말인가. 밭이며 밭이란 다 돌아다녀 보고 들에 가서 또한 논마다 다 돌아다녀도 보이지 않던 부모님을 간신히 찾았는데 바쁘셔서 가실 수가 없단다. 농사일 하다가 학교에 간다는 것이. 다시 학교로 혼자 불나게 걸아가서 부모님이 바쁘셔서 못 오신다고 그냥 원서를 써달라고 부모님이 책임진다고 했더니 겨우 써 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그 때의 부모님은 젊으셨고 강단이 있으셨다. 지금처럼 허리도 굽지 않고.
작가가 풀어낸 이야기 속에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서 학교에서 돌려 보낸 이야기를 읽다보니 나의 옛기억이 떠올라 먹먹했다. 아들의 손에 닭을 팔아 장만한 차비와 육성회비를 손에 꼭 쥐어 주고 당신은 먼 길을 걸어 가셨을 어머니,우리네 어머니들이 그렇게 다 강하시다. 한시도 손에서 일을 놓으시지 않으시면서 오로지 식구들을 위해서만 자신의 몸을 혹사시킨다. 우렁이처럼.작가의 아버님이 아프실 때 8년 동안 다슬기국을 끓여 내셨다는 이야기를 읽고 뭉클했다. 어머니에겐 아버님이 하늘이고 이 세상 전부였을 것이다. 하루라도 더 함께 살기 위하여 어머님이 한겨울 얼음속도 마다하지 않으시면서 다슬기를 잡으셨을 생각을 하니.울 친정엄마 또한 아버지가 기운이 다해 가시는 통에도 늘 하시는 말씀이 있으셧다. '니 아버지, 지금 이대로 내가 살동안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 그랬다.큰 병이라도 더이상 진행이 안되고 나이가 있으니 아픈 것은 당연하다고 하시면서 그 상태 그대로 두분이서 가는 날까지 함께 하고 싶으셨는데 아버지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다시 남겨진 자식들 때문에 살아가신다.바지런하게 손을 놀리시고 당신 몸이 부서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호미를 들고 일을 하시고 푸성귀 하나 더 자식에게 주기 위해 새벽에 밭에 나가시기도 하신다.
그의 기억이 풀어낸 이야기를 따라 가다보면 어머니의 일생 속에 '여자의 일생' 이 있고 저자의 일생이 또한 어미의 몸을 파먹고 나온 우렁이들처럼 그렇게 맑은 물 속 바위에 붙어 있는 다슬기처럼 바라 보고 있다. 굳건한 생명력은 아마도 어머니의 강인함에서 나오지 않았을까.어미닭처럼 자식도 품고 손자 손녀도 품고 보금자리를 따듯하게 만들어 모두가 모일 수 있는 둥지를 만들어 놓으셨다. 결혼한 여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면 소설 몇 권은 나온다는 농담을 자주 한다.그만큼 된고추보다 진하다는 시집살이도 이겨내고 없는 살림에 가난까지 이겨내며 자식농사 집안농사 말로도 다 풀어낼 수 없는 사연들이 정말 구구절절 많다.그런 이야기들이 아들을 통하여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한 권의 책으로 엮여진 것을 보면 어쩌면 그의 어머니는 행복하신 것이다. 작가 개인의 어머니를 벗어나 이젠 모두의 어머니로 거듭나셨다고 볼 수 있다. 나 또한 아버지 살아계시던 칠순에 칠십편의 연작시를 써서 칠순선물로 시집을 만들어 드렸다. 너무 좋아하시는 아버지, 그 책을 들고 돋보기 안경을 쓰시고는 앉아서 조용하게 읽으시던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기억해주어야 할 부모님의 일생이지만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등한시하기 쉬운데 그럴때일수록 더 챙겨보고 챙겨 드려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 들인다.
책을 읽다가 문득 얼마전 친구의 연로하신 어머님이 수술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 살기 바쁘다고 깜빡했다.어떠신지 문자를 넣었더니 아직도 병원에 계시단다. 내 부모님도 챙기게 되지만 나이가 들다보니 점점 친구들 부모님들도 걱정,이젠 모두가 받아들여야 할 나이인데도 그게 힘들다는 것이다.꾸밈없이 소박한 어머님의 사진과 시골사진이 함께 하면서 더욱 편안하게 내 어머니를 생각하며 읽었다. 어머님께는 다른 어떤 선물보다도 큰 선물이 되었을 듯 하면서 나 또한 우리 엄마를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며칠전에는 친정에 갔더니 친정엄마가 아버지 사진을 꺼내 놓으시지 않는다. '엄마 왜 아버지 사진 안 꺼내 놓는데 난 아버지 사진 많은데 내가 줄까.' '니는 왜 니 아버지 그 흔 란닝구만 입고 있는 사진만 찍었니... 입성이 사나워서 싫다.' 엄마는 그게 싫으셨던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늘 일만 하시고 고생하시다 가셨는데 좋은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고 남기고 싶으셨는데 그걸 그 때는 말씀하지 않으시다가 아버지가 가시고 나신 후에 말씀 하신다.옆지기가 옆에서 한마디 거든다. '어머님, 그게 더 자연스럽고 좋은거에요.' '그래도 난 싫다' <김용택의 어머니>에서 내 아버지 내 어머니를 만난 듯 하다. 어쩌면 그는 그동안 어머니에게 진 빚을 이 책으로 조금이나마 갚지 않았을까. 흰고무신을 신고 몸빼바지를 입고 계신 어머님이 그렇게 이쁠수가 없다. 정말 건강하시고 꼿꼿하게 오래사시길 바란다.나 또한 친정엄마께 전화라도 자주 드려야겠다.이참에 얼른 전화를 걸어 '엄마 나야,막내..' 하고 반가운 목소리를 들려 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