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 교향악 펭귄클래식 39
앙드레 지드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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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향악> 이 작품을 언제 읽고 다시 읽게 된 것인지. 중학교 때에도 고등학교 때에도 난 유독 '고전'과 '세계문학'에 빠져 도서실 한 귀퉁이에서 두껍고도 세로줄 쓰기의 책들을 탐독하는데 시간가는 줄 몰랐다. 집에서도 늘 끼고 있는 책들이 고전과 장단편문학,하지만 그때 읽고는 다시 집어들 여유가 없었는지 그때 읽은 것으로 만족을 한 것인지 도통 기회가 없었는데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때 읽었던 책들을. 이 작품은 영화로도 보았던 기억이 있고 사춘기시절 무척이나 가슴졸이며 안타까움에 결말이 꼭 그래야했을까? 하며 혼자 한탄하던 작품인 듯 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장애와 비장애'의 차이는 무엇이고 '보인다는 것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지. 그리고 '육체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 의 그 미묘한 차이를 이 작품에서 다시금 느껴본다.

 

'나는 길 잃은 양을 데리고 온 거요.'

귀머거리 노파의 임종을 지키러 갔던 목사는 노파의 죽음 후에 홀로 남겨진 눈이 보이지 않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제르트뤼드'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그가 거두지 않으면 거둘 사람이 없다는,목사이기 때문에 여러마리의 길 잃는 양 중에서 자신은 한마리의 양을 데리고 왔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집에는 다섯명의 아이와 아내 아멜리가 있다.아멜리는 갓난아기 때문에도 힘들어 했는데 자신이 데려 온 장애아 때문에 일이 더 늘어나 푸념을 늘어 놓았지만 그는 아내의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제르트뤼드를 교육시키는데 온 정성을 쏟아 붓는다. 남자들은 어느 집이나 여자들이 하는 일에는 관심이 덜하다.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그리고 예감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모른다. 아내는 장애아를 보는 순간에 직감이 좋지 않아 반대를 한 것인데 목사인 남편의 만류를 그녀를 돌보게 되었다.

 

다기망양이라고 했다. 길이 여러 갈래여서 양을 잃고 있다는 것을,자신은 장애아인 제르트뤼드에게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마르탱은 목사에게 그녀를 교육하면서 '일기' 같은 쓰길 바랬다. 그녀는 아직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깨끗한 도화지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순수한 영혼이니 모든 것을 잘 받아 들일거라는,그녀의 잠자고 있는 세상을 열어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귀머거리 할머니와 함께 했기 때문에 그녀가 말을 못한 것인지 워낙에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던 듯,하지만 그녀는 세상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목사가 들려주는 그대로 세상을 상상하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순수한 영혼에 목사는 세상의 더러운 '죄'와 같은 것을 들려주고 싶지 않아 함께 숲길을 걷거나 음악을 들려주면서 그녀의 또 다른 세상을 열어 나갔다. 함께 음악회에 갔다가 들은 '전원 교향곡' 그곳은 물론 베토벤이 귀가 들리지 않은 시기에 만든 곡이라 알고 있지만 듣을 수 있는 사람보다 더 아름답게 곡을 만들었다. 그녀는 그 곡을 들어가며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운지 묻는다.과연 그럴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상상속에 갇힌 세상,목사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상상만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그녀에게 때를 입히고 싶지 않았던 목사,하지만 세상은 결코 아름다운 것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눈이 보이는 사람들은 자기가 누리는 행복을 모른단다... 그렇지만 볼 수 없는 저는 듣는 행복은 알아요.'

 

'나이를 먹었다고 항상 아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

서서히 자신만의 세상에서 나와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그녀 앞에 목사와는 다른 젊은 남자인 목사 아들 자크가 나타나고 몰라보게 변한 그녀에게 반한 자크는 그녀와 결혼할 것을 다짐한다.하지만 신앙과 아버지 앞에서 뜻을 굽히는 자크, 그때까지도 자신이 제르트뤼드를 사랑하고 있음을 몰랐는데 아내의 수수께끼 같은 말이 자꾸만 그를 붙잡는다.그랬다. 아내는 그녀에게 향하는 목사의 '진심'을 보았던 것이다. 누가 장애이고 누가 장애자가 아닌지. 아내는 볼 수 있었던 목사의 사랑을 목사인 자신은 눈이 보이지 않는 제르트뤼드처럼 눈을 뜨고도 못보는 그야말로 자신의 사랑에 장애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아니 그는 자신의 사랑을 주님의 사랑으로 밀어 부치려 했다. 종교적 사랑이지 자신의 육체적 사랑이 아니라고 절대적으로 부정을 했던 것이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했다. 자신의 진심을 자신에게도 제르트뤼드에게도 속일 수가 없었는데 친구 마르탱은 그녀의 눈을 검사 한 후에 그녀가 수술을 받으면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그녀는 수술을 받게 된다.

 

드디어 그녀는 동면의 삶에서 깨어나게 된 것이다. 목사는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려 하면 할수록 그녀에게 향하고 그런 마음을 어쩌지도 못하는 사이 그녀가 수술을 마치고 들어서던 길에 사고가 일어났다. 그녀가 정말로 시냇가에 '물망초'를 꺾기 위하여 몸을 굽힌 것인지 아니면 자살을 하려고 그랬던 것인지 그녀는 물에 빠져 생사의 갈릴길에 서게 되었다. 비로소 드러나는 그녀의 마음, 지금까지 목사를 사랑하고 있는 것인줄 알았는데 세상을 보게 된 순간 깨닫게 된 그녀의 마음은 목사의 아들 '자크'에게 향하고 있었다는 것. 하지만 자크는 아버지와 그녀 때문에 개종을 한 후 였고 그녀는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들에,그리고 자신의 사랑의 미묘함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고 산다는 말을 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눈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는 어떤 세상을 그렸을까? 목사가 다섯아이와 아내가 있는 남편임을 그리고 그의 곁에는 이런 모든 상황을 걱정하는 아내가 있음을 그녀가 보았던 것이다. 눈을 뜨고 처음 그녀가 보게 된 세상은 아름다움이 아닌 자신의 마음안에 있는 '죄'였던 것이다. '제가 처음 본 것은 우리의 과오,우리의 죄였어요.' 목사가 읽어주던 말씀 중에 '만일 너희가 눈이 먼 사람이라면 죄가 없으리라.' 과연 그랬을까? 눈이 보이지 않았던 그때 보지 못하던 '죄와 과오 그리고 걱정어린 아내의 얼굴'을 보면서 제라트뤼드는 자신의 길을 알고 말았던 것이다.

 

목사는 왜 아내의 조언에도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그동안 '눈이 멀어' 있었던 것일까? 눈이 먼 소녀를 치료하고 교육시켜서 개안을 시켜 놓았지만 막상 자신의 눈은 멀어 있는 아이러니한 세상,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던 제르트뤼드.목사의 옷을 걸치고 종교라는 믿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려 했언 목사, 우린 어쩜 그런 진실한 사랑을 부정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 자신안에 존재하는 사랑은 눈이 멀어서 보지 못하고 눈 앞에 급급한 사랑만 좇아 가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마음까지 마음의 눈이 먼 것은 아니다. 좀더 자신의 마음에 충실했더라면,목사의 옷을 벗고 자신에게 진실했더라면 그들의 사랑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자크와 제르트뤼드의 사랑은 이루어졌을까? 자신이 사랑하고 있기에,그것을 부정하면서도 마음 안에서는 받아 들였기 때문에 아들과의 사랑을 반대해야만 했던 목사, 결국 소녀의 죽음으로 그리고 아들의 개종으로 그는 두 영혼을 잃게 되고 말았다. 눈을 뜨고 있는 그대,사랑이 보이시나요? 정신적 사랑을 갈구하면서 육체적 사랑을 좇아 가고 있는 당신, 당신의 마음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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