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른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
박에스더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삼월 초 큰딸이 수술을 하게 되었다. 진작 겨울방학에 했더라면 수술시간이 날 수 있었는데 너무 늦게 결심을 했고 병원에도 늦은 감이 있게 갔다. 졸업을 하고 갔으니 이월에는 시간이 없다는 것,하지만 빨리 해야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데 마음만 급했다. 병원일정은,아니 의사의 일정은 안되는데.다른 방법이 없을까? 어쩔 수 없이 인맥을 동원하기로 했다. 대한민국에서 인맥을 동원하면 안되는 것도 되는 사회이기에 우리도 한번 힘은 없지만 작은 힘이라도 보태보기로 했다. 아는사람의 건너 아는 사람을 찾아 수술날짜를 앞당겨 줄 수 있는지 물으니 비는 시간이 없다고 하더니만 급기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 이십의 고개에 올라 선 딸이 실망을 한 듯 꼭 그래야만 하느냐며 따져 물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된다면 해야되는 상황이니 하자고 하여 했는데 우리가 동원한 인맥이 아닌 아주 가까운 곳에 더 큰 인맥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모든 것이 수월하게 돌아가고 모든 것은 무사히 끝나게 되었다. 그런 일이 끝나고 이제 성인이 된 딸은 정말 이런 사회라는 것이 싫다는 것이다. 학연 지연에 연줄이 있어야 알아주고 받아주는 사회,그리고 권위주의에 물들어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는 그런 사람들이 정말 싫다는 것이다. 알고나면 별거 아닌 사람들인데 말이다.

 

우리의 교육제도는 '성공지향적'이면서 '경쟁'을 부추기고 붕어빵 기계에서 똑같은 붕어빵을 찍어내듯 그렇게 교육을 시키고 있지만 점점 '나 너 우리'라고 배우던 교과서 속의 나 너 우리에서 탈피를 하여 '나는 나' 너는 너'를 찾아가고 있는 듯 하다. 다름을 이제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에 나가면 자신도 모르게 권위주의와 계급과 규범과 질서들에 길들여지며 '당연'하게 따라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하다가도 나 또한 세월이 가고 짬밥의 수가 늘어날수록 배가 배운대로 똑같이 밑에 사람들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무서운 시어머니 밑에서 똑같은 시어머니가 나오듯이 배운대로 밑의 세대에게 똑같이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가끔 삶을 무료하게 만들기도 한다.그렇다고 훌쩍 대한민국을 버리고 이민을 갈수도 없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내가 나고 자란 뿌리를 쉽게 버린다는 것은 글쎄? 우리 민족처럼 '뿌리'와 '근본'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 다름을 인정하며 잘살수 있을까? 물론 잘살수도 있겠지만 어느 순간에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길들여진 습관이라는 것이 무섭듯이 단번에 무얼 고치기에는,그것이 개인일 때도 힘이 든데 '우리'라는 거대한 단체의 입장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더 많은 시간을 요할 것이다. 하지만 서서히 변화는 나타나고 있다. 이런 책을 어떻게 예전에는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을 했을까? 읽는 처음부터 나의 가려움을 대신 긇어주고 있는 것처럼 속시원함은 무엇인지. '전시,허세,체면, 이런 다양한 종류의 보여주기 속에서 우리는 항상 내용보다는 형식,업무보다는 의전을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헷갈린다. 뭐가 진짜고, 뭐가 우선인지를 말이다. ' 나 또한 형식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내용을 중요시하지 형식적으로 무엇을 하라고 하면 반기를 제일먼저, NO를 외치고 나선 사람중에 한 명이다. 그러니 당연히 '싸가지 없는'으로 손가락질을 당할 때도 분명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속이 비었을까? 그것은 아니다. 모두가 옳다고 하고 무조건적으로 형식적인 것을 따라갈 때 그것이 잘못되었다면 고쳐야 한다고 한소리 하고 나서는 사람이 지금까지는 그리 많지 않았으리라.아니 우린 '좋은게 좋은거'라면서 또한 그렇게 따라가는 것이 사회를 잘 버티어 나가는 덕목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난 정말 내게 맞지 않는 옷처럼 벗어버렸다. 그래도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어느 순간 나이가 들어가다보니 'NO'를 외치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나도 'YES'로 기울고 있더라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느끼게 된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승자가 되었다고 꼭 잘사는 법은 없다. 사회는,행복은 성적순이 아닌것처럼 아니 그와 반대로 행복은 성적의 거꾸로 순처럼 일등만 달리던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에 나가서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그런 반면에 학창시절 성적이 좋지 못하던 사람들은 주변에서도 잘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 내자식에게는 '승자'가 되길 강요하고 '대학'이라는 허울 좋은 간판을 따기를 부추기고 있다. 사회가 모두가 타고 달려가는 그 기차에서 벗어나면 낙오자가 될까봐 용감하게 다른 길을 선택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편승'하여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한이 있어도 보통의 사람들이 겪는 그 고통을 고스란히 겪으며 달려가길 바라고 원한다. 그래야만 할까? 딸이 이십이 되고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꼭 다른 사람과 똑같은 길을 걷게 해야만 할까? 다른 길을 제시해 주었지만 자신만 낙오자가 되는 것 같고 도태되는 것,도피하는 것 아니냐며 싫단다. 그렇다면 꼭 모두가 걷는 길을 걸어가면서 나 또한 똑같은 붕어빵이 되어야 할까?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사회에 나가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아직도 학벌이 중요시되고 간판이 중요시되고 학연 지연에 체면이나 형식이 난무하는 사회이다. 나부터가 대학을 가지 않고 다른 길을 갔다고 했다면 먼저 '왜?' 하고 묻게 된다. 하지만 그럴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하면서도 그동안 몸에 겹겹이 굳어져 떨어지지 않는 굳은살처럼 되어 버린 것을 하루 아침에 떼어낼 수는 없지만 서서히 너와 내가 다름을 인정하고 형식보다는 내용을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 하는 그런 사회로 되어 나간다면,우리 그렇게 변화할 수 있게 너와 내가 만들어야 한다. 아니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획일성을 걷어내고 서로가 다름을,차이를 인정하자고 그녀가 나섰듯이 점점 생각이 깨인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싫다고 모두가 떠날 수는 없다. 어느 사회에 가던지 '문제점'은 반듯이 있다. 내가 싫다고 떠나고 나면 그리워지기 마련이다. 다시 그 사회에 돌아가면 잘살것만 같은 그런 '오류(?)' 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자신의 자리에 돌아왔을 때 내가 과연 변해있을까? 위와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밑을 보고 옆을 보면 정말 지금보다 더 자신을 인정하며 살수 있다. 늘 승자가 되고 정상에 서는 것만 가르쳐 왔고 그렇게 배워 왔지만 이젠 아래를 보고 옆을 보며 차이를 공감하며 자신부터 변해간다면 살만한 사회이고 세상이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