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탐식가들
김정호 지음 / 따비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내가 눈여겨 보는 짧막한 프로중에 EBS의 '천년의 밥상' 이 있다. 이 방송을 보다보면 단지 음식이 음식이 아닌 '우리의 역사와 삶'이란 것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음식속에 깃들어 있는 우리의 질곡의 역사와 고난했던 삶이 그대로 담겨 있어 하나의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전통을 먹는 것과 같은 느낌이 있다. 그런 이유로 방송에서 나온 음식을 현실에서 접하게 되면 그야말로 음식이라기 보다는 그 음식이 탄생하기까지의 '역사'를 보게 되니 함부로 탐하기가 어렵다.

 

현대사회는 대량생산에 넘쳐나는 사회이기 때문에 배를 채운다는 기본적인 의미보다는 '건강' 이나 '맛'을 추구하는 음식에 한가지 아니 몇가지 의미를 더 부여하여 그야말로 '맛탐험'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어느 식당 어디를 가도 '맛집' 이라는 간판 하나 걸리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로 어디에 나왔다가 중요한 홍보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맛집을 알리는 한 방편으로는 '블로거'들의 숨은 노력 또한 담겨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득이 되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잘못 이용되면 돌리어 화가 되어 돌아오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어느 식당은 '사진절대금지' 라는 곳도 있다. 현대사회의 인심이란 단번에 아군이 적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가끔 이런 맛집을 찾기도 하는데 그런 맛집 보다는 내게 맞는 음식과 그외 여러 이유를 따져 맛집을 기피하는 경향도 있다. 남들 입맛이 내 입맛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탐식가와 미식가들'은 어떠했을까? 아니 정말 탐식가와 미식가가 있었을까? 굶주림도 심했고 한편으로는 사대부들은 먹거리가 넘쳐나게 흥청망청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책 속의 내용처럼 반상에도 3첩 5첩등 그 겪을 두어 제한하였다는 것은 그만큼의 음식사치를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되지만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식재료가 풍부했을까, 지금과는 너무도 다르게 식재료가 풍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식가로 자처한 '혀균'은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남겼기에 그가 탐식가임이 밝혀진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숭불사회에서 숭유억불사회가 되면서 살생이 밥상에 끼친 영향에서 다른 것 보다 '소고기' 대한 것이 심했던 듯 하다. 왜 안그렇겠는가. 땅덩이는 좁고 농경사회였으니 농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소'를 중요시 했겠지만 소고기에 탐이 다른 고기보다 또 남달랐던 사회인듯 하다. 돼지고기값이 소고기값보다 비쌌다고 하니 말이다. 소 한마리가 없어지면 사람 몇 명이 그 힘을 대신해야 했다니,그러면서도 반대로 억압을 하면 더욱 먹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인듯 하다. 소의 도축을 금지하고 소고기 먹는 것을 금지하면 할수록 그에 반하는 잘못된 편법들이 동원되었다니 그 속사정 이야기가 재밋기도 하다.

 

우심적,당시 우심을 맛본다는 행위는 사대부가 남들로부터 호탕한 기개를 인정받는 것을 의미했다.하지만 한편으로는 유배를 갔던 정약용은 '소 염통 구워 먹는 게 부추밭 가꿈보다 났다.' 라고 했다는데 유배가기 전에는 그도 음식을 탐하던, 양반들이 주로 먹던 음식에 대한 탐식이 있었지만 유배생활에서는 음식이란 자신을 지탱하는 한 방법이었기에 가장도 즐겨하고 흑산도에 유배를 간 형에게도 자신이 즐기는 가장및 그 방법과 양념을 전했다는 것이 이채롭다. 음식이란 있는 사람들에게는 탐식이기도 했지만 그외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음식'을 이용하기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따라 일을 선택하는 허균과 같은 사람도 있었다니 정말 재밌다. 그런 그이기에 조선의 '맛지도'를 써내기도 하지 않았을까.그야말로 최초의 '식객'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음식에 대한 탐이 대단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좋고 나쁨을 누구보다 더 자유롭게 표현해 낸 사람일지도 모른다. 좀더 조선시대에 음식에 대한 '레시피' 를 남겨 두었다면 음식은 더 발전하고 그 문화를 좀더 다양하게 꽃 피울 수도 있지 않았을까. 구전되고 손맛으로 전해지던 음식이 '기록' 속에서 보여지는 재밌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역사를 읽는 느낌이다.

 

'조선 사대부들은 우심적을 먹으며 왕희지를 떠올렸고,왕희지처럼 대접받고 싶어 했다. 우심적에는 '당신을 왕희지처럼 여긴다' 라는 뜻이 담겨 있으므로,사대부들은 정작 우심적의 맛보다 그런 호사가 더 즐거웠으리라.' 겉 멋에 도살된 소들이 많으니 '사사로이 소와 말을 도살하는 것은 마땅히 금지령이 있어야 한다.' 며 한성부가 이를 관장하도록 했다. 그것이 '우금령' 이다.' 그런가 하면 '서울 풍습에 음력 10월 초하룻날, 화로 안에 숯을 시뻘겋게 피워 석쇠를 올려놓고 소고기를 기름장,달걀,파,마늘,산초가루로 양념한 후 구우면서 둘러 앉아 먹는 것을 '난로회' 라고 한다' 이런 날이 있었다니, 민초들 보다는 양반들이 누렸을 이 호사가 지금 우리가 즐겨 먹는 외식의 한 방법인 '숯불구이'는 아닐까.

 

책의 후기에서도 밝혔듯이 '조선의 탐식가들'이라기 보다는 음식에 얽힌 이야기며 탐식과 미식의 그 차이를 찾아 나서지만 그 미묘한 차이를 어찌 다 빍힐 수 있을까? 음식에 담긴 인물의 이야기와 역사 그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면 좋을 듯 하다. 먹는 다는 것은 탐하기 보다는 그 음식에 깃들여 있는 '삶'을 맛보는 것이라고 한 맛 칼럼리스트 황교익의 말처럼 맛을 탐하기 보다는 '천년의 밥상'편에도 담겨 있듯이 '역사와 삶' 을 맛본다면 탐식이 아닌 미식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정말 탐식가들 보다는 '조선의 음식에 얽힌 이야기'를 읽은 것처럼 내가 모르던 부분들도 알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견과 구'의 차이가 확실했다는 것이다. 애견은 먹을 수 없는 것이지만 '황구'처럼 구가 들어가는 개는 식용개였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복날의 복은 '날씨가 더워서 개도 주인 옆에 엎드려 있다'라는 한자의 의미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두부'라는 것은 정말 귀했던 것으로 '대보름날 세시풍속,두부 먹기'라는 것이 있어 액막이로 두부를 먹은 것에서 유래를 하여 감옥에서 나온 사람에게 두부를 먹이는 풍속 역시 관재수를 막는 액막이라는 것이다.그런하면 추사 김정희가 늘그막에 깨달은 위대한 음식은 '두붓국' 이었다. 그 두붓국은 추사가 가족과 같이 먹고 싶은 음식이었다는 것이다. 오랜 유배생활로 가족과 떨어져 홀로 지내다보니 가족의 소중함및 함께 하던 그시절이 그리웠으리라. '대팽두부과강채 고회부처아녀손'이란 말이 추사 고택 기둥에 있다는데 얼마전에 다녀왔는데 지나쳤나보다. 그 뜻은 '위대한 음식은 두부,오이,생강, 나물이요. 가장 즐거운 모임은 부부,아들딸,손주를 만나는 것' 이란 뜻이란다. 무릇 음식이란 가족과 함께 즐겁게 먹어야 제맛이고 내 몸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듯 하다. 홀로 쓸쓸히 먹는 음식은 독이 될 수도 있다.탐식가든 미식가든 음식에 깃든 삶을 따라 가다보니 조선의 역사와 인물을 만난 듯 하다. 조선의 음식에 깃든 다양한 '삶'을 한상 가득 받은 느낌이다.음식이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독이면서 자신을 살리는 길일 것이다. 점점 섭생이 중요해지는 현대사회 음식속에 깃든 역사와 삶을 생각하며 먹는다면 내 몸에 어떻게 변할까. 

 

*오타 수정

110p  그의 가성각에는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 그의 가성각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250p  채소 위로 식사를 하기 - 채소 위주로 식사를 하기

252p  보사는 강진 고을 자리 잡고 있으니 - 보림사가 아닐까.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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