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타노 쇼고는 다른 작품으로 미리 만난 작가이지만 이 작품은 몇번이나 읽어야지 하면서도 다른 작품을 읽은 그 맛을 기억하기 위함이었을까 조금 시간을 두었다 읽은 것이 오히려 잘한 것 같다. 이 작품을 읽기 전 12월 초에 천리포수목원에 다녀왔다. 그곳은 12월 겨울이지만 가을벚꽃이 한창이라는 검색어가 떠서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였는데 막상 가서 보니 그 궁금증이 다 풀렸다. 우린 일반적으로 벚꽃은 봄에만 피는 줄 안다. 물론 봄에 피는 벚나무 맞다.그런데 봄에도 일반 벚나무와 똑같이 꽃이 피고 가을에 가을벚꽃이 핀다. 시절을 잘못 알고 피는 꽃이 아니라 가을에도 피는 가을벚꽃인 것이다. 봄처럼 꽃이 탐스럽고 꽃잎이 통통한 것이 아니라 추위에 피어나기 때문인지 꽃잎이 약간 길쭉하다. 하지만 정말 눈을 의심하듯 나무에 하얗게 팝콘처럼 피어난 가을벚꽃을 보며 자연의 오묘함을 느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벚나무는 봄에 화려하게 피어 나고는 그 생을 마감하는 것일까.아니다 가을에는 다른 어떤 단풍보다 이쁘고 곱게 물든다. 하지만 가을바람에 우수수 낙엽이 떨어져 내리고 나뭇가지만 앙상하게 남아있으니 나무의 존재감이 없어진다.봄의 화려함을 잃어버린 벚나무에 비유한 제목이 무슨 로맨스 소설같다.하지만 우타노 쇼고의 추리소설,서술형 아니 사회추리소설이다.
왜 이소설을 반전이 주는 묘미가 대단할까? 라고 생각하며 읽었다.우선은 소설의 시작부터 등장인물들의 나이때를 언급하지 않았다.물론 기요시도 아이코도 주인공 나루세와 그의 누이동생 아야노나 지하철역에서 자살소동을 벌인 '사쿠라'의 나이를 언급했더라면 대단한 착각에 빠져가며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이야기는 프리터인 나루세가 여러 일을 전전하면서 몸만들기며 성생활까지 그야말로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그가 자살소동을 벌인 사쿠라를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과 류이치로의 뺑소니 사건을 조사하다 그 끝에 '호라이 클럽' 이라는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유령회사와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예전에 탐정사무실에서 2년여기간동안 몸담았고 야쿠자생활까지 해보게 되었던 나루세는 '류이치로 뺑소니사건' 을 맡아 그때의 감각을 되살려 프리터생화를 하는 중간중간 호라이클럽이라는 유령회사의 뒤를 캐게 된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하는 회사일까.
말하자면 돈있고 가족이 없거나 의지할 때 없는 노인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떴다방' 이나 마찬가지인 호라이클럽, 그들은 물건만 강매를 하는것이 아니라 사람 목숨을 담보로 하는 보험에까지 마수를 뻗쳐 한사람의 뿌리까지 뽑아 버리는 정말 무섭고도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는 막나가는 기업이나 마찬가지다. 왜 노인들이 주머니를 털려가며 물건을 강매당하고 목숨까지 담보로 바쳐가며 의문사를 당해야 하는지,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다면 이젠 '나루세' 라는 인물이 나서서 그들의 뿌리를 뽑을 때이다. 하지만 그의 일은 사쿠라를 만나면서 꼬여간다. 대체 자살소동을 벌인 이 '사쿠라'라는 여인은 어떤 일을 하며 정체가 무엇일까? 모텔에서 나오는 것을 목격했는데 그녀의 사랑을 믿어야 할까? 그녀에게 자꾸만 마음이 기울어간다.
'꽃이 떨어진 벚나무는 세상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건, 기껏해야 나뭇잎이 파란 5월까지야. 하지만 그 뒤에도 벚나무는 살아 있어. 지금도 짙은 녹색의 나뭇잎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지. 그리고 이제 얼마 후엔 단풍이 들지...단풍이요..그래 다들 벚나무도 단풍이 든다는 걸 모르고 있어.'
벚나무처럼 화려한 시절을 보낸 노인들,사회적으로 뒤로 밀리는 노인층.갈수록 인간의 수명은 늘어가고 노인층이 늘어가지만 사회에서 노인들은 젊은층처럼 대접받는 나이가 아니다. 그들이 범죄에 이용당해도 어디가서 하소연은 물론 죽음조차 제대로 밝혀지거나 주목을 받질 못한다. 아니 당연한 죽음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런 늘어만 가는 노인들에 대한 사회적문제를 이슈화한 사회추리소설이라고 해야하나 거기에 다른 소설처럼 드러난 트릭이 아니라 작가의 교묘한 서술적 트릭이라 분량이 꽤 된다. 도대체 대단한 반전이 숨어 있다는데 어디서부터 반전이 시작될까,아니면 이 인물이 조금 수상적다 하는 생각을 가지며 읽었는데 느낌이 비슷하게 맞아 들어간다. 미리 예감을 해서일까 반전이 그리 놀랍지는 않다고 생각을 했는데 처음에 그들의 나이를 거론했더라면 재미가 정말 없었을 그런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노년층이기에 젊은 시절의 이야기들이 함께 믹스되면서 시간을 감지하지 못하니 그에 작가의 트릭이 또한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제목부터 의도된 반전을 가져다준다.벚꽃이 필 때는 젊은 시절이라 한다면 벚꽃이 진 계절인 노년의 삶에 다시 찾아 온 사랑과 일, 다시 벚꽃이 피던 계절처럼 열정이 살아 있을수 있을까. 이십대와는 다르지만 나루세라는 인물은 이십대와 같은 일을 하며 똑같이 몸도 만들고 있고 지치지 않고 성생활도 즐기고 있으며 24시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누구보다 열심히 열정적으로 프리터로 살아가고 있다. 누구나 지난 시간을 그리워하고 그 시간이 다시 온다면 지금보다는 더...라는 생각을 가지며 살아간다. 하지만 한번 지난 시간은 다시오지 않는다. 연습이 없는 인생이다. 지금 바로 이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한다. 누구나 나이를 먹지만 젊은 시절은 기억해주어도 노인을 기억해주지는 않는다. 인생 뒷방살이처럼 뒤쳐져 있으니 사회범죄의 표적이 되기도 하는 노인층, 좀더 관심을 가져주고 자신의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라는 취지처럼 그의 소설을 읽고나니 씁쓸하다. 지금 사회 한 켠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나이 들어간다고 자신이 자신의 삶을 무방비상태로 놔둔다면 타의에 의해 급물살에 휩쓸려 갈 수 있음을,그 무서움을 본다.우타노 쇼고를 또 한번 기억하게 하는 소설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