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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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에도 '2010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을 읽었는데 올해 만난 작품들은 왠지 모를 낯설음, 소설을 그래도 조금은 읽는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젊은 작가' 들의 작품을 등한시했나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작가의 이름도 내용도 나와는 동떨어진 느낌을 가져 평론을 읽지 않고 읽어보려다 조금 참고를 하며 읽었다. 좋은 취지에서 시작한 상이고 작품집이기에 나 또한 작년에 이어 올해도 그리고 그다음에도 쭉 이어 책들을 만나고 싶은데 장편만 읽다가 단편을 읽어서일까 낯설다. 하지만 작품들마다 왠지 모르게 '외로움,고독,절망' 속에서도 나름 희망을 찾고자 하는 몸부림 같은 그들의 바닥을 짚고 일어서는 '패기' 를 느껴 희망적으로 책을 놓으며 그들의 또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물속 골리앗 - 김애란
그녀의 첫 장편소설인 <두근두근 내인생> 요즘 주목하고 있는 작품인데 이 작품을 먼저 만나게 되었다. 물속 골리앗은 정말 재난 소설이다. 일본의 대지진을 뉴스를 통해서 보았기에 이 소설이 낯설지 않았을까, 우리의 재개발과 일본의 대지진이 함께 어우러져 생각나는 것은 왜 일까. 평생 용접을 하며 겨우 장만한 아파트, 대출금을 겨우 값고 '내집이다' 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그것도 모두가 떠나버린 빈 아파트에 어머니와 둘이 남아 있는데 거대한 장마가 닥쳤다. 그들은 상중이기에 그곳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재개발시위에서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평생 불을 가지고 일을 하셨던 아버지는 축축하게 물에 적어 있었다. 타워에서 떨어지셨다는데 이유가 뭘까. 아버지의 사유도 재개발이 된다니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려해도 그들에겐 더이상 물러설 곳도 아무것도 없다. 오직 이 집이 그들이 가질 수 있고 버틸 수 있는 마지막 공간인 것처럼 그들은 집에 갇히고 줄기차게 내리는 장마로 인해 거대한 물이 모든 것을 휩쓸고 간다. 아버지의 묘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머니마져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시신을 겨우 문짝배를 만들어 거대한 물살에 띄워 보지만 황톳물은 아버지를 데려 간것처럼 어머니도 데려가 버렸다. 그런 속에서 골리앗을 만나고 아버지의 영혼의 도움으로 먹을 것을 구하게 되어 겨우 살아난 그 앞에 비는 그치고 하늘에 뜬 '반달' 을 보게 된다. 아버지도 잃고 어머니도 잃었지만 그 자신만은 재난 끝에서 겨우 살아 남아 반달을 보고 있다.희망적이라고 해야 할까,목숨을 건졌으니. 실감나게 그려지는 일들이 영화 속 장면들처럼 뇌리에 남는다. 표현을 잘한듯 하여 그녀의 다음 작품들이 아니 앞으로의 행보가 기다려진다.

물속 골리앗이 재난소설이라면 김유진의 <여름> 은 무언가 감각적이면서도 쓸쓸함이 느껴진다.개수대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벌레와 인터뷰에서 느껴지는 '쓸쓸함' 알 수 없는 여름의 뙤약볕을 방금 지나쳐 온 듯한 순간의 현기증이 느껴진다. 그런가하면 이장욱의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 은 몽롱하다.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안가는 그런 현실속에서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분간이 안가는 자전적 느낌까지 '먼 공간을 건너온 것이 아니라 먼 시간을 건너온 것 같은 기분이 되곤 한다.' 라는 소설속 문장처럼 그런 느낌이다. 현실이면서 현실적이라기 보다는 '생각' 속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었다면 김사과의 소설은 현실적인 '분노' 를 보지만 왜 분노해야 하는지 사무실에서는 꾹 꾹 눌러 참던 그가 왜 밖에서는 살인을 저지르며 알 수 없는 슬픈 분노로 인하여 타인처럼 변해가는지 약간은 판타지적이며 점점 분노의 끝을 알 수 없는 블랙홀에 빨려 들 듯 따라가게 한다. 그녀의 다른 책 <영이 02>를 가지고 있는데 그녀를 좀더 들여다 보고 싶게 만든다.

단편 소설 한 편으로 작가들을 이해하기란 힘들다. <허공의 아이들>은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자들의 도시>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모두가 증발해 버리고 소년이 소녀를 만나 마트에서 가져온 것들로 연명하며 서로의 성장을 지켜 보는 시간 속에 소녀 또한 증발하고 소년만 남겨지게 된다. 하지만 세상은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섬 처럼 허공중에 있다. 아, 난감하다.외롭다.쓸쓸하다. 그런 세상이 올까,갑자기 궁금해진다. 물로 모든 것이 휩쓸려 가는 중에도 '물속 골리앗' 에서도 한사람이 살아 남았고 '허공의 아이들' 에서도 소년이 살아 남았다. 아담과 이브처럼 있던 그들 중에서 한사람이 사라진 순간에 '뼈가 자라는 소리' 를 듣게 되는 소년, 난 이 소설을 어떻게 내려 놓아야 할까. 내가 다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도 나와 동떨어진 이야기라 해도 난 그저 '희망' 을 보았다는 이유로 작품을 접는다. 그렇다면 <너의 변신>은 어떤가, 성형이 만연한 사회,예전에는 일부 연애인이나 그외 자신에게 콤플렉스가 있다고 생각하는 몇 몇이 하는 그런 '변신' 인줄 알았는데 이제 성형은 '일반적' 인 일이 되었다. 누구나 할 수 있고 어느 부위이든 맘에 들지 않으면 고치는 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 그렇기도 하거니와 성을 바꾸는 일도 놀랍지 않다. 세상이 변해가고 환경이 변해가니 이해할만 한데 그 끝이 어디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완벽함' 을 추구하여 무엇이 될까. 외모에 그리 욕심을 부리지 않는 내겐 거리가 먼 이야기지만 요즘 세태를 나태내고 있는 듯 하여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소통의 부재를 보다'
그리고 <떠떠떠,떠> 말을 하고 싶지만 그가 내 뱉는 언어는 '떠떠떠..' 남들은 그의 말을 기다리는 순간에 다른 세계에 빠져 있다. 그의 언어는 말이 되지 못하고 가슴 안에 맺히고 만다. 그런 속에서 한 소녀가 쓰러지고 전학을 가게 되고 사회인이 되어 사자탈을 쓴 청년과 팬더곰탈을 쓴 아가씨가 되어 만났다. 아직도 그의 언어는 말이 되지 못하고 있다. 서로의 아픔도 충분히 알고 감싸줄 줄도 알지만 사랑을 이야기하고 사랑이 되려는 순간에 마찰음을 일으키듯 그녀는 발작을 그남자는 '떠떠떠' 말더듬이가 된다. 사랑에도 '소통' 이 되어야 하는데 서로의 장애로 인하여 '단절' 된다. 어찌보면 단편들은 현대인들이 겪는 '외로움' '고독' '소통의 부재' 를 나타내기도 한다. 물속 골리앗에서는 빈 아파트에 어머니와 그만 외로이 '고립' 된다. 그러다 혼자 남겨지게 되는, 그 순간에 세상과 통할 수 있는 무언가 수단이 있었다면 어떻게 소설은 변했을까, 소통이 안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겪는 외로움과의 싸움은 처절하다.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 또한 혼자 겪는 외로움이 더 큰 혼란을 가져오지 않았을까,멀리 이국땅에서. 그렇다면 김사과의 소설은 또 어떠한가. 자신의 슬픈 분노를 남에게 털어 놓았다면,회사에서 억눌린 감정을 옆 동료에게 털어 놓았다면 줄줄이 이어지던 피비린내 나는 사건들이 발생했을까. '허공의 아이들' 또한 고립이고 외로움이다. 어느 누구도 없다. 세상에 단 둘만 버려진 상황에서 그들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지만 언제 증발하게 될지 모른다. 다른 세상과 소통할 무엇이 없다. 그런 속에서도 자신은 자라고 있다. 아이러니다. 외롭고 고독함 속에서도 시간은 간다는 것이다. 삶은 계속되고 시간은 흘러가고 물은 낮은 곳을 찾아 흘러간다. 그들이 장애를 가지고 있어 사랑의 소통이 안되는 순간에도.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스마트시대라고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개인화와 고립화' 로 이어지는 것 같다. 모두와 소통할 수 있는 미디어시대라고 하지만 언제나 난 혼자인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당당하게 홀로 남겨지는 사람들, 하늘에 뜬 반달을 보듯, 젊은 작가들에게서 나 또한 희망을 본다. 작품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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