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란
공선옥 지음 / 뿔(웅진)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영란, 그녀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문득 그 이야기가 떠 올랐다. 중국의 교사들이 쓰는 우화 가운데 외아들을 잃고 깊은 슬픔에 빠져 남을 원망하며 살던 여인이 하루는 늙은 철학자를 만나고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제가 겨자씨를 가져오면 네 아들을 찾게 해주마.그러나 그 씨앗은 슬픔이 없는 집에서 가져와야 한다.' 그녀는 열심히 겨자씨를 찾으러 다녔다. 겨자씨는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슬픔이 없는 집은 한 곳도 없었다. 이렇게 슬픔은 내게 닥치며 무척이나 큰 일처럼 느껴지고 내겐 대단해보이지만 그렇다고 나 이외의 남에게 슬픔이 없으란 법은 없다. 누구나 보편적인 슬픔을 다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의 크고 작음을 떠나 밖으로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일 뿐이지. 그렇다면 영란 그녀의 슬픔 또한 보편적인 슬픔일까, 누구나 죽음이라 그외 다른 이유로 이별을 할 수 있다.그것이 준비된 이별일 수 있고 준비되지 않은 갑작스런 이별을 맞이할 경우 그 슬픔을 어떻게 견디고 내고 치유하느냐에 따란 남은 자로서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 김형경의 <좋은 이별> 에서처럼 사랑과 죽음으로 인한 좋은 이별을 하였다면 치유가 되는 시간도 빠르고 견디어 내는 삶 또한 더욱 단단하게 영글었으리라. 하지만 주인공 영란은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과 아들의 죽음도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사이 또다시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여 갱생을 삶을 얻지 못하고 그 안의 깊은 슬픔에 갇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에 이른다

그렇다고 부모와의 삶이 행복했던 것도 아니다. 아버지를 잃고 재가한 엄마를 따라 다시 얻게 된 가족은 아버지와 오빠, 하지만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오빠는 그녀를 가족으로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아니 그녀와 오빠사이에 이렇다할 끈끈한 정을 나눌 그런 일들이 없다. 다시 아버지를 잃고 엄마마져 돌아가신 불운한 삶 속에서 겨우 만난 남편, 알콩달콩 아들 하나 얻어 재미있게 살아가는가 하는 순간에 불행은 한꺼번에 겹친 것이다. 아들과 남편을 잃고 낡은 집마져 오빠가 헐어버리려고 할때 그녀는 딱히 가야할 곳이 없었다. 거기에 출판사를 한다고 빚만 잔뜩 남기고 간 남편, 그녀는 남편이 남기고간 빚을 정리해야할 것 같아 남편과 함께 하던 작가인 이정섭에게 연락하여 만나지만 그 또한 불행한 삶 속을 거닐고 있다. 기러기아빠로 겨우 지탱하고 있는 그는 아내와 헤어지고 겨우 생활비를 보내주는 수준인데 그 또한 인쇄를 받아야 생활을 하는 가난한 삶, 그 둘이 우연인것처럼 노대통령의 빈소에서 만나고 한끼 밥을 먹으며 인연처럼 끈을 잇게 된다. 우연찮게 목포의 지인이 죽어 그곳으로 내려가야 하는 정섭을 따라 물흐르듯 그냥 투명인간처럼 그를 따라나선 영란, 그렇게 간 목포는 그들의 제2의 삶의 터전이 되고 만다. 아니 '목포의 눈물' 처럼 그동안 깊은 슬픔뒤에 숨겨 놓았던 눈물을 그곳에 가서 진정한 눈물을 흘리게 되면서 사람으로 인해 받은 슬픔을 그들처럼 한곡절 슬픔을 가진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자연치유를 해 나가는 그야말로 치유의 소설이다. 

'죽음은 참 무정한 것이다. 한번 죽어버리면, 이 아무렇지 않은 대화를, 나눌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봄밤의 향내를 함께 맡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저 봄밤의 따스한 볼빛들을, 저 다정한 소리들을 함께 들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음은 그렇다. 함께 하던 자잘한 모든 것들을 함께 나눌수가 없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처럼 이승에서 함께 해야 봄밤의 향내도 함께 맡고 따스한 불빛도 함께 하지 아무리 장미가 아름답게 핀들 무엇하리. 버려진 집에 세상과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려진 여인 영란, 그녀의 이름은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영란, 그러니까 그녀의 이름은 '공란' 인 것이다. 비었다. 이름이. 가족이 떠나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여인이 무엇인들 남았겠는가.그렇다며 그녀는 이제 이름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들을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어디에서 무엇부터 시작을 할까.

정섭과 우연찮게 목포로 내려가지만 그녀가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아 한가지 자신의 마지막 목숨을 맡길 약은 가져왔다. 정섭과 만났던 자리에서 어울렸던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한소녀를 만나 가게 된 '영란여관' 에서 마지막을 보내리라 다짐하지만 질긴 목숨은 다시 이승에 버려지게 되고 그곳에서 갱생의 삶을 찾듯, 자신과 같은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영란' 이란 이름도 얻게 되고 살아갈 방법을 찾게 되고 잃어버렸던 말하는 법도 스스로 찾아내게 된다. 새로 시작할 에너지를 타인에게서 얻게 된 그녀, 다시 사랑도 찾아오고 누군가를 품어줄 모성애도 되찾게 되지만 그녀의 가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영란이 그렇다면 정섭 또한 목포를 배회하게 된다. 그 또한 아픔이 있는 사람들과 어울려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가지만 늘 한구석에 자리한 여인을 잊을 수가 없다. 그녀의 이름도 모른다. 두 사람은 늘 서로의 삶에서 교묘히 얽혀 있지만 그 매듭을 풀지 못하고 있다가 마지막 순간에 재회를 하게 된다. 하지만 그 마지마부터는 독자의 몫이다. 해피엔드로 맺을 것인지 불행으로 끝맺음을 할것인지 독자가 알아서 할 몫이다. 

'모든 것은 헛수고에요.쓰레기를 치우는 것도,사는 것도.' 
그런 그녀였다. 집이 주위 빌라 사람들에 의해 쓰레기장이 되어가도 치울줄을 모르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헛수고와 같은 삶인데 쓰레기가 대수인가,당장 자신의 앞날이 문제인데 그 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데 쓰레기가 쌓여 있는들 어떠리. 하지만 그 쓰레기도 낡은 집도 모두가 다 헛수고였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나니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었다. 깊은 슬픔에서 벗어나듯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자신의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부딪히다보니 살아갈 힘이 생겨났다. 어찌 슬픔이 없는 집이 있으랴. 겨자씨를 얻을 수는 있어도 슬픔이 없는 집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모성애가 사라진줄 알았는데 영란여관의 수옥이를 보고 완규의 조카 수한이를 만나면서 다시 솟아나는 모성애에 목포를 떠나지 못하고 머무르는 영란, 하지만 이젠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치매를 앓는 안자의 어머니를 떠안게 되어 다시 떠날 수가 없다. 질긴 삶의 끈은 그녀를 목포에 칭칭 감아 옮아매 놓는다. 그렇다고 딱히 목포를 떠나서 다시 서울로 돌아간들 무엇이 있으랴, 시작해야 한다면 자신과 같은 크기의 슬픔을 가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살면서 정을 나누는 이곳이 더 낫지 않을까. 그렇게 마음이 맞는 인자씨와 함께 차리게 된 '영란집' 에서 그녀들은 새로운 희망을 찾는다. '우리 같은 사람은 골백번 이별해도 이별만은 질이 안 들어.' 라는 말처럼 이별을 딛고 잘 일어나는 사람은 없다. 이별은 늘 아쉽고 안타깝고 아픔이 서린다. 나 혼자 고해를 건너는 것이 아닌 누구나 고해를 건너고 있는 것이다. 삶의 이유를 찾듯 목포에서 새로운 삶으로 슬픔을 딛고 일어서게 되는 영란, 구수한 목포 사투리가 어우러져 더욱 토속적이고 구수하고 맛깔스럽다. 탁한 막걸에 박박 비벼대고 무쳐낸 간재미회처럼 어우러지고 부대껴야 맛이 나는 것이다. 눈물없이 인생이 영글수 없고 슬픔없이 어찌 인생이 완성될 수 있을까.누구나 가지고 있고 안고 있는 '보편적 슬픔' 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 그 슬픔을 딛고 새로운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 슬픔의 늪에 빠져 허우적 거리면 할수록 늪에 더 깊게 빠져든다. 나 또한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지난 겨울은 참으로 힘이 들었다. 밥을 먹으려 하면 줄줄 흘러 내리는 눈물 때문에 혼자 밥 먹기 힘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혼자 남겨진 엄마를 생각하게 되었고 엄마의 슬픔을 생각하니 내 슬픔은 너무도 작아 보여 슬픔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을 하자 어느순간 슬픔은 가벼워졌다. 슬픔은 그리움이 되고 보고픔이 되었지만 아버지를 잃었던 그 시간보다는 지금이 내 감정에 자유롭고 좀더 깊게 아버지를 생각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영란, 이제 그녀의 앞에 나타날 정섭, 그 둘을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난다. 이제 그 둘의 앞엔 슬픔이 없고 희망과 웃음만 오기를 바란다. 슬픔 뒤엔 기쁨이 있는 것이다. 늘 슬픔만 있다면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지금 당신이 슬프다면 슬픔의 문을 열고 부딪쳐라, 자꾸 사람속에 섞이다 보면 슬픔은 희석되는 것이다. 영란 그녀의 삶을 따라가다보니 내 슬픔도 희석이 된 듯 하다. 이젠 희망만 충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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