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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의 나라 - 몽족 아이, 미국인 의사들 그리고 두 문화의 충돌
앤 패디먼 지음, 이한중 옮김 / 윌북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문화적 충돌이 빚은 리아의 이야기는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처럼 읽고 나니 어떻게 판가름해야 할지 몰랐다. 정말 '만약에..' 라는 가정하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본다면 리아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그것에 대한 답은 아무도 모른다. 단지 그녀가 어쩌면 '뇌사'보다는 더 나은 삶은 살았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것이 옳고 그른지는 정말 분간하기 어려울정도로 난해하게 얽힌 문화적 충돌과 소통의 부재는 너무도 큰 결과를 만들어냈지만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다.
몽족, 그들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 <동방불패> 영화에도 나왔다지만 너무 오래 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크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영화는 보고 싶었지만 볼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짝수장에 나열된 몽족의 역사를 읽다보니 우리와 너무도 흡사하다. 아픔을 겪어가며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택한 삶에서 그들이 겪어야 했던 문화적 충돌과 의학과 샤먼의 격돌은 무엇이 더 낫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들의 믿음과 사랑이 리아를 현대의학이 하지 못한 부분을 해내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만든다. 결코 현대의학으로 모든 것을 다 치료할 수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생명이란 의사들이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의해 정해져 있는 것 같다. 얼마전 친정아버지 또한 폐암판정을 작년 여름에 받고 얼마 사시지 못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건강하시게 농사일을 모두 하시며 일년 반을 사시다 지난주에 아주 편안하게 가셨다. 물론 현대의학인 병원에서 받아 온 약으로 연명하시기는 했지만 그외 아버지에게 좋다는 것들을 많이 보충해 드렸다. 의료진들이야 그런것들은 필요하지 않고 환자에게 더 부담이 될 수 있으니 되도록이면 피하라고 했지만 그런 위기에 놓인 가족이라면 누구라도 정말 지프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좀더 건강하시게 생명이 연장되었다고 볼 수도 있고 또 그렇게 생각하는게 편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리아의 엄마와 아버지인 나오 카오와 푸아가 자신들의 방식대로 샤먼을 행하고 리아에게 행한 것들이 결코 잘못되었다고 볼 수 없다. 한편으로는 의사들이 손을 놓은 상태에서 그들이 현대의학으로 돌보던 상태보다 더 좋아지거나 나빠지지 않은 상태로 오래도록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은 알 수 없는 몽족들만의 의학이나 그들의 사랑과 믿음이 밑바탕 되지 않았나 싶다.
'리 부구가 계속 라오스에 살았더라면 리아는 계속되는 대발작으로 영아기나 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미국 의료는 리아의 목숨을 보존하기도 하고 위태롭게 만들기도 했다. 나는 어느 쪽이 리아의 가족에게 더 상처가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만일 닐이 데파킨을 더 일찍 처방했더라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만일 그가 리아를 위탁 가정에 보내는 대신 방문 간호사를 이용해 약을 먹이도록 했다면? 만일 그가 양쪽 문화에 한 다리씩 걸치고 있는 바 야오 무아나 조나스 방아이 같은 몽족 지도자를 찾아 중재를 의뢰해 처방 이행에 관한 의심들을 잠재울 수 있었다면? MCMC에 더 나은 통역자가 있었다면?'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가정에 불과하다. 리 부부가 라오스에서 미국으로 건너오지 않고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평화롭게 살았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유능한 통역사가 개입되어 모든 말들은 잘 전달하고 리 부부가 또한 병원에서 내린 처방을 잘 따랐다고 리아가 좀더 나아졌으리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리아를 통해 9년 동안 지켜본 '문화의 충돌' 은 서로의 입장만 내세우며 서로의 방법과 처방이 옳다고 우기는 어쩌면 우월함이 리아를 더 방치한지도 모른다. 좀더 '소통' 을 해보려는 시도보다는 서로의 언어로 받아 들이고 이해했으리라 하고 믿었던 '소통의 부재' 가 더 큰 화를 불어 온 듯 하다.
만약에 정말 처음 리아가 3개월 첫 발작증세를 보였을때 아무리 말이 통하지 않고 문화적인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좀더 소통을 위하여 누군가 노력을 기울였다면, 법이 아닌 환자와 의사의 입장에서 리아를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변했을까. 리아 뿐만이 아니라 병원에 가면 환자와 의사간에는 '간극' 이 있다. 의사가 내리는 처방을 모두 믿을 수 없듯이 의사가 백프로 환자를 낫게 하는 것도 아니다. 많은 환자를 돌봐야 하는 의사를 잘못 믿었다가 큰 화를 입는 경우도 있고 중간입장인 간호사의 잘못으로 일이 잘못 되는 경우도 있다. 누구 한사람의 잘못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큰 '소통의 부재' 는 한 생명을 뇌사에 빠뜨렸고 죽음을 단정지으려던 생명이 부모의 사랑과 믿음으로 오랜 시간을 버티어 주었다. 현대의학이 손을 놓은 상태에서 어떻게 그들이 하지 말라는 것을,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것을 행한 리 부부의 손을 들어 주었는지 현대의학이나 샤먼 중에 어느 한가지 옳다고 하기엔 정말 애매한 상황이 그녀에게서 벌어졌다.
나라는 없지만 어느 민족에게 한번도 지배를 받지 않은 민족인 몽족, '몽족은 명령받기를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지는 것을 싫어한다. 굴복하느니 떠나거나 싸우거나 죽는 쪽을 택한다. 그들은 상대의 수가 많다고 해서 겁먹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네보다 힘이 센 문화일지라도 그 문화가 더 우월하다는 주장에 잘 넘어가지 않는다.' 그런 몽족인 '리 부부일행은 26일을 걸은 끝에 국경을 넘어 태국으로 들어갔고, 1년 동안 난민캠프 두 곳에서 지내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메이의 글에서 '너무 힘들어서 못 가겠다'고 한 여동생 계는 처음 있던 캠프에서 죽고 말았다.' 죽을 고비를 넘으며 그들이 살던 문화와 너무도 다른 미국에 오게 되었지만 그들이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대부분은 미국으로 먼저 이만한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공동주택, 도시의 폭력, 복지에 의존하는 것, 다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것,짐승을 잡아 바칠 수 없게 된다는 것, 할아버지가 아편을 피워도 감옥에 끌려간다는 것, 사람 잡아먹는 거인,공룡, 그리고 몽족 환자들의 간이나 콩팥이나 뇌를 먹어버린다는 의사들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들이 들었던 소문만으로도 의학이나 의사 그리고 병원을 믿지 못하는 상태인데 문화적 차이로 그들이 행하는 샤먼까지 행하지 못하게 하니 그들이 의사들이 지시하는 대로 약을 잘 먹일수는 없었을 것이다. 약을 제대로 먹이지 못한다는 이유로 법원은 그들에게서 리아를 빼앗아 갔다. 만약에 누군가가 나서서 부모에게서 자식을 법적인 근거로 빼앗기 보다는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사회 복지사를 통해 이해를 시키고 약을 먹이게 했더라면 리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병을 바라보는 시점이 다르고 병에 대한 처방 또한 판이하게 다른 문화적 차이에서 어느 것이 옳다고 볼 수는 없다. 그들이 리아에게 과다하게 처방했던 약들로 인해 빚어진 더 큰 병은 만약에 리 부부가 그 약을 딸에게 제대로 먹이지 않았다면 그들나름의 처방을 했더라면 더 큰 문제로 불거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리아의 이야기는 문화적 차이 뿐만이 아니라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의사와의 간극에서 비롯된 일이기도 하다. 좀더 자기의 입장이 아닌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했다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소수민족으로 농사만 짓던 그들이 언어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겪어야 했던 충돌은 리아가 자신이 병마와 싸우던 충돌처럼 가슴 아프다. '리아는 원래 정말 귀여운 아이였어요. 간질을 심하게 앓긴 해도 '생기' 넘치는 아이였거든요. 그런데 그땐..., 그냥 거기 있을 뿐이었어요. 보통 혼수상태면 평화롭게 잠든 모습인데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잠자는 공주처럼 예쁘고 편안하게 누워 있는 게 아니었어요.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었어요. 건드릴 때마다 몸이 굳어졌어요. 고통과 '싸우고' 있었다고 할까요.' '타문화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얼마나 큰 일을 자초했는지 보여주는 리아이 이야기는 정말 가슴이 아프다. 힘이 없는 자가 어디서든 당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자립심 강하고 지배받는 것을 싫어하는 몽족인 리 부부였기에 딸의 긴 싸움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잘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본다. 사람이나 문화 사이에 소통이란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