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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산길
이성부 지음 / 책만드는집 / 2010년 3월
평점 :
일시품절
산행시인 이성부, 그의 전작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 라는 시집을 읽고 너무 좋아서 <도둑 산길>과 <지리산>을 구매를 했다. 그런데 시인의 이야기를 만난 것은 <지리산 둘레길 걷기여행>에서 이다. 필자와 함께 지리산 둘레길의 한 부분을 걸었던 그가 지리산을 뒷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달라 하고는 그 사진을 언젠가 프로필 사진으로 쓰겠다는 이야기를 그 책에서 읽었는데 바로 그 사진이 이 책의 프로필에 실려 있는 것이다. 너무 반갑다. 타지에서 고향사람을 만난것처럼 반가워 난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게 그렇게 좋아. 반가워?' 하며 내게 반문을 한다. '좋지..' 했는데 그에겐 아무런 감정이 없다. 내가 해주는 이야기가 책을 읽지 않은 그에겐 느낌이 없는 것이다.하지만 내겐 너무 좋다.
산행을 하며 오로지 산행하면서 만나는 나무와 숲 들꽃 길 사람들 자연에 대한 이야기로만 시를 쓴다는 것은 어쩌면 힘든 일이다. 요즘 사람들은 시집을 잘 읽지 않으려 한다. 시집을 읽으려 하지 않는것 뿐만이 아니라 시를 잘 쓰려 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돈이 되지 않는 시를 누가 쓰고 누가 읽겠는가. 하지만 그는 긴 아픔의 시간을 이겨내고 다시금 쏟아낸 이야기들이 자연과 벗하며 힘든 인생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걷듯 한 산행 이야기라 더 좋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 이후 간암이란 큰 병마와 싸우며 힘든 시간을 이겨낸 듯 하다. 그가 산과 함께 한 시간도 30여년이고 시와 함께 한 시간도 30여년이라고 했듯이 아픔의 시간인 오르막을 힘들게 올라왔기에 그가 느끼는 산들바람은 더욱 싱그럽고 상큼하게 전해진다.
안 가본 산... 내 책장에 꽂혀진 아직 안 읽은 책들을/ 한 권씩 뽑아 천천히 읽어가듯이/ 안 가본 산을 물어물어 찾아가 오르는 것은/ 어디 놀라운 풍경이 있는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떤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마냥 흘러가고픈 마음 때문이 아니라/ 산길에 무리 지어 핀 작은 꽃들 행여나 다칠까 봐/ 이러질 발을 옮겨 딛는 조심스러운 행복을 위해서라 아니라...... 아직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사랑의 속살을 찾아서/ 거기 가지런히 꽂혀진 안 읽은 책들을 차분하게 펼치듯/ 이렇게 낯선 적요 속으로 들어가 안기는 일이/ 나에게는 가슴 설레는 공부가 되기 때문이다/
백비... 감악산 정수리에 서 있는 글자가 없는 비석 하나/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너무 크고 많은 생 담고 있는 나머지/ 점 하나 획 한 줄도 새길 수 없었던 것은 아닌지...... 저리 덤덤하게 태연할 수 있다는 것을/ 저렇게 밋밋하게 그냥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도 뒤늦게 알아차렸습니다/
어느 사이 속보가 되어... 걷는 것이 나에게는 사랑 찾아가는 일이다/ 길에서 슬픔 다독여 잠들게 하는 법을 배우고/ 걸어가면서 내 그리움에 날개 다는 일이 익숙해졌다/ 숲에서는 나도 키가 커져 하늘 가까이 팔을 뻗고/ 산봉우리에서는 이상하게도 내가 낮아져서/ 자꾸 아래를 내려다 보거나 멀리로만 눈이 간다/ ..... 먼 곳을 향해 떼어놓는 발걸음마다/ 나는 찾아가야 할 곳이 있어 내가 항상 기쁘다/ 갈수록 내 등짐도 가볍게 비워져서/ 어느 사이에 발걸음 속도가 붙었구나!/
건너 산이 더 높아 보인다... 산봉우리에 올라가 바라볼 때마다/ 저 건너편 산봉우리가 더 높아 보인다/ 건너편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이까 올랐던 산봉우리 되돌아보면/ 이게 뭔가 그 봉우리가 역시 더 크고 높게 보인다/.... 산에 다니면서부터 나는 나의 시가/ 낮은 목소리로 가라앉아 숨을 죽이거나/ 느리게 걸어가서도 결국은/ 쓸모없이 모두 사라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키가 큰 욕망은 마침내 무너지고 널브러져서/ 부스러기가 된다는 것을 산이 가르쳤다/......
그의 시를 읽고 있다 보면 내가 산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힘들게 그를 따라 오르막길을 오르고 나무를 만나고 잠시 잠깐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만나고 건너편 산봉우리를 만나고 이름모를 들꽃을 만나고 나의 인생을 만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참 좋다. 산에 가지 못하는 날, 산에 가고 싶은 날 시인의 시들을 읽고 있다보면 내가 산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가 느낀 느낌들이 그가 전해준 느낌들이 그가 그려준 풍경들이 내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것처럼 나도 산인이 되어 있는 기분이다. 그가 '간암' 이라는 큰 산을 넘어 들려주는 산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좋다. 부디 건강해져서 백두대간 아니 더 많은 산들을 오르고 그리고 내리거나 도둑 산길을 다니며 만났던 이야기들을 '시詩' 로 승화시켜 보여주길 바란다. 자신의 삶과 함께 했던 시와 산행이 이렇게 멋지게 그 자신을 나타내주는 글이 될 수 있어 좋다. 시집을 읽고 나면 빨리 산에 가고 싶어진다. 나 혼자 오롯이 오솔길을 차지하고 걸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