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12명의 목사 집단 처형 사건, 그들은 순교자일까?
1950년 11월, 평양 정보처 파견대 이대위와 장대령은 공산당에 끌려갔다가 처형된 14명의 목사 집단 처형 사건에서 살아 남은 신목사와 한목사에 대하여 그들이 어떻게 그 현장에서 살아 남았고 또한 처형된 12명은 과연 순교자인가 하는 문제를 깊게 파고 들게 된다. 이대위와 친구인 박군의 아버지 또한 12명의 목사중에 한 분으로 목사들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고 그들이 있는 정보처 앞의 폐허가 되다시피한 중앙교회가 박군의 아버지가 있던 교회였다는 것을 알고는 교회를 한바퀴 둘러 보던 중, 우연히 마주친 어딘가 이상한 남자, 그가 신목사와 살아 남은 한목사라는 것을 신목사를 찾아 가서 알게 된 이대위는 12명을 순교자로 몰아 가는 장대령과 맞서 무언가 숨겨진 진실을 파헤쳐 보려 한다.

'실종된 목사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해줘야겠네.'
집단 처형, 하지만 그 현장에서 살아 남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무언가 '진실' 을 그들이 알고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신목사와 반쯤 정신을 놓은 한목사, 그들에게서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진실' 을 얻어낼 수 있을까? 장대령 보다는 좀더 인간적인 점수를 얻은 이대위는 신목사를 찾아가 그가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 진실을 들으려 하지만 신목사는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은폐하려는 것처럼 보여지며 한목사를 자신의 수족처럼 보살피려 한다. 그가 어떻게 그곳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 그도 12명처럼 순교자일까?

'두 분은 총살 직전에 우리 보병부대에 구조되어 감방에서 풀려났습니다.'
간발의 차이로 처형 직전에 살아 남은 신목사, 그가 알고 있는 진실은 무엇일까. 그가 12명을 순교자라 하지 않아도 많은 교인들과 사람들은 그들을 '순교자' 로 각인을 하고 있는 현실, 그렇다면 신목사가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이 상황에서 그가 무슨 진실을 토해내도 그 진실이 진실로 받아 들여질까. 박군 또한 기독교에 너무 광적인 아버지 때문에 배교자가 된 상태라 그의 아버지의 마지막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자 한다. 아버지가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 을 위해 죽었는지 아님 배교를 했는지에 따라 자신이 아버지 죽음에 대하여 애도를 하겠다는 그, 이대위를 따라 아버지 죽음에 대한 진실에 근접하기 위하여 평양을 찾는다.

'자네가 기독교인의 입장이 되어 그 순교자들을 생각해봐. 냉혹하게 죽임을 당한 열두 명의 목사들을 말야. 살아남은 두 사람이 어떻게 처리돼야 하는지 그래도 모르겠나?' 모두의 입장에서 보면 집단 처형된 12명의 목사는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 순교자가 되지 못한 두 명의 목사는 그들을 또한 순교자라고 증언을 해야만 마땅하다. 하지만 그 진실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신목사가 쥐고 있지만 순교자로 몰아가는 장대령의 말보다는 자신이 현재를 바라보던 신목사, 하지만 그는 모두를 위한 길을 택한다. 12명 그들은 순교자였다고. 과연 죽음 앞에서 아무리 목사들이라고 하지만 정말 순교자였을까. 하느님을 택했을까? 

죽음 앞에서 자신의 목숨보다 먼저 하느님을 택할 사람이 있을까? 배교를 할 '유다' 는 없었던 것일까?
신목사 그는 교인들에게 죽지 않았기에 '유다' 라고 칭해지지만 그가 모두를 모아 놓은 자리에서 털어 놓은 진실은 그들은 순교자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실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들여다 보면 그들은 순교자 보다는 마지막 순간, 기도를 할 수 없었던 것. 그들을 순교자라고 하지 않는다고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을 순교자라고 한다고 무엇이 변하는 것도 아닌 현실. 그들의 죽음은 '순교자' 라고 포장이 되어 교인들을 뭉치게 하고 신목사는 다시 교회로 돌아가 목회를 하지만 전쟁통이라 먹을 것도 부족하고 교회는 점점 피난민으로 넘쳐 나는데 그의 몸은 이미 중병을 앓고 있어 겁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던 것.

박군 아버지의 진실을 편지로 알려주지만 진실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순교자모임에 참석하여 앞장서는 박군, 진실이 모두 드러나고 정치정보국을 떠나는 장대령, 그곳을 떠나 서울에 돌아와 자신이 하던 교수직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업이 정보국장을 맞게 되는 이대위, 전쟁은 점점 알 수 없이 흘러가버리고 그들이 원하지 않아도 평양을 버리고 서울로 내려와야 하는 상황에서 건강이 악화된 신목사를 보호하고 싶었지만 마지막까지 '유다' 이길 원하지 않는 그를 평양에 남겨 놓고 내려와야 하는 현실.

진실이 진실로 밝혀졌다면 현실은 어떻게 변했을까? 
집단처형된 12명의 목사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신목사가 진실로 밝혔더라면 어떠했을까? 그 진실은 진실로 받아들여졌을까? 또한 죽음 앞에서 고뇌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소설은 한국전쟁후 십여년의 세월이 흐른후에 쓰여진 것이라 하니 정말 대단하다. 진실이 아무 값어치도 없는 현실과 죽음이 인간의 믿음마져 변하게 되어 '유다' 가 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소설은 한국전쟁 60년을 맞이하여 이런 소설이 있어나 하며 다시금 한국전쟁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한다. 지난 6월에 본 영화 <포화 속으로> 도 한국전쟁의 한 편린을 보듯 잊혀져간 '이름없는 학도병' 들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하게 해 보는 영화 였는데 이 소설은 죽음앞에서 인간이 고뇌하고 믿음보다 자신의 목슴이 더 중하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유다가 되어야 하는, <죄와 벌>을 읽는 듯한 느낌을 전해 주었다. 

'진실의 수호자가 되시겠다고요? 도대체 그러는 목사님은 누굽니까? 누굴 위해 그걸 지키고 있는 겁니까? 누구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아니면 군을 위해서? 어느 쪽입니까?... 아니면, 목사님의 신을 위해서?'  신목사가 만약에 12명 목사들의 죽음은 이런 것이다 하고 사실을 말했다면 현실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 혼자 유다가 되어 모두의 배척속에 나날을 보내었을까? 아님 그래도 모두는 그들을 '순교자' 라고 믿었을까? 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갔다. 그들에게서 믿음은 가져가지 못한듯 하지만 죽음앞에서 흔들리는 믿음을 보며 신이 먼저 일까? 목숨이 먼저 일까? 하는 생각도 가져 본다. 내겐 딱히 이런 깊은 믿음은 없지만 믿음이 있어도 죽음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고뇌하게 될 듯 하다. 전쟁상황이 아니라 해도.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을 전해주는 소설은 우리에겐 크레 알려지지 않은 소설이며 작가였던 듯 싶다. 좋은 기회에 만날 수 있었던 소설이고 한국전쟁 60년을 맞아 읽게 된 소설은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아직 그 아픔이 가시지 않고 남아 있어서일까 많은 질문을 하는 듯 하다. 사실을 사실대로 폭로하기 보다는 신목사가 택한 길을 어느 누구라도 걷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게 12명에 대한 참회는 아닌가 한다. 그들이 죽음을 택한 것도 아니고 죄가 있어도 죽음을 당하게 된 것도 아닌, 전쟁의 피해자에게 신목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기도는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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