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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배고픈 천사는 입 안에, 내 입천장에 오롯이 매달린다. 그건 배고픈 천사의 저울이다. 배고픈 천사가 내 눈을 제 안경처럼 덧쓰고, 심장삽은 현기증을 일으키고, 석탄은 흐릿하게 보인다. 배고픈 천사가 내 뺨을 그의 턱 위에 끼워 맞춘다. 그리고 내 숨결을 그네 뛰게 한다. 숨그네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심한 착란 상태이다.' 축음기 상자였던 돼지가죽 트렁크에 아버지의 외투와 우단 깃이 달린 도회풍의 할아버지의 외트, 삼촌의 니터보커 바지를 넣고 이웃 타르프 씨가 준 가죽각반을 넣고 피니 고모가 준 초록색 양모장갑을 넣고 지난 크리스마스에 선물 받은 붉은 포도주색 실크스카프와 세면도구를 넣어 길을 떠날때 소년은 '배고픔' 이 그렇게 큰 적이 될지 몰랐다.
17세 소년 레오, 그는 강제수용소에서 5년여 동안 수감생활을 하며 '삶과 죽음의 숨그네' 사이를 오가며 배고픔과 향수 그리고 죽음과 시체에 두려워 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 우리는 수용소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시체를 치우는 법을 배웠다. 사후경직이 시작되기 전에 죽은 이들의 옷을 벗긴다. 얼어 죽지 않으려면 그들의 옷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이 아껴둔 빵을 먹는다. 그들이 마지막 숨을 거두면 죽음은 우리에게 횡재다.' 다른이의 죽음을 통해 남겨진 사람들은 '삶의 연장' 되는 처절한 수용소의 생활에 그는 집으로 향하는탈출보다도 강제수용소로 돌아가는 길이 더 익숙하기만 하다.
소설은 소설이라기 보다는 강제수용소의 체험기와 같이 건조한 문체이지만 사실적으로 쓰여졌다. 독일계 소수민족에서 태어난 그녀, 어머니가 강제수용소에서 오년을 보냈고 아버지 나치 무장친위대로 징집되었다고 돌아왔고 할아버지 또한 루마니아에 독재정권이 들어서고 재산을 모두 몰수 당했다고 하니 그녀의 삶이 닮긴 소설이라 할 수 있을 듯 하다. 루마니아에 살던 17세에서 45세 사이의 독일인은 남녀를 불문하고 소련의 강제수용소로 유형을 갔다하니 그녀와 루마니아의 소수민족의 삶이 오롯이 담긴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동료 '오크사 파스티오르' 와 함게 이야기를 강제추방을 당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 나가다가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나서 쓰게된 소설 <숨그네>는 그녀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 주었지만 독자들에겐 참흑한 강제수용소 생활을 좀더 세세히 전해주는 계기가 된 듯 하다.
'너는 돌아올거야.' 라는 할머니의 말이 레오를 집으로 돌아오게 만들었을까? 죽음보다 더한 배고픔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강한 에너지를 안겨주는 말이 되었을까? 가족들은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무관심하다고 생각하게 된 레오,적십자를 통해 온 한장의 엽서에 담긴 자신을 대신할 새로운 동생의 탄생에 적개심을 품었던 그가 강제수용소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서서히 적응해 나가며 자신이 가졌던 생각들을 고쳐나갈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의 말' 이나 할어버지의 죽음이후에 이웃이 들려준 자신에 대한 사랑이 담긴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삽질 1회 = 빵 1그램처럼 처절하게 '생' 으로 달려가기 위한 그의 노력이 수용소에서 그가 배고픔을 이기게 해 주기도 하였겠지만 죽음보다 무서운 배고픔을 이겨내는 것에는 방법이 없었을 듯 하다. '절대영도에는 세칙이 없다. 배고픈 천사가 뇌를 훔치는 도둑이라면 절대영도는 법 자체다. 빵의 정당성에는 현재만 있을 뿐, 전후 과정이 없다. 완벽하게 투명하거나 완벽하게 비밀에 휩싸여 있다. 빵의 정당성은 배고픔이 뒤따르지 않는 폭력과는 다른 폭력이다. 빵의 법정에는 일반적인 도덕이 들어설 수 없다.' 법도 없고 먹을것도 부족했던 곳에서 그들은 좀더 배고픔을 이겨내보기 위한 방법으로 '빵바꾸기'도 하고 자신이 가진것을 하나하나 팔아 먹을것 대용으로 없애기도 했지만 '아마포 손수건' 만은 트렁크 밑에 남겨 두었다. 그 손수건이 자신과 같다고 느낀 레오,손수건마져 없애버리면 영영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신세가 될 것같아 '너는 돌아올 거야.' 라는 할머니의 말과 함께 했던 손수건을 고이 간직했던 그의 질곡의 수용소의 생활은 비참 그 자체이다.
죽은 시체의 머리카락마져 추위를 막기 위한 양탄자로 쓰이는 그곳에서 그가 마주한 시체는 자신이 직접적으로 겪는 '배고픔' 보다는 무서움이 덜 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철처한 배고픔에 노출되도록 한것이 관리자들이 뒤로 빼돌린 것 때문에 더한 고통을 겪었다는 것을 알고는 그들이 느낀 '배신감' 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제수용소에서 그들이 그토록 이겨내지 못한 추위와 배고픔을 나 몰라라 한 관리자들, 그들의 최후 또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처참 그 자체였다. 자신은 수용소에서 그토록 힘든 시간을 이겨내는 동안 고향집에는 여전히 예전과 별다르지 않은 삶이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안 레오, 자신의 현실과 가족이 누리고 있는 현실사이의 간극을 그가 이겨낼 수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다. '고향에서는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아무도 모른다. 지금쯤 할아버지는 고향 집 베란다에서 차가운 오이샐러드를 먹으며 생각할 것이다. 내가 죽었다고. 할머니는 헛간 옆 방바닥만한 그늘에서 닭 울음소리를 내며 암탉들을 불러 모은 후,모이를 뿌려주며 생각할 것이다. 내가 죽었다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마 벤히에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손수 만든 세일러복을 입고 산골 풀밭 한가운데 누워 생각할 것이다. 나는 이미 하늘에 있다고. 나는 어머니를 흔들며 말할 수 없다. 어머니, 나를 사랑해요. 나 아직 살아 있어요.'
6월,우리에겐 한국전쟁 60년을 맞는 해라 그런가 더 가슴이 아팠다. 얼마전에 본 영화 <포화 속으로> 의 학도병도 생각나고 그 학도병과 오버랩되는 17세 소년 레오가 살기 위해 옷의 모든 부분에 감자를 넣어 수용소로 돌아오는 부분을 읽으며 가슴이 아렸다. 고향을 향하여,자유를 향하여 도망칠 수도 있는데 먹을것을 택하여 수용소로 돌아가는 그의 무거운 발걸음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나는 눈을 감고도 막사로 가는 길을 찾는다. 나는 외출이 필요 없다. 내게는 수용소가 있고, 수용소에는 내가 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침대 하나와 펜야의 빵과 양철그릇 뿐이다. ' 한참 먹을 것에 예민할 나이이고 자신만을 찾을 이기적인 나이에 그가 배우고 겪은 '삶과 죽음' 이라는 명제가 그의 일생을 어떻게 바꾸었을지, 작가가 창작의 자유를 찾아 고향을 버리고 망명을 택하여 삶이 박탈당한 강제수용소 이야기를 진솔하게 우리에게 들려주기 까지 얼마나 긴 터널을 걸어왔을지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나에게 주어진 '오늘' 을 더 값지게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소설이다.진실은 언젠가는 수면으로 떠 오르기 마련이다. 감추려 하면 할수록 터져 나오려 하는 압력은 더 커지는 듯 하다.처참이 너무 세세하고 무미함이 자리하여 조금은 읽는데 힘이 들수도 있지만 인내를 가지고 읽다보면 '삶의 희망' 이 나타나듯 '진실' 을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