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제대로 사랑한다는 의미야...


이 책을 읽으며 과연 맥의 입장이라면 딸을 살해한 범인을 '용서' 를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용서>라는 것은  타인을 용서하는 것일까 자신을 용서하는 것일까..자신의 마음을 옭아매고 있던 미움의 울타리를 거두어 내고 <마음에 자유>를 안겨주는 것처럼 <용서>라는 것은 타인보다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미워하고 증오한다면 자신 또한 평생을 마음의 감옥안에서 어둠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 어둠밭에서 빛을 보지 않고 살기 보다는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

맥은 바쁜 아내를 대신하여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여행을 떠난다. 친구들 가족과 함께 캠핑을 가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던 중 케이트가 카누를 타다가 아빠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던 순간에 모든 슬픔이 시작되었다. 카누가 뒤집히면서 아이들이 물에 빠지고 구조원을 했던 경험이 있는 맥은 물에 뛰어 들어가 간신히 아이들을 구해 내지만 '거대한 슬픔'은 그 뒤에 일어난다. 막내딸 '미시'가 감쪽같이 사라진것. 그들이 야영하던 캠핑장 주변을 찾아 보지만 미시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고 수소문 하던 끝에 낯선자가 미시를 유괴해 갔음이 밝혀지고 그가 남긴 증거물은 연쇄살인범임을 알아내지만 미시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유괴해가던 차를 쫒던 중에 오두막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발견하는 피 묻은 미시의 빨간 원피스를 찾아 내지만 여섯살난 미시는 없다. 그 슬픔을 간진한채 살아가던 맥에게 어느날 전해진 쪽지 한 장, 그곳엔 오두막에 오라는 파파가 보낸 글이 쓰여 있고 그는 아내와 아이들이 여행을 떠난 후에 오두막으로 향하여 슬픔의 장소에서 뜻하지 않게 '파파' 를 만나게 된다. 하느님은 우리가 늘 생각하는 비슷한 그림의 형상을 생각하는데 이곳에서 만난 파파는 우리의 생각을 뒤집어 놓는다. 흑인에 중년의 뚱뚱한 아줌마. 파파와 함께 있는 예수와 그외 사람들과 맥은 지난 이야기와 신비한 체험을 하듯 시간을 보내며 그동안 자신이 속에 얽히어 있던 실타래를 풀듯 상처를 조금씩 치유하며 자신이 가장 증오하는 자마져 '용서'를 하는 법을 배운다. 

'여기는 바로 당신의 영혼이에요. 이 혼란스러운 정원이 바로 당신인 거죠! 당신의 마음 밭에서 우리가 함께 목적을 갖고 일했어요. 비록 거칠지만 아름답고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어요. 당신이 보기에는 엉망 같아도 나에게는 완벽한 패턴이 형성되고 있는게 보여요. 생기가 넘치는 게 느껴져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차원 분열 도형이죠.' 

'어둠 속에서는 두려움과 거짓말과 후회의 실체 크기가 가려지죠. 그런 것들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이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더 크게 보일 뿐이에요. 당신 안에 있는 그런 것들에게 빛을 비추면 실제 모습이 보이겠죠.' 

'당신이 내 존재를 느끼건 아니건 간에 당신은 언제나 나에게 말을 걸 수 있고 나는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을 거예요.'

우린 어려움에 처하면 자신도 모르게 '아이고 하느님..' 이란 소리를 할때가 있다. 위에 언급한 말처럼 하느님이란 존재는 우리가 느끼건 못 느끼건 간에 우리안에 늘 함께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기독교나 크리스천이란 소리는 아니다. 종교를 떠나서 무한의 존재로 느끼는 하느님에게 알게 모르게 넋두리처럼 혼잣말을 할때가 있다. 몹시 대화가 하고 픈데 들어줄 사람이 없다던가 '영적인 존재'에게 털어 놓으면 꼭 들어줄것만 같아 꼭 그분이 아니어도 공간안에 숨쉬고 있는 어느 존재에게 자신만의 마음을 담아 소원을 빌 때, 우린 정형화 되지 않은 하느님을 만난다. 소설속처럼 아픔을 간직한 맥이 형상화된 하느님을 만나서 자신안에 고여 있던 아픔을 토로해 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상처가 아물 수 있었을까. 그 하느님이 할아버지든 할머니든 중년의 흑인 여성이든 간에 자신의 아픔을 표출해 내고 그들과<대화> 를 나누었기에 상처가 소독이 되지 않았나 싶다. 

<오두막> 은 자신에게는 상처였지만 그 상처를 치유하게 해 준 장소이며 공간이다. 그가 '거대한 슬픔'의 장소로 <오두막>을 그냥 방치해 두었다면 그의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자신을 갉아 먹었을 테지만 영적인 존재와 만남에서 자신안에 고여 있던 아픔을 모두 짜내어 새살이 돋아 나오게 하였기에 어둠속에서는 아픔의 상처가 커 보였지만 밝은 빛에서는 실제 자신의 존재를 볼 수 있었던,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커다란 아픔이 되었던 장소나 사건이 일어났던 곳에 누가 다시 가고 싶겠는가.하지만 나 또한 경미한 사고로 끝났지만 아픔의 장소가 있다. 그 장소와 이름만 들어도 아픔이 다시 밀려오는 듯 했지만 그 아픔을 잊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 장소에 가서 사고 현장을 다시 들여다 보는 것이다. 상처를 덮어 놓거나 기피하기 보다는 부딪히다 보면 더 빨리 치유할 수 있다는 작가만의 치유 방법이 하느님과의 대화로 이어지지만 그가 현실을 받아 들이고 부딪힌 것이 더 빨리 치유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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