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의 첼리스트
스티븐 갤러웨이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사라예보에 울려 퍼진 첼로 진혼가, <아다지오>
 
 
이 책을 처음 접하며 웬지 <피아니스트>라는 영화가 생각이 났다. 그는 전쟁중에 살아남은 피아니스트이지만 그가 처했던 폐허, 그리고 사라예보에서 첼리스트가 연주하는 장면이 괜히 오버랩이 되면서 동장면처럼 날 괴롭혔다.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고 하여 소설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읽어보니 너무도 참혹하다. 사라예보 내전, 사라예보 룰렛처럼 어느 순간에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설지 모르는 참혹한 곳에서 살기 위한 그들만의 투쟁이 얼마나 참혹했을까 하는 생각이 내내 떠나지 않았다. 그 참혹함을 잠재우듯 울려 퍼졌을 사람이 목소리와 닮은 첼로곡 알바노니의 <아다지오>. 난 워낙에 <시크릿 가든의 아다지오>를 너무 좋아하기에 사라예보 죽음의 현장에 아다지오가 울려 퍼졌다고 하니 더욱 소름이 끼쳤다. 가슴 밑바닥을 울리는 듯한 아다지오가 22명이 죽은 구덩이에서 22일동안 울려 퍼졌다니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도시를 둘러 싼 언덕에 세르비아계 저격수들이 사람들을 향한 무차별적 죽음의 사격을 가했다니 너무도 참혹하다. 그들의 총구를 피해 살기 위해 양조장으로 아래층의 성깔있는 할머니의 물까지 뜨기 위해 집을 나서는 <케난>. 그는 집에서는 웃고 나기지만 현관을 벗어나면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현장으로 발을 디딜때마다 그의 온몸은 겁에 질려 있다. 어디에서 총알이 날아 올지,저격수의 목표물로 들어날지 모르는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후들거리는 다리로 양조장까지 폐허의 길을 걸어 도착하지만 물을 뜨기 위해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날아든 포탄, 자신이 터진 포탄의 조각에 맞은 것인지 안맞은 것인지 무감각해진 무서움, 살아 있어도 이젠 집까지 돌아가는 길이 무척이나 긴 고행길처럼 힘들기만 하다. 무겁게 어깨에 걸쳐진 물병들과 저격수의 눈을 피해 물을 나르는 케난, 그를 통해 한방울의 물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아내와 아들은 이탈리아로 떠났지만 누이의 가족과 자신이 먹을 빵을 구하기 위하여 빵집으로 나가는 드라간, 그가 빵집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나이이지만 누이의 집에 언쳐 살고 있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는 그도 저격수를 피하며 빵집으로 가는 길은 늘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아내의 친구인 에미나, 그녀의 코트가 맘에 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저격수의 목표물이 되어 총알이 뚫고 지난간 코트는 코트의 생명을 잃어 버리고 같은 거리에서 저격수의 목표물이 되어 희생양이 된 사람들, 그들의 죽음과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겨지는 것을 원치 않는 드라간, 하지만 사라예보를 떠나 아내와 아들이 있는 이탈리아에 가고 싶지는 않다.
 
빵을 구하기 위해 줄을 서서 있던 22명이 희생당한 구덩이, 그 죽음의 순간을 목격한 첼리스트는 가까이 살기도 하여 그곳에서 22일 동안 연주를 하기로 한다. 첼리스트를 보호하기 위한 임무를 맡게 된 <애로>. 그녀는 누구보다도 냉철한 판단력으로 저격수와 저격위치를 가려내지만 움직이지 않는 저격수는 죽이고 싶지 않다. 아니 첼리스트의 <아다지오>를 듣는 순간부터 그녀가 왜 소총을 잡고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지 회의에 빠져들기 시작하듯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습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첼리스트를 겨누고 있던 저격수를 사살한 다음부터 자신의 본연으로 돌아오기 시작하는 그녀, 첼리스트의 마지막 연주가 끝남과 동시에 그녀도 소총을 버렸다. 그 장소에.
이제 더이상 죽고 죽이는 일을 하고 싶지가 않다. 첼리스트가 아다지오를 연주하는 순간 사라예보는 죽음의 도시가 아닌 꽃과 나무가 자라고 총구멍이 아닌 깨끗이 페인트가 칠해진 벽으로 변한것처럼 순간적으로 생각이 들었듯이 사람들도 변해간듯 하다.비록 죽음이 난무하고 저격수의 목표물이 되어 폐허의 도시에 살고 있지만 저격수였던 애로가 그 이름을 버리고 '내이름은 알리사야..' 하고 소리친 것처럼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인간다운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너무도 가슴 아픈 소설이다. 우리에 사람을 가두어 놓고 죽이는 것처럼 어떻게 그렇게 무서운 일들이 벌어졌는지 이 소설은 말해주고 있다. 전쟁의 상처를 달래주듯 울려 퍼지는 첼로음악, 아다지오. 그는 아무 이유없이 죽은 22명의 혼을 달래듯 22일동안 연주를 하고는 첼로의 활을 버렸다. 그의 몰골은 참혹했지만 음악만은 아름답게 흘러 나왔을듯 싶다. 그리고 처절하게 전쟁의 상처가 깊이 패인 사라예보의 사람들 가슴 가슴을 울려 주고 내 가슴까지도 울려 주었다. 점점 사람들이 죽은자에게 무감각해지고 총알이 박혀 흘러 내리는 피에 무감각해져가는 것은 전쟁이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뿌리 뽑아 놓았기 때문인것 같다. 그 생지옥과 같은 곳에서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것과 다르지 않음을 그들은 알고 있는 듯하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자신을 잃어버린 그들이 나의 발목을 잡으며 잊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느낌이다.
 
 
'드라간, 전 두려워요.죽는 것도 사는 것도 다 두려워요. 이런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고, 그래서 이 전쟁이 그냥 하나의 전쟁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앞으로의 삶으로 완전히 굳어질까봐 두려워요.'
 
'부인은 오랫동안 유령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아직 살아 있으면서 유령으로 지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가장 끔찍한 일이다. 좋든 싫든 조만간 우리 모두는 유령이 될 테고, 그러면 땅에서 완전히 씻겨 없어져 우리에 대한 기억조차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령이 아닌 때가 있고 우리는 그 차이를 알아야만 한다. 일단 그 차이를 잊으면, 그때는 유령이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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