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전집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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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그를 처음 떠 올릴때 입에서 선뜻 나오는 한구절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로 시작하는 기형도의 빈집.첫 마디부터 구구절절 무언가 사연이 있을듯 하여 그 공허함으로 빨려들다 보면 한번 읽고는 그 여운을 감당하지 못해 다시 읽고 다시 한번 더 읽어야만 직성이 풀리고 다시 눈으로 마음으로 읽어야만 가슴에 박힐듯한 시어들.
 
그의 짧은 생애가 말해주듯 정말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듯 하다. 그의 유작시에 담겨진 시어들 하나하나 묻어나는 절망 죽음 무언가 안개가 뒤덮은 듯한 암훌함이 베어 나온다. 그의 죽음마져 한편의 시가 된듯한 착각에 빠져 그의 연보를 먼저 흝어보고 시들을 읽어 나갔다.희망을 찾아보려 했지만 희망은 빈집에 갇히기라도 한듯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죽음을 알고 있었나.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시골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난 이 '엄마 걱정'이란 시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몇십리 길을 걸어가야 겨우 오일장을 만나고 돈이 될만한 것이라고 해야 텃밭에서 농사지은 콩이며 깨 시에서 언긋한 열무며 마늘등등을 머리에 짚으로 만든 또아리 위에
보자기 보자기 싼 것들을 이고 오일장을 가시면 난 엄마 손에 들려줘 올 번데기며
눈깔사탕을 빈집 툇마루에 해바라기 하고 앉아 기다리곤 했다. 그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해준 엄마 걱정, 벌써 내 나이가 그 시절 엄마 나이만큰 걸어 왔으니 내게도 시인의 유년의 윗목만큼 유년시절은 가슴 뭉클하게 다가온다.
 
전집에는 그의 시들뿐만 아니라 새로 찾아낸 시뿐만이 아니라 소설과 산문 일기등이 있어 그를 좀더 가깝게 들여다 볼 수 있어 좋다.소설에는 그의 가족적이면서도 자전적인 이야기가 나오는듯 하면서 기행문은 한번쯤 나도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훌쩍 땀에 쩔어가면서 여행을 하고 픈 생각도 든다.그의 발자취를 따라.. 언뜻 기행문을 읽다보니 그 짧은 여행도 그의 생의 마지막 불꽃같은 것 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죽음을 알고 읽는 시와 그의 글들은 죽음이라는 벽과 늘 마주친다.그리고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안개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주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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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안개란 시를 읽다보면 안개속에 빠져들었다가 나와야 할듯 한 분위기다.긴 방죽에 서 있을듯한 느낌에 안개에 젖은 축축한 풀들을 밟고 서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 안개속을 지나서 가는 여공들의 얼굴은 밝고 깔깔 웃음소리까지 내며 간다.전혀 안개를 의식하지 못하는듯 하다.안개도 그들의 일상이 된것이다.그 읍의 명물이듯이.
 
그의 전집은 짧은 생을 살다 갔다는것을 떠나서 한번 읽고 지나치기엔 아쉬움이 남는다.시간이 날때마다 다시금 들추어 시를 한구절 한구절 낮게 읊조리면서 읽어봐야 겠다. 그의 사진속 웃는 얼굴처럼 그에게서 희망을 찾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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