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는 나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는 물질이다-액체다. 물론 가끔 사용하기는 하지만, 어느 여자들이 꼼꼼하게 브랜드를 챙기고 해박한 지식을 오물조물하는걸 그저 신기하게 지켜볼 뿐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는 읽지 않았다. 그 남자의 책은 예전에 여러 권 본 듯 한데(젊은 시절, 그 남자의 책 한권 안 읽어 본 사람은 드물겠지만), 가물가물하다. 그런데 분명 향수는 아니었다. 이번에 영화 <퍼퓸-어느 살인자 이야기(Perfume: The Story Of A Murderer'2006)>를 보고 쓸데없이? 더불어 확인한 것이기도 하다.

 

 

 

 

 

영화엔 대개 잘 모르는 (비헐리우드) 배우들이 나와서 이국적인 느낌을 갖고 보는데, 생뚱맞게 더스틴 호프먼 비슷한 배우가 나오길래,  긴가민가 했는데 역시나였다. 굳이 왜 더스틴 호프먼을 써야 했을까? 하긴 영화 제작과정이 한 사람의 순수한 의도대로  만든다는게 어려운 일이니, 그 내막을 알길이 없지만 말이다. 물론 그의 연기는 좋다. 하지만 약간 낯선 배우들과 낯선 느낌의 우중충한 분위기의 영화에서 그를 발견하게 되면, 감상의 몰입이 잠시 영화 밖으로 뛰쳐나오기 때문이다(왜 저 사람이 저기 있지?).

아시아 영화들과 달리 서양 영화를 보면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령 이 영화만 보더라도, 감독은 독일 출신이고, 주연은 영국 배우, 배경은 프랑스. 그래서 이 영화 자체의 국적은 유럽의 여러나라로 묶여진다. 이러한 여러 인종과 문화의 섞임-거기엔 분명 장점-상승의 효과가 있을 것이다.

감독은 우리에게 무지막지하게 뛰는 소녀를 통해 가슴 헐떡이게 한 영화 <롤라 런(Run Lola Run, Lola Rennt'1998)>의  톰 튀크베어(Tom Tykwer)이다. <겨울잠 자는 사람들(Wintersleepers'1997)>,  <공주와 전사(The Princess And The Warrior, 2000)>, <헤븐(Heaven'2002)'>그리고 최근 코엔 형제, 올리비에 아사야시, 스와 노부히로 등 쟁쟁한 감독들과 함께 한 다소 싱거웠던 옴니버스 영화 <사랑해, 파리(Paris, Je T'Aime'2006)>  등이 있다.

<사랑해, 파리>에서는 나탈리 포트만이 출연한 부분(눈 먼 청년과의 사랑)을 연출했는데, 속도 편차가 큰 편집으로 다른 단편들에 비해 그래도 지루함은 덜했다. <헤븐>은 남편의 복수를 위해 살떨리면서 한 일이 잘못 엉키면서 테러리스트로 오인 된 여자의 이야기를 다뤘다. 그러나 액션-폭력 영화는 아니고, 그렇게 전개될거 같은 (경찰서 안에서의) 긴장된 분위기가 어느새 위험하지만 은은한 남녀의 사랑이야기로 어긋난다(그래서 나는 재미있게 봤다. 헬기가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여기서 여자주인공으로 나온 케이트 블란쳇은 꽤 매력있게 나온다. 연약하진 않지만, 특유의 여성미를 내뿜을 수 있는 배우란 생각이 든다. 이번에 새 영화 <바벨>에서는 나오는 부분도 적고 그냥 아프기만 한 연기라 좀 심심했다.

 

 

   

 

 

톰 튀크베어 감독은 작가로서의 (젊은) 실험성은 <롤란 런>에서 만족하고, 그 뒤로는 거친 외곽을 부드럽게 다듬고 흔히 말하는 예술성과 대중성의 적당한 균형을 유지하는 듯한 냄새가 난다.  

상업 영화로 볼 수 있는 이번 작품에서도, 대중에게 익숙한 방식을 가지면서도 언뜻 드러나지 않는 묘한 영상의 장치들이 있다. 특히 영화 마지막, 처형 장면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사방에 두고 주인공이 보여준 '제스처'는 인상적이다. 다만 그 장면이 약간 짧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있다.  마치 향수를 톡 짧게 뿌리지만, 향기는 은은하게 오래 남듯이 말이다.

이 영화를 보면, 향수 제작 방법이 과학적이면서도 뭔가 신비적인 것인양 비춰진다. 특히 그르누이의 얍삭한 스승(더스틴 호프만)이 마지막으로 향수의 비법에 대해 말할 때, 십여개의 작은 병들이 일렬로 담겨진 상자를 가리키는 장면이 있는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향수에 대한 신비감을 더욱 자아낸다.

그래서 나도 향수에 대해서 시간이 나면 공부해 보고픈 맘이 생기더라. 물론 책을 통해서겠지만.

 

 

 

 

 

 

눈으로 듬뿍 향수를 마시게 된 영화인데, 몇몇 장면은 향락(jouissance)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특히 아까도 말한 처형대 위에서 그르누이가 그를 직접 (칼을 들고) 처형하려는 남자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장면이 그렇다. 두 딸을 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가진 아버지의 심정이 변화를 겪게 되면서 얼굴에 번지는 그 미묘한 환희의 표정..

이 영화에서의 향수香水는 향락享樂인가? 그 주이상스가 잠시 찡그리듯 이 영화에 출현한 것일까?

어쨌든 나중에 다시 이 영화를 볼 것이고

원작 소설도 찾아서 볼 것이다.

그러나 향수를 사러 매장에 가지는 않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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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삶(Das Leben Der Anderen / The Lives Of Others, 2006)

훔쳐보기는 에로영화를 자극하는 살 떨리는 시선의 기술이 아닌가? 근데, 이 남자(HGW XX/7)는 훔쳐듣기라는 도청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감시한다. 도청은 어떻게 보면 뉴튼 역학 시대의 덕목인 '객관적인 관찰'의 세계상과 비슷하다. 즉 관찰자는 그 사물과 감정적으로 단절된 공간에서 객관적으로 기술하면 된다. 실험대 위에 구르던 쇠구슬이 멈췄다고 손끝으로 굴려서 어떤 조작된 결과를 얻는 건 찰리 채플린 영화에나 나올법한 발상이다. 이정도로 운을 띄우고...

이제는 영화에서 왠만한 것들은 다 구사된 거 같다. 그래서 극단적인 자극으로 '반전'이라는 것을 써먹기도 하는데, 그것도 약발이 떨어지는 실정이다. 약의 종류에 비해 효과는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감기약이 달라봐야 얼마나 달라질 수 있겠는가? 그래서 반전이라도 앞서 몇 번 써먹은 것들은 곧바로 상투적인 감정을 부채질하며 관객들의 욕을 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결국 영화가 기댈것은 그러한 자극적인 양념이 아니라 '영화다운' 영화로 가는 길이다. 두어시간 흐르는 영화의 공간이 충실하다면, 거기에서도 상투성은 일상의 소박한 반복으로 자연스레 묻어서 우리를 거스르지 않는다. 즉 자극적인 양념 하나로 결정적인 맛을 내기보다는 어떤 진국에 넣는냐가 더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이 영화 <타인의 삶>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상투성과 호들갑을 떨며 놀래지 않아도 될 만한 반전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으로 영화의 빛깔이나 무게가 갑자기 바뀌진 않는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길게 다져 온 '타당성' 위에 그것들을 쌓아놓기 때문이다. 

도청과 감시하느라고 애쓴 HGW XX/7는 위즐러를 가리킨다. 영화 초반에 보여 준 그의 견고한 인상과 영화가 흐르면서 관객도 모르게 변화된 그남자의 모습은 놀랍다.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난 것일까? 그러나 재미는 이것이 단 한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어떤 갈래질되는 순간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엘리베이터 안에서 축구공을 손에 든 꼬마와의 만남을 꼽을 수 있다. 꼬마의 순진한 말은 위즐러 요원을 자극하고 직업병을 도지게 만들었다. 즉 뭔가 불미스러운건 체크하는 버릇(그래서 영화 초반, 강의중에 어떤 학생의 의미심장한 질문을 듣고 출석표에서 그 학생을 볼펜으로 체크하는 모습처럼). 그래서 이름을 물은 것이다. 그런데 아이는 못 듣고 다시 묻는다. 그러자 위즐러는 전혀 다른 버전으로 다시 묻는다(그와 동시에 그도 다른 버전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 이름이 뭐지?"   여기에 이 영화의 순발력 있는 센스가 빛을 발하는 곳이 아닐까?  

 ..

이번에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의 선택은 이 영화를 보면,  모처럼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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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엔 가슴에 살살 꽂히는 음악이 나온다(특히 이 영화에서 누군가를 완전히...). 남자주인공이 직접 피아노로 연주도 하는 데, '착한 사람들을 위한 소나타(Die Sonate Vom Guten Menschen)'라는 곡이다.  가브리엘 야레(Gabriel Yared)와 스테판 무카(Stephane Moucha)가 음악을 맡았다(Yared, Moucha-Das Leben der Anderen). 가브리엘 야레(가브리엘 야리드라고도 표기하던데..)의 프로필을 보면, 영화음악과 오랜 연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에 고다르와도 작업을 했으며, 로버트 알트만(위험한 사랑, 1987) 그리고 실험적인 애니를 만드는 르네 랄루의 <간다라>에서도 그의 이름을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베티 블루>, <연인(L'Amant / The Lover)>, <시티 오브 엔젤>, <뉴욕의 가을>, <콜드 마운틴> 등이 있다.

대충 알라딘에서 찾아 본 가브리엘 야레가 참여한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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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3-30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외로 코믹한 장면이 많은 영화더군요. ^^ 어떻게보면 반공영화같기도한 작품인데 구사회주의의 현실이 저런 것이었다면 정말 끔찍했을거라는 생각이 계속들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 영화가 아카데미작품상을 받은 데에는 작품성자체보다는 정치적 고려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TexTan 2007-03-30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장면도 기억나네요. 남자 주인공이 나는 왜 감시를 받지 않았냐고(마치 생각해 보니 자존심 상한다는식으로..), 그랬더니 "너도 감시 도청 다 했어"라는 식으로 말하자, 그 멍한 표정..
 

로드리게스 감독의 끈질긴 설득으로 프랭크 밀러는 공동 감독이자  원작자로  영화 <씬 시티(Sin City, 2005>에 참여한다.  전의 영화들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비현실적인) 질감을 부여받은 배우들은 하나의 인간이라기 보다는 등장인물로서의 '캐릭터'로 강화된다. 그대신 생물로서의 '생리성'은 제거된다.

이번엔 신판 <새벽의 저주> 감독을 맡았던 잭 스나이더와 함께 아주 먼 과거 스파르타의 용맹한 인물들을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영화를 통해 만들어냈다. <씬 시티>가 그래도 어떤 힘의 과잉이 한 사람을 중심으로 전달되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300명(플러스 알파)이라는 집단을 통해 커다란 무더기로 그 과잉을 선보인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서 어떤 '우려'가 나온다. 서구문명의 '씨앗'이었던 [스파르타와 그리스]가  떼거리로 밀려오는 페르시아의 군대와의 이항대립적인 맞섬! 그것이 그냥 심심풀이 영화로만 끝날 얘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온갖 신비한 주술과 서커스적인 괴이함과 공포, 즉 웅장한 볼거리를 먼 시선의 위치(마치 스크린처럼)에서는 제공하지만, 실제로 맞닥뜨리면 스파르타 300명의 군인들에게 터무니 없이 무너지는 페르시아 군대.  이것은 스파르타 군인들이 어려서부터 익혀 온 단련, 규율이라는 '디스플린(discipline)'과 체계적이지 못한, 그러나 그냥 힘만 넘쳐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페르시아 군대라는 대비를 준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대비들로(가령 선과 악) 파급되기 쉬운 성질을 가진다.

이것은 현재로 곧바로 넘어와, '미국과 중동이라는 도식'에서 충분히 살아날 수 있는 것들이다. 어떤 사람이 프랭크 밀러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반대하는 사람이고, 영화에서 그 무자비하게 침략하는 페르시아 군대가 오히려 미국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글을 언뜻 본 기억이 난다. 나는 프랭크 밀러의 사상이 어떠한지는 전혀 모른다. 설령 그 말이 맞더라도(실은 믿기진 않지만) 그 영화를 보고 그런 생각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 영화는 눈으로 보는 영화이지, 머리로 생각하게 하는 영화는 아닐 것이다. 그냥 백인들, 미국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자연스레 스파르타 군인들에게 감정이 이입이 되고, 즉각적으로 영화 밖에서도 그 페르시아의 대체물로 중동의 말 안듣는 못된? 국가들이 쉽게 들어서게 될 것이다.  요새 벌어지는 미국과 중동 문제에 너무도 쉽게 그 감정의 내용들이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이럴 것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영화를 그냥 재미로 볼 것이지, 왜 쓰잘데기 없는 것들을 끄집어내서 의식있는 체하냐고..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을 터이고, 나도 어쩌면 거기에 가끔 속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라고 말할 영화들도 있겠지만, 그 말의 테두리에 담기엔 뭔가 꺼림직한 영화들도 있는 것이다. 만든 사람의 의도와 상관없이도 말이다.

모든 영화들이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라는 쟝르로 들어가 순진한척 눈만 껌뻑일 순 없다.  

그래도 정말 그것을 고수한다면, 우리?도 할 말이 있다.

"감상은 감상일 뿐이다" "비평은 비평일 뿐이다"

서로 큰 목소리로 서로 겹쳐지지 않는 말들만 뱉어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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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가벼운 얘기로 마무리를 해보자.

협곡을 이용해서 정말 정말(강조 두번) 잘 싸우는 스파르타 군대의 놀라운 버티기는 영화 밖에서 볼 때,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다. 떼로 몰려들기, 하늘을 가리는 수 많은 화살 공격, 정예 가면 부대, 거인 등 등...

페르시아 군대가 그럼 이렇게 해보면 되지 않나?

스파르타 군대가 좁은 협곡을 무대로 맞서고 있는데, 일단 숫자로 밀어 붙인다. 그럼 협곡을 뒤로 하고 그 좁은 틈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하는 형국이 된다. 그럼 기름 단지 같은 것을 그 협곡 안으로 던진다. 그리고 바로 불화살을 쏘면 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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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니 핑크 - 할인행사
도리스 되리 감독, 마리아 슈라더 외 출연 / AltoDVD (알토미디어)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이런 독일 영화는 처음이다. 영화에 대한 내 경험이 짧은 탓도 있겠지만, 독일 영화하면 왠지 파스빈더 감독의 아스라한 비애가 슬쩍 떠오른다.  아마 이 영화 파니핑크도 자세한 정보를 안 보고 그냥 넘겼다면, 그냥 괜찮은 유럽 영화쯤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뭔가 흐뭇함이 든다. 거기엔 영화에 대한 만족도도 포함될 것이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면, 이 영화에는 정말 다양한 것들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그것들이 거칠데 도드라지지 않고 마치 한 바구니에 귀여울 정도로 잘 담겨 있는 느낌이다.

먼저 독일(유럽이라고 치면)의 현재, 그래도 지구상에서 이성과 물질의 혜택을 잘 누린 사람들의 겉과 다른  공허한 내면이 엿보인다. 거기다 서른이 넘은 혼자 사는 노처녀라면, 그 휑한 가슴은 더할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 파니핑크는 그런 소외감을 달래고자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마음에 대한 동양적 비전에 의지하기도 하고, 어떤 모임에서 자기의 관을 미리 만들면서 삶에 대한 묵묵한 여유를 얻으려 하기도 한다. 거기다 우연히 현대판 흑인 주술사 청년을 만나는데(처음 등장은 카리스마가 있는데, 알고보니 엉뚱한), 이 친구가 결국 파니핑크에게 소중한 인간경험과 큰 자극이 된다.  

이러한 음울한 사회성을 파니핑크를 통해 부각시키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은 아니다. 여기선 어디까지나 한 사람, 파니핑크가 주인공이고, 그러한 것들은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는 하나의 배경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파격적인 우주선?에 대한 것도 나오지만, 그것이 영화의 흐름을 복잡하게 만들진 않는다. 그냥 하나의 흥미로운 요소이고, 그것이 결국엔 영화에 필요한 그리고 주인공에게도 역시 필요한 무언가를 선사한다.

바로 성장이다. 갑작스런 부재, 사라짐은 큰 허탈감을 줄 수 있지만, 파니핑크는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그리고 이것이 파니핑크가 받아들일 하나의 단계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즉 어떤 갈증이나 결핍을 밖에서 찾아 헤맸다면, 이젠 슬슬 자기 내면-파니 핑크 자신으로 회귀라는 성숙한 사이클을 얻게 된다.  이 영화를 '여성 영화'라고도 하는 거 같은데, 그러한 의도와 목적성에 넣을 만큼, 여성의 문제에만 집착한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다. 어느 남자라도 충분히 즐겁게 공감할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감상이 끝나면, 잔잔한 재미가 먼저 다가오는 영화다. 그러나 그 안에는 삶에 대한 진지함, 그리고 뭔가 개운하게 솟은 성장한 인간의 가슴도 잠시나마 그려진다. 덤벙 덤벙하는 귀여운 여주인공의 모습이 흐뭇한 기억으로 오래 남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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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4-09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전 오늘 그 유명한 영화를 봤네요.
여주인공 정말 귀엽더군요. 장면 하나하나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TexTan 2007-04-10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여배우가 지금쯤 더 나이를 먹었겠군요.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지 궁금해 지네요^^
 
오쇼의 짜라투스트라
오쇼 라즈니쉬 지음, 쁘렘 요잔 엮음 / 나무의꿈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이렇게 두꺼운 책은 정말 오랜만에 만져본다. 1084쪽이라는 엄청난 두께를 자랑한다. 이 책은 종이질이 그래도 좋은 편인데, 만약 좀 더 저렴한 종이를 택해 만들었다면, 그 부피는 더욱 커졌을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이렇게 두껍지만 사전은 아니다. 여기엔 니체의 텍스트로서의 화신(化身) 짜라투스트라(최근엔 차라투스트라로 불리기도 하지만..)의 긴 외침이 담겨 있다.  그리고 오쇼의 반향(反響)이 첨가되는 데, 듣는 사람에 따라 그 맛이 시원할 수도 있고, 또 하나의 편견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먼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원문이 등장하고, 이어서 각 구절에 대한 오쇼의 해석이 이어지는 식이다. 이 책에 어느 정도 <짜라투스트라는..>의 내용이 들어가지만, 전부 다는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 책은 더 두꺼워졌을 것이다(손에는 쥘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책은 <춤추는 신들의 광기>라는 제목을 가지고 예전에  세 권으로 나왔었는데, 이번에 이렇게 하나로 묶여 나온 것이다. 원래 제목을 부제로라도 썼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만큼 '춤추는 신들의 광기'는 니체와 어울리는 빼어난 제목으로 보인다.

오쇼의 강의록을 옮겨 적은 책이니 만큼, 어떤 체계적이고 짜임새 있는 형식은 아니다. 그래서 자연스러움과 기대치 않은 섬뜩한 오쇼의 말들을 불규칙적으로 경험할 수도 있다. 이것이 오쇼 책들이 갖는 장단점이라 할 수 있고, 이러한 스타일의 선호도에 따라 독자층도 갈라질 것이다.

오쇼는 니체의 "신은 죽었다"를 해석하면서, 그 말이 맞지만, 더 정확히는 "신은 산 적 조차 없었다"는 식으로 말을 덧붙인다. 어찌보면, 그 말이 명쾌하게 들릴 순 있지만, 정말 니체가 한 말이 가리키는 거하고 맞는다고 보기도 어려울 듯 싶다. 니체가 정말 전에는 신이 살았는데, 지금은 신이 죽었다는 그런 생물학적이고 존재론적인 발상에서 한말은 아닐 것이다. 신이 어차피 인간들 욕망의 과잉된 투사로서 탄생하고(왠 포이에르바흐?), 그것이 다시 인간에게 어떤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세했다면, 그것조차도 어느 시점에서  인간의 신체나 정신에 대한 포획의 힘이 줄어, 사람들이 거기서 벗어났다는 징후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마치 보이지 않는 포승줄의 죄이는 힘은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그 포승줄을 몸에 이고 다니는 모습은 어떨가) 그러므로 지금도 온갖 종교들-교회니 사찰들이 버젓이 있지만, 그것이 과거와는 다른 내적인 형식을 가지고 새로운 조건에서 외양을 유지하는 것으로 본다면,  니체의 말은 중층적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공자의 '중용'에 대한 것도, 오쇼는 "극단에 치우치지 말고 중간에 머무르라"는 것으로 딱 중간의 위치를 유지하면서 사회에서 안전하게 버티기 하는 인간상의 모습을 끌어내고 있다. 그런데 정말 중용이 그러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이렇게 오쇼는 동서양의 방대한 지식을 왕래하면서, 자기식만의 이해의 틀로 (너무도) 새롭게 해석하는 경향이 어느 정도는 있는 거 같다. 물론 이것도 오쇼가 대중들에게 좀 복잡한 것을 생략하고 전달하는 (알면서도 감수하는) 방식인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말이다. 이렇게 오쇼 해석엔 뭔가 꺼림직함과 맞장구라도 쳐주고 싶은 기발함이 공존하는 듯 하다.  

<짜라투스트라..>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역시 초인일 것이다. '초인(超人)'이 슈퍼맨(Superman)의 뜻이라면, 이미 너무도 낡고 매우 욕망적인 인간의 최고치 수준으로 해석하는 방식인데(그래서 일단 오쇼는 히틀러와 오로빈도의 초인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그냥 한자의 '超人'은 꼭 '위버맨쉬'로 번역하지 않더라도, 그 안에 그런 다의적인 뜻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오쇼도 물론 '슈퍼맨'식 해석을 거부하면서, 뉴맨(Newman)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쓰고 있다.

번역은 오쇼의 제자이면서 그 동안 오쇼의 많은 책들을 우리말로 옮긴 쁘렘 요잔(손민규)이 맡았다. 책 말미에 역자 해제나 후기라도 달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정확히 1084쪽 뒤에 아무것도 없이 책이 끝나니까, 아주 긴 여행의 여운을 어디 몇 자락 종이에 기댈 수 없어 허전하기까지 하다. 

철학적인 니체 해석과는 사뭇 다르지만, 거기서 받을 수 없는 어떤 시원함이나 다른 쪽으로 향하는 새로운 줄기 뻗음 같은 느낌을 이 책에서 (간혹)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니체와 짜라투스트라 그리고 오쇼라는 삼각편대의 고공 비행이 대지의 맛을 충분히 즐기라는 사차후 같은 엔진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거 같지 않은가? 정말 묘한 앙상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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