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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의 짜라투스트라
오쇼 라즈니쉬 지음, 쁘렘 요잔 엮음 / 나무의꿈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이렇게 두꺼운 책은 정말 오랜만에 만져본다. 1084쪽이라는 엄청난 두께를 자랑한다. 이 책은 종이질이 그래도 좋은 편인데, 만약 좀 더 저렴한 종이를 택해 만들었다면, 그 부피는 더욱 커졌을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이렇게 두껍지만 사전은 아니다. 여기엔 니체의 텍스트로서의 화신(化身) 짜라투스트라(최근엔 차라투스트라로 불리기도 하지만..)의 긴 외침이 담겨 있다. 그리고 오쇼의 반향(反響)이 첨가되는 데, 듣는 사람에 따라 그 맛이 시원할 수도 있고, 또 하나의 편견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먼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원문이 등장하고, 이어서 각 구절에 대한 오쇼의 해석이 이어지는 식이다. 이 책에 어느 정도 <짜라투스트라는..>의 내용이 들어가지만, 전부 다는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 책은 더 두꺼워졌을 것이다(손에는 쥘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책은 <춤추는 신들의 광기>라는 제목을 가지고 예전에 세 권으로 나왔었는데, 이번에 이렇게 하나로 묶여 나온 것이다. 원래 제목을 부제로라도 썼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만큼 '춤추는 신들의 광기'는 니체와 어울리는 빼어난 제목으로 보인다.
오쇼의 강의록을 옮겨 적은 책이니 만큼, 어떤 체계적이고 짜임새 있는 형식은 아니다. 그래서 자연스러움과 기대치 않은 섬뜩한 오쇼의 말들을 불규칙적으로 경험할 수도 있다. 이것이 오쇼 책들이 갖는 장단점이라 할 수 있고, 이러한 스타일의 선호도에 따라 독자층도 갈라질 것이다.
오쇼는 니체의 "신은 죽었다"를 해석하면서, 그 말이 맞지만, 더 정확히는 "신은 산 적 조차 없었다"는 식으로 말을 덧붙인다. 어찌보면, 그 말이 명쾌하게 들릴 순 있지만, 정말 니체가 한 말이 가리키는 거하고 맞는다고 보기도 어려울 듯 싶다. 니체가 정말 전에는 신이 살았는데, 지금은 신이 죽었다는 그런 생물학적이고 존재론적인 발상에서 한말은 아닐 것이다. 신이 어차피 인간들 욕망의 과잉된 투사로서 탄생하고(왠 포이에르바흐?), 그것이 다시 인간에게 어떤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세했다면, 그것조차도 어느 시점에서 인간의 신체나 정신에 대한 포획의 힘이 줄어, 사람들이 거기서 벗어났다는 징후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마치 보이지 않는 포승줄의 죄이는 힘은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그 포승줄을 몸에 이고 다니는 모습은 어떨가) 그러므로 지금도 온갖 종교들-교회니 사찰들이 버젓이 있지만, 그것이 과거와는 다른 내적인 형식을 가지고 새로운 조건에서 외양을 유지하는 것으로 본다면, 니체의 말은 중층적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공자의 '중용'에 대한 것도, 오쇼는 "극단에 치우치지 말고 중간에 머무르라"는 것으로 딱 중간의 위치를 유지하면서 사회에서 안전하게 버티기 하는 인간상의 모습을 끌어내고 있다. 그런데 정말 중용이 그러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이렇게 오쇼는 동서양의 방대한 지식을 왕래하면서, 자기식만의 이해의 틀로 (너무도) 새롭게 해석하는 경향이 어느 정도는 있는 거 같다. 물론 이것도 오쇼가 대중들에게 좀 복잡한 것을 생략하고 전달하는 (알면서도 감수하는) 방식인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말이다. 이렇게 오쇼 해석엔 뭔가 꺼림직함과 맞장구라도 쳐주고 싶은 기발함이 공존하는 듯 하다.
<짜라투스트라..>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역시 초인일 것이다. '초인(超人)'이 슈퍼맨(Superman)의 뜻이라면, 이미 너무도 낡고 매우 욕망적인 인간의 최고치 수준으로 해석하는 방식인데(그래서 일단 오쇼는 히틀러와 오로빈도의 초인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그냥 한자의 '超人'은 꼭 '위버맨쉬'로 번역하지 않더라도, 그 안에 그런 다의적인 뜻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오쇼도 물론 '슈퍼맨'식 해석을 거부하면서, 뉴맨(Newman)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쓰고 있다.
번역은 오쇼의 제자이면서 그 동안 오쇼의 많은 책들을 우리말로 옮긴 쁘렘 요잔(손민규)이 맡았다. 책 말미에 역자 해제나 후기라도 달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정확히 1084쪽 뒤에 아무것도 없이 책이 끝나니까, 아주 긴 여행의 여운을 어디 몇 자락 종이에 기댈 수 없어 허전하기까지 하다.
철학적인 니체 해석과는 사뭇 다르지만, 거기서 받을 수 없는 어떤 시원함이나 다른 쪽으로 향하는 새로운 줄기 뻗음 같은 느낌을 이 책에서 (간혹)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니체와 짜라투스트라 그리고 오쇼라는 삼각편대의 고공 비행이 대지의 맛을 충분히 즐기라는 사차후 같은 엔진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거 같지 않은가? 정말 묘한 앙상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