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경우, 독자는 '나'에 감정이입하기 쉽다. 특히 작중 화자 '나'가 독자와 동성일 경우, 비슷한 연배일 경우 그런 경향은 더욱 강해진다. 그렇다면 나는 『The Housemaid』의 housemaid, 오늘의 주인공 밀리에게 동일시하는 게 자연스럽다. 밀리는 비밀을 숨긴 채 나타난 사람이고,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이고, 새로운 환경에 내던져진 사람이며, 이상한 구조의 다락방에서 오늘 밤 잠들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나는 밀리에게 동일시하지 못했다.

"Who has the time?"

I bite back any kind of judgemental response. Nina Winchester doesn't work, she only has one child who's in school all day, and she's hiring somebody to do all her cleaning for her. (5p)

직업이 없는 여자가 집안일을 소홀히 한다는 비난조의 말투에 턱, 걸렸다. 집안일에 도움을 받기 위해 밀리를 고용했는데, 그러니깐 그런 필요가 밀리에게는 '고용 창출', 의식주를 해결해 주는 중요한 일자리가 되었는데, 밀리는 이 일을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데, 그랬는데도 밀리는 자신의 고용을 결정한 니나를 무시한다. 니나를 미워한다. 그런 니나와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앤드류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직업이 없고 돌볼 아이가 한 명인데도, 집안일에 소홀히 하는 어떤 여자. 왜, 앤드류는 니나 같은 사람과 결혼을...









직업도 있으면서 집안일도 소홀히 하지 않는 여성도 있을 테다. 다만, 그런 여성들은 혹실드가 지적했던 second shift, '2교대제'의 녹록지 않은 현실을 예상해야 한다.

'과도기적 결혼(transitional marriage)' 유형은 부부간 동상이몽의 사례로, 부인은 일터와 가정에서 자신의 역할이 동등하게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남편은 여전히 "일 우선 이데올로기를 고수한다. 부인은 가족생활 밖의 경제 영역으로 이동해 갔지만, 남편은 아직 가족영역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혹실드는 과도기적 결혼 유형이 가장 빈번히 관찰되는 현실이야말로 "정체된 혁명"의 증거라 주장하고 있다. (『앨리 러셀 혹실드』, 15쪽)

그렇다면, 직업도 없으면서 집안일을 소홀히 하는 여자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가지 방법은 결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직장일을 병행하는 것이다. 이 경우 '직업도 없으면서'에 해당되지 않는다. 또 다른 방법은 직업은 없지만, 전업주부로서 집안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다. 완벽한 '가정의 천사'로 사는 것이다.











『경제학이 필요한 순간』은 의사이며 경제학자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김현철 씨의 저작이다. 의사라서 관찰할 수 있는 지점과 경제학자만의 분석의 조합이 절묘할 뿐만 아니라, 선정한 의제들도 관심을 끌만하면서도 중요한 주제들이다.

<일과 가정의 양립을 꿈꾸다>라는 챕터는 외국인 가사도우미 제도에 대한 부분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시 오세훈 시장의 제안으로 시작된 사업이다. 홍콩과 싱가포르, 타이완에서 외국인 가사도우미 제도가 긍정적으로 운용된 사례가 소개되는데, 가사 노동의 상당 부분을 이미 외주화하고 있는 사람이지만, 외국인 가사도우미에게 가사, 그중에서도 육아를 전담시킨다는 것이 조금 불편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에 대해 읽고 있노라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이 제도가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을까 싶다.

아이의 엄마, 돌보는 일을 전적으로 맡을 것을 강요받는 기혼 여성이 박사 과정을 밟고 있을 때, 학업을 계속하고 논문을 써야 할 때, 외국인 가사도우미 제도는 완벽한 해결책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특별히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이 제도를 활용할 수 있을 때, 돕는 손길이 간절한 고용인 입장에서는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임금 착취'로 고통당하는 '제3세계 여성'으로 보기보다는 도움을 주는 고마운 사람이며, 금전적으로는 내게 도움을 받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여하튼, 외국인 가사도우미들은 그 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요는 직장을 그만두고 제 아이를 직접 키우고 싶어 하는 여성과 남성이 '아이를 직접 키울 권리'를 마음껏 누리게 하자는 것이다. 자아실현과 커리어, 그리고 소득의 이유로 직장 생활을 계속하길 원하는 여성과 남성이, 워킹맘 혹은 워킹대디로 일하는데 불편함이 없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사회 전체가 아이의 보육과 교육에 투자하고, 아이의 성장과 건강한 삶을 위해 아이와 부모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고민하자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시행되고 있지만, 노르웨이를 비롯한 북유럽 모델처럼 아이를 양육하는 가정에 대한 현금 지원을 대폭 상향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고, 양쪽 부모가 육아 휴직을 신청, 이용할 뿐만 아니라, 그 기간의 임금을 보전해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은영 씨가 텔레비전에 나오기 훨씬 전, 혹은 이렇게 유명해지기 전에 읽었던 그의 책이 있다.

불안을 다룰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솔직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일하는 엄마라면 '나는 사회적 성취와 경제적인 것이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아이를 일보다 덜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스스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전업주부인 엄마도 '나는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이구나'라고 인정하고, 이렇게 살면 자신의 삶이 도태될 거라는 오해는 버려야 한다. 인정하고 오해하지 않아야 불안이 해결된다. (『불안한 엄마, 무관심한 아빠』, 236쪽)

오랜 시간 전업주부였던 나는 아이들 때문에 내 삶이 도태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새로운 직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 보니, 도태된 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사회 구성원 중에 한 명으로서 사회 속에서 내가 아무런 자리를 갖고 있는 못하다는 게, 내가 아이들에게 그런 모습으로 보인다는 게 좀 아쉽기는 했다. (아, 그게 바로 삶이 도태되었을 때의 모습인가?) 오랜 시간, 나의 이런 상황이 자발적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내 체력을 고려했을 때, 그 '어쩔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제 아이들은 내 품이 필요 없는 나이가 되었고, 부모로부터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사춘기를 거쳐, 이제 성인이 되었다. 요즘이라면, 아이들에게 더 필요한 건 엄마가 아니라, 용돈일 수도 있겠다. 이렇게 한 시절이 지나간 것에 대해 기쁘게, 그리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과거의 결정을 부정하는 건 힘든 일이다. 공들였던 시간과 에너지를 부정하는 것 역시 합리적이지 않다. 내 생각은, 내 마음은 자기합리화와 변명으로 가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최선이라 생각했던 나의 선택이 내게 선사했던 기쁨과 웃음이 거짓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암담함과 두려움 역시 여전히 내 몫이라는 걸 안다. 세상이 두려운 중년 여성, 잘하는 게 하나 없는 경단녀가 되었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만족한다.

하우스메이드 시리즈를 아주 재미있게 읽고 있다. 유려한 문장과 치밀한 구성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어쩔지 모르겠지만, 좀처럼 스릴러를 읽지 못하는 독자에게는 적당히 무섭고, 꽤나 재미있는 소설이어서, 다른 책들도 연달아 읽어야겠다 생각이 든다. 핫가이가 계속 나온다. 아플 때 아니면 사시사철 '아이스!'를 외치는 철없는 나도 핫가이가 좋다. 가이라면 역시 핫가이. 게다가 스윗한 핫가이다.

파란 6월이 가고 있다.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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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6-24 1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하우스 메이드 웨딩이라뇨. 제가 3편까지는 알았지만 웨딩까지 나온 줄은 몰랐네요. 과연 ..
저 코워커 번역서로 사뒀습니다. 아직 읽진 않았지만요.

저는 소설을 읽을 때 꼭 주인공이 아니어도 어떤 인물들에게 대입하게 되기는 하거든요. 물론 주인공인 경우가 많지만, 대체적으로 아픈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 더 이입하는 편이긴 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데 하우스메이드를 재미있게 읽었으면서도 저 역시 밀리에게 이입하지는 못하겠다는거에요. 밀리라면, 제 경우에 좀 떨어져서 들여다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편인것 같아요. 거리두기가 되는 인물이랄까요. 가사노동과 고용자에 빗대어 단발머리 님은 말씀하셨지만 제 경우엔, 엔조를 유혹하는 지점에서 좀 튕겨져 나와버려요. 외국의 문화와 차이가 있기도 하겠지만 저라는 사람이 꽉 막힌 구석도 있어서, 이 유부남 원하는데 안되니까 이 총각 꼬셔보자, 하는 지점에서 나랑은 너무 다른 사람.. 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 단발머리 님은 지적인 글을 쓰셨는데 저는 너무 원초적 댓글을 달아버렸네요.

단발머리 2025-06-24 14:50   좋아요 0 | URL
있더라구요, 웨딩이 ㅋㅋㅋㅋㅋ 그 책은 보너스 챕터 분위기에요. 이북으로 76쪽이구요. 그냥 작가가 서비스 차원에서 쓴 거 같아요.

아픈 사람에게 이입한다는 다락방님 댓글 보니... 그것도 소설을 읽는 좋은 방법인것 같아요. 아픈 사람, 고통 당하는 사람, 궁지에 몰린 사람이 보통 주인공이잖아요. 밀리가 엔조를 유혹하는 지점에서 튕겨져 나왔다는 거 완전 공감하고요. 저는, 밀리가 니나랑 앤드류 사이에서 눈치 없는 말을 할 때, 쟤 왜 저러냐~~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거든요. 상황으로는 저도 니나 미워해야 하는데 말이지요. 밀리에게 이입이 안 되어서요.

원초적 댓글을 저는 좋아합니다. 뜨거운 댓글도 환영하고요. 아, 핫가이 댓글도 좋아합니다.
플러팅에 대해서 글 하나 쓰려고 하는데..... 아무튼 짧게라도 써보려고 해요. 기다리지 마시고, 기대하지 마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5-06-24 10:58   좋아요 1 | URL
기다리고 기대합니다. 얼른요, 얼른!!

책읽는나무 2025-06-24 23: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번역서를 신나게 읽은 자!ㅋㅋㅋ
저는 어느 쪽에 이입했을까? 생각해보니…밀리가 엔드류에게 마음이 갔을 때부터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었고..엔조의 가슴에 손을 얹었을 때도 뜨악! ㅋㅋㅋ
니나가 악다구니를 퍼붓고 집 안을 엉망으로 만들고 사람을 미쳐버리게 상황을 조작하는 와중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껴 밀리에게 한 번씩 고맙다고 인사를 몇 번 했었거든요.
그때 니나에게 뭔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밀리에게 완전히 이입되지 않았던 듯 해요.
신나게 읽을 땐 좋았었는데 다 읽고 나선 하우스 메이드가 아닌 다른 직업과 설정을 했었음 어땠을까? 이성적 유혹을 이용한 것, 그리고 결국 밀리는 넘어가고…그런게 좀 안타까웠어요.
아, 안타까웠다는 건 이미 밀리에게 감정 이입을 한 걸까요?ㅋㅋㅋ

저는 전업주부로서 애들은 많이 커가고 있는 요즘따라 경제 활동을 하지 못하는 것에 조금 고민이 생기곤 하거든요. 하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인데 이것도 좀 이기적인 것인가, 싶기도 하구요. 그런데 단발 님이 인용해주신 문구가 큰 위로가 되네요. 인정하고 오해하지 않아야 불안이 해결된다. 세뇌해야 할 문장이네요.ㅋㅋㅋ

단발머리 2025-06-28 12:14   좋아요 1 | URL
저도 그 두 번의 경우 다 뜨악~~ 했어요. 책나무님이 니나에게 뭔가 있는 것 같다고 느끼셨다는 그 지점이 참 놀라워요. 뒤쪽 내용 모르는데, 그냥 그렇게 느끼신 거잖아요. 저는ㅋㅋㅋㅋㅋㅋ 니나에게 다른 이유가 있다고 느꼈다기 보다는 너무 억울하더라구요. 그니깐 집안일도 잘 못하고, 잘 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여자의 입장에서, 바로 제 입장ㅋㅋㅋ 억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근데 나중에 짜잔~~~!!

위의 글에도 썼지만, 저는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업맘이 되었다, 이런 생각이 강했거든요. 원망하지는 않았는데, 이게 나의 최선이 아니었다, 뭐 그런 생각이요. 오박사님 저 책 읽고 그냥 저의 그런 과거와 선택을 받아주기로 했어요. 그 때, 나는 내 아이를 내가 키웠으면 좋겠다~~ 하고 결정했던 거요. 그것 역시 제 선택이었음을 받아들였어요. 그러고 나니 마음이 쪼금 편안해지더라구요. 책나무님께도 그 책이 위로가 되었다고 하니, 제가 더 좋네요. 헤헤~~ 즐거운 주말 되세요, 서울은 덥습니다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