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매트 헤이그 지음, 노진선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4월
평점 :
엘름 부인이 ‘하지만 널 무너뜨리는 건 대부분 룩이야’라고 말했을 때, 놀랐다. 체스판에서 내가 제일 즐겨 쓰는 말이 룩이기 때문인데, 룩과 비숍 두 개 기물의 움직임이 가능한 퀸보다 나는 룩이 훨씬 더 좋다. 전진, 후진, 왼쪽, 오른쪽. 직진으로 이동할 수 있는 룩은 세상을 이해하는 일반적인 방식과도 비슷하다. 전진과 후진, 왼쪽과 오른쪽. 하나의 우주, 일직선의 세계.
이 책은 이런 일직선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다른 선택으로 만들어진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노라 시드의 모습을 보여준다. 죽기로 결심한 노라는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곳, 삶과 죽음 사이의 특별한 공간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에서 어린 시절 사서 선생님 엘름 부인을 만나게 된다. 더 이상 삶에 대한 아무런 미련도 기대도 없는 노라에게 이번 생은 후회로 뒤덮여 있다. 이렇게 했더라면. 저렇게 했더라면. 그 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그랬더라면 현재의 고통이 자신에게 닿지 않았을 거라 체념하고 후회하는 노라에게 엘름 부인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책들을 건네고, 노라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선택들로 이루어진 다른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지금의 나를 만들었던 선택들 중에 근원적인 요건들은 선택 밖의 것들이다. 부모, 국적, 인종, 그리고 성별. 나는 이것들 중 어느 것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지만, 이것들은 지금 나의 세계를 이루는데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내가 했던 선택이 있다. 대학과 직장, 배우자와 거주지. 이런 선택으로 지금의 내 세계가 만들어졌고, 그런 선택의 합이 지금의 나다.
그 대학 어떤 거 같아?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대학에 가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 새로운 생활이 두렵기도 하고, 기숙사 생활도 걱정되었지만, 스무 살 새롭게 시작하기에 괜찮은 곳이라 생각했다. 물어볼 사람이 없어 교회 선배에게 물어보았다. 그 대학 어때? 괜찮지, 거기 괜찮지 뭐. 그래도 나는 니가 안 갔음 좋겠다. 만약 내가 그 대학에 갔다면 내 삶은 지금과 어떻게 다를까. 한 달 다니고 그만두었던 첫번째 직장을 계속 다녔다면, 그랬다면 지금 내 삶은 어떤 모습일까. 큰아이를 낳은 후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 회사에 다녔다면, 워킹맘으로 살고 있다면, 그 우주 속의 나는 지금의 나와 어떻게 다를까. 결혼해서 친정과 시댁에서 모두 가까운 이 곳이 아니라,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면. 만약 그랬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그때 그랬으면 어땠을까의 가정이 노라에게 이루어졌다. 노라는 다른 삶을 산다. 아니, 전혀 새로운 삶 속으로 ‘던져진다’. 영국 시골 펍의 주인이 되고, 친구를 잃고 절망한 채 호주의 해변에서 마약에 찌든 삶을 살고, 수영선수가 되어 올림픽에 출전해 메달리스트가 되고, 북극권 한계선의 빙하학자가 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밴드의 리드싱어가 되고, 다정한 남자친구와 함께 유기견을 돌본다. 남편과 함께 캘리포니아에서 작은 포도밭을 가꾸고, 소설을 쓰고, 피아니스트가 된다. 여행 블로거가 되고, 자려고 하지 않는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가 된다. 그리고 노라는 이 곳으로 오기 전, 자신에게 마지막 친절을 베풀어주었던 이웃 애쉬와 함께 하는 삶 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행복하다고 느끼던 그곳에서조차 노라는 그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깨닫고, 결국은 현재의 삶으로 다시 ‘살아난다’.
우리의 우주와 나란히 존재하는 또 다른 우주에 대한 생각,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 다른 선택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세계. 다른 내가 존재하는 다른 우주. 그런 상상, 새로운 삶에 대한 가능성이 이 책을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다. 다만, 의사 남편과 예쁜 딸아이, 멋진 집과 철학 교수라는 직업적 성공의 총합이 행복한 삶의 전형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세상을 바꾸고자 할 때 가장 쉽게 바꿀 수 있는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는 건 분명하지만, 관점의 변화만을 말하는 것 역시 세상에 대한 너무 순진한 이해 방식이 아닌가 묻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라의 선택으로 새로운 삶이 열릴 때마다 흥미로웠다. 메달리스트가 되기 위한 고된 새벽 훈련이나 피눈물 나는 인고의 시간 없이 얻게 된 세계 최고 가수로의 손쉬운 안착이 좀 아쉽기는 했지만, 그런 상상마저도 마음껏 꿈꿀 수 있어서 좋았다. 굶주린 북극곰에 맞서 연신 프라이팬을 두드릴 때,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위해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에 들어설 때, 나도 함께했다. 안식년을 맞은 철학교수가 되어 깔끔한 서가에 꽂힌 플라톤의 『국가』,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줄리아 크리스테바와 주디스 버틀러,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의 책을 쓰다듬을 때, 나도 그 옆에 있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의 진학을 소심하게 말리던 사람은 내 아이와 스스럼없이 전화하는 사이가 됐다. 아빠, 언제 와요? 나의 선택은 어떤 식으로든 내 삶을 만들어갔다. 이런 방식 혹은 저런 방식으로. 내가 선택한 지금의 우주와 선택하지 않은 또 다른 우주의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