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讀

전체 118권(종이책 50권, 전자책 68권)
작년보다 42권 더 읽었으니 成功!?

에고 만화책이 많다 ㅠㅠ

送舊迎新! 謹賀新年!
甲辰年 靑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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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백의 맏딸인 유화가 두 여동생과 함께 놀고 있는데, 천제의 아들(天王子, 곧 천자이므로 왕)이라고 자칭하는 해모수란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는 유화를 압록강 가에 있는 어떤 집으로 유인하여 사욕을 채우고 떠나버린다. 그 후 유화는 임신을 하였고, 이 때문에 해모수와 관계한 사실이 탄로난다. 이에 유화의 부모는 그녀가 부모의 허락도 없이 남자와 관계를 가진 것을 질책하며 그녀를 우발수에 귀양 보낸다.

유화를 임신케 한 해모수는 이 무렵 이미 늙은 몸이었다. 그에게는 해부루라는 아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금와라는 손자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의 손자인 금와 역시 장성하여 왕위를 물려받은 상태였다. 따라서 해모수가 유화를 취한 일은 유화가 북부여 왕 해모수의 눈에 들어 수청을 강요당했을 것이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유화가 금와의 할머니뻘 된다는 사실은 동명성왕 14년인 서기전 24년에 유화가 죽자, 금와가 태후의 예에 준하여 그녀의 장례식을 치르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유화의 이 같은 당부를 받아들인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 등 세 친구와 함께 졸본 땅으로 건너간다(‘『삼국사기』에 기록된 동명성왕의 출생과 성장 이야기’ 참조).

주몽이 대소의 위협을 피해 망명한 졸본부여는 일명 ‘구려국(句麗國)’이라고 하는 곳이었다. 구려국은 흔히 ‘고리’, ‘구리’ 등의 이름으로도 불렸으며, 부여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구려는 부여, 한 등과 마찬가지로 고(古)조선 말기에 형성된 국가로 볼 수 있다.

대소의 군사들을 따돌린 주몽은 모둔곡이라는 계곡에서 세 명의 동지를 만난다. 모둔곡에서 주몽이 만난 세 명의 동지는 재사, 무골, 묵거 등이었다. 재사는 삼베옷을 입고 있었고, 무골은 장삼을 입고 있었으며, 묵거는 수초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은 자신의 신분을 밝힌 후 재사에게는 극씨, 무골에게는 종실씨, 묵거에게는 소실씨 등의 성을 내린다.

3. 동명성왕의 영토확장 전쟁과 고구려의 성장

(서기전 58년~서기전 19년, 재위기간:서기전 37년~서기전 19년, 18년)

고주몽이 왕위에 오르면서 구려라는 국호를 고구려로 개칭하고 국가의 위상을 일신하기 위해 대대적인 영토확장 정책을 실시한다.

송양이 항복하자 주몽은 비류국을 ‘옛 땅을 회복했다’는 뜻의 고구려말인 ‘다물’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 곳 왕으로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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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종의 실리책과 고려의 안정

(1018~1046년, 재위기간:1034년 9월~1046년 5월, 11년 8개월)

정종(靖宗)시대로 접어들면서 고려 사회는 거란 침입으로 야기된 혼란을 극복하고 평화기를 정착시킨다. 국교를 단절하고 있던 거란과 다시 외교관계를 맺고 사회 전반에 팽배해진 위기의식을 불식시키는 한편, 사회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일련의 안정책을 단행하게 되는 것이다.

정종은 현종의 차남이자 원성왕후 김씨 소생으로 1018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형(亨), 자는 신조(申照)이다. 5세 때 내사령과 평양군으로 책봉되었고, 1034년 9월 19세의 어린 나이로 임종에 직면한 친형 덕종의 선위를 받아 고려 제10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17세였다.

1. 성군 문종과 고려의 태평성대

(1019~1083년, 재위기간:1046년 5월~1083년 7월, 37년 2개월)


정종시대에 마련된 안정을 기반으로 문종(文宗)은 정치, 사회, 문화, 외교, 학문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획기적인 발전을 일궈낸다. 37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지속된 이러한 발전은 이른바 ‘고려의 황금기’를 열게 되고, 이에 따라 고려 문화와 대외적 위상은 한층 격상된다.

문종은 현종의 셋째 아들이자 원혜태후 김씨 소생으로 1019년(현종 10년) 12월 계미일에 출생하였으며 이름은 휘(徽), 자는 촉유(燭幽)이다. 1022년(현종 13년)에 낙랑군에 책봉되었고, 1037년(정종 3년)에 내사령에 올랐다가 1046년 5월 정유일 정종의 선위를 받아 고려 제11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혈기 왕성한 28세였다.

1. 순종의 병상 3개월 치세

(1047~1083년, 재위기간:1083년, 7월~10월, 3개월)

순종(順宗)은 문종의 장남이자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 1047년 12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훈(勳), 자는 의공(義恭)이다. 8세 때인 1053년 2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1083년 7월 문종이 죽자 37세의 나이로 고려 제12대 왕에 올랐다.

1. 선종의 중도정치와 고려 문화의 융성

(1049~1094년, 재위기간:1083년 10월~1094년 5월, 10년 7개월)

순종이 즉위 3개월 만에 죽자 동복아우 선종이 왕위에 올라 문종의 정치 형태를 이어간다.

선종(宣宗)은 문종의 둘째 아들이자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 1049년 9월 경자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운(運), 자는 계천(繼天)이다. 1056년 3월 국원후에 책봉된 이래 여러 관직을 거쳐 상서령으로 있다가 1083년 7월 순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태사 겸 중서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 순종이 재위 3개월 만에 죽자 고려 제13대 왕에 올랐다.

그는 시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감성이 풍부하여 많은 시를 남겼다. 하지만 전하는 것은 거의 없고, 다만 거란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시가 남아 있다.

 

찬이슬 내려 바람은 거세지만

가을 하늘 하도 맑아

피향전 깊은 밤에도 노래소리 들리는구나

분분한 인생은 한낱 꿈과 같으니

영화를 탐한들 무슨 소용 있으리

금잔에 술이나 부어 마음껏 즐기세나

1. 나이 어린 헌종의 즉위와 왕위를 노리는 사람들

(1084~1097년, 재위기간:1094년 5월~1095년 10월, 1년 5개월)

선종은 임종이 가까워지자 자신의 11세 된 어린 아들 욱에게 왕위를 넘긴다. 이렇게 되자 왕권은 자연히 사숙태후 이씨에게로 넘어가 섭정이 시작된다. 하지만 태후의 섭정은 오래가지 못한다.

헌종(獻宗)은 선종의 장남이자 제2비 사숙왕후 소생으로 1084년 6월 을미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욱(昱)이다. 1094년 5월 선종이 서거하자 그 유언에 따라 중광전에서 11세의 어린 나이로 고려 제14대 왕에 올랐다.

1. 어린 조카를 밀어내고 즉위한 숙종의 10년 통치

(1054~1105년, 재위기간:1095년 10월~1105년 10월, 10년)

나이 어린 헌종이 밀려나고 숙종(肅宗)이 즉위함으로써 고려 조정은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휘말리지만 점차 안정을 되찾는다. 그러나 여진족의 성장으로 변방이 불안해짐에 따라 외교관계에 변화가 생기고, 그 때문에 군사제도의 개편이 단행되는 등 고려 사회는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숙종은 문종의 셋째 아들이자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 순종과 선종의 동복아우이다. 1054년 7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희(熙)였으나, 거란의 9대 왕 천조제와 이름의 발음이 같다 하여 천조제 즉위년인 1101년 3월에 옹()으로 개명하였으며 자는 천상(天常)이다.

1. 예종의 영토확장 노력과 여진의 성장

(1079~1122년, 재위기간:1105년 10월~1122년 4월, 16년 6개월)

숙종시대부터 급속도로 성장한 여진이 예종시대에 이르러 더욱 강대해지면서 중국대륙은 전운에 휩싸인다. 이러한 여파는 고려의 변방을 불안하게 만들고, 예종은 성장하는 여진의 남하를 막는 동시에 거란에게 잃었던 압록강변을 되찾는 작업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 때문에 예종 초기는 여진과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지속되지만 압록강변을 회복한 다음부터는 전쟁을 종결하고 안정을 되찾음으로써 여러 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다.

예종은 숙종과 명의왕후 유씨의 맏아들로서 1079년(문종 33년) 정월 정축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우(), 자는 세민(世民)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학에 밝고 시를 좋아해 학문이 깊었으며, 침착하고 낭만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1094년에 검교사공 주국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벼슬을 받았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태위에 올랐다가 아버지 숙종이 왕위에 오른 지 5년 만인 1100년에 왕태자에 책봉되었다.

1107년 윤 10월 고려 조정은 여진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국경 경비군관의 보고에 따라 선제 공격을 결정하고 17만 대군으로 여진정벌을 단행한다. 이를 위해 윤관을 상원수, 오연총을 부원수에 임명하고 예종은 천문관의 건의에 따라 서경으로 떠난다. 왕이 몸소 서경에 가서 변방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겠다는 의도였다.

17만을 이끌고 간 윤관은 그해 12월 여진과 싸워 웅주, 영주, 복주, 길주 등을 장악하고 그곳에 성을 쌓았으며, 이듬해 초에 함주와 공험진에 성을 쌓고, 또다시 3월에 의주, 통태진, 평융진 등에도 세 성을 쌓아 백성들을 이주시킴으로써 고려는 동북지역에 9성을 얻게 되었다.

3. 윤관의 여진정벌과 동북 9성

동북 9성은 1107년 윤관(尹灌)의 건의에 따라 조직된 별무반이 고려 동북쪽의 변방 바깥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여진족들을 축출하고, 그 지역에 쌓은 9개의 성을 일컫는다. 이 9성은 흔히 함주, 영주, 웅주, 길주, 복주, 공험진, 진양진, 통태진, 숭녕진을 가리키는데 그 위치와 지역 명칭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기록에 따라서는 열거한 9성 중 숭녕진과 진양진 대신 의주와 평융진을 포함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들의 절대 위치는 밝혀져 있지 않다.

여진의 추장들을 거의 섬멸시킨 윤관은 출동명령을 내렸다. 윤관 자신이 군사 5만 3천을 거느리고 정주 대화문을 나섰으며, 중군병마사 김한충이 3만 6천7백을 이끌고 안륙수로 나아가고, 좌군병마사 문관이 3만 4천을 이끌고 정주 홍화문으로 향했다. 우군병마사 김덕진은 4만 4천을 이끌고 선덕진의 안해, 거방 두 초소의 중간 지점으로 나아갔으며, 선병별감 양유송과 원흥, 도부서사 정숭용과 진명, 도부서부사 견응도 등은 해군 2천6백을 인솔하고 도린포로 떠났다.

1. 인종의 우유부단한 정치와 고려왕조의 위기

(1109~1146년, 재위기간:1122년 4월~1146년 2월, 23년 10개월)

예종이 죽고 14세의 어린 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고려 조정은 권력암투의 아수라장으로 전락한다. 이 때문에 인종은 장인이자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에게 왕위를 빼앗길 뻔하는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고, 묘청이 이끄는 서경 세력과 김부식이 중심이 된 개경 세력 사이에 끼어 수동적인 정치로 일관한다.

인종은 예종의 맏아들이자 순덕왕후 이씨 소생으로 1109년 10월 기해일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구(構), 이름은 해(楷), 자는 인표(仁表)이다. 그는 1115년 2월 7세의 나이로 왕태자에 책봉되었으며 1122년 4월 예종이 죽자 14세의 어린 나이로 고려 제17대 왕에 올랐다.

서경천도론을 처음 내세운 사람은 서경의 승려 묘청이었다. 그는 일관 백수한을 제자로 삼고 이른바 음양비술이라고 일컫는 풍수설을 바탕으로 서경 세력들을 규합하고 있었다. 그 결과 정지상을 비롯하여 내시낭중 김안,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임경청 등이 묘청의 풍수설에 매혹되었다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이 묘청의 난을 낭불양가(郎佛兩家)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고,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한 바 있다. 그는 묘청의 난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여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묘청을 위시한 서경 세력의 주장에도 문제는 없지 않았다. 대금정벌론을 내세워 잃었던 민족의 위상을 되찾으려는 노력은 높게 평가될 수 있으나 당시 국제정세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또 서경 천도의 당위성을 지나치게 풍수사상에만 의존한 것도 문제였다.

『삼국사기』는 이들 편찬자들의 독자적인 저술이 아니라 『고기』, 『삼한고기』, 『신라고사』, 『구삼국사』, 김대문의 『고승전』과 『화랑세기』, 『계림잡전』, 최치원의 『제왕연대력』 등의 국내 문헌과 『삼국지』, 『후한서』, 『진서』, 『위서』, 『송서』, 『남북사』, 『신당서』, 『구당서』, 『자치통감』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기술되었다.

1. 향락주의자 의종의 환관정치와 정중부의 난

(1127~1173년, 재위기간:1146년 2월~1170년 9월, 24년 7개월)

묘청의 난 이후 개경의 문신귀족들이 정권을 장악한 가운데 즉위한 의종은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친위 세력 형성에 주력한다. 이 때문에 환관(宦官)과 내시(內侍)들의 힘이 막강해져 그들과 언간들 사이에 치열한 힘겨루기가 전개되고, 그 틈바구니에서 멸시당하던 무신들이 반란의 기회를 엿보게 된다.

의종(毅宗)은 인종의 맏아들이자 제3비 공예왕후 임씨 소생으로 1127년 4월 경오일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철(徹), 이름은 현(晛), 자는 일승(日升)이다. 1143년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1146년 2월 정묘일에 인종이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대관전에서 고려 제18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20세였다.

1. 허수아비 임금 명종과 무신들의 정권다툼

(1131~1202, 재위기간:1170년 9월~1197년 9월, 27년)

정중부의 반란으로 명종(明宗)이 즉위하면서 고려는 무신정권 시대로 접어든다. 왕은 존재하나 힘이 없고 모든 권력은 일부 무신들이 장악하여 치열한 정권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곳곳에서 반란사건이 잇따른다. 이로 인해 국가기강은 무너지고 민심은 흉흉해져 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른다.

명종은 인종의 셋째 아들이자 공예왕후 임씨 소생으로 1131년 10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흔(昕), 이름은 호(晧), 자는 지단(之旦)이다. 1148년에 익양후에 봉해지고 후에 다시 익양공으로 승진되었으며, 1170년 9월에 반란을 일으킨 정중부 등이 의종을 몰아내고 동복아우인 그를 왕으로 세움으로써 고려 제19대 왕에 즉위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2. 무신정권 시대를 풍미한 인물들  

정중부의 무신난 이후 조정의 권력은 무신난을 주도한 일부 무장들에 의해 장악된다. 이들 무장들은 과격파와 온건파로 구분될 수 있는데 정중부, 양숙, 진준, 기탁성, 이소응, 홍중방 등의 무반 고위 인사들은 온건파에 속했고, 이의방, 이고, 채원 등 하급 무장들은 과격파에 속했다. 흔히 정중부가 무신난을 주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이의방, 이고, 채원 등의 하급 무장들이 난을 주도하고 정중부는 그들의 계획에 동의했을 뿐이다. 따라서 하급 무장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반란을 꾀하고 있었던 데 반해 정중부 등의 고위직 무장들은 반란을 실행할 의지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1. 늙은 왕 신종의 즉위와 최씨 무신정권의 성립

(1144~1204년, 재위기간:1197년 9월~1204년 1월, 6년 4개월)

신종(神宗)시대는 비록 6년여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이지만 최씨 무신정권이 장기집권의 기반을 닦는가 하면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아 고려 사회는 건국 이래 최악의 상태를 맞이한다.

신종은 인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공예왕후 임씨 소생으로 1144년 7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민(旼), 이름은 탁(晫), 자는 지화(至華)이다.

1. 왕권 회복을 꿈꾸는 희종과 최충헌 제거 계획

(1181~1237년, 재위기간:1204년 1월~1211년 12월, 7년 11개월)

희종(熙宗)은 신종과 선정왕후의 맏아들로 1181년 5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덕(悳), 이름은 영(), 자는 불피(不陂)이다. 1200년 4월에 왕태자에 책봉되고, 1204년 1월에 병상에 누운 신종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1. 강종의 황혼녘 짧은 치세

(1152~1213년, 재위기간:1211년 12월~1213년 8월, 1년 8개월)

강종(康宗)은 명종의 맏아들이자 의정왕후 김씨 소생으로 1152년 4월 을사일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숙(璹), 개명은 정(貞), 이름은 오(), 자는 대화(大華)이다. 1173년 4월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1197년 9월 최충헌에 의해 명종이 쫓겨날 때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그 후 줄곧 강화에서 지내다가 1210년 12월에 개경으로 돌아왔으며, 1211년 정월에 한남공에 봉해졌다가 그해 12월에 최충헌이 희종을 폐위시키고 그를 옹립함에 따라 고려 제22대 왕에 즉위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60세였다.

1. 고종시대의 계속되는 변란과 대몽항쟁

(1192~1259년, 재위기간:1213년 8월~1259년 6월, 45년 10개월)

최씨 무신정권이 안정기로 접어든 고종(高宗)시대는 몽고의 흥기로 고려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 전체가 전쟁에 휘말린다. 서쪽으로 밀려났던 거란이 다시 동으로 쫓겨왔으며, 남으로 밀려났던 송이 망국에 직면하고, 북쪽의 맹주로 자리한 금도 몰락한다. 몽고의 이 같은 무서운 팽창정책에 맞서 고려는 수십 년 동안 영토수호 전쟁을 수행한다. 그런 가운데 무신정권 내부에서는 권력투쟁이 이어지고, 왕실은 무신들의 암투를 이용하여 왕권을 회복하려 한다.

1. 원종의 친원정책과 무신정권의 종식

(1219~1274년, 재위기간:1259년 6월~1274년 6월, 15년)

원종(元宗)시대는 무신정권의 말기이자 원의 고려복속정책이 본격화되던 시기로서 고려 조정은 왕실 중심의 친몽파와 무신들이 이끄는 반몽파로 갈라진다. 원종은 몽고의 힘을 빌려 왕권을 회복하려 하고 무신정권은 그 같은 왕실의 정책을 경계하며 몽고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힘을 형성하려 한다. 이것은 결국 쌍방간의 힘대결로 번지게 되어 결과적으로 몽고의 내정간섭의 빌미만 확대시키게 된다.

원종은 고종의 맏아들이자 안혜왕후 유씨 소생으로 1219년 3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전(倎), 이름은 식(), 자는 일신(日新)이다. 그는 1241년 정월에 태자에 책봉되어 1259년 4월에 몽고와의 화의조약에 따라 고종을 대신해서 몽고에 입조했다.

1. 변발한 충렬왕과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고려

(1236~1308년, 재위기간:1274년 6월~1298년 1월, 1298년 8월 복위~1308년 7월, 1298년 1월부터 동년 8월 초까지는 충선왕 재위기간이므로 총 재위기간은 33년 6개월)

원 세조의 부마가 된 충렬왕(忠烈王)이 즉위하면서 고려는 급속도로 원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철저한 친원정책 덕분으로 고려 왕실은 오히려 무신정권에게 잃었던 힘을 회복하게 된다. 이에 따라 조신들의 힘은 미미해져 정치가 실종되고, 사회 전반에 변발과 호복차림의 몽고 풍속이 만연하여 고려는 점차 자생력을 잃어간다.

충렬왕은 원종의 맏아들이자 정순왕후 김씨 소생으로 1236년 2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심(諶) 또는 춘(賰), 이름은 거(昛)이다. 그는 1259년 6월 고종이 죽자 몽고에 입조해 있던 원종을 대신해 임시로 국사를 대리하였으며, 1267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 후 1272년에 원나라에 입조하여 연경에 머물렀으며, 1274년에 원 세조의 딸 홀도로게리미실 공주에게 장가들어 원의 부마가 되었다. 그리고 1274년 6월 원종이 죽자 귀국하여 고려 제25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1. 충선왕의 전지(傳旨)정치와 고려 조정의 불안정

(1275~1325년, 재위기간:1298년 1~8월, 1308년 7월 복위~1313년 5월, 총 5년 3개월)

원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인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면서 고려의 몽고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진다. 심지어는 왕이 재위기간 대부분을 원나라에서 기거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로 인해 고려 조정의 불안은 한층 가중되고, 한편에선 왕위를 둘러싼 암투가 진행된다.

충선왕은 충렬왕의 셋째 아들이자 제국대장공주 장목왕후 소생으로 1275년 9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원(謜),이름은 장(璋), 자는 중앙(仲昻), 몽고식 이름은 이지리부카다. 1277년 1월에 3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298년 정월에 태상왕으로 물러난 충렬왕을 이어 24세의 젊은 나이로 고려 제26대 왕에 올랐다. 하지만 왕비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로 그해 8월에 왕위에서 쫓겨나 원나라로 압송되었다가 1308년 7월 충렬왕의 뒤를 이어 복위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34세였다.

1. 충숙왕의 위태로운 삶과 불안정한 왕위

(1294~1339년, 재위기간:1313년 3월~1330년 2월, 1332년 2월 복위~1339년 3월, 총 24년)

충선왕은 왕위를 충숙왕(忠肅王)에게 물려주면서 동시에 조카 왕고를 세자로 세웠다. 이 같은 충선왕의 이해 못할 행동은 고려 조정을 왕위쟁탈전의 소용돌이로 휘몰아간다. 이 때문에 충숙왕은 누차에 걸쳐 원나라에 소환당하는 수모를 겪다가 급기야 왕위를 내놓아야 하는 위기 상황에 몰린다.

충숙왕은 충선왕의 차남이자 몽고녀 의비 소생으로 1294년 7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도(燾), 이름은 만(卍), 자는 의효(宜孝), 몽고식 이름은 아자눌특실리다. 1298년에 강릉군 승선사에 봉해졌다가 장성해서는 강릉대군으로 진봉되었으며, 1313년 3월 원나라의 심양왕직을 고수하던 충선왕의 선위를 받아 고려 제27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20세였다.

1. 희대의 패륜아 충혜왕과 고려 왕실의 위기

(1315~1344년, 재위기간:1330년 2월~1332년 2월, 1339년 3월 복위~1344년 1월, 총 6년 10개월)


충혜왕(忠惠王)은 충숙왕의 장남이자 공원왕후 홍씨 소생으로 1315년 1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정(禎), 몽고식 이름은 보탑실리다. 1328년 정월에 원나라의 승인을 받아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330년 2월 병약해져 정치에 염증을 느낀 충숙왕의 양위를 받아 고려 제28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는 16세에 불과했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충혜왕은 한 나라를 통치할 만한 인격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성격마저 포악하여 정사를 뒷전으로 미루고 향락과 여색에 빠져 지냈다. 즉위 후 6일 동안이나 정사를 폐하고 사냥을 즐기는가 하면 날마다 내시들과 씨름을 하며 놀았다. 또한 배전, 주주 등에게 국가의 중책을 일임하여 일부 관료들의 권력 남용이 극대화되고, 자신의 행적을 기록한다는 이유로 사관들을 몹시 싫어하여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하였다.

1. 어린 충목왕의 즉위와 덕녕공주의 섭정

(1337~1348년, 재위기간:1344년 2월~1348년 12월, 4년 10개월)

충목왕(忠穆王)은 충혜왕의 맏아들이자 정순숙의공주(덕녕공주) 소생으로 1337년 4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흔(昕), 몽고식 이름은 팔사마타아지다.

1. 충정왕의 짧은 치세와 비참한 최후

(1338~1352년, 재위기간:1349년 7월~1351년 10월, 2년 3개월)

충정왕(忠定王)은 충혜왕의 둘째 아들이자 희비 윤씨 소생으로 1338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저(), 몽고식 이름은 미사감타아지다. 1348년 4월에 경창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2월에 충목왕이 죽자 덕녕공주가 덕성부원군 기철과 정승왕후에게 서무를 대행시키고 충목왕의 죽음을 원에 알렸다. 부고를 받은 원의 순제는 이듬해 2월에 왕자 저를 입조하라고 했다.

1. 개혁주의자 공민왕의 배원정책과 고려의 국권회복

(1330~1374년, 재위기간:1351년 10월~1374년 9월, 22년 11개월)

14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원은 홍건적의 봉기로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시기에 고려 국왕에 즉위한 공민왕(恭愍王)은 배원정책을 골격으로 하는 일련의 개혁정책을 통해 국권을 되찾고 잃었던 북방의 영토를 회복한다. 이로써 고려는 1백여 년간 지속된 원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체제 구축을 위해 매진하게 된다.

공민왕은 충숙왕의 차남이자 공원왕후 홍씨 소생으로 충혜왕의 동복아우이며 초명은 기(祺), 이름은 전(顓), 몽고식 이름은 백안첩목아다. 그는 1330년 5월에 태어나 강릉대군에 봉해졌으며, 1341년 원나라 순제의 입조 요구에 따라 12세 때부터 줄곧 연경에서 생활하였다. 그리고 1344년 조카 충목왕이 즉위하자 강릉부원대군에 봉해졌다. 1348년 12월 충목왕이 사망함에 따라 조신들은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지만 원나라가 충정왕을 세움에 따라 성사되지 않았다. 그러나 충정왕이 나이가 어린 탓으로 정치가 안정되지 못하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원 순제는 1351년 10월 충정왕을 폐하고 그를 고려 제31대 왕에 봉했다. 이 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1.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우왕과 고려 조정의 혼란

(1365~1389년, 재위기간:1374년 9월~1388년 6월, 13년 9개월)

공민왕이 살해당하자 어린 우왕(禑王)을 즉위시킨 이인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한다. 한편 명나라의 개국으로 북원과 명나라 사이에서 고려는 외교적 난관에 부딪혀 명나라와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는 처지가 되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왜구의 노략질로 민심은 동요하여 민간경제가 극도로 피폐해진다.

우왕은 공민왕의 장남이자 시비 반야 소생으로 1365년에 태어났으며, 아명은 모니노, 이름은 우(禑)이다.

그는 어린 시절을 신돈의 집에서 보내야 했다. 공민왕은 원래 자식이 없어 고민하고 있었는데, 신돈이 자신의 여종 반야를 바쳐 아이를 얻으라고 권유하였다. 이에 공민왕이 반야와 동침했고 얼마 뒤에 그녀가 아이를 잉태했다. 반야가 만삭이 되자 신돈은 자신의 친구인 승려 능우의 어머니에게 반야를 맡겼다.

창왕의 짧은 치세와 신진 세력의 득세

(1380~1389년, 재위기간:1388년 6월~1389년 11월, 1년 5개월)

이성계와 조민수의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 세력이 축출되고 우왕이 폐위되자 조정은 회군 세력에 의해 장악된다. 하지만 이들은 조민수 세력과 이성계 세력으로 갈라져 패권다툼의 양상을 띠게 된다.

이들 양 세력의 대립은 차기 왕을 세우는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이성계 일파는 종친들 중에 한 사람을 택하여 왕으로 세우자고 하였는 데 반해 조민수 일파는 우왕의 아들 창(昌)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조정 내 세력이 크지 않았던 조민수는 당시 명망이 높던 이색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였다. 조민수의 도움 요청을 받은 이색은 공민왕의 제3비 익비 한씨로 하여금 창왕을 왕으로 세울 것을 명령하는 교지를 내리도록 하였다. 이로써 우왕의 맏아들이자 근비 이씨 소생인 왕자 창이 고려 제33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는 불과 9세였다.

1.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과 고려왕조의 최후

(1345~1394년, 재위기간:1389년 11월~1392년 7월, 2년 8개월)

1389년 11월에 발생한 우왕 복위사건 이후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 등과 결탁하여 폐가입진의 명분으로 창왕을 폐위하고 정창군 왕요를 옹립한다. 이로써 조정은 이성계 일파에 의해서 완전히 장악되고 급기야 그들은 역성혁명을 노리게 된다.

공양왕(恭讓王)은 제20대 왕 신종의 6세 손인 정원부원군 왕균과 그의 정실부인 왕씨 사이에서 1345년 2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요(瑤)다. 처음에 정창부원군에 봉해졌다가 다시 정창군으로 개봉되었으며, 1389년 11월 이성계, 정몽주, 조준,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고려 제34대 왕에 즉위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이미 불혹을 넘긴 45세였다.

그를 왕으로 세우기 앞서 이성계, 심덕부,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정도전 등은 흥국사에 모여 창왕을 폐위하고 종실에서 적당한 사람을 선택해 새로운 왕으로 세울 것을 결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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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水中四維下上帝隆子於辰馬

삼수 가운데와 사방 아래 상제께서 아들을 진마에 내려보냈다.

先操鷄後搏鴨 此謂運滿一三甲

먼저 닭을 잡고 후에 오리를 칠 것인즉, 이를 일러 운수가 일삼갑에 찼다고 할 것이다.

暗登天明理地 遇子年中興大事

어둠이 하늘에 오르고 밝음이 땅을 다스릴 것이니, 자년이 되면 대사를 이루리라.

混跡沌名姓 混沌誰知愼興聖

종적과 성명이 혼돈을 이루나니, 혼돈 속에서 누가 진실로 성스러운 일을 일으킬 줄 알리요.

振法雷揮神電 於巳年中二龍見

법을 움직여 뇌성을 일으키고 신령한 번개가 번쩍이며, 사년 중에 두 마리의 용이 나타난다.

一則藏身靑木中 一則顯形黑金東

하나는 청목 속에 몸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의 동쪽에 모습을 나타내리.

智者見愚者盲 興雲注雨興人征

지혜로운 자는 볼 것이나 우매한 자는 보지 못할 것이니,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거느리며 사람들을 일으켜 정벌하리라.

或見盛或見衰 盛衰爲減惡塵滓

때로는 성하고 때로는 쇠할 것이니, 성쇠가 모두 악의 잔재를 없애기 위함이니라.

此一龍子三四遞代相承六甲子

이 한쪽 용의 아들 서넛이 서로 대를 바꾸어가며 여섯 갑자를 계승하리라.

此四維定滅丑 越海來隆須待酉

이 사유에서 기필코 축을 멸하고 바다를 건너와 융성하리니 반드시 유를 기다려라.

此文若見於明王 國泰人安帝永昌

이 글을 만약 현명한 임금에게 보이면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고 제왕은 길이 번창하리.

吾之記凡一百四十七字

나의 기록은 모두 일백사십칠 자이니라.

"삼수중과 사유 아래 옥황상제가 진마에 아들을 내려보냈다는 것은 진한과 마한 땅에 아들을 내려보냈다는 뜻이 아니겠소? 또한 사년에 두 용이 나타나서 그 하나는 청목 속에 모습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 동쪽에 모습을 나타냈다는 것은 청목은 곧 소나무니 송악을 일컫고, 흑금은 철을 이른 것이니 철성에 기반을 마련한다는 뜻입니다."

"특히나 이 글에 따르면 ‘축(丑)’이 멸하고, ‘유(酉)’가 일어난다고 했으니, 이는 정축년에 태어난 폐하가 멸하고, 정유년에 태어난 왕대인이 일어난다는 뜻 아니오이까? 이 내용을 폐하께서 아시면 당장 왕대인을 죽이려고 들 것인데,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궁예는 처음부터 왕건을 죽일 계획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오히려 왕건을 더욱 확실하게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궁예는 왕건의 충성심을 시험했을 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궁예의 행동은 왕건에게 위기감을 느끼게 하였고, 역모의 뜻을 품게 만들었다. 그러던 차에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을 찾아와 모반을 도모하자고 하였다. 왕건은 망설이다가 부인 유씨의 설득에 힘입어 마침내 군사를 모아 왕성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918년(무인년) 6월 병진일, 왕건은 드디어 왕으로 등극하여 국호를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고려(高麗)’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지 4일 만에 반란이 일어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마군장군 환선길이었다. 그는 왕건과 함께 고려 건국에 참여한 인물이었는데, 아내의 제의에 따라 왕권을 노리고 반란을 도모하게 된다.

그의 동생 환향식도 같은 혐의로 잡혀 죽었다.

이들 형제 이외에도 청주 출신들이 역모를 도모하기도 했다. 청주 출신 순군리 임춘길을 비롯하여 배총규, 강길아차, 경종 등이 반역을 도모하고 청주에 가서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이 계획이 복지겸의 정보망에 걸려 실패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왕건을 위협한 또 한 사람은 웅주(공주)성주 이흔암이었다. 이흔암은 왕건이 궁예를 내쫓고 왕이 되자 웅주성주를 포기하고 철원으로 상경한다. 이 때문에 웅주는 후백제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이들 외에도 명주(강릉)의 김순식, 명지성(경기도 포천)의 성달, 문소(경북 의성)의 홍술 등이 왕건의 휘하에 들기를 거부하였고, 웅성(공주)과 그 주변의 홍성, 서산 일대의 성주들이 대거 견훤에게 투항해버린다. 이로 인해 왕건은 한동안 고전을 면치 못한다.

대야성전투(927년 7월)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견훤의 20년 공든 탑

공산대첩(927년 9월)

-피눈물을 흘리며 달아나는 왕건

병산싸움(930년 1월)

-낙동강에 한을 뿌리고 돌아서는 견훤

임진해전(932년 9월)

-백제 수군, 개성을 안방처럼 드나들다

운주전투 (934년 9월)

-견훤, 양팔을 잃고 허탈감에 빠지다

비운의 혁명가 궁예(857~918년)

궁예는 신라인이니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이요,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혹자는 궁예가 48대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그는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에 긴 무지개와 같은 흰빛이 있어서 위로는 하늘에 닿았다. 일관이 아뢰기를,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 있는 날(重午)에 태어났고, 나면서 이가 있으며 또한 광염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 듯합니다. 기르지 마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중사로 하여금 그 집에 가서 아이를 죽이도록 하였다.

불세출의 영웅 견훤(867~936년)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이요, 함통(당나라 의종의 연호) 8년 정해(867년)에 났으니, 본래의 성은 이씨였는데, 뒤에 견(甄)을 성으로 삼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자개이니 농사로 생활을 하다가 광계(당나라 희종의 연호) 연간에 사불성(또는 사벌, 상주)에 자리를 잡고 자칭 장군이라고 하였다. 아들 넷이 있어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는바, 특히 훤은 유달리 유명하고 지혜와 책략이 많았다."

친화력의 승부사 왕건(877~943년)

아버지 왕륭이 송악(개성)의 호족이며 궁예가 세운 태봉국 신하였다는 사실 이외에 왕건의 조상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진 이야기는 거의 없다. 다만 조선 문종대에 정인지 등에 의해 139권으로 편찬된 『고려사』의 ‘태조실록’에서 발췌한 3대 조상들의 추존 묘호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승리의 화신 유금필(?~941년)

왕건이 통일을 이루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단연 유금필이다. 그는 왕건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여지없이 난관을 타개하였고, 어떤 상황에서도 기필코 승리를 이끌어낸 고려 병사들의 수호신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유금필은 장령으로서의 전략을 가졌으며, 병사들에게는 늘 신망을 얻었다. 출정할 때마다 명령을 받으면 즉각 출발하였고, 집에 들러 잔 적도 없었다. 개선할 때면 태조는 반드시 마중을 나가 위로해주었으며, 시종일관 다른 장수들이 받지 못하는 총애와 대우를 해주었다."

그는 941년에 죽었으며, 시호는 충절이다. 성종 13년에는 태사 벼슬을 추증받았고,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에게는 긍, 관유, 경 등의 아들이 있었고, 태조의 제9비 동양원부인 유씨는 그의 딸이다.

5. 고려 개국공신 4인방

918년 6월,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네 사람이다.

홍유(?~936년)

홍유(洪儒)는 경상도 의성 사람으로 초명은 술이다. 무장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언변과 논리가 뛰어났으며, 고려 건국 당시 왕건을 설득하여 왕으로 옹립한 장본인이다.

홍유에 대한 왕건의 믿음은 두터웠던 모양이다. 왕건은 홍유를 경상 북부지역을 안정시킬 수 있는 적임자라고 판단하고 의성의 호족장으로 대우하는 차원에서 그의 딸을 제26비로 맞아들인다. 그녀가 바로 의성부원군부인 홍씨로 왕건의 25번째 아들 의성부원대군의 어머니이다.

배현경(?~936년)

배현경(裵玄慶)은 경주 사람으로, 초명은 백옥삼이다. 그는 담력이 뛰어나고 무예가 출중하여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운 덕분에 궁예 휘하에 있을 때 일개 병졸에서 마군장군까지 오른 대단한 인물이다.

고려 건국 이후에는 개국 1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승진하여 벼슬이 정1품 대광에 이르렀다.

신숭겸(?~927년)

신숭겸(申崇謙)은 광해주(춘천) 사람으로 초명은 능산이며 본관은 평산이다. 그는 본래 전라도 곡성에서 태어났으나, 뒤에 춘천으로 옮겨 그곳에서 터전을 잡았다.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자 그 휘하에 들어갔으며, 신씨 성은 왕건에게서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복지겸 생몰년 미상

복지겸(卜智謙)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다만 그가 개국 당시 신숭겸, 홍유, 배현경 등과 함께 왕건을 옹립하여 개국 1등공신이 되었다는 것과, 면천 복씨의 시조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그의 초명은 사귀 또는 사괴라고 전하고 있으며, 고려 개국 이후에는 주로 감찰 일을 맡아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개국 초 왕건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던 세력들을 일일이 색출하여 반란을 차단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1. 태조 왕건과 민족 대화합의 결정체 ‘고려’

(877~943년, 재위기간:918년 6월~943년 5월, 25년)

2. 주름살 왕 혜종의 즉위와 계속되는 왕권 위협

(912~945년, 재위기간:943년 5월~945년 9월, 2년 4개월)

혜종은 태조와 장화왕후 오씨의 장남으로 912년 나주에서 출생했으며 이름은 무(武), 자는 승건(承乾)이다. 태조의 제1비 신혜왕후 유씨가 소생이 없었던 탓으로 아들을 보지 못했던 왕건은 나주의 미천한 집안 출신 오씨로부터 첫아이를 얻었으니, 그가 바로 혜종이다.

2. 정종의 짧은 치세와 서경 천도계획

(923~949년, 재위기간:945년 9월~949년 3월, 3년 6개월)

개경파를 완전히 제거하고 무력으로 왕위에 오른 정종은 즉위 초부터 개경 세력과 백성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이 때문에 그는 서경으로 천도하기 위해 많은 인력을 강제 동원하여 평양에 왕성을 쌓기 시작한다. 하지만 천도 계획은 오히려 민심을 이반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정종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다준다.

1. 광종의 과감한 개혁작업과 호족들의 수난

(925~975년, 재위기간:949년 3월~975년 5월, 26년 2개월)

고려는 광종(光宗)의 즉위로 전환기를 맞이한다. 광종은 정종과 달리 집권 초기에는 무리한 정책을 삼가고 관망하는 자세를 보였지만 한동안의 모색기를 거친 다음에는 과감한 개혁정책으로 일관한다. 개혁의 초점은 왕권을 강화하고 호족의 힘을 약화시켜 중앙집권화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광종의 이러한 개혁정책은 당연히 호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 때문에 광종 집권기는 왕과 호족들 간의 힘싸움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1. 경종의 화합정책과 호족 공신들의 재등장

(955~981년, 재위기간:975년 5월~981년 7월, 6년 2개월)

광종이 죽자 고려의 정국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한다. 광종 대 말기부터 서서히 힘을 회복하던 호족들이 경종(景宗)의 즉위와 동시에 재등장하게 된 것이다. 조정의 요직을 차지한 호족들은 가장 먼저 광종 대의 수모를 앙갚음하기 위해 복수전을 펼쳤고, 그로 인해 고려 조정엔 또다시 피바람이 몰아친다.

경종은 955년 9월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주(), 자는 장민(長民)이다.

1. 유학 정치이념의 실현자 성종과 중앙집권 체제의 완성

(960~997년, 재위기간:981년 7월~997년 10월, 16년 3개월)

유학적 소양을 두루 갖춘 성종(成宗)이 집권하면서 고려는 유교사회로 전환하기 위한 대대적인 체제 정비작업에 돌입한다. 충효사상을 강조하고 계급질서 확립에 주력함으로써 무반과 문반으로 이뤄진 양반사회와 농·공·상으로 이뤄진 평민사회, 노비와 천민으로 이뤄진 천민사회의 구분이 명확해진다.

논리로 80만 대군을 물리친 서희와 강동 6주

서희는 광종 대에 대광 내의령을 지낸 서필의 아들이다. 서필은 광종의 귀화인 중용정책에 반대했던 인물로 사치를 싫어하고 스스로 검소하여 몇 번에 걸쳐 왕의 사치를 경계하는 간언을 하기도 했다. 또한 광종이 귀화인들에게 지나친 대접을 하며 신하들의 집을 빼앗아 그들에게 나눠주자 이에 반발하여 스스로 자기 집을 내놓겠다고 하여 광종의 잘못된 행각을 중지시키기도 했다.

1. 동성연애자 목종의 나약한 정치와 강조의 반란

(980~1009년, 재위기간:997년 10월~1009년 2월, 11년 4개월)

18세의 어린 목종(穆宗)이 집권하자 왕권은 그의 모후 헌애왕후 차지가 된다. 유난히 정권욕이 강했던 헌애왕후는 김치양과 부부연을 맺고 그들의 소생으로 왕위를 이으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고, 왕권을 상실한 목종은 도탄에 빠진 나머지 남색을 즐기며 정치를 외면한다. 이에 따라 조정이 일부 척족과 권신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면서 고려는 점점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2. 수난을 먹고 자란 군주 현종과 고려의 국력 신장

(992~1031년, 재위기간:1009년 2월~1031년 5월, 22년 3개월)

현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거란의 침입으로 몽진하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이미 수난에 이골이 난 그는 계속되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종 대 이후 과거로 등용된 인재들과 함께 고려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성공한다. 이로써 고려는 성종 이후 제2의 도약기를 맞이하게 된다.

현종은 992년 태조의 제5비 신성왕후 김씨 소생 안종 왕욱과 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 어머니와 사별하고 성종에 의해 궁중에서 양육되었으며, 1003년(목종 6년)에 12세의 나이로 대량원군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009년 2월 목종이 강조에 의해 폐립되자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18세였다.

4. 거란의 2차 침입과 불굴의 용장 양규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제일 먼저 진출한 곳은 흥화진(평북 의주)이었다. 40만 대군으로 흥화진이 포위되자 흥화진 도순검사 양규가 낭중 정성과 부사 장작 등과 함께 방비책을 세우고 성을 고수한다.

순식간에 고려군은 포위되었고, 강조는 포로가 되어 거란왕에게 끌려가야 했다. 강조를 보자 거란왕은 자신의 신하가 되길 맹세하면 살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강조는 "고려 사람으로 거란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때 행영도통부사 이현운이 "두 눈으로 이미 새 세월을 보았거늘 어찌 일편단심 옛 산천만을 생각할 수 있으랴." 하면서 거란의 신하가 되길 청했다. 이에 강조가 "너는 고려인인데 어째서 그 따위 말을 하느냐?"고 꾸짖었다. 그 소리를 듣고 거란왕은 강조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통주에서 강조가 이끌던 고려 정예군을 대파한 거란은 다시 흥화진으로 향했다. 그들은 강조의 편지를 위조하여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양규는 "우리는 왕의 명령을 받고 이곳에 왔으므로 강조의 항복 지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마디로 거절했다.

구주의 별장 김숙흥이 중랑장 보량과 함께 적군을 기습하여 1만여 명을 죽였으며, 양규는 적의 주둔지인 무로대를 급습하여 적군 2천여 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며 포로 3천여 명을 구출한다. 그 후에는 이수에서 적군 2천5백을 무찔렀으며, 여리첨에서도 1천여 명을 섬멸시켰다.

전쟁이 끝나자 현종은 양규의 전공을 포상하고 공부상서직을 추증하였으며, 그의 처 홍씨에게는 매년 벼 1백 석을 내리고 은율군군이라는 봉작을 주었다. 또한 아들 양대춘에게는 교서랑이라는 관직을 내렸다. 한편 별장 김숙흥에게는 장군직이 추증되고 그의 어머니에게 매년 곡식 50석이 내려졌다.

현종 10년에 양규와 김숙흥 두 사람에게 공히 공신록권이 발급되었고, 현종 15년에는 삼한후벽상공신 칭호가 내려졌다. 현종은 교서는 양규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병사들을 지휘하매 그 위엄은 사기를 앙등시켰고, 원수들을 추격하니 그 위력은 강토를 평안히 하였다. 정의의 칼이 빛나는 곳마다 만인이 다투어 도망쳤고, 6균(鈞)의 활을 당길 때마다 적병들이 모조리 투항했다. 이로써 성과 진이 보전되고 사기 또한 드높았다."

고려 역시 거란의 대대적인 침략을 예상하고 20만 군대를 조성하였다. 20만 군대의 상원수는 평장사 강감찬이 맡았다.

강감찬은 병력을 이끌고 흥화진으로 나아가 쇠가죽을 꿰어 흥화진 동쪽으로 흐르는 내를 막았다. 그리고 거란군이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물을 터뜨리고, 복병으로 하여금 흩어지는 거란군을 공격케 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흔히 구주대첩으로 불리는 이 싸움을 이끈 인물은 강감찬이었다. 그는 경주로부터 금주(시흥)로 이주해와 금주 호족으로 성장한 강여청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고려 건국에 공로가 있어 삼한벽상공신에 오른 강궁진이며, 본관 금주에서 949년에 감찬을 낳았다. 자칫 무인으로 알기 쉬운 그는 성종 대에 과거에 장원급제한 문인이며 누차에 걸쳐 승진을 거듭한 끝에 예부시랑, 국자제주, 한림학사, 승지, 좌산기상시, 중추사 등을 역임하고 거란의 3차 침입 당시에는 정2품의 서경유수 겸 내사문하사 평장사에 올라 있었다.

1. 덕종의 짧은 치세와 오래 기억된 ‘덕(德)’

(1016~1034년, 재위기간:1031년 5월~1034년 9월, 3년 4개월)

현종 후기의 안정은 덕종(德宗) 대에도 이어진다. 16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은 덕종은 나이답지 않은 너그러움과 섬세함을 바탕으로 명민한 정치를 펼쳐나가지만 병약한 탓으로 왕위에 오른 지 3년여 만에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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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족의 맏형 고구려를 생각함

아, 고구려!

언젠가 모 신문사가 주최한 전시회의 제목이다. 이 전시회를 보면서 ‘왜 한국인은 고구려를 떠올리기만 하면 가슴이 뛰는 걸까?’ 하고 반문해 보았다.

고구려가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고구려의 역사와 그 대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세계지도를 볼 때마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으로 눈길이 가고, 그 순간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안타까움 섞인 한숨을 쏟아낸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아, 고구려만 망하지 않았어도…….

역경의 세월을 이기며 고구려는 동명성왕 이후 28대에 걸쳐 700년을 지속했다. 그 기간 동안 중국 대륙에서는 서한, 신, 동한, 삼국의 위·촉·오, 진, 서진과 동진, 변방 5족의 16국, 남북조의 송·제·양·진·북위·동위·서위·북제·북주, 수, 당 등이 몰락과 성장을 거듭했다.

이렇듯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수십 개나 되는 나라가 발전과 멸망을 거듭하는 가운데 고구려는 무려 700년 동안이나 북방의 맏형으로, 동이족의 버팀목으로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역사의 향기를 맡으며 다시 한 번 나지막하게 외쳐보길 바란다.

아, 고구려!

삼국사를 다룬 대표적 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 이름은 주몽(朱蒙, 추모 또는 중해)이며 해모수와 유화가 그의 부모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를 북부여의 시조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어머니 유화는 하백의 딸이라고 전하고 있다. 또한 해모수에게는 부루라는 아들이 있었으므로 주몽과 부루는 이복 형제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는 유화가 해모수의 후비이며, 주몽은 그의 서자라는 주장을 가능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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