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水中四維下上帝隆子於辰馬

삼수 가운데와 사방 아래 상제께서 아들을 진마에 내려보냈다.

先操鷄後搏鴨 此謂運滿一三甲

먼저 닭을 잡고 후에 오리를 칠 것인즉, 이를 일러 운수가 일삼갑에 찼다고 할 것이다.

暗登天明理地 遇子年中興大事

어둠이 하늘에 오르고 밝음이 땅을 다스릴 것이니, 자년이 되면 대사를 이루리라.

混跡沌名姓 混沌誰知愼興聖

종적과 성명이 혼돈을 이루나니, 혼돈 속에서 누가 진실로 성스러운 일을 일으킬 줄 알리요.

振法雷揮神電 於巳年中二龍見

법을 움직여 뇌성을 일으키고 신령한 번개가 번쩍이며, 사년 중에 두 마리의 용이 나타난다.

一則藏身靑木中 一則顯形黑金東

하나는 청목 속에 몸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의 동쪽에 모습을 나타내리.

智者見愚者盲 興雲注雨興人征

지혜로운 자는 볼 것이나 우매한 자는 보지 못할 것이니,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거느리며 사람들을 일으켜 정벌하리라.

或見盛或見衰 盛衰爲減惡塵滓

때로는 성하고 때로는 쇠할 것이니, 성쇠가 모두 악의 잔재를 없애기 위함이니라.

此一龍子三四遞代相承六甲子

이 한쪽 용의 아들 서넛이 서로 대를 바꾸어가며 여섯 갑자를 계승하리라.

此四維定滅丑 越海來隆須待酉

이 사유에서 기필코 축을 멸하고 바다를 건너와 융성하리니 반드시 유를 기다려라.

此文若見於明王 國泰人安帝永昌

이 글을 만약 현명한 임금에게 보이면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고 제왕은 길이 번창하리.

吾之記凡一百四十七字

나의 기록은 모두 일백사십칠 자이니라.

"삼수중과 사유 아래 옥황상제가 진마에 아들을 내려보냈다는 것은 진한과 마한 땅에 아들을 내려보냈다는 뜻이 아니겠소? 또한 사년에 두 용이 나타나서 그 하나는 청목 속에 모습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 동쪽에 모습을 나타냈다는 것은 청목은 곧 소나무니 송악을 일컫고, 흑금은 철을 이른 것이니 철성에 기반을 마련한다는 뜻입니다."

"특히나 이 글에 따르면 ‘축(丑)’이 멸하고, ‘유(酉)’가 일어난다고 했으니, 이는 정축년에 태어난 폐하가 멸하고, 정유년에 태어난 왕대인이 일어난다는 뜻 아니오이까? 이 내용을 폐하께서 아시면 당장 왕대인을 죽이려고 들 것인데,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궁예는 처음부터 왕건을 죽일 계획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오히려 왕건을 더욱 확실하게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궁예는 왕건의 충성심을 시험했을 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궁예의 행동은 왕건에게 위기감을 느끼게 하였고, 역모의 뜻을 품게 만들었다. 그러던 차에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을 찾아와 모반을 도모하자고 하였다. 왕건은 망설이다가 부인 유씨의 설득에 힘입어 마침내 군사를 모아 왕성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918년(무인년) 6월 병진일, 왕건은 드디어 왕으로 등극하여 국호를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고려(高麗)’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지 4일 만에 반란이 일어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마군장군 환선길이었다. 그는 왕건과 함께 고려 건국에 참여한 인물이었는데, 아내의 제의에 따라 왕권을 노리고 반란을 도모하게 된다.

그의 동생 환향식도 같은 혐의로 잡혀 죽었다.

이들 형제 이외에도 청주 출신들이 역모를 도모하기도 했다. 청주 출신 순군리 임춘길을 비롯하여 배총규, 강길아차, 경종 등이 반역을 도모하고 청주에 가서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이 계획이 복지겸의 정보망에 걸려 실패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왕건을 위협한 또 한 사람은 웅주(공주)성주 이흔암이었다. 이흔암은 왕건이 궁예를 내쫓고 왕이 되자 웅주성주를 포기하고 철원으로 상경한다. 이 때문에 웅주는 후백제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이들 외에도 명주(강릉)의 김순식, 명지성(경기도 포천)의 성달, 문소(경북 의성)의 홍술 등이 왕건의 휘하에 들기를 거부하였고, 웅성(공주)과 그 주변의 홍성, 서산 일대의 성주들이 대거 견훤에게 투항해버린다. 이로 인해 왕건은 한동안 고전을 면치 못한다.

대야성전투(927년 7월)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견훤의 20년 공든 탑

공산대첩(927년 9월)

-피눈물을 흘리며 달아나는 왕건

병산싸움(930년 1월)

-낙동강에 한을 뿌리고 돌아서는 견훤

임진해전(932년 9월)

-백제 수군, 개성을 안방처럼 드나들다

운주전투 (934년 9월)

-견훤, 양팔을 잃고 허탈감에 빠지다

비운의 혁명가 궁예(857~918년)

궁예는 신라인이니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이요,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혹자는 궁예가 48대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그는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에 긴 무지개와 같은 흰빛이 있어서 위로는 하늘에 닿았다. 일관이 아뢰기를,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 있는 날(重午)에 태어났고, 나면서 이가 있으며 또한 광염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 듯합니다. 기르지 마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중사로 하여금 그 집에 가서 아이를 죽이도록 하였다.

불세출의 영웅 견훤(867~936년)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이요, 함통(당나라 의종의 연호) 8년 정해(867년)에 났으니, 본래의 성은 이씨였는데, 뒤에 견(甄)을 성으로 삼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자개이니 농사로 생활을 하다가 광계(당나라 희종의 연호) 연간에 사불성(또는 사벌, 상주)에 자리를 잡고 자칭 장군이라고 하였다. 아들 넷이 있어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는바, 특히 훤은 유달리 유명하고 지혜와 책략이 많았다."

친화력의 승부사 왕건(877~943년)

아버지 왕륭이 송악(개성)의 호족이며 궁예가 세운 태봉국 신하였다는 사실 이외에 왕건의 조상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진 이야기는 거의 없다. 다만 조선 문종대에 정인지 등에 의해 139권으로 편찬된 『고려사』의 ‘태조실록’에서 발췌한 3대 조상들의 추존 묘호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승리의 화신 유금필(?~941년)

왕건이 통일을 이루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단연 유금필이다. 그는 왕건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여지없이 난관을 타개하였고, 어떤 상황에서도 기필코 승리를 이끌어낸 고려 병사들의 수호신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유금필은 장령으로서의 전략을 가졌으며, 병사들에게는 늘 신망을 얻었다. 출정할 때마다 명령을 받으면 즉각 출발하였고, 집에 들러 잔 적도 없었다. 개선할 때면 태조는 반드시 마중을 나가 위로해주었으며, 시종일관 다른 장수들이 받지 못하는 총애와 대우를 해주었다."

그는 941년에 죽었으며, 시호는 충절이다. 성종 13년에는 태사 벼슬을 추증받았고,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에게는 긍, 관유, 경 등의 아들이 있었고, 태조의 제9비 동양원부인 유씨는 그의 딸이다.

5. 고려 개국공신 4인방

918년 6월,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네 사람이다.

홍유(?~936년)

홍유(洪儒)는 경상도 의성 사람으로 초명은 술이다. 무장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언변과 논리가 뛰어났으며, 고려 건국 당시 왕건을 설득하여 왕으로 옹립한 장본인이다.

홍유에 대한 왕건의 믿음은 두터웠던 모양이다. 왕건은 홍유를 경상 북부지역을 안정시킬 수 있는 적임자라고 판단하고 의성의 호족장으로 대우하는 차원에서 그의 딸을 제26비로 맞아들인다. 그녀가 바로 의성부원군부인 홍씨로 왕건의 25번째 아들 의성부원대군의 어머니이다.

배현경(?~936년)

배현경(裵玄慶)은 경주 사람으로, 초명은 백옥삼이다. 그는 담력이 뛰어나고 무예가 출중하여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운 덕분에 궁예 휘하에 있을 때 일개 병졸에서 마군장군까지 오른 대단한 인물이다.

고려 건국 이후에는 개국 1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승진하여 벼슬이 정1품 대광에 이르렀다.

신숭겸(?~927년)

신숭겸(申崇謙)은 광해주(춘천) 사람으로 초명은 능산이며 본관은 평산이다. 그는 본래 전라도 곡성에서 태어났으나, 뒤에 춘천으로 옮겨 그곳에서 터전을 잡았다.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자 그 휘하에 들어갔으며, 신씨 성은 왕건에게서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복지겸 생몰년 미상

복지겸(卜智謙)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다만 그가 개국 당시 신숭겸, 홍유, 배현경 등과 함께 왕건을 옹립하여 개국 1등공신이 되었다는 것과, 면천 복씨의 시조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그의 초명은 사귀 또는 사괴라고 전하고 있으며, 고려 개국 이후에는 주로 감찰 일을 맡아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개국 초 왕건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던 세력들을 일일이 색출하여 반란을 차단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1. 태조 왕건과 민족 대화합의 결정체 ‘고려’

(877~943년, 재위기간:918년 6월~943년 5월, 25년)

2. 주름살 왕 혜종의 즉위와 계속되는 왕권 위협

(912~945년, 재위기간:943년 5월~945년 9월, 2년 4개월)

혜종은 태조와 장화왕후 오씨의 장남으로 912년 나주에서 출생했으며 이름은 무(武), 자는 승건(承乾)이다. 태조의 제1비 신혜왕후 유씨가 소생이 없었던 탓으로 아들을 보지 못했던 왕건은 나주의 미천한 집안 출신 오씨로부터 첫아이를 얻었으니, 그가 바로 혜종이다.

2. 정종의 짧은 치세와 서경 천도계획

(923~949년, 재위기간:945년 9월~949년 3월, 3년 6개월)

개경파를 완전히 제거하고 무력으로 왕위에 오른 정종은 즉위 초부터 개경 세력과 백성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이 때문에 그는 서경으로 천도하기 위해 많은 인력을 강제 동원하여 평양에 왕성을 쌓기 시작한다. 하지만 천도 계획은 오히려 민심을 이반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정종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다준다.

1. 광종의 과감한 개혁작업과 호족들의 수난

(925~975년, 재위기간:949년 3월~975년 5월, 26년 2개월)

고려는 광종(光宗)의 즉위로 전환기를 맞이한다. 광종은 정종과 달리 집권 초기에는 무리한 정책을 삼가고 관망하는 자세를 보였지만 한동안의 모색기를 거친 다음에는 과감한 개혁정책으로 일관한다. 개혁의 초점은 왕권을 강화하고 호족의 힘을 약화시켜 중앙집권화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광종의 이러한 개혁정책은 당연히 호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 때문에 광종 집권기는 왕과 호족들 간의 힘싸움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1. 경종의 화합정책과 호족 공신들의 재등장

(955~981년, 재위기간:975년 5월~981년 7월, 6년 2개월)

광종이 죽자 고려의 정국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한다. 광종 대 말기부터 서서히 힘을 회복하던 호족들이 경종(景宗)의 즉위와 동시에 재등장하게 된 것이다. 조정의 요직을 차지한 호족들은 가장 먼저 광종 대의 수모를 앙갚음하기 위해 복수전을 펼쳤고, 그로 인해 고려 조정엔 또다시 피바람이 몰아친다.

경종은 955년 9월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주(), 자는 장민(長民)이다.

1. 유학 정치이념의 실현자 성종과 중앙집권 체제의 완성

(960~997년, 재위기간:981년 7월~997년 10월, 16년 3개월)

유학적 소양을 두루 갖춘 성종(成宗)이 집권하면서 고려는 유교사회로 전환하기 위한 대대적인 체제 정비작업에 돌입한다. 충효사상을 강조하고 계급질서 확립에 주력함으로써 무반과 문반으로 이뤄진 양반사회와 농·공·상으로 이뤄진 평민사회, 노비와 천민으로 이뤄진 천민사회의 구분이 명확해진다.

논리로 80만 대군을 물리친 서희와 강동 6주

서희는 광종 대에 대광 내의령을 지낸 서필의 아들이다. 서필은 광종의 귀화인 중용정책에 반대했던 인물로 사치를 싫어하고 스스로 검소하여 몇 번에 걸쳐 왕의 사치를 경계하는 간언을 하기도 했다. 또한 광종이 귀화인들에게 지나친 대접을 하며 신하들의 집을 빼앗아 그들에게 나눠주자 이에 반발하여 스스로 자기 집을 내놓겠다고 하여 광종의 잘못된 행각을 중지시키기도 했다.

1. 동성연애자 목종의 나약한 정치와 강조의 반란

(980~1009년, 재위기간:997년 10월~1009년 2월, 11년 4개월)

18세의 어린 목종(穆宗)이 집권하자 왕권은 그의 모후 헌애왕후 차지가 된다. 유난히 정권욕이 강했던 헌애왕후는 김치양과 부부연을 맺고 그들의 소생으로 왕위를 이으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고, 왕권을 상실한 목종은 도탄에 빠진 나머지 남색을 즐기며 정치를 외면한다. 이에 따라 조정이 일부 척족과 권신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면서 고려는 점점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2. 수난을 먹고 자란 군주 현종과 고려의 국력 신장

(992~1031년, 재위기간:1009년 2월~1031년 5월, 22년 3개월)

현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거란의 침입으로 몽진하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이미 수난에 이골이 난 그는 계속되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종 대 이후 과거로 등용된 인재들과 함께 고려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성공한다. 이로써 고려는 성종 이후 제2의 도약기를 맞이하게 된다.

현종은 992년 태조의 제5비 신성왕후 김씨 소생 안종 왕욱과 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 어머니와 사별하고 성종에 의해 궁중에서 양육되었으며, 1003년(목종 6년)에 12세의 나이로 대량원군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009년 2월 목종이 강조에 의해 폐립되자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18세였다.

4. 거란의 2차 침입과 불굴의 용장 양규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제일 먼저 진출한 곳은 흥화진(평북 의주)이었다. 40만 대군으로 흥화진이 포위되자 흥화진 도순검사 양규가 낭중 정성과 부사 장작 등과 함께 방비책을 세우고 성을 고수한다.

순식간에 고려군은 포위되었고, 강조는 포로가 되어 거란왕에게 끌려가야 했다. 강조를 보자 거란왕은 자신의 신하가 되길 맹세하면 살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강조는 "고려 사람으로 거란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때 행영도통부사 이현운이 "두 눈으로 이미 새 세월을 보았거늘 어찌 일편단심 옛 산천만을 생각할 수 있으랴." 하면서 거란의 신하가 되길 청했다. 이에 강조가 "너는 고려인인데 어째서 그 따위 말을 하느냐?"고 꾸짖었다. 그 소리를 듣고 거란왕은 강조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통주에서 강조가 이끌던 고려 정예군을 대파한 거란은 다시 흥화진으로 향했다. 그들은 강조의 편지를 위조하여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양규는 "우리는 왕의 명령을 받고 이곳에 왔으므로 강조의 항복 지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마디로 거절했다.

구주의 별장 김숙흥이 중랑장 보량과 함께 적군을 기습하여 1만여 명을 죽였으며, 양규는 적의 주둔지인 무로대를 급습하여 적군 2천여 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며 포로 3천여 명을 구출한다. 그 후에는 이수에서 적군 2천5백을 무찔렀으며, 여리첨에서도 1천여 명을 섬멸시켰다.

전쟁이 끝나자 현종은 양규의 전공을 포상하고 공부상서직을 추증하였으며, 그의 처 홍씨에게는 매년 벼 1백 석을 내리고 은율군군이라는 봉작을 주었다. 또한 아들 양대춘에게는 교서랑이라는 관직을 내렸다. 한편 별장 김숙흥에게는 장군직이 추증되고 그의 어머니에게 매년 곡식 50석이 내려졌다.

현종 10년에 양규와 김숙흥 두 사람에게 공히 공신록권이 발급되었고, 현종 15년에는 삼한후벽상공신 칭호가 내려졌다. 현종은 교서는 양규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병사들을 지휘하매 그 위엄은 사기를 앙등시켰고, 원수들을 추격하니 그 위력은 강토를 평안히 하였다. 정의의 칼이 빛나는 곳마다 만인이 다투어 도망쳤고, 6균(鈞)의 활을 당길 때마다 적병들이 모조리 투항했다. 이로써 성과 진이 보전되고 사기 또한 드높았다."

고려 역시 거란의 대대적인 침략을 예상하고 20만 군대를 조성하였다. 20만 군대의 상원수는 평장사 강감찬이 맡았다.

강감찬은 병력을 이끌고 흥화진으로 나아가 쇠가죽을 꿰어 흥화진 동쪽으로 흐르는 내를 막았다. 그리고 거란군이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물을 터뜨리고, 복병으로 하여금 흩어지는 거란군을 공격케 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흔히 구주대첩으로 불리는 이 싸움을 이끈 인물은 강감찬이었다. 그는 경주로부터 금주(시흥)로 이주해와 금주 호족으로 성장한 강여청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고려 건국에 공로가 있어 삼한벽상공신에 오른 강궁진이며, 본관 금주에서 949년에 감찬을 낳았다. 자칫 무인으로 알기 쉬운 그는 성종 대에 과거에 장원급제한 문인이며 누차에 걸쳐 승진을 거듭한 끝에 예부시랑, 국자제주, 한림학사, 승지, 좌산기상시, 중추사 등을 역임하고 거란의 3차 침입 당시에는 정2품의 서경유수 겸 내사문하사 평장사에 올라 있었다.

1. 덕종의 짧은 치세와 오래 기억된 ‘덕(德)’

(1016~1034년, 재위기간:1031년 5월~1034년 9월, 3년 4개월)

현종 후기의 안정은 덕종(德宗) 대에도 이어진다. 16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은 덕종은 나이답지 않은 너그러움과 섬세함을 바탕으로 명민한 정치를 펼쳐나가지만 병약한 탓으로 왕위에 오른 지 3년여 만에 생을 마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