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백의 맏딸인 유화가 두 여동생과 함께 놀고 있는데, 천제의 아들(天王子, 곧 천자이므로 왕)이라고 자칭하는 해모수란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는 유화를 압록강 가에 있는 어떤 집으로 유인하여 사욕을 채우고 떠나버린다. 그 후 유화는 임신을 하였고, 이 때문에 해모수와 관계한 사실이 탄로난다. 이에 유화의 부모는 그녀가 부모의 허락도 없이 남자와 관계를 가진 것을 질책하며 그녀를 우발수에 귀양 보낸다.

유화를 임신케 한 해모수는 이 무렵 이미 늙은 몸이었다. 그에게는 해부루라는 아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금와라는 손자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의 손자인 금와 역시 장성하여 왕위를 물려받은 상태였다. 따라서 해모수가 유화를 취한 일은 유화가 북부여 왕 해모수의 눈에 들어 수청을 강요당했을 것이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유화가 금와의 할머니뻘 된다는 사실은 동명성왕 14년인 서기전 24년에 유화가 죽자, 금와가 태후의 예에 준하여 그녀의 장례식을 치르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유화의 이 같은 당부를 받아들인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 등 세 친구와 함께 졸본 땅으로 건너간다(‘『삼국사기』에 기록된 동명성왕의 출생과 성장 이야기’ 참조).

주몽이 대소의 위협을 피해 망명한 졸본부여는 일명 ‘구려국(句麗國)’이라고 하는 곳이었다. 구려국은 흔히 ‘고리’, ‘구리’ 등의 이름으로도 불렸으며, 부여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구려는 부여, 한 등과 마찬가지로 고(古)조선 말기에 형성된 국가로 볼 수 있다.

대소의 군사들을 따돌린 주몽은 모둔곡이라는 계곡에서 세 명의 동지를 만난다. 모둔곡에서 주몽이 만난 세 명의 동지는 재사, 무골, 묵거 등이었다. 재사는 삼베옷을 입고 있었고, 무골은 장삼을 입고 있었으며, 묵거는 수초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은 자신의 신분을 밝힌 후 재사에게는 극씨, 무골에게는 종실씨, 묵거에게는 소실씨 등의 성을 내린다.

3. 동명성왕의 영토확장 전쟁과 고구려의 성장

(서기전 58년~서기전 19년, 재위기간:서기전 37년~서기전 19년, 18년)

고주몽이 왕위에 오르면서 구려라는 국호를 고구려로 개칭하고 국가의 위상을 일신하기 위해 대대적인 영토확장 정책을 실시한다.

송양이 항복하자 주몽은 비류국을 ‘옛 땅을 회복했다’는 뜻의 고구려말인 ‘다물’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 곳 왕으로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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