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인형관의 살인 ㅣ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4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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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단계의 캔버스를 보고 바로 내 ‘기억‘과 연결시킨 기사코의 통찰력은 역시 날카롭다 해야 할 것이다.

"그 후로 몇 번이나 기억해내 보려고 했는데요,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이 잘 안 나요. 너무 아득해서 손이 닿질 않아요. 뭐랄까, 뭔가 모양이 다른 조각이 잔뜩 섞인퍼즐 같은 느낌이라서요. 그래서 왠지 붓이 가는 대로 그려보면 어떨까 싶었는데........"

무서운 그림.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 기울어진 석탑의 뾰족한 끝에 가슴이 꿰뚫린 남자. 유리 십자가에 책형을 당한 인면의 야수. 고층 빌딩 사이에서 아스팔트에 배까지 삼켜진 여자. 눈이 먼 아기를 물고 있는 거대한 개. 하늘에서 늘어뜨려진 밧줄로 목을 맨 노인. 그림 한 장 한 장을 기사코는 다시 한 번 골똘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잠시 후.

어떠한 형태로든 28년 전에 어머니 미와코가 죽은 열차사고와 관련된 작품이 나올 것 같기는 한데 지금은 뭘 어떻게 그리면 될지, 어디서부터 그리면 될지 도통 갈피를 못 잡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달 전에 일어난 화재와 어머니 사와코의 죽음에 대한 내 생각. 정체불명의 인물이 보낸 두 번째 편지. 시마다 기요시에게 들은 나카무라 세이지의 이야기와 이 집 ‘인형관과의 관계.....한다.
저번 달에 연구실을 방문했을 때 나와 가케바의 대화를 언뜻 들은 기사코는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터이다. 어쩌면 나중에 가케바에게 자세한 사정을 들었는지도 모른다.

쿡쿡 쑤시는 듯한 옛 기억. 너무나 아득한 풍경.
편지를 보낸 사람이 집요하게 기억해내라‘고 되풀이해 닦달하는 것.
내 ‘죄‘, 내 ‘추악함.......
그 문제만은 어떻게든 해결하는 것이 내 간절한 소망이다. 설령 언젠가 ‘그‘에게 살해당할 운명이라 하더라도.

붉은 꽃 흐드러지게 핀 피안화, 가을바람. 붉은 하늘. 두 줄기 검은 선, 선로 다가오는 굉음. 마치 거대한 뱀 같은, 뱀의 사체 같은 열차의 모습. 흐르는 물. 어린아이.
엄마를 부르는 목소리........
때때로 마음 어딘가에서 흔들리는 그 단편들을 어떻게든 그려보자. 그렇게 생각하고 시작한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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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안채문 중 하나의 여벌열쇠를 가지고 있다.
일단 그렇게 가정하고 다음 문제로 넘어가자. 안쪽 밀실, 즉 흙광의 열쇠 문제다.
그 문에 단 자물쇠의 열쇠는 두 개 모두 내가 가지고 있다. 그리고 둘 다 안채의 다른 열쇠와 함께 열쇠 다발에 끼워두었다.

나는 다시 열쇠집에 가서 새 자물쇠를 사왔다. 그때 밀랍으로 열쇠 구멍 안쪽의 본을 떠서 여벌열쇠를 만들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가능한 것도 있습니다"라고 열쇠집 점원은 대답했다. 하지만 악용될 우려가 있으므로 아주 신용하는 손님의 의뢰만 받아들인다고 했다.

어머니의 대답에 장지문을 열자 이부자리 위에 엎드린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기모노를 벗고 하얀 나가주반*만 입고 있는 게 아닌가. 순간 나는 딱할 만큼 당황하고 말았다.
* 기모노와 같은 기장의 속옷.

심야의 방.
차가운 의자에 앉아 숨 막히는 정적에 몸을 맡긴다.
(......두려워해라.)OO는 펜을 들었다.
(두려워해라.)이만하면 그 남자도 깨닫기 시작했으리라.
자신에게 퍼부어지는 강한 적의를. 거기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를.
(두려워해라. 그리고.......)펜은 왼손으로 쥐었다.
(기억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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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갔다고 해도 열쇠가 있으면 밖에서 열리는 문은 안채에 세 개 있다. 현관문, 부엌 옆의 통용문, 그리고 서양식 저택으로 이어지는 문 세 개다. 이 문들의 열쇠를 나는 내 열쇠 다발에, 어머니는 어머니의 열쇠 다발에 각각 하나씩 보관하고 있다.

남은 가능성은 두 가지.
자물쇠의 열쇠 구멍을 이용해 여벌열쇠를 만들었거나, 혹은 사건 당일 밤에 내가 잠든 방에 숨어들어 머리맡에 놓아둔 열쇠 다발을 몰래 들고 갔거나.

나는 그제야 겨우 깨달았다.
열쇠가 문제라면 제일 먼저 의심해야 할 사람이 있지 않은가. 말할 것도 없이 미즈지리 씨 부부다.

문은 분명 잠겨 있었다. 자물쇠가 달린 문고리 자체를 문에서 떼어낸 듯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문을 경첩째로 빼낸 것은 아닐까, 라는 가능성도 고려했다. 하지만 두꺼운 판자에 회반죽을 바른 그 문은 무게가 상당할 것이다. 그렇게 쉽게 빼내기는 불가능하거니와 내가 보기에 그러한 흔적도 없었다.

나도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내 열쇠 다발은 항상 몸에 지니고 있든지 가까운 곳에 놓아두고, 열쇠 다발을 잃어버린 적도 없다. 부엌 찬장 서랍에 넣어둔 여벌열쇠도 살펴보았지만 수상한 점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범인은 어떻게 안채에 들어온 걸까.

‘범인‘은 어떻게 광에 들어갔을까.
그날 이후 되풀이해 그 문제를 풀려고 애써보았지만 이렇다 할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안채 안의, 역시 아무도 숨어들 수 없는 흙광. 하지만 실제로는 역시 누가 숨어들었다. 그 전날 밤 내가 마지막으로 광에서 나오고 나서 다음 날 정오가 지나 문을 열기 전에 누가 광에 숨어들어 또 인형에 그런 장난을 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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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관의 살인 ㅣ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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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관의 살인』 외전
― 시라카와 길을 따라 인형관을 추리하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에서 내가 가장 먼저 읽은 작품은 『기면관의 살인』이었다. 이후 『십각관의 살인』, 『수차관의 살인』, 『미로관의 살인』을 읽으면서 작품 속 ‘관’이 실제로 어디쯤에 자리 잡고 있을지를 한번쯤 추리해보고 싶었다.

특히 『십각관의 살인』과 『수차관의 살인』을 읽을 때는 지도를 펼쳐놓고 관의 위치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작품 속에 제시된 지리적 정보만으로 실제 지도 위에서 위치를 좁히기에는 단서가 부족했다. 관 자체의 구조와 주변 환경은 구체적으로 그려지지만, 실제 지명과 도로를 하나씩 대입해 위치를 찾아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인형관의 살인』은 달랐다.

작품은 인형관이 교토 사쿄구 기타시라카와(北白川)에 있다고 분명하게 밝힌다. 여기에 시라카와 길, 이마데가와 길, 긴가쿠지, 철학의 길, 난젠지, 시모가모 신사처럼 실제 교토의 지명과 도로가 구체적으로 등장하고, 히류 소이치가 어디를 걸어가고 어디를 자전거로 찾아가는지까지 묘사한다.

더구나 그곳은 내가 좋아해서 두 번이나 찾아갔던 교토다.

이 정도라면 한번 해볼 만했다.

인형관은 기타시라카와의 어디쯤에 있었을까.

추리소설을 읽다가 이번에는 범인이 아니라 인형관의 위치를 추리해보기로 했다.


1. 첫 번째 단서 ― 교토역에서 인형관으로

히류가 처음 교토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인형관으로 향하는 장면부터 상당히 구체적인 단서가 나온다.

교토역에서 출발한 택시는 약 30분을 달린다. 그리고 시라카와 길이라는 큰길에서 벗어나 산 쪽으로 들어간 뒤 모퉁이를 몇 번 돈다.

도착한 곳은 교토시 사쿄구 기타시라카와.

히류는 바로 근처에 산이 있다는 것을 보고 이곳이 교토 시내에서도 꽤 변두리에 속하겠다고 생각한다.

주변 풍경에 대한 묘사는 더욱 구체적이다.

한적한 고급 주택가이고, 살짝 가파른 도로를 사이에 두고 흙담과 산울타리가 길게 이어진다. 집마다 부지가 상당히 넓으며 큰길의 소음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인형관의 기본적인 입지 조건이 드러난다.

인형관은 시라카와 길, 즉 시라카와도리(白川通)에 바로 붙어 있는 집이 아니다. 시라카와도리에서 산 쪽으로 들어가 여러 차례 모퉁이를 돌아야 하는 곳에 있다.

또한 도로에 경사가 있고 산이 바로 근처에 있다고 묘사된다.

기타시라카와의 동쪽은 히가시야마 산지와 맞닿아 있다. 따라서 작품의 묘사를 실제 지형에 대입하면 인형관은 기타시라카와 가운데서도 시라카와도리 동쪽, 산기슭으로 올라가는 주택가 쪽에 자리 잡았다고 추정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이것이 인형관의 위치를 좁히는 첫 번째이자 가장 강력한 단서다.


2. 두 번째 단서 ― 시라카와 길을 따라 이마데가와까지

히류의 일상적인 이동에서도 중요한 단서가 나온다.

그는 어느 날 시라카와 길을 따라 이마데가와까지 내려간다.

이어 작품은 이마데가와 길이 교토 시가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주요 도로 가운데 하나이며, 동쪽에서 시라카와 길과 교차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교차점에서 좁아진 길을 동쪽으로 더 나아가면 긴가쿠지(銀閣寺)가 나온다고 덧붙인다.

시라카와도리와 이마데가와도리는 모두 실제 교토의 도로다. 두 길이 만나는 교차점도 실제로 존재하고 그곳에서 동쪽으로 들어가면 긴가쿠지에 닿는다.

소설 속 지리가 허구로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라 실제 교토의 도로망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내려간다’이다.

앞서 인형관은 시라카와도리에서 산 쪽으로 들어간 기타시라카와의 주택가에 있었다. 그런 인형관에서 나와 시라카와도리를 따라 이마데가와까지 ‘내려간다’면, 인형관은 시라카와이마데가와 교차점보다 북쪽에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첫 번째 단서가 인형관을 시라카와도리 동쪽 산기슭으로 좁혔다면, 두 번째 단서는 다시 그 위치를 이마데가와보다 북쪽으로 좁힌다.

두 조건을 겹치면 인형관이 있을 법한 공간이 제법 선명해진다.


3. 세 번째 단서 ― 긴가쿠지와 철학의 길

히류가 좋아하는 산책 장소에서도 단서를 얻을 수 있다.

히류는 긴가쿠지에서 냐쿠오지(若王子) 신사까지 이어지는 철학의 길을 특히 좋아해 관광객이 적을 만한 요일과 시간대를 골라 이따금 찾아간다고 말한다.

철학의 길은 실제로 긴가쿠지 부근에서 시작해 비와호 소수(琵琶湖疏水)를 따라 남쪽으로 이어지고 냐쿠오지 신사 부근에 이르는 약 2킬로미터의 산책길이다.

앞서 확인한 인형관의 위치와 연결해보면 이 동선도 자연스럽다.

인형관에서 산기슭의 주택가를 빠져나와 시라카와도리로 나온다. 그 길을 남쪽으로 내려가 이마데가와도리를 만나고, 거기서 동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긴가쿠지와 철학의 길에 접근할 수 있다.

따라서 철학의 길은 관광객 히류가 우연히 찾아간 명소라기보다 기타시라카와에 사는 히류의 일상적인 산책 생활권 안에 있는 장소로 그려진다.


4. 네 번째 단서 ― 걸어서 가는 곳과 자전거로 가는 곳

히류의 이동수단에서도 거리 감각을 짐작할 수 있다.

히류는 낡은 절과 신사를 싫어하지 않아 난젠지(南禪寺)와 시모가모(下鴨) 신사까지 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곳들은 근처이기는 해도 걸어가기에는 거리가 만만치 않아 자전거를 타고 갈 때가 많다고 한다.

난젠지는 철학의 길 남쪽에서 더 내려간 곳에 있고, 시모가모 신사는 기타시라카와에서 서쪽으로 떨어져 있다.

이를 지도 위에 올려놓으면 히류의 생활반경이 그려진다.

긴가쿠지와 철학의 길은 산책권, 그보다 거리가 있는 난젠지와 시모가모 신사는 자전거 생활권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기타시라카와의 인형관이 있다.

물론 사람이 어느 정도 거리를 걸을지, 언제부터 자전거를 이용할지는 개인마다 다르다. 따라서 이 단서만으로 정확한 거리를 계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앞의 두 단서로 추정한 위치가 히류의 생활 동선과 모순되지 않는지를 확인하는 보조 단서로는 충분하다.


5. 교토의 밤 ― 다이몬지 오쿠리비

작품에는 교토라는 공간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하는 장면도 있다.

히류는 어머니로 알고 살아온 이모와 함께 오쿠리비를 보러 간다.

오후 8시.

어두운 산중턱에서 불길이 번져가며 거대한 ‘大’자가 밤하늘 아래 모습을 드러내고, 이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이것은 교토의 고잔 오쿠리비(五山送り火) 가운데 다이몬지(大文字)다. 매년 8월 16일 밤 교토를 둘러싼 산에 차례로 불을 밝히며, 다이몬지는 오후 8시에 가장 먼저 점화된다. 소설에 적힌 시각도 실제 행사와 일치한다.

이 대목을 읽으니 아쉬운 마음이 더 커졌다.

사실 올해 8월 연휴에는 이 다이몬지 오쿠리비를 직접 보려고 교토에 갈 계획이었다. 8월 14일부터 17일까지 3박 일정으로 교토역 인근 호텔까지 예약해두었다. 8월 16일 밤 교토에서 거대한 ‘大’자가 산 위에 불타오르는 모습을 직접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음 달 미국 여행이 예정되어 있어 결국 교토 여행은 취소했다. 예약해두었던 숙소도 취소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늘이 바로 오쿠리비가 열리는 8월 16일이고, 나는 지금 『인형관의 살인』에서 히류가 그 불을 바라보는 장면을 읽고 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책 속의 히류가 바라보았던 것과 같은 ‘大’자를 나도 교토의 밤하늘 아래서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장면이 더욱 아쉽게 다가온다.

올해는 책 속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8월 16일의 교토에서 그 불을 직접 보고 싶다.

다만 이 장면은 인형관의 위치를 좁히는 직접적인 단서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히류와 이모가 인형관에서 다이몬지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오쿠리비를 보기 위해 이동한 뒤 바라본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장면은 『인형관의 살인』의 교토가 단순한 배경지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도로와 동네, 절과 신사뿐 아니라 교토 사람들이 계절 속에서 경험하는 풍경과 행사까지 소설 안으로 들어와 있다.


6. 지도 위에 인형관을 세워보다

이제 지금까지의 단서를 하나씩 겹쳐보았다.

첫째, 작품은 인형관의 소재지를 사쿄구 기타시라카와라고 명시한다.

둘째, 교토역에서 택시로 약 30분을 달려 시라카와도리라는 큰길에서 산 쪽으로 들어가 모퉁이를 몇 번 돌아야 인형관에 도착한다.

셋째, 인형관 주변은 산이 가깝고 도로에 경사가 있는 한적한 고급 주택가이며, 큰길의 소음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넷째, 히류는 시라카와도리를 따라 이마데가와까지 내려간다. 따라서 인형관은 시라카와이마데가와 교차점보다 북쪽에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다섯째, 긴가쿠지와 철학의 길은 히류가 즐겨 찾는 산책 생활권이고, 조금 더 떨어진 난젠지와 시모가모 신사는 자전거 생활권이다.

이 조건들을 실제 교토 지도 위에 차례로 겹치면 인형관의 위치는 처음보다 훨씬 좁혀진다.

시라카와이마데가와 교차점보다 북쪽에 있는 기타시라카와, 시라카와도리에서 동쪽 산 방향으로 들어간 경사진 주택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시라카와도리에서 산 쪽으로 들어간 기타시라카와 시부세초(北白川仕伏町)에서 야마노모토초(北白川山ノ元町) 일대의 산기슭 주택가를 유력한 범위로 추정해볼 수 있다. 다만 이는 작품에 정확한 주소가 제시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확인한 지명과 이동 방향, 지형 묘사를 실제 지도에 대입해 얻은 추정이다.

아마 이 정도가 소설이 허락하는 가장 합리적인 추정 범위일 것이다.

정확한 골목이나 번지를 지목하는 순간부터는 근거보다 상상이 앞서게 된다. 그러니 인형관을 찾아가는 우리의 추리는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지도 위에는 이미 인형관 하나가 생겼다.

실제로 존재하는 집은 아니지만, 기타시라카와의 산기슭 어느 한적한 골목을 바라보면 아야츠지가 그곳 어딘가에 인형관을 세워두었을 것 같은 공간이 그려진다.


7. 소설이 불러낸 다시 가고 싶은 교토

나는 교토에 두 번 갔다.

그 가운데 한 번은 비와호로 가기 위해 교토를 거쳐간 것이었다. 두 번이나 교토를 찾았지만 금각사와 은각사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인형관의 살인』을 읽기 전까지 은각사는 그저 다음 교토 여행에서 한번 가봐야 할 곳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가 시라카와 길이라는 이름을 만났고, 이마데가와 길을 만났으며, 그 길의 끝에서 은각사를 만났다. 다시 지도를 펼치자 기타시라카와에서 은각사와 철학의 길, 냐쿠오지 신사와 난젠지가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졌다.

철학의 길 옆으로 흐르는 물이 비와호에서 끌어온 소수라는 사실까지 생각하면, 전에 찾아갔던 비와호와 아직 걷지 못한 교토의 길도 내 여행의 기억 속에서 연결된다.

특히 다음에 교토에 가면 은각사에서 시작해 철학의 길을 꼭 걸어보고 싶다.

은각사를 나와 비와호 소수를 따라 천천히 남쪽으로 걷고, 냐쿠오지 신사를 지나 난젠지까지 이어가 보고 싶다. 『인형관의 살인』에서 히류가 좋아해 이따금 찾았다는 길을 이번에는 내가 직접 걸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가고 싶은 곳이 하나 더 있다.

기요미즈데라(清水寺), 청수사다.

전에 찾았던 때는 2월이었다. 아직 겨울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경내에는 매화가 조금씩 꽃을 피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겨울 끝자락에서 봄을 준비하던 청수사의 모습이었다.

그 청수사를 이번에는 가을에 다시 보고 싶다.

단풍이 산을 덮고, 붉고 노란 잎 사이로 청수사의 무대가 모습을 드러내는 계절. 2월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매화가 피기 시작하던 청수사를 기억하고 있기에, 가을의 청수사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것 같다.

사실 이번 여름에도 교토로 갈 뻔했다. 아니, 오늘이 바로 그곳에 있어야 했던 날이다. 8월 16일 다이몬지 오쿠리비를 보기 위해 숙소까지 예약해두었다가 다음 달 미국 여행 때문에 취소했다. 계획대로였다면 지금쯤 교토 어딘가에서 밤이 오기를 기다리며 다이몬지산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교토는 두 번 다녀온 도시이면서도 아직 보고 싶은 것과 걷고 싶은 길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래서 다음 교토는 가을에 꼭 가고 싶다.

기타시라카와에서 시라카와 길을 걸어보고 싶다. 큰길에서 동쪽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골목으로 들어가 소설 속 인형관이 있었을 법한 주택가도 천천히 둘러보고 싶다. 이마데가와까지 내려와 은각사를 보고, 그곳에서 철학의 길로 들어서 냐쿠오지 신사와 난젠지까지 걸어보고 싶다.

그리고 하루쯤은 다시 청수사를 찾아가고 싶다.

2월에 매화가 막 피기 시작하던 그곳에서 이번에는 가을 단풍을 바라보고 싶다. 한 장소를 다른 계절에 다시 찾는 것도 여행이 주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인형관의 정확한 주소는 찾을 수 없다.

그래도 기타시라카와의 경사진 골목을 걷다 보면 한번쯤 멈춰 서서 주변을 바라보게 될 것 같다.

‘시라카와 길에서 산 쪽으로 들어와 모퉁이를 몇 번 돌면…… 아야츠지가 세운 인형관도 이런 곳에 있지 않았을까.’

추리소설 한 권을 읽다가 범인 말고 집 한 채의 위치를 추리했다.

그 집을 찾아 지도 위의 교토를 돌아다니다 보니 은각사와 철학의 길을 만났고, 이번 여름에 보지 못한 다이몬지의 불도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2월에 찾았던 청수사를 이번에는 단풍 속에서 다시 보고 싶어졌다.

이번 여름에는 가지 못했지만, 교토는 다시 갈 것이다.

다음에는 시라카와 길을 따라 인형관을 추리했던 바로 그 길을 직접 걸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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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앞뜰 나무 사이로 모습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악의가 느껴져 나는 가벼운 구역질과도 비슷한 기분을 맛보았다.

열쇠는 나와 어머니가 하나씩 가지고 있다. 여벌열쇠는 부엌 찬장 서랍에 넣어두었다. 덧붙여 광에 단 자물쇠의 열쇠 두 개는 내가 보관하고 있다.

"하지만 참 별일이지? 아무리 봐도 저절로 굴러왔다기보다는 누가 놓아둔 듯한 느낌이 들어."

긴가쿠지에서 냐쿠오지若王子 신사까지 이어지는 ‘철학의 길‘은 특히 좋아하는 곳이라 이따금 관광객이 적을 듯한 요일과 시간대를 골라 나가 본다. 저번 달 여자아이 타살 시체가 발견된 절은 이 길 근처에 있다.

그렇게 멀리 산책 나갈 때 타는 자전거 브레이크가 망가졌다.
10월 16일 금요일 오후의 일이다.

"가끔은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그렇지, 소이치?"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 이런 제안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 애들 장난일 거야. 하지만 이른 아침인데.. 초등학생이 학교 가기 전에 그런 장난을 칠까 싶기도 하고. 고양이를 기르는 집은 현관 앞에 빈 캔이나빈 병이 놓여 있으면 조심해야 한다지만 우리는 고양이도 안 기르는데."

"요전에 구라타니 씨랑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혼자 살다 보니 밥 먹을 때 되게 적적하다는구나. 밖에서 때우는 경우도 허다하고...... 쓰지이 씨랑 가능하면 기즈가와 씨도 불러서 냄비요리라도 대접하면 어떨까? 모두 혼자 사니까 분명 좋아할 것 같은데."

"낮에 미리 고양이가 있는 집을 찾아둔대. 좋은 고양이가 있는 집에 빈 캔을 놓아 표시를 하고 밤에 고양이를 훔치러 온다나 봐."
"그럼 훔친 고양이는 샤미센 가죽으로?"

낡은 절과 신사도 싫어하지는 않기에 난젠지南禪寺 절이나 시모가모下鴨 신사까지 갈 때도 있다. 이처럼 근처이기는 하지만 걸어가기에는 거리가 만만치 않은 곳은자전거를 타고 갈 때가 많다.

학교 갔다 돌아오는 아이들 몇 명이 좌우로 퍼져서 이쪽으로 걸어오다가 두 발을 땅에 질질 끌면서 언덕길을 달려오는 자전거를 보고 깜짝 놀라 멈춰 섰다. 몹시 당황한 내 얼굴이 아주 무시무시했던 것이 틀림없다.

셔츠 팔꿈치 부분이 찢어져 드러난 살에 피가 맺혔다. 바지는 찢어지지 않았지만 팔꿈치만큼 아팠다.
상처 치료는 뒤로 미루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자전거 브레이크부터 살폈다. 그리하여 판명된 사실.
핸들 레버와 브레이크를 잇는 와이어 두 줄이 모조리 끊어져 있었다.

아스팔트에 왼쪽 무릎과 어깨, 팔꿈치를 호되게 찧었다. 숨이 턱 막혀 잠시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아저씨, 괜찮아요?"

구라타니는 물론 쓰지이도 예상 외로 어머니의 초대를 환영했지만, 기즈가와는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하고 거절했다고 한다. 말투로 보아 육체적인 장애보다 다른두 사람과의 나이 차가 신경 쓰인 것 아니겠냐고 어머니는 말했다.

"당신의 아버지 히류 고요 씨는 후지누마 잇세이 화백과 자별한 사이였죠. 당연히 화백의 아들인 기이치 씨와도 알고 지냈을 겁니다. 그런 인간관계를 고려해보면, 저쪽 서양식 저택을 개축할 때 고요 씨가 나카무라 세이지에게 일을 의뢰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큽니다."

"나카무라 세이지. 푸를 청靑자에 맡을 사司자를 써서 세이지입니다."
기억 속에 있는 이름이었다. 분명..
"어떤 건축가의 이름이에요. 벌써 죽었지만, 아주 흥미로운 사람이거든요."

만약 구라타니가 광에 숨어들었던 ‘범인‘이라면 그쪽 복도에 인형이 놓여 있다는 것을 당연히 알 것이다. 그런데 안채에도 인형이 있느냐고 물어보다니, 모르는 척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걸까.
결국 어느 쪽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쓰지이의 말과 표정을 관찰한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깔깔 웃는 어머니의 목덜미는 옅은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옛날부터 술을 좋아해서 아버지 이케오가 건재했을 때는 매일 밤 둘이서 저녁 반주를 들었다. 지금도 그 습관은 변함이 없어 자기 전에는 늘 청주나 맥주를 마신다. 가끔 같이 마실 때도 있지만 나는 술이 그리 센 편이 아니다. 그래도 이날 밤은 권해주는 대로 비교적 많이 마셨다.

"와, 이 집을 무대로 말입니까?"
구라타니가 탄성을 질렀다.
"인형관의 살인이었던가요?"

"쓰지이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떤 녀석이 범인일까요? 이대로 내버려두면 세 번째 사건이 일어날까요?"
"흠, 글쎄."
쓰지이는 퉁명스레 대답하더니 술잔의 술을 쭉 들이켰다.
"그런 현실의 사건에는 흥미가 없어. 지금 당장은 내 소설 속 살인사건만으로도 힘에 부치거든."
"이야, 그럼 지금 쓰고 계신 건 미스터리 소설?"

지금은 죽고 없는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 그가 지은 몇 채의 관館. 거기서 일어난 몇 가지 사건.......
쓰디쓴 술에 거나하게 취한 내 머릿속에 작년 가을에 입원한 나를 병문안 왔던 한 친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갑자기 구역질이 치밀어서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것은 불쌍한 작은 동물의 사체였다. 털이 하얗고 조그만 고양이 사체.
"I.끔찍해.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어머니가 비명을 지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나 비참한 모습이었다. 죽은 새끼 고양이의 작디작은 머리가 납작이 짓눌려 있었다.
10월 24일 토요일 아침의 일이었다.

처음은 광의 인형이었다. 이때 나는 안채와 연립주택 사이의 문을 수리했고, 광 문에는 자물쇠를 달았다. 그 결과 안채에 숨어들 수 없게 된 ‘범인‘은 활동 장소를 집밖으로 옮겨........
우편함에 들어 있던 유리 조각. 현관에 놓여 있던 돌도 포함한다 치고 그다음은 자전거 브레이크. 그리고 머리가 찌부러진 새끼 고양이 사체.
그런 행동에 일관되게 담겨 있는 것은 틀림없이 ‘악의‘다. 우리, 아니 주로 나 개인을 향한 사악한 감정....
물론 어머니도 피해를 입기는 입었다.

마네킹에 묻은 피, 우편함 속의 유리 조각, 현관의 돌, 자전거 브레이크, 고양이 사체. 전부 ㅇㅇ가 저지른 일이다.
그 남자를 겁주기 위해서. 그리하여 싹 다 잊은 듯이 태평하게 살고 있는 그 남자가 자신의 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아직 모자라다.
아직 그 남자는 남겨놓은 메시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직.......
(두려워해라.)주문처럼 OO는 되풀이했다.
(두려워해라. 그리고.......)

누군가의 악의는 점점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듯도 하다. 이대로 점점 심해지는 걸까. 그리고 그(혹은 그녀)는 최종적으로 뭘 바라는 걸까.
이제 그만, 단정해도 상관없을 듯하다.
누군가 나를 노리고 있다.

10월 28일 수요일 오후 4시 반. 장소는 커피집 라임.
어젯밤 가케바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 후로 어떻게 지내느냐는 안부전화였다.
정말 바라 마지않던 연락이었다. 요 한 달 동안 내 신변에 잇달아 일어난 일에 대해 제3자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다. 마침 그럴 때 가케바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실제로 나는 두 번이나 육체적인 피해를 입었다.
유리에 손가락을 베인 정도라면 장난이라는 말로 넘어갈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자전거 브레이크를 망가뜨린 건 어떠한가. 타기 전에 잠깐 점검했다면 바로 알아차릴 만한 고장이기는 했지만, 반대로 까딱 잘못했으면 그 정도의 상처로는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누가? 뭣 때문에?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거야. 요는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벌어진 일의 의미가 이렇게나 바뀐다는 거지. 누군가 널 노린다고 그랬는데 다르게 해석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고. 물론 네 ‘해석‘을 전부 부정하는 건 아니야. 어쩌면 네 해석이 전면적으로 올바른 해답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오늘 네 모습을 보니 좀 걱정이 돼서."

전혀 짐작 가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다. .그때.
목 아랫부분에서 정수리를 향해 약한 전류가 흘러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늘그 느낌과 더불어 눈앞의 현실이 균형을 잃고 묘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예를 들어 넌 동일인물이 그 일을 전부 다 저질렀다고 가정했는데, 과연 그럴까?"
"아니라는 거야?"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거지. 만약 그렇다면 네가 말하는 상대의 ‘악의‘ 역시 저절로 그 성격이 달라져."

"아니, 그럴 것까지는."
"뭐,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너무 골똘히 생각하다 노이로제라도 걸리면 어떻게 하냐. 그건 내 전공이 아니란 말이야."

지금처럼 강한 ‘요동‘을 경험한 것은 딱 한 번뿐이다. 저번 달 중순경 이 가게 이 자리에서 지금처럼 가케바 히사시게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던 바로 그때.......
이건 뭘까.
이건.
혹시 내 마음 깊은 곳에 묻혀 있는 무슨 기억?

라임을 나선 나는 가케바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꼭 한 번 우리 집을, 특히 별채인 서양식 저택을 구경하고 싶다고 그가 말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범인은 여섯 명의 몸에서 별자리의 축복을 받은 부분을 모아 ‘아조트‘라는 이상적인 인체를 창조하려 한 모양인데, 이게 실은......."

나는 일부러 차갑게 대답했다. 가케바는 위쪽이 뻥 뚫린 홀의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물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일어난 우메자와梅澤가 사건*이라고 알아?"
* 작가 주 : 이 사건에 대해서는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고단샤, 1981)에 자세하게 쓰여 있다.
"우메자와 가 사건?"
"쇼와昭和 11년*이었나. 도쿄에서 일어난 유명한 살인사건이야. 여자 여섯 명이 각각 두부頭部, 흉부胸部, 복부腹部, 요부腰部, 대퇴부大腿部, 하족부下足部를 절단당하고, 절단된 부분이 사라진 시체로 발견됐다고 해."
*서기 1936년.

어제 라임에서 가케바와 이야기할 때 경험한 그 기묘한 현실의 붕괴감. 도대체 그것은 뭐였을까.
그전에도 몇 번인가 경험한 적이 있는 감각이지만, 적어도 어제는 가케바가 던진 어떤 질문에 호응하듯이 그 현상이 일어났다. 누가 나를 노릴 만한 이유가 짐작은가느냐? 그 질문을 받았을 때,
다

아침 10시쯤에 일어났을 때부터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분명 어젯밤 또 ‘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깼었기 때문이리라.
누군가 같은 지붕 아래 있다. 그 움직임, 그 숨결, 그........

"마네킹 하면 밀랍인형처럼 틀림없이 밀랍으로 만들었을 줄 알았는데 아니네."
"다이쇼大正* 시대 당시에 수입된 건 밀랍이었대. 최근에는 FRP라는 강화 플라스틱만 써서 만든다던가. 아버지는 아무래도 독자적으로 이런저런 소재를 시험해본모양이지만."
*다이쇼 천황 시대의 연호. 1912~1926.

라임에서 조언해준 가케바의 말에는 역시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뭐든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것 정도는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잘 안다. 나쁘게 해석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고 정신건강에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그가 어제 광의 인형 사건 말고 다른 사건을 ‘우연‘과 ‘별 뜻 없는 장난‘으로 설명하려 든 것은 억지가 아닐까.

"어제는 정말 깜짝 놀랐어."
어머니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웬일로 손님이 왔나 했더니 가케바 아니겠니. 고등학교 때 우리 집에 몇 번 놀러 왔었지. 교토에서 다시 만나다니 우연도 참 이런 우연이 어디 있을까."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연 후 전등 스위치를 더듬어 찾으며 광 안으로 한 발 들어선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입을 떡 벌리고 눈을 부릅떴다.
"이, 이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쓰러진 인형들의 몸을 물들인 강렬한 색! 빨간 그림물감이 또 그녀들의 하얀 살갗에 마구 처발라져 있었다.

광의 문은 틀림없이 밖에서 자물쇠로 잠가두었다. 여벌열쇠를 포함해 자물쇠 열쇠 두 개는 전부 내가 보관한다. 문 말고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만한 통로는 없다. 벽높은 곳에 둥그런 채광창 몇 개가 있지만 지름은 기껏해야 30에서 40센티미터 정도이고 안쪽에는 철망이 쳐져 있다.

현실의 색채가 어지러이 흐트러지며 마음속 어딘가에서 들린 목소리는.......
.엄......엄마.엄마는?
......어디 있어?!
.뭐였을까.
아아, 뭐였을까.
어찌 되었든 나는 다시금 확신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참상‘이라고 표현해도 되리라.
방구석에 모아둔 인형들이 모조리 한가운데로 끌려나와 있었다. 어떤 것은 팔이 하나 없고, 어떤 것은 다리가 하나 없고...... 두 팔이 없는 것, 하반신이 없는 것, 머리가 없는 것, 번번한 얼굴만 있는 것...... 그런 그녀들이 위를 보거나 엎드리거나 포개어진 상태로 쓰러져 있다. 너무나도 난잡한 그 모습에서는 완성한 나무 블록 집을자기 손으로 허물어뜨리는 어린아이의 흉포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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