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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관의 살인 ㅣ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인형관의 살인』 외전
― 시라카와 길을 따라 인형관을 추리하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에서 내가 가장 먼저 읽은 작품은 『기면관의 살인』이었다. 이후 『십각관의 살인』, 『수차관의 살인』, 『미로관의 살인』을 읽으면서 작품 속 ‘관’이 실제로 어디쯤에 자리 잡고 있을지를 한번쯤 추리해보고 싶었다.
특히 『십각관의 살인』과 『수차관의 살인』을 읽을 때는 지도를 펼쳐놓고 관의 위치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작품 속에 제시된 지리적 정보만으로 실제 지도 위에서 위치를 좁히기에는 단서가 부족했다. 관 자체의 구조와 주변 환경은 구체적으로 그려지지만, 실제 지명과 도로를 하나씩 대입해 위치를 찾아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인형관의 살인』은 달랐다.
작품은 인형관이 교토 사쿄구 기타시라카와(北白川)에 있다고 분명하게 밝힌다. 여기에 시라카와 길, 이마데가와 길, 긴가쿠지, 철학의 길, 난젠지, 시모가모 신사처럼 실제 교토의 지명과 도로가 구체적으로 등장하고, 히류 소이치가 어디를 걸어가고 어디를 자전거로 찾아가는지까지 묘사한다.
더구나 그곳은 내가 좋아해서 두 번이나 찾아갔던 교토다.
이 정도라면 한번 해볼 만했다.
인형관은 기타시라카와의 어디쯤에 있었을까.
추리소설을 읽다가 이번에는 범인이 아니라 인형관의 위치를 추리해보기로 했다.
1. 첫 번째 단서 ― 교토역에서 인형관으로
히류가 처음 교토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인형관으로 향하는 장면부터 상당히 구체적인 단서가 나온다.
교토역에서 출발한 택시는 약 30분을 달린다. 그리고 시라카와 길이라는 큰길에서 벗어나 산 쪽으로 들어간 뒤 모퉁이를 몇 번 돈다.
도착한 곳은 교토시 사쿄구 기타시라카와.
히류는 바로 근처에 산이 있다는 것을 보고 이곳이 교토 시내에서도 꽤 변두리에 속하겠다고 생각한다.
주변 풍경에 대한 묘사는 더욱 구체적이다.
한적한 고급 주택가이고, 살짝 가파른 도로를 사이에 두고 흙담과 산울타리가 길게 이어진다. 집마다 부지가 상당히 넓으며 큰길의 소음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인형관의 기본적인 입지 조건이 드러난다.
인형관은 시라카와 길, 즉 시라카와도리(白川通)에 바로 붙어 있는 집이 아니다. 시라카와도리에서 산 쪽으로 들어가 여러 차례 모퉁이를 돌아야 하는 곳에 있다.
또한 도로에 경사가 있고 산이 바로 근처에 있다고 묘사된다.
기타시라카와의 동쪽은 히가시야마 산지와 맞닿아 있다. 따라서 작품의 묘사를 실제 지형에 대입하면 인형관은 기타시라카와 가운데서도 시라카와도리 동쪽, 산기슭으로 올라가는 주택가 쪽에 자리 잡았다고 추정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이것이 인형관의 위치를 좁히는 첫 번째이자 가장 강력한 단서다.
2. 두 번째 단서 ― 시라카와 길을 따라 이마데가와까지
히류의 일상적인 이동에서도 중요한 단서가 나온다.
그는 어느 날 시라카와 길을 따라 이마데가와까지 내려간다.
이어 작품은 이마데가와 길이 교토 시가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주요 도로 가운데 하나이며, 동쪽에서 시라카와 길과 교차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교차점에서 좁아진 길을 동쪽으로 더 나아가면 긴가쿠지(銀閣寺)가 나온다고 덧붙인다.
시라카와도리와 이마데가와도리는 모두 실제 교토의 도로다. 두 길이 만나는 교차점도 실제로 존재하고 그곳에서 동쪽으로 들어가면 긴가쿠지에 닿는다.
소설 속 지리가 허구로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라 실제 교토의 도로망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내려간다’이다.
앞서 인형관은 시라카와도리에서 산 쪽으로 들어간 기타시라카와의 주택가에 있었다. 그런 인형관에서 나와 시라카와도리를 따라 이마데가와까지 ‘내려간다’면, 인형관은 시라카와이마데가와 교차점보다 북쪽에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첫 번째 단서가 인형관을 시라카와도리 동쪽 산기슭으로 좁혔다면, 두 번째 단서는 다시 그 위치를 이마데가와보다 북쪽으로 좁힌다.
두 조건을 겹치면 인형관이 있을 법한 공간이 제법 선명해진다.
3. 세 번째 단서 ― 긴가쿠지와 철학의 길
히류가 좋아하는 산책 장소에서도 단서를 얻을 수 있다.
히류는 긴가쿠지에서 냐쿠오지(若王子) 신사까지 이어지는 철학의 길을 특히 좋아해 관광객이 적을 만한 요일과 시간대를 골라 이따금 찾아간다고 말한다.
철학의 길은 실제로 긴가쿠지 부근에서 시작해 비와호 소수(琵琶湖疏水)를 따라 남쪽으로 이어지고 냐쿠오지 신사 부근에 이르는 약 2킬로미터의 산책길이다.
앞서 확인한 인형관의 위치와 연결해보면 이 동선도 자연스럽다.
인형관에서 산기슭의 주택가를 빠져나와 시라카와도리로 나온다. 그 길을 남쪽으로 내려가 이마데가와도리를 만나고, 거기서 동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긴가쿠지와 철학의 길에 접근할 수 있다.
따라서 철학의 길은 관광객 히류가 우연히 찾아간 명소라기보다 기타시라카와에 사는 히류의 일상적인 산책 생활권 안에 있는 장소로 그려진다.
4. 네 번째 단서 ― 걸어서 가는 곳과 자전거로 가는 곳
히류의 이동수단에서도 거리 감각을 짐작할 수 있다.
히류는 낡은 절과 신사를 싫어하지 않아 난젠지(南禪寺)와 시모가모(下鴨) 신사까지 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곳들은 근처이기는 해도 걸어가기에는 거리가 만만치 않아 자전거를 타고 갈 때가 많다고 한다.
난젠지는 철학의 길 남쪽에서 더 내려간 곳에 있고, 시모가모 신사는 기타시라카와에서 서쪽으로 떨어져 있다.
이를 지도 위에 올려놓으면 히류의 생활반경이 그려진다.
긴가쿠지와 철학의 길은 산책권, 그보다 거리가 있는 난젠지와 시모가모 신사는 자전거 생활권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기타시라카와의 인형관이 있다.
물론 사람이 어느 정도 거리를 걸을지, 언제부터 자전거를 이용할지는 개인마다 다르다. 따라서 이 단서만으로 정확한 거리를 계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앞의 두 단서로 추정한 위치가 히류의 생활 동선과 모순되지 않는지를 확인하는 보조 단서로는 충분하다.
5. 교토의 밤 ― 다이몬지 오쿠리비
작품에는 교토라는 공간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하는 장면도 있다.
히류는 어머니로 알고 살아온 이모와 함께 오쿠리비를 보러 간다.
오후 8시.
어두운 산중턱에서 불길이 번져가며 거대한 ‘大’자가 밤하늘 아래 모습을 드러내고, 이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이것은 교토의 고잔 오쿠리비(五山送り火) 가운데 다이몬지(大文字)다. 매년 8월 16일 밤 교토를 둘러싼 산에 차례로 불을 밝히며, 다이몬지는 오후 8시에 가장 먼저 점화된다. 소설에 적힌 시각도 실제 행사와 일치한다.
이 대목을 읽으니 아쉬운 마음이 더 커졌다.
사실 올해 8월 연휴에는 이 다이몬지 오쿠리비를 직접 보려고 교토에 갈 계획이었다. 8월 14일부터 17일까지 3박 일정으로 교토역 인근 호텔까지 예약해두었다. 8월 16일 밤 교토에서 거대한 ‘大’자가 산 위에 불타오르는 모습을 직접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음 달 미국 여행이 예정되어 있어 결국 교토 여행은 취소했다. 예약해두었던 숙소도 취소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늘이 바로 오쿠리비가 열리는 8월 16일이고, 나는 지금 『인형관의 살인』에서 히류가 그 불을 바라보는 장면을 읽고 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책 속의 히류가 바라보았던 것과 같은 ‘大’자를 나도 교토의 밤하늘 아래서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장면이 더욱 아쉽게 다가온다.
올해는 책 속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8월 16일의 교토에서 그 불을 직접 보고 싶다.
다만 이 장면은 인형관의 위치를 좁히는 직접적인 단서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히류와 이모가 인형관에서 다이몬지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오쿠리비를 보기 위해 이동한 뒤 바라본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장면은 『인형관의 살인』의 교토가 단순한 배경지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도로와 동네, 절과 신사뿐 아니라 교토 사람들이 계절 속에서 경험하는 풍경과 행사까지 소설 안으로 들어와 있다.
6. 지도 위에 인형관을 세워보다
이제 지금까지의 단서를 하나씩 겹쳐보았다.
첫째, 작품은 인형관의 소재지를 사쿄구 기타시라카와라고 명시한다.
둘째, 교토역에서 택시로 약 30분을 달려 시라카와도리라는 큰길에서 산 쪽으로 들어가 모퉁이를 몇 번 돌아야 인형관에 도착한다.
셋째, 인형관 주변은 산이 가깝고 도로에 경사가 있는 한적한 고급 주택가이며, 큰길의 소음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넷째, 히류는 시라카와도리를 따라 이마데가와까지 내려간다. 따라서 인형관은 시라카와이마데가와 교차점보다 북쪽에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다섯째, 긴가쿠지와 철학의 길은 히류가 즐겨 찾는 산책 생활권이고, 조금 더 떨어진 난젠지와 시모가모 신사는 자전거 생활권이다.
이 조건들을 실제 교토 지도 위에 차례로 겹치면 인형관의 위치는 처음보다 훨씬 좁혀진다.
시라카와이마데가와 교차점보다 북쪽에 있는 기타시라카와, 시라카와도리에서 동쪽 산 방향으로 들어간 경사진 주택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시라카와도리에서 산 쪽으로 들어간 기타시라카와 시부세초(北白川仕伏町)에서 야마노모토초(北白川山ノ元町) 일대의 산기슭 주택가를 유력한 범위로 추정해볼 수 있다. 다만 이는 작품에 정확한 주소가 제시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확인한 지명과 이동 방향, 지형 묘사를 실제 지도에 대입해 얻은 추정이다.
아마 이 정도가 소설이 허락하는 가장 합리적인 추정 범위일 것이다.
정확한 골목이나 번지를 지목하는 순간부터는 근거보다 상상이 앞서게 된다. 그러니 인형관을 찾아가는 우리의 추리는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지도 위에는 이미 인형관 하나가 생겼다.
실제로 존재하는 집은 아니지만, 기타시라카와의 산기슭 어느 한적한 골목을 바라보면 아야츠지가 그곳 어딘가에 인형관을 세워두었을 것 같은 공간이 그려진다.
7. 소설이 불러낸 다시 가고 싶은 교토
나는 교토에 두 번 갔다.
그 가운데 한 번은 비와호로 가기 위해 교토를 거쳐간 것이었다. 두 번이나 교토를 찾았지만 금각사와 은각사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인형관의 살인』을 읽기 전까지 은각사는 그저 다음 교토 여행에서 한번 가봐야 할 곳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가 시라카와 길이라는 이름을 만났고, 이마데가와 길을 만났으며, 그 길의 끝에서 은각사를 만났다. 다시 지도를 펼치자 기타시라카와에서 은각사와 철학의 길, 냐쿠오지 신사와 난젠지가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졌다.
철학의 길 옆으로 흐르는 물이 비와호에서 끌어온 소수라는 사실까지 생각하면, 전에 찾아갔던 비와호와 아직 걷지 못한 교토의 길도 내 여행의 기억 속에서 연결된다.
특히 다음에 교토에 가면 은각사에서 시작해 철학의 길을 꼭 걸어보고 싶다.
은각사를 나와 비와호 소수를 따라 천천히 남쪽으로 걷고, 냐쿠오지 신사를 지나 난젠지까지 이어가 보고 싶다. 『인형관의 살인』에서 히류가 좋아해 이따금 찾았다는 길을 이번에는 내가 직접 걸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가고 싶은 곳이 하나 더 있다.
기요미즈데라(清水寺), 청수사다.
전에 찾았던 때는 2월이었다. 아직 겨울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경내에는 매화가 조금씩 꽃을 피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겨울 끝자락에서 봄을 준비하던 청수사의 모습이었다.
그 청수사를 이번에는 가을에 다시 보고 싶다.
단풍이 산을 덮고, 붉고 노란 잎 사이로 청수사의 무대가 모습을 드러내는 계절. 2월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매화가 피기 시작하던 청수사를 기억하고 있기에, 가을의 청수사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것 같다.
사실 이번 여름에도 교토로 갈 뻔했다. 아니, 오늘이 바로 그곳에 있어야 했던 날이다. 8월 16일 다이몬지 오쿠리비를 보기 위해 숙소까지 예약해두었다가 다음 달 미국 여행 때문에 취소했다. 계획대로였다면 지금쯤 교토 어딘가에서 밤이 오기를 기다리며 다이몬지산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교토는 두 번 다녀온 도시이면서도 아직 보고 싶은 것과 걷고 싶은 길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래서 다음 교토는 가을에 꼭 가고 싶다.
기타시라카와에서 시라카와 길을 걸어보고 싶다. 큰길에서 동쪽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골목으로 들어가 소설 속 인형관이 있었을 법한 주택가도 천천히 둘러보고 싶다. 이마데가와까지 내려와 은각사를 보고, 그곳에서 철학의 길로 들어서 냐쿠오지 신사와 난젠지까지 걸어보고 싶다.
그리고 하루쯤은 다시 청수사를 찾아가고 싶다.
2월에 매화가 막 피기 시작하던 그곳에서 이번에는 가을 단풍을 바라보고 싶다. 한 장소를 다른 계절에 다시 찾는 것도 여행이 주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인형관의 정확한 주소는 찾을 수 없다.
그래도 기타시라카와의 경사진 골목을 걷다 보면 한번쯤 멈춰 서서 주변을 바라보게 될 것 같다.
‘시라카와 길에서 산 쪽으로 들어와 모퉁이를 몇 번 돌면…… 아야츠지가 세운 인형관도 이런 곳에 있지 않았을까.’
추리소설 한 권을 읽다가 범인 말고 집 한 채의 위치를 추리했다.
그 집을 찾아 지도 위의 교토를 돌아다니다 보니 은각사와 철학의 길을 만났고, 이번 여름에 보지 못한 다이몬지의 불도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2월에 찾았던 청수사를 이번에는 단풍 속에서 다시 보고 싶어졌다.
이번 여름에는 가지 못했지만, 교토는 다시 갈 것이다.
다음에는 시라카와 길을 따라 인형관을 추리했던 바로 그 길을 직접 걸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