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앞뜰 나무 사이로 모습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악의가 느껴져 나는 가벼운 구역질과도 비슷한 기분을 맛보았다.
열쇠는 나와 어머니가 하나씩 가지고 있다. 여벌열쇠는 부엌 찬장 서랍에 넣어두었다. 덧붙여 광에 단 자물쇠의 열쇠 두 개는 내가 보관하고 있다.
"하지만 참 별일이지? 아무리 봐도 저절로 굴러왔다기보다는 누가 놓아둔 듯한 느낌이 들어."
긴가쿠지에서 냐쿠오지若王子 신사까지 이어지는 ‘철학의 길‘은 특히 좋아하는 곳이라 이따금 관광객이 적을 듯한 요일과 시간대를 골라 나가 본다. 저번 달 여자아이 타살 시체가 발견된 절은 이 길 근처에 있다.
그렇게 멀리 산책 나갈 때 타는 자전거 브레이크가 망가졌다. 10월 16일 금요일 오후의 일이다.
"가끔은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그렇지, 소이치?"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 이런 제안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 애들 장난일 거야. 하지만 이른 아침인데.. 초등학생이 학교 가기 전에 그런 장난을 칠까 싶기도 하고. 고양이를 기르는 집은 현관 앞에 빈 캔이나빈 병이 놓여 있으면 조심해야 한다지만 우리는 고양이도 안 기르는데."
"요전에 구라타니 씨랑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혼자 살다 보니 밥 먹을 때 되게 적적하다는구나. 밖에서 때우는 경우도 허다하고...... 쓰지이 씨랑 가능하면 기즈가와 씨도 불러서 냄비요리라도 대접하면 어떨까? 모두 혼자 사니까 분명 좋아할 것 같은데."
"낮에 미리 고양이가 있는 집을 찾아둔대. 좋은 고양이가 있는 집에 빈 캔을 놓아 표시를 하고 밤에 고양이를 훔치러 온다나 봐." "그럼 훔친 고양이는 샤미센 가죽으로?"
낡은 절과 신사도 싫어하지는 않기에 난젠지南禪寺 절이나 시모가모下鴨 신사까지 갈 때도 있다. 이처럼 근처이기는 하지만 걸어가기에는 거리가 만만치 않은 곳은자전거를 타고 갈 때가 많다.
학교 갔다 돌아오는 아이들 몇 명이 좌우로 퍼져서 이쪽으로 걸어오다가 두 발을 땅에 질질 끌면서 언덕길을 달려오는 자전거를 보고 깜짝 놀라 멈춰 섰다. 몹시 당황한 내 얼굴이 아주 무시무시했던 것이 틀림없다.
셔츠 팔꿈치 부분이 찢어져 드러난 살에 피가 맺혔다. 바지는 찢어지지 않았지만 팔꿈치만큼 아팠다. 상처 치료는 뒤로 미루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자전거 브레이크부터 살폈다. 그리하여 판명된 사실. 핸들 레버와 브레이크를 잇는 와이어 두 줄이 모조리 끊어져 있었다.
아스팔트에 왼쪽 무릎과 어깨, 팔꿈치를 호되게 찧었다. 숨이 턱 막혀 잠시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아저씨, 괜찮아요?"
구라타니는 물론 쓰지이도 예상 외로 어머니의 초대를 환영했지만, 기즈가와는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하고 거절했다고 한다. 말투로 보아 육체적인 장애보다 다른두 사람과의 나이 차가 신경 쓰인 것 아니겠냐고 어머니는 말했다.
"당신의 아버지 히류 고요 씨는 후지누마 잇세이 화백과 자별한 사이였죠. 당연히 화백의 아들인 기이치 씨와도 알고 지냈을 겁니다. 그런 인간관계를 고려해보면, 저쪽 서양식 저택을 개축할 때 고요 씨가 나카무라 세이지에게 일을 의뢰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큽니다."
"나카무라 세이지. 푸를 청靑자에 맡을 사司자를 써서 세이지입니다." 기억 속에 있는 이름이었다. 분명.. "어떤 건축가의 이름이에요. 벌써 죽었지만, 아주 흥미로운 사람이거든요."
만약 구라타니가 광에 숨어들었던 ‘범인‘이라면 그쪽 복도에 인형이 놓여 있다는 것을 당연히 알 것이다. 그런데 안채에도 인형이 있느냐고 물어보다니, 모르는 척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걸까. 결국 어느 쪽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쓰지이의 말과 표정을 관찰한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깔깔 웃는 어머니의 목덜미는 옅은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옛날부터 술을 좋아해서 아버지 이케오가 건재했을 때는 매일 밤 둘이서 저녁 반주를 들었다. 지금도 그 습관은 변함이 없어 자기 전에는 늘 청주나 맥주를 마신다. 가끔 같이 마실 때도 있지만 나는 술이 그리 센 편이 아니다. 그래도 이날 밤은 권해주는 대로 비교적 많이 마셨다.
"와, 이 집을 무대로 말입니까?" 구라타니가 탄성을 질렀다. "인형관의 살인이었던가요?"
"쓰지이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떤 녀석이 범인일까요? 이대로 내버려두면 세 번째 사건이 일어날까요?" "흠, 글쎄." 쓰지이는 퉁명스레 대답하더니 술잔의 술을 쭉 들이켰다. "그런 현실의 사건에는 흥미가 없어. 지금 당장은 내 소설 속 살인사건만으로도 힘에 부치거든." "이야, 그럼 지금 쓰고 계신 건 미스터리 소설?"
지금은 죽고 없는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 그가 지은 몇 채의 관館. 거기서 일어난 몇 가지 사건....... 쓰디쓴 술에 거나하게 취한 내 머릿속에 작년 가을에 입원한 나를 병문안 왔던 한 친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갑자기 구역질이 치밀어서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것은 불쌍한 작은 동물의 사체였다. 털이 하얗고 조그만 고양이 사체. "I.끔찍해.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어머니가 비명을 지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나 비참한 모습이었다. 죽은 새끼 고양이의 작디작은 머리가 납작이 짓눌려 있었다. 10월 24일 토요일 아침의 일이었다.
처음은 광의 인형이었다. 이때 나는 안채와 연립주택 사이의 문을 수리했고, 광 문에는 자물쇠를 달았다. 그 결과 안채에 숨어들 수 없게 된 ‘범인‘은 활동 장소를 집밖으로 옮겨........ 우편함에 들어 있던 유리 조각. 현관에 놓여 있던 돌도 포함한다 치고 그다음은 자전거 브레이크. 그리고 머리가 찌부러진 새끼 고양이 사체. 그런 행동에 일관되게 담겨 있는 것은 틀림없이 ‘악의‘다. 우리, 아니 주로 나 개인을 향한 사악한 감정.... 물론 어머니도 피해를 입기는 입었다.
마네킹에 묻은 피, 우편함 속의 유리 조각, 현관의 돌, 자전거 브레이크, 고양이 사체. 전부 ㅇㅇ가 저지른 일이다. 그 남자를 겁주기 위해서. 그리하여 싹 다 잊은 듯이 태평하게 살고 있는 그 남자가 자신의 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아직 모자라다. 아직 그 남자는 남겨놓은 메시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직....... (두려워해라.)주문처럼 OO는 되풀이했다. (두려워해라. 그리고.......)
누군가의 악의는 점점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듯도 하다. 이대로 점점 심해지는 걸까. 그리고 그(혹은 그녀)는 최종적으로 뭘 바라는 걸까. 이제 그만, 단정해도 상관없을 듯하다. 누군가 나를 노리고 있다.
10월 28일 수요일 오후 4시 반. 장소는 커피집 라임. 어젯밤 가케바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 후로 어떻게 지내느냐는 안부전화였다. 정말 바라 마지않던 연락이었다. 요 한 달 동안 내 신변에 잇달아 일어난 일에 대해 제3자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다. 마침 그럴 때 가케바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실제로 나는 두 번이나 육체적인 피해를 입었다. 유리에 손가락을 베인 정도라면 장난이라는 말로 넘어갈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자전거 브레이크를 망가뜨린 건 어떠한가. 타기 전에 잠깐 점검했다면 바로 알아차릴 만한 고장이기는 했지만, 반대로 까딱 잘못했으면 그 정도의 상처로는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누가? 뭣 때문에?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거야. 요는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벌어진 일의 의미가 이렇게나 바뀐다는 거지. 누군가 널 노린다고 그랬는데 다르게 해석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고. 물론 네 ‘해석‘을 전부 부정하는 건 아니야. 어쩌면 네 해석이 전면적으로 올바른 해답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오늘 네 모습을 보니 좀 걱정이 돼서."
전혀 짐작 가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다. .그때. 목 아랫부분에서 정수리를 향해 약한 전류가 흘러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늘그 느낌과 더불어 눈앞의 현실이 균형을 잃고 묘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예를 들어 넌 동일인물이 그 일을 전부 다 저질렀다고 가정했는데, 과연 그럴까?" "아니라는 거야?"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거지. 만약 그렇다면 네가 말하는 상대의 ‘악의‘ 역시 저절로 그 성격이 달라져."
"아니, 그럴 것까지는." "뭐,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너무 골똘히 생각하다 노이로제라도 걸리면 어떻게 하냐. 그건 내 전공이 아니란 말이야."
지금처럼 강한 ‘요동‘을 경험한 것은 딱 한 번뿐이다. 저번 달 중순경 이 가게 이 자리에서 지금처럼 가케바 히사시게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던 바로 그때....... 이건 뭘까. 이건. 혹시 내 마음 깊은 곳에 묻혀 있는 무슨 기억?
라임을 나선 나는 가케바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꼭 한 번 우리 집을, 특히 별채인 서양식 저택을 구경하고 싶다고 그가 말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범인은 여섯 명의 몸에서 별자리의 축복을 받은 부분을 모아 ‘아조트‘라는 이상적인 인체를 창조하려 한 모양인데, 이게 실은......."
나는 일부러 차갑게 대답했다. 가케바는 위쪽이 뻥 뚫린 홀의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물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일어난 우메자와梅澤가 사건*이라고 알아?" * 작가 주 : 이 사건에 대해서는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고단샤, 1981)에 자세하게 쓰여 있다. "우메자와 가 사건?" "쇼와昭和 11년*이었나. 도쿄에서 일어난 유명한 살인사건이야. 여자 여섯 명이 각각 두부頭部, 흉부胸部, 복부腹部, 요부腰部, 대퇴부大腿部, 하족부下足部를 절단당하고, 절단된 부분이 사라진 시체로 발견됐다고 해." *서기 1936년.
어제 라임에서 가케바와 이야기할 때 경험한 그 기묘한 현실의 붕괴감. 도대체 그것은 뭐였을까. 그전에도 몇 번인가 경험한 적이 있는 감각이지만, 적어도 어제는 가케바가 던진 어떤 질문에 호응하듯이 그 현상이 일어났다. 누가 나를 노릴 만한 이유가 짐작은가느냐? 그 질문을 받았을 때, 다
아침 10시쯤에 일어났을 때부터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분명 어젯밤 또 ‘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깼었기 때문이리라. 누군가 같은 지붕 아래 있다. 그 움직임, 그 숨결, 그........
"마네킹 하면 밀랍인형처럼 틀림없이 밀랍으로 만들었을 줄 알았는데 아니네." "다이쇼大正* 시대 당시에 수입된 건 밀랍이었대. 최근에는 FRP라는 강화 플라스틱만 써서 만든다던가. 아버지는 아무래도 독자적으로 이런저런 소재를 시험해본모양이지만." *다이쇼 천황 시대의 연호. 1912~1926.
라임에서 조언해준 가케바의 말에는 역시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뭐든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것 정도는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잘 안다. 나쁘게 해석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고 정신건강에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그가 어제 광의 인형 사건 말고 다른 사건을 ‘우연‘과 ‘별 뜻 없는 장난‘으로 설명하려 든 것은 억지가 아닐까.
"어제는 정말 깜짝 놀랐어." 어머니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웬일로 손님이 왔나 했더니 가케바 아니겠니. 고등학교 때 우리 집에 몇 번 놀러 왔었지. 교토에서 다시 만나다니 우연도 참 이런 우연이 어디 있을까."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연 후 전등 스위치를 더듬어 찾으며 광 안으로 한 발 들어선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입을 떡 벌리고 눈을 부릅떴다. "이, 이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쓰러진 인형들의 몸을 물들인 강렬한 색! 빨간 그림물감이 또 그녀들의 하얀 살갗에 마구 처발라져 있었다.
광의 문은 틀림없이 밖에서 자물쇠로 잠가두었다. 여벌열쇠를 포함해 자물쇠 열쇠 두 개는 전부 내가 보관한다. 문 말고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만한 통로는 없다. 벽높은 곳에 둥그런 채광창 몇 개가 있지만 지름은 기껏해야 30에서 40센티미터 정도이고 안쪽에는 철망이 쳐져 있다.
현실의 색채가 어지러이 흐트러지며 마음속 어딘가에서 들린 목소리는....... .엄......엄마.엄마는? ......어디 있어?! .뭐였을까. 아아, 뭐였을까. 어찌 되었든 나는 다시금 확신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참상‘이라고 표현해도 되리라. 방구석에 모아둔 인형들이 모조리 한가운데로 끌려나와 있었다. 어떤 것은 팔이 하나 없고, 어떤 것은 다리가 하나 없고...... 두 팔이 없는 것, 하반신이 없는 것, 머리가 없는 것, 번번한 얼굴만 있는 것...... 그런 그녀들이 위를 보거나 엎드리거나 포개어진 상태로 쓰러져 있다. 너무나도 난잡한 그 모습에서는 완성한 나무 블록 집을자기 손으로 허물어뜨리는 어린아이의 흉포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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