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관의 살인 ㅣ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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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1] 『시계관의 살인』 시마다 스님의 사회학 강의
― ‘현실’이라는 공적 환상과 개인이 키우는 ‘악몽’


1. ‘현실’은 정말 객관적인가

『시계관의 살인』에서 시마다 스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단순한 추리소설 속 잡담으로 보기에는 제법 묵직하다. 그는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실’조차 사회가 공동으로 만들어낸 하나의 거대한 환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질서와 규칙을 필요로 한다. 국가, 법률, 제도, 도덕, 화폐, 역사에 대한 평가와 같은 것들이 모여 사회가 인정하는 하나의 ‘현실’을 형성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현실을 객관적인 세계 그 자체처럼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이러한 공통의 현실이 있기 때문에 사회는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규칙 안에서 생활할 수 있다.

그러나 시마다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사회가 만든 ‘현실’은 사람들에게 안정과 질서를 제공하는 동시에 개인의 사고와 행동을 일정한 틀 안에 가두는 통제장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현실은 단순히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그 만들어진 현실을 다시 진짜 현실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2. 사회가 만든 ‘현실’이라는 공적 환상

시마다가 말하는 현실은 개인 한 사람이 꾸는 환상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함께 믿고 있기 때문에 현실처럼 작동하는 공적인 환상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만들어져 있는 사회의 언어와 가치관, 제도와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인지에 대한 기준도 대부분 그 사회 안에서 배운다.

이러한 공적 현실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문제는 그것이 지나치게 강해질 경우이다.

사회가 정해놓은 현실만을 유일한 진실이라고 요구하기 시작하면, 그 틀에서 벗어나는 개인의 생각과 상상은 비정상이나 위험한 것으로 취급될 수 있다.

시마다가 말하는 ‘현실이라는 환상’에는 따라서 두 얼굴이 있다.

ㅇ 인간을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안정과 질서의 장치
ㅇ 인간을 일정한 사고방식 안에 머물게 하는 지배와 통제의 장치

이 양면성을 이해해야 시마다가 다음으로 꺼내는 ‘악몽’이라는 개념도 이해할 수 있다.


3. 개인이 키우는 또 하나의 세계 ― ‘악몽’

사회가 만든 공적 현실에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시마다는 이러한 개인적인 환상을 ‘악몽’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악몽은 반드시 공포스럽거나 악한 생각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회가 당연하다고 규정한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고, 기존의 질서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정신활동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에 가깝다.

그래서 시마다는 예술가·사상가·과학자뿐만 아니라 정치적 권력자까지도 거대한 ‘악몽’을 키우는 인간으로 바라본다.

작품에서 피카소·마르크스·아인슈타인·히틀러 같은 서로 전혀 다른 인물들이 한꺼번에 언급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을 도덕적으로 같은 선상에 놓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공통점은 기존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관을 만들어 현실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피카소는 기존의 시각적 현실을 해체했고, 마르크스는 사회와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틀을 제시했으며, 아인슈타인은 인간이 당연하게 생각하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바꾸었다.

히틀러 역시 자신이 만들어낸 정치적·인종적 세계관을 현실에 강제로 구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시마다가 말하는 ‘악몽의 사육가’라는 범주 안에 들어간다.

물론 이는 그들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특히 나치 독일의 범죄와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시마다의 관심은 선악의 판정이라기보다 인간이 만들어낸 사적인 환상이 얼마나 거대한 공적 현실로 변할 수 있는가에 있다.


4. 누가 현실을 만드는가 ― 역사와 권력

시마다의 이야기가 더욱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역사에 관한 언급이다.

그는 현실과 역사에 대한 평가 역시 승리한 사회와 권력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한다.

가령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가 지금과 전혀 달랐다면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역사적 평가와 사회의 공식적인 언어 역시 지금과는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승자가 언제나 옳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시마다가 강조하려는 것은 사회가 무엇을 현실이라고 부르고 무엇을 정상적인 역사로 가르치는가에도 권력의 작용이 개입한다는 점이다.

역사적 사실 그 자체와 사회가 그 사실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서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우리가 너무도 단단한 사실처럼 받아들이는 ‘현실’의 일부도 인간 사회가 만들어낸 해석의 체계일 수 있다는 것이다.


5. 점은 왜 맞는 것처럼 보이는가

시마다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노노미야의 점에 대한 설명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는 점쟁이가 반드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점쟁이 본인이 자신의 능력을 진심으로 믿는 것과, 실제로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마다는 예언이 맞는 것처럼 보이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표현의 넓은 해석 가능성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28세 이후 죽는다.’

라는 말은 사실 29세에 죽어도 맞고 50세에 죽어도 맞으며 90세에 죽어도 맞는다.

마찬가지로

‘16세가 되기 전에 죽는다.’

라는 예언도 태어나자마자 죽든 15세에 죽든 모두 적중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언의 범위를 넓게 만들어두면 사건이 벌어진 뒤 결과를 다시 예언에 끼워 맞추기가 쉬워진다.

여기에 인간의 기억과 선택적 해석이 더해진다.

맞지 않은 예언은 잊어버리고 우연히 들어맞은 부분만 기억하면 점쟁이의 예언은 점점 더 정확했던 것처럼 느껴진다.

시마다는 이것을 단순한 사기라고만 보지 않는다.

사람이 자신이 믿고 싶은 이야기를 하나의 ‘현실’로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바라본다.

그런 점에서 점에 관한 이야기도 앞서 말한 ‘현실이라는 환상’과 연결된다.


6. 나카무라 세이지의 건축 ― 개인의 ‘악몽’을 현실로 만드는 공간

시마다의 긴 이야기가 『시계관의 살인』에서 중요한 이유는 결국 나카무라 세이지의 건축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시마다는 나카무라 세이지가 단순히 기괴하고 복잡한 집을 설계한 건축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지은 관들은 의뢰인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고독한 환상과 집착을 건축이라는 현실의 공간으로 끌어내는 장소이다.

즉 의뢰인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악몽’을 실제 사람이 들어가 살아갈 수 있는 건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수차관이나 미로관 역시 그곳의 주인이 품은 강한 욕망과 집착을 건물의 형태로 구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카무라 세이지는 단순한 건축가라기보다 타인의 악몽을 공간으로 증폭시키는 사람에 가깝다.

그리고 시계관에서 그 역할은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7. 고가 미치노리의 ‘악몽’ ― 도와와 멈출 수 없는 시간

시계관의 주인 고가 미치노리에게 그 ‘악몽’의 중심에는 딸 도와가 있었다.

미치노리의 도와에 대한 집착은 정상적인 부녀관계의 범위를 넘어선다. 그는 딸과 시간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시계관이라는 거대한 건축물 속에 새겨 넣는다.

수많은 시계와 종, 시계탑, 그리고 외부보다 1.2배 빠르게 흐르는 구관의 시간은 단순한 장식이나 기발한 건축 아이디어가 아니다.

고가 미치노리가 머릿속에서 키워온 시간에 대한 집착을 나카무라 세이지가 실제 공간으로 구현한 결과이다.

여기서 시마다가 말한 ‘악몽’이라는 표현이 구체적인 모습을 얻는다.

사회의 일반적인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시간이 시계관 안에서는 현실이 된다.

외부에서 50분이 흐르는 동안 내부에서는 60분이 흐른다.

시계관 안에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그 잘못된 시간이 오히려 ‘현실’이 된다.

이것은 앞서 시마다가 했던 사회에 관한 이야기와도 묘하게 겹친다.

사람들이 모두 같은 것을 현실이라고 믿으면 그것은 그 세계 안에서 현실로 기능한다.

구관 사람들은 수많은 시계가 모두 같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잘못된 시간이지만, 구관 안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공적 현실’이 된 셈이다.


8. 고가의 악몽을 이용한 사요코

여기서 작품은 한 번 더 뒤틀린다.

고가 미치노리가 만들어놓은 이 기괴한 시간은 애초에 살인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요코는 시계관의 비정상적인 시간구조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자신의 복수에 이용한다.

고가 미치노리의 개인적인 악몽이 사요코에게는 완전범죄를 가능하게 하는 현실적인 살인도구가 된 것이다.

그녀는 구관과 외부의 시간차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죽인 뒤 밖으로 빠져나오고, 구관 사람들이 범행시각이라고 믿는 시간에는 시마다와 함께 있으면서 알리바이를 만든다.

따라서 『시계관의 살인』에는 여러 층의 ‘현실’이 겹쳐 있다.

ㅇ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정상적인 외부의 시간
ㅇ 고가 미치노리가 만들어놓은 시계관 내부의 시간
ㅇ 사요코가 피해자들에게 보여주는 날조된 과거
ㅇ 구관 사람들이 사실이라고 믿는 ‘도와의 복수’
ㅇ 그리고 그 모든 거짓 현실 뒤에 숨어 있는 실제 사건

사요코의 범행은 결국 사람들에게 가짜 현실을 믿게 만드는 행위이기도 하다.


9. 「침묵의 여신」 ― 악몽을 추적하다 범행을 발견하다

고가 미치노리가 남긴 「침묵의 여신」은 사요코의 복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사요코는 오히려 그 시를 시마다를 자신의 곁에 붙잡아두기 위한 미끼로 이용한다.

시마다가 고가의 시를 해석하느라 자신과 함께 움직이면, 사건이 벌어졌다고 알려진 시간에 사요코가 시마다와 함께 있었다는 알리바이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가 된다.

시마다는 「침묵의 여신」을 해석하기 위해 고가 미치노리의 과거와 시계관을 조사하고, 그 과정에서 고가가 만들어놓은 ‘악몽’의 핵심인 1.2배 빠른 시간에 접근한다.

결국 사요코가 자신의 알리바이를 굳히기 위해 끌어들인 사람이 사요코의 시간 트릭을 무너뜨린다.

이 점에서 시마다의 긴 사회학적 이야기도 단순한 철학적 장광설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처음부터 나카무라 세이지가 만든 관을 누군가의 악몽이 현실화된 공간으로 바라보았고, 고가의 악몽을 이해하려 했기 때문에 시계관의 진짜 시간에 도달할 수 있었다.


10. 정리 ― 『시계관의 살인』에서 ‘현실’과 ‘악몽’이 의미하는 것

시마다의 강의는 언뜻 보면 연쇄살인과 직접 관계없는 철학적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품 전체를 알고 다시 보면 이것은 시계관이라는 공간을 이해하는 하나의 해석틀이 된다.

사회는 수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현실’을 만들어낸다.

개인은 그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의 ‘악몽’을 키운다.

고가 미치노리는 도와와 시간에 대한 자신의 악몽을 키웠고, 나카무라 세이지는 그것을 시계관이라는 건축물로 현실화하였다.

그리고 사요코는 그 악몽 속에 만들어진 1.2배의 시간을 자신의 복수를 위한 살인도구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 악몽의 구조를 이해하려 했던 시마다가 시간의 비밀을 발견하면서 범행은 무너진다.

그런 의미에서 『시계관의 살인』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 가운데 하나는 ‘무엇이 현실인가’라는 시마다의 질문이 작품의 핵심 트릭과 그대로 겹친다는 데 있다.

구관에 갇힌 사람들에게 1.2배 빠른 시간은 거짓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모든 시계가 같은 시간을 가리키는 동안에는 누구도 그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가 믿는 잘못된 시간이 하나의 현실이 된 것.

시마다가 말한 ‘현실이라는 공적 환상’이 시계관이라는 건축물 안에서 문자 그대로 구현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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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8-24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기 관시리즈 6부작둥 시계관의 살인이 제일 본격추리다운 느낌은 주는 작품이지요.기계적이고 물리젝인 트릭이 아닌 시간과 연관된 작가의 창의적 트릭이 독창적인 작품이지요.자랑삼아 말하자면 저는 한스본이 아닌 90년대 서울문화사본으로 6권을 다갖고 있지요^^

대장정 2026-08-24 21:54   좋아요 0 | URL
저도 읽으면서 시간 자체를 이용한 트릭이 정말 독창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90년대 서울문화사본으로 6권이나 소장하고 계시다니 부럽네요^^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시계관의 살인 ㅣ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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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관의 살인』 독서감상보고서
― 조작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의 ‘악몽’이 만든 시계관


1. 작품 개요

가. 작가

ㅇ 아야츠지 유키토(綾辻行人): 1960년 일본 교토시 출생. 1987년 『십각관의 살인』으로 데뷔하며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의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 잡음

나. 작품 성격

ㅇ 나카무라 세이지가 설계한 기괴한 저택을 무대로 하는 ‘관 시리즈’의 대표작
ㅇ 외부와 단절된 구관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과 구관 밖에서 사건의 과거와 시계관의 비밀을 추적하는 시마다의 이야기가 병행되는 본격 미스터리
ㅇ 비밀통로를 이용한 공간 트릭과 구관의 시계가 실제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시간 트릭을 결합하여 알리바이를 만들어낸 작품


2. 줄거리 ― 9년 만에 되살아난 복수와 시계관의 연쇄살인

가. 유령 취재를 위해 다시 찾은 시계관

기담사에서 발행하는 오컬트 잡지 『CHAOS』는 소녀의 유령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있는 시계관을 취재하기 위해 특별기획을 마련한다.

가와미나미와 부편집장 고바야카와, 카메라맨 우츠미, W대학 초상현상연구회 학생들, 영매 미코토 등이 취재팀을 이루어 시계관 구관에서 며칠 동안 머물며 교령회를 열기로 한다.

그런데 초상현상연구회 학생들 가운데 사키코·가와라자키·우류·후쿠니시는 약 9년 전에도 이곳을 찾았던 인물들이었다. 당시 이들은 숲에서 장난삼아 함정을 팠고, 그 함정은 훗날 시계관을 둘러싼 비극의 출발점이 된다.

나. 9년 전의 비극과 다시 살아난 사요코의 원한

그 함정에 실제로 빠진 사람은 도와가 아니라 사요코의 딸 교코였다. 교코는 결국 죽음에 이르고, 이후 사요코는 남편까지 잃으면서 가족을 잃는 비극을 겪는다.

그러나 사요코는 당시 학생들에게 곧바로 복수하지 않는다. 사건은 세월 속에 묻히는 듯했다.

그로부터 9년 뒤, 당시의 학생들이 성장한 모습으로 다시 시계관을 찾아와 유령을 조사하고 구관에 들어가고 싶다고 한다. 사요코에게는 잊으려 했던 딸과 남편의 죽음, 그리고 그 비극의 출발점이었던 과거가 다시 눈앞에 나타난 셈이었다.

이 재회가 묻어두었던 원한을 되살리고 결국 복수를 실행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사요코는 미코토와 고바야카와, 잡지사의 취재기획을 이용하여 학생들과 관련자들이 자연스럽게 구관에 들어가도록 판을 마련한다.

다. ‘도와의 복수’로 위장된 과거

사요코는 자신의 딸 교코가 함정에 빠졌다는 진실을 그대로 밝히지 않는다.

대신 학생들에게 도와가 그들이 만든 함정에 빠져 얼굴에 큰 상처를 입었고, 아름다움에 집착하던 도와가 그 충격으로 결국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함정이라는 사건 자체는 실제였지만 함정의 피해자를 교코에서 도와로 바꾸어 과거를 날조한 것이다.

이 때문에 구관에서 살인이 시작되고 현장에 ‘너희들이 죽였다’라는 문구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현재의 연쇄살인을 ‘도와의 죽음에 대한 복수’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실제 복수의 출발점은 도와가 아니라 사요코가 잃은 딸 교코와 가족의 비극에 있었다.

라. 구관에서 시작된 연쇄살인

첫날 밤 교령회가 열린 뒤 영매 미코토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검은 영의와 가면을 쓴 살인자에 의한 연쇄살인이 시작된다.

외부와 차단된 구관에서 사람이 사라지고 살인자가 나타났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면서 처음에는 내부 사람 가운데 범인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사건이 이어지면서 각 방의 대형 시계 가운데 일부가 숨겨진 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진자의 방에는 외부로 이어지는 비밀통로까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따라서 범인은 구관 내부를 자유롭게 이동할 뿐만 아니라 외부에서도 몰래 드나들 수 있었다.

살인 역시 모두 같은 이유로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9년 전 사건 관계자들은 본래의 복수 대상이었지만, 후쿠니시를 잘못 알아보고 와타나베가 살해되는 오인살해가 발생하고, 우츠미·고즈에·고바야카와 등 복수와 직접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희생되면서 사건은 애초의 복수 범위를 훨씬 넘어선 참극으로 확대된다.

마. 「침묵의 여신」으로 시마다를 끌어들이다

한편 나카무라 세이지의 건축에 관심을 가진 시시야 가도미, 즉 시마다 기요시도 시계관을 찾아온다.

처음에는 구관 출입을 거절당하지만, 사요코는 이후 고가 미치노리가 남긴 「침묵의 여신」이라는 시의 수수께끼를 풀어달라며 시마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시에는 1992년 8월 5일, ‘시간의 끝’, ‘침묵의 여신의 단 한 번의 노랫소리’ 등이 암시되어 있었고, 시마다는 이를 풀기 위해 고가 미치노리와 도와의 과거, 9년 동안 울리지 않는 종, 시계탑의 구조 등을 조사한다.

그러나 「침묵의 여신」 자체는 사요코의 살인동기와 직접 관계가 없다.

사요코에게 이 시는 시마다를 자기 주변에 붙잡아두기 위한 미끼이기도 했다. 사건이 벌어졌다고 알려진 시각에 시마다와 함께 행동함으로써, 시마다 자신을 자신의 알리바이 증인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바. 탐정을 알리바이 증인으로 이용한 시간 트릭

사요코가 범행에 이용한 결정적인 장치는 원래부터 시계관에 존재하던 1.2배 빠른 시간이었다.

구관의 모든 시계는 외부의 정상적인 시간보다 빠르게 움직였고, 외부에서 50분이 흐르면 구관에서는 60분이 흐른다. 구관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시각을 실제 시간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범행시각 자체를 잘못 인식한다.

사요코는 이 시간차와 외부 비밀통로를 이용해 실제로는 다른 시각에 구관에 들어가 살인을 저지르고 다시 밖으로 빠져나온다. 그리고 구관 사람들이 ‘살인이 벌어진 시각’이라고 생각하는 외부의 같은 시각에는 시마다와 함께 행동한다.

그 결과 시마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요코의 가장 강력한 알리바이 증인이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요코가 알리바이를 굳히기 위해 끌어들인 바로 그 시마다가 「침묵의 여신」과 고가 미치노리의 과거, 시계관의 구조를 추적하면서 구관과 외부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결국 범행의 핵심인 시간 트릭을 간파한다.

결국 사요코가 자신의 범행을 감추기 위해 이용한 고가의 시와 시마다의 존재가 역으로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출발점이 된다.


3. 시계관 ―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속이는 건축

가. 시계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닌 건축 장치

시계관에는 곳곳에 수많은 시계가 설치되어 있다. 처음에는 저택의 이름에 걸맞은 기괴한 장식처럼 보이지만 사건이 진행되면서 시계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건축 구조 자체를 구성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각 방 벽면에 설치된 대형 시계 가운데 일부는 숨겨진 문의 일부로 만들어져 있었다. 문짝의 경계를 타일의 이음새와 정확히 겹쳐놓아 평소에는 벽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며, 이를 통해 방과 방 사이를 들키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특히 가와미나미가 벽면의 대형 시계 바늘 위치가 이전과 조금 달라졌다는 사실을 눈치채면서 비밀문의 존재에 접근하는 과정은 나카무라 세이지의 공간 트릭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다.

나. 진자의 방과 외부 연결통로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것으로 보였던 구관에는 진자의 방을 통해 밖으로 이어지는 비밀통로가 존재하였다.

따라서 처음부터 ‘구관 안에 있는 사람 가운데 살인자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는 구조였다. 외부의 인물 역시 통로의 존재만 알고 있다면 구관을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외부통로의 존재는 사요코가 초반부터 진자의 방에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경고했던 장면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4. 작품의 핵심 트릭 ― 구관의 시간을 조작하다

『시계관의 살인』의 가장 중요한 트릭은 구관 내부의 시계가 실제 시간보다 빠르게 움직이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외부에서 50분이 흐르는 동안 구관에서는 60분이 흐르도록 모든 시계를 조정해 놓았다. 즉 구관의 시계는 약 1.2배 빠르게 움직인다.

따라서 이것은 분명한 시간 조작이다.

실제 세계의 시간이 빨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구관 사람들이 시간을 확인하는 유일한 수단인 시계를 조작함으로써 구관 안에서는 외부와 다른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구관에 들어간 사람들은 자신의 손목시계 등을 반입하지 않았고 외부의 자연광도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수많은 시계가 모두 같은 시간을 보여주면 그것을 실제 시간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사요코는 이 시간차와 외부통로를 결합하여 실제 범행시각과 구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범행시각을 다르게 만들고, 외부에서는 시마다와 함께 행동하면서 알리바이를 만들어낸다.

이 작품의 핵심은 단순히 시계를 몇 시간 앞당겨 놓은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는 속도 자체를 다르게 설정했다는 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외부와 구관의 시간차가 계속 벌어지기 때문에 범행이 이어질수록 사요코의 알리바이는 더욱 강해진다.


5. 반복되는 졸림과 수면제 가설

구관에 들어간 사람들은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졸려하거나 정신이 몽롱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처음에는 수많은 시계가 내는 반복적인 소리나 폐쇄된 공간이 사람들의 정신상태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처음 가지고 들어온 식수에 수면제를 섞어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을 세웠다.

범인 또는 협력자가 물통에 미리 약물을 넣어두었다면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다시 약을 넣으러 다닐 필요가 없고,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물을 마시면서 졸림과 판단력 저하가 반복되는 것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태는 구관의 시간이 실제보다 빠르게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드는 데도 도움이 된다.


6. 피해자들의 죽음과 범행 목적을 추적하다

가. 도와 사건과 복수설

사건 초반 ‘너희들이 죽였다’라는 문구와 9년 전 사건이 드러나면서 당시 도와의 죽음에 관련된 학생들을 향한 복수라는 가설을 세웠다.

실제로 당시 사건과 관계된 사키코·가와라자키·우류·후쿠니시 등이 현재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가설은 상당 부분 힘을 얻었다.

그러나 와타나베·우츠미·고즈에·고바야카와 등 과거 사건과 직접 관계없는 사람들이 계속 죽으면서 단순한 ‘도와의 복수’만으로는 전체 살인을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나. 와타나베의 오인살해

처음에는 와타나베가 왜 살해되었는지가 큰 의문이었다.

이후 후쿠니시 료타의 원래 성이 와타나베였고, 범인이 ‘와타나베 료타’를 죽이려다가 와타나베 료스케를 잘못 죽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와타나베의 죽음은 오인살해로 설명된다.

이 사실은 한때 흔들렸던 ‘과거 사건 관계자들이 본래의 표적’이라는 가설을 다시 강화하였다.

다. 우츠미 살해에 대한 추리의 변화

카메라맨 우츠미가 살해되었을 때 처음 떠올린 것은 카메라에 촬영시각이 기록되기 때문에 범인의 시간 트릭이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이었다.

그러나 작품의 배경이 1989년이라는 점에서 당시의 필름카메라가 오늘날의 디지털카메라처럼 촬영시각을 자동으로 기록하고 곧바로 확인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처음 세웠던 시간기록 가설에 의문을 품고, 다음으로 우츠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범인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장면을 사진에 담은 것이 아닌가 하는 쪽으로 추리를 옮겨갔다.

그러나 진상이 밝혀진 뒤에는 우츠미의 카메라가 실제 시각을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 결국 처음에 의심했던 ‘카메라와 시간 트릭의 관계’가 그의 죽음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음이 드러난다.

라. 복수에서 무차별적인 살인으로

사요코의 범행은 딸의 죽음에 대한 복수에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범위를 넘어선다.

원래 복수 대상이 아닌 사람들이 오인살해를 당하거나, 범행 과정에서 정체와 트릭을 감추기 위해 제거되는 일이 계속되면서 결국 시계관은 복수의 장소가 아니라 수많은 무관한 사람까지 희생되는 참극의 무대가 된다.

사요코에게 어떤 비극적인 과거가 있었더라도 이 지점에서 그녀의 범행에는 어떠한 정당성도 부여하기 어렵다.

마. 살해순서와 살해동기

1) 고묘지 미코토
ㅇ 사요코가 복수의 판을 만들면서 영매로 이용한 인물
ㅇ 교령회를 성립시키고 취재팀이 구관에 들어가도록 하는 과정에 이용된 뒤, 계획의 일부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제거됨

2) 가타기 사키코
ㅇ 9년 전 시계관을 찾았던 네 명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복수 대상이 됨
ㅇ 실제 함정을 직접 판 사람은 아니었지만 사요코는 당시의 네 사람을 하나의 집단으로 보아 책임을 물음

3) 와타나베 료스케
ㅇ 본래 복수 대상이 아니었던 인물
ㅇ 후쿠니시 료타의 옛 성이 ‘와타나베’였고 이름까지 비슷하여, 사요코가 그를 후쿠니시로 잘못 알고 살해한 오인살해의 희생자

4) 우츠미 아쓰시
ㅇ 카메라맨으로서 사용하던 카메라의 시각기록 기능 때문에 구관의 시간과 실제 시간이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날 위험이 있었음
ㅇ 시간 트릭이 발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살해되고 카메라와 필름까지 파괴됨

5) 가와라자키 준이치
ㅇ 가타기 사키코와 마찬가지로 9년 전 시계관을 찾았던 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복수 대상이 됨
ㅇ 살해 직전 범인의 가면을 벗겨 사요코의 얼굴까지 확인함

6) 니이미 고즈에
ㅇ 진자의 방을 통해 외부로 빠져나가 비밀통로의 존재를 알아냄
ㅇ 구관에서는 한밤중이어야 할 시각에 밖이 대낮이라는 사실을 직접 목격하면서 구관과 외부의 시간차를 알아차렸기 때문에 제거됨

7) 우류 미사오
ㅇ 후쿠니시 료타와 함께 실제로 함정을 팠던 인물로, 교코의 죽음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된 복수 대상 가운데 한 사람
ㅇ 사요코의 본래 복수 목적에 가장 직접적으로 해당하는 희생자

8) 고바야카와 시게오
ㅇ 본래 9년 전 사건과는 관계가 없는 인물
ㅇ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구관 내부에 설치된 도청장치를 발견하는 등 사요코의 범행 수법에 접근하면서 제거됨

9) 노노미야 야스나리
ㅇ 9년 전 사건의 복수 대상과는 전혀 관계없는 인물
ㅇ 사요코가 비밀통로를 이용해 이동하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면서 정체와 통로의 비밀이 드러날 위험이 생겨 살해됨

결국 희생자들을 순서대로 살펴보면 사요코의 범행이 어떻게 변해가는지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처음에는 9년 전 교코의 죽음에 대한 복수에서 시작하지만, 오인살해가 발생하고 시간 트릭이나 비밀통로를 알아차린 사람, 범인의 정체를 확인한 사람까지 차례로 제거하면서 복수는 점차 자신의 범행을 은폐하기 위한 살인으로 확대된다.


7. 유키야 ― 끝까지 1순위로 의심한 인물

가. 가장 강력해 보였던 동기

유키야는 어릴 때부터 도와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는 말을 들으며 성장한다.

도와가 죽은 이후에도 그녀가 자신의 곁에서 말을 건다고 믿는 모습을 보이고, 9년 전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알고 있는 듯한 반응까지 나타낸다.

따라서 도와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복수할 동기를 가진 인물로 가장 강하게 의심하였다.

나. ‘료타’라는 이름에 대한 반응

시마다가 후쿠니시를 소개하면서 ‘후쿠니시 료타’라고 말하자 유키야는 ‘료타’라는 이름에 순간적으로 불안한 반응을 보인다.

이 장면을 통해 유키야가 과거 사건 관계자들의 이름이나 얼굴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더욱 강해졌다.

다. 너무 쉽게 범인을 알려주는 것은 아닌가

그럼에도 유키야를 그대로 범인이라고 확정하기에는 오히려 너무 많은 단서가 유키야를 가리킨다는 점이 걸렸다.

도와에 대한 집착, 복수동기, 과거 사람들과의 관계, 행방이 묘연해지는 행동까지 차례로 제시되면서 오히려

“아야츠지 유키토가 이렇게 쉽게 범인을 알려줄 리가 있는가.”

라는 의심이 계속 따라다녔다.

따라서 유키야를 가장 유력한 1순위 후보로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작가가 의도적으로 독자의 시선을 유키야에게 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경계심 역시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8. 사요코 ― 비밀통로가 밝혀지기 전부터 시작된 의심

사요코에 대한 의심은 비밀통로의 실체가 밝혀지고 난 뒤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다.

초반부터 사요코가 진자의 방에는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유독 강하게 경고하는 장면이 눈에 걸렸다.

아직 그 방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왜 저 방만 저렇게까지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가.”

라는 의문이 생겼고, 사요코가 시계관 내부의 어떤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이후 진자의 방과 외부를 연결하는 통로의 존재가 확인되면서 그 의심은

‘사요코가 통로를 알고 있으며 범인을 도와주는 공범이 아닌가.’

라는 가설로 구체화되었다.

당시에는 사요코를 직접 살인범이라기보다 시계관의 비밀을 알고 범인을 돕는 공범 쪽으로 보았다.


9. 고가 미치노리의 ‘악몽’을 사요코가 살인의 도구로 이용하다

고가 미치노리와 「침묵의 여신」은 사요코의 복수동기를 직접 설명하는 장치는 아니다.

그러나 왜 시계관에 외부와 다른 시간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사요코가 어떻게 그 시간을 범행에 이용할 수 있었는가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고가 미치노리는 딸 도와에게 강하게 집착하였고, 도와와 시간에 대한 자신의 강박을 시계관이라는 건축물 속에 구현하였다.

나카무라 세이지는 이러한 미치노리의 환상과 집착을 수많은 시계와 종, 시계탑이 결합된 하나의 거대한 건축장치로 만들어낸다.

시계관 내부의 시계가 실제보다 1.2배 빠르게 움직이는 것 역시 사요코가 살인을 위해 새로 만든 장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애초에 고가 미치노리의 계획에 따라 시계관에 존재하던 구조였다.

고가는 자신이 설정한 시계관의 독자적인 시간 속에서 특정한 순간이 오면 시계탑이 최후를 맞도록 설계하였다.

사요코는 바로 고가 미치노리가 자신의 ‘악몽’ 속에서 만들어 놓은 비정상적인 시간을 발견하고 그것을 자신의 복수에 이용한 것이다.

여기에서 시마다가 나카무라 세이지의 건축을 설명하며 사용한 ‘악몽’이라는 말도 비로소 작품의 사건과 연결된다.

시마다의 해석에 따르면 나카무라 세이지는 의뢰인이 품고 있던 고독한 환상과 악몽을 건축이라는 현실의 공간으로 증폭시키는 인물이다.

시계관은 고가 미치노리의 도와에 대한 집착과 시간에 대한 광기가 건물로 현실화된 공간이며, 사요코는 고가가 만들어놓은 그 악몽의 공간을 자신의 복수극을 실행하는 무대로 이용한 것이다.

또한 「침묵의 여신」은 사요코의 살인과 직접 관계가 없지만 사건에서 역설적인 역할을 한다.

사요코는 이 시의 수수께끼를 풀어달라며 시마다를 끌어들여 자신의 곁에 붙잡아 두고, 그를 알리바이 증인으로 이용하려 한다.

그러나 시의 수수께끼를 추적하던 시마다가 오히려 고가가 시계관에 만들어놓은 시간의 비밀을 발견하고, 결국 사요코가 이용한 1.2배 시간 트릭을 간파한다.

사요코가 완전범죄를 위해 끌어들인 탐정이 결국 자신의 범행을 무너뜨린 것이다.


10. 가장 큰 문제점 ― “너, 너는……” : 미스리드가 아니라 독자를 사기친 단서

가. 문제의 장면

가와라자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면 쓴 살인자와 목숨을 건 몸싸움을 벌인다.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상대방의 가면을 벗기고 그 아래 나타난 얼굴을 처음 확인한다. 그리고

“너, 너는…….”
“왜…….”

라고 말한다.

진범이 사요코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보면 이 장면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나는 이것을 단순한 미스리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격 미스터리의 미스리드는 사실에 부합하는 단서를 제시하되 독자가 그것을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게 만드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장면은 실제 그 상황에서 하기 어려운 말을 하게 함으로써 독자에게 잘못된 관계정보를 제공한다. 말 그대로 독자를 사기친 것이나 다름없다.

나. ‘가면을 벗긴 순간’이라는 상황

이 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와라자키가 처음부터 사요코와 싸우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가면을 벗기기 전까지 가와라자키는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사요코와 얼굴을 마주한 상태에서 언쟁을 벌이고 거친 말을 주고받다가 흥분하여 상대를 ‘너’라고 낮춰 부른 상황도 아니다.

정체를 모르는 살인자와 몸싸움을 벌이다가 가면을 벗긴 바로 그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안면이 있는 사요코의 얼굴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너’라는 반응은 더욱 부자연스럽다.

다. 사요코를 보고 ‘너’라고 할 수 있는가

가와라자키와 사요코는 2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며 특별히 친밀한 관계도 아니다.

그런 인물이 살인자의 가면 아래에서 갑자기 나타났다면

“당신이…… 왜…….”
“사요코 씨가…… 왜…….”
“왜 아줌마가…….”

같은 반응이 훨씬 자연스럽다.

반대로 우류·후쿠니시·고즈에처럼 가와라자키와 비슷한 또래이거나 가까운 관계의 인물이 나타났다면

“너…… 왜 네가…….”

라는 말은 매우 자연스럽다.

유키야 역시 가와라자키가 시계관에 온 그날 이미 만나 일면식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표현이다.

라. 독자의 오독이 아니라 정상적인 추리

실제로 나는 이 ‘너’라는 한마디를 중요한 단서로 받아들였다.

가와라자키가 ‘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을 추려 고즈에·우류·후쿠니시 등을 검토했고, 유키야 역시 가와라자키와 일면식이 있다는 점에서 범인 후보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것은 독자가 제멋대로 상상한 것이 아니다.

작가가 직접 제시한 호칭이라는 관계정보를 이용한 정상적인 추리였다.

마. 차라리 이 장면을 넣지 않았어야 함

가와라자키가 범인의 얼굴을 확인하고 경악한 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쓰러졌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또는 마지막 말을 단순히

“왜…….”

에서 끝냈어도 충분했다.

그랬다면 ‘가와라자키는 범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만 독자에게 제공하면서 범인의 연령이나 친밀관계에 관한 잘못된 정보를 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작가는 굳이 ‘너’라는 관계정보를 넣었다.

바. 미스리드가 아니라 사기성 단서

잘 만든 미스리드는 진상이 밝혀진 뒤 독자가

“작가는 사실을 보여줬는데 내가 잘못 읽었구나.”

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장면은 진상을 알고 다시 읽어도

“저 상황에서 사요코를 보고 누가 ‘너’라고 하겠는가.”

라는 의문이 먼저 든다.

독자가 잘못 읽은 것이 아니다. 작가가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세워놓은 것이다.

따라서 가와라자키의 마지막 대사는 영리한 미스리드가 아니라, 범인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독자에게 거짓 관계정보를 제공한 ‘사기성 단서’이며, 이 부분만큼은 작가가 독자를 사기쳤다고 평가한다.


11. 옥에 티 ― 수면제가 섞인 물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문제

범인이 구관 사람들이 마실 물에 수면제를 섞어놓았다는 설정은 시간 트릭을 보조하는 장치로서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인 의문은 남는다.

여러 사람이 며칠 동안 반복해서 마시는 물에 약물이 들어 있었다면 어느 한 사람이라도

“물맛이 조금 이상하다.”
“평소 물하고 다르다.”
“냄새가 묘하다.”

같은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

특히 물 자체는 맛과 향이 강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성분이 섞이면 미세한 변화가 오히려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누구도 물 자체에 이상을 느끼지 않는다.

약물의 종류와 농도, 물에 섞였을 때 맛과 냄새가 어느 정도 변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다면 이 부분은 작품의 정교한 시간 트릭과 비교해 현실성이 떨어지는 ‘옥에 티’로 볼 수 있다.


12. 독서 중 주요 추리의 흐름

가. 초반

ㅇ 나카무라 세이지가 만든 건물인 만큼 어딘가에 비밀통로가 있을 것으로 예상
ㅇ 밀실처럼 보이는 평면도 자체를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

나. 시계

ㅇ 작품에서 시계와 시간이 지나치게 반복되는 점을 의심
ㅇ 구관 안에서 사람들이 보고 있는 시간이 실제 시간과 다를 가능성 제기

다. 수면제

ㅇ 사람들이 계속 졸리고 몽롱해하는 점을 통해 처음에는 시계소리 등의 영향을 의심
ㅇ 이후 처음 반입한 식수에 수면제가 섞여 있을 가능성으로 추리 전환

라. 우츠미의 카메라

ㅇ 처음에는 카메라에 남은 촬영시각이 시간 트릭을 깨뜨릴 가능성을 의심
ㅇ 작품의 배경이 1989년이라는 점에서 당시 필름카메라로 촬영시각을 확인할 수 있는지 의문 제기
ㅇ 이후 우츠미가 범인에게 불리한 장면을 촬영했을 가능성으로 추리 전환
ㅇ 최종적으로는 카메라의 시각기록 기능이 실제 시간과 구관 시간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 살해 이유와 연결됨

마. 범인 추리

ㅇ 가와라자키의 “너”라는 마지막 말을 근거로 또래나 가까운 인물을 우선 검토
ㅇ 고즈에·우류·후쿠니시 등을 후보에 올리고 소거
ㅇ 유키야는 도와에 대한 강한 집착과 동기, ‘료타’라는 이름에 대한 반응 등을 근거로 끝까지 1순위 후보로 유지
ㅇ 동시에 “아야츠지 유키토가 이렇게 쉽게 범인을 알려줄 리가 있는가”라는 의심도 계속 유지
ㅇ 사요코는 비밀통로가 밝혀지기 전부터 진자의 방 출입을 유독 강하게 금지한 점 때문에 시계관의 비밀을 알고 있을 가능성을 의심
ㅇ 이후 비밀통로가 발견되면서 사요코 공범설까지 제기


13. 종합 평가

지금까지 『기면관의 살인』·『십각관의 살인』·『미로관의 살인』·『인형관의 살인』·『시계관의 살인』을 읽었지만, 매번 느끼는 것은 아야츠지 유키토가 설계한 트릭을 독자의 입장에서 제대로 추리해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읽으면서 나카무라 세이지가 만든 ‘관’이라는 사실 때문에 막연히 건물 자체와 비밀통로를 의심하고, 특정 인물이 지나치게 수상하게 묘사되면 “이렇게 쉽게 범인을 알려줄 리가 있는가” 정도까지는 생각할 수 있다.

『시계관의 살인』에서도 어딘가에 비밀통로가 있을 것이라는 점, 시계와 시간이 범행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 등장인물들의 계속되는 졸림이 수면제와 관계된 것이 아닌가 하는 부분까지는 추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구관의 모든 시계를 1.2배 빠르게 움직이게 하고, 그 시간차와 외부 비밀통로를 결합하여 실제 범행시각과 사람들이 알고 있는 범행시각을 완전히 갈라놓은 뒤, 탐정인 시마다까지 자신의 알리바이 증인으로 이용한다는 전체 구조까지 미리 추리해내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사요코는 자신이 알리바이를 굳히기 위해 고가 미치노리의 「침묵의 여신」을 미끼로 시마다를 끌어들였지만, 결국 바로 그 시마다가 고가의 ‘악몽’이 만들어놓은 1.2배의 시간을 해독하면서 범행을 간파한다. 범인이 자신의 완전범죄를 위해 이용한 탐정이 결국 그 완전범죄를 무너뜨린다는 구조도 인상적이다.

물론 가와라자키의 “너, 너는…….”이라는 말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것은 영리한 미스리드가 아니라 독자에게 잘못된 관계정보를 제시한 사기성 단서라고 생각한다. 수면제가 섞인 물을 아무도 이상하게 느끼지 않았다는 설정 역시 현실성에서 의문이 남는다.

그럼에도 이러한 불만 때문에 작품 전체의 성취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진상을 알고 나면

“와, 이런 트릭을 어떻게 생각해냈을까.”

라는 감탄이 먼저 든다.

작가에게 ‘너’라는 말로 한 번 제대로 사기당했다는 불쾌감이 있으면서도, 결국 그 상상력과 대형 트릭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지금까지 읽은 관 시리즈 가운데 『시계관의 살인』이 남긴 가장 강한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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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나
출생 1972년 12월 2일 (53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본관 밀양 손씨


쉼 없는 열정 스페인, 소소한 행복의 일본,
그리고 여기 뜨거운 가슴의 아르헨티나로!
머물지 않는 바람처럼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는
작가 손미나. 힘겨웠던 순간, 지독한 아픔과 외로움을
떨치고 싶어 떠난 그 곳,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는
지친 그녀를 큰 품으로 안아주는 광활한 자연과
누구에게나 인생은 희망이라는 소박한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용기와 열정으로 돌아온 손미나는 이번 여행기를 통해
세상 어디에나 시련은 있는 거라고, 실컷 울고 일어나다시 앞으로 달려야 한다고, 힘들고 지친 이들의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되어주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고려대학교 서어서문학과 졸업. 
스페인 바르셀로나 대학원언론학 석사, 
1997년 KBS 공채 24기 아나운서로 입사해
<가족오락관>, <도전 골든벨>, <세계는 지금>, 
<세상은 넓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대한민국 간판 아나운서로 10년간 사랑받았다. 
현재 작가 겸 프리랜스 아나운서로활동 중이며 펴낸 
책으로는 <스페인, 너는 자유다>,
<태양의 여행자-손미나의 도쿄 에세이>, 
번역한 책으로는 <엄마에게 가는 길>, <연필 하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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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기다려온
운명적인 사랑을 찾아 - P4

여행은 때에 따라 한순간의 즐거움, 특별한 기억, 혹은 그저 시간과에너지를 낭비한 허무한 과거로 남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아주 가끔 인생의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커다란 계기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기도 하는데 내게는 아르헨티나가 그랬다. - P4

내가 아르헨티나에 마음을 뺏기기 시작한 것은 보르헤스의 시를 공부하던 학창 시절.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모습은 봄날의 바람처럼 내게 막연한 꿈을 안겨다 주었다. 천재 작가 보르헤스의황홀한 시어들을 통해 더욱 아름답고 신비로운 모습으로 빚어진 도시를 직접 거닐어 보고 싶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내가 소망했던 일이다. - P4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어렵고 복잡하지. 한마디로 여자와 같다고나 할까.
없으면 울게 되고, 곁에 있으면 너무 좋을 때도 있고 던져버리고 싶을 때도 있고,
하지만 아무리 화가 치밀게 한다 해도 다시 보지 않겠단 말은 할 수 없는 존재. 영원히 헤어질 수는 없는 존재 말이야…왜냐고? 그야 물론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지.
이해하기 힘든 존재. 하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 그래서 한번 사랑에 빠진 후에는 아무리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도 반드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 미워질 때가 있더라도 그냥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영원히, 그 누구보다사랑스러운 나만의 여인 같은 그런 존재, 그게 바로 부에노스아이레스지. - P6

이 대사를 듣던 순간, 내 안에서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옷장 안에 넣어두었던 가방을 꺼내어 짐을 꾸려서 지구 저편의 세상에 몸을 던질 때가 된 것이었다. 당시 나는 인생의커다란 도전과 고비를 동시에 맞고서 힘겨워 하고 있었다. 무너진 사랑으로 인해 세상 모든 진실에 대한 믿음까지 흔들렸고 끔찍한 외로움과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누구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절망감, 어떻게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막막함, 아무도 나를 이해해 줄수 없을 것 같은 고독감,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짓누르며 무너뜨리려 하고있을 때 함께 울어주겠다고, 그 슬픔을 이해할 수 있다고, 그 정도 일쯤으로 쓰러져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 상처 받은 마음을 안아주겠다고 아르헨티나가 얘기하고 있었다. - P6

Nuevo Mundoen Buenos Aires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이름이 주는 환상과로망, 그것을 뛰어넘는 도시 곳곳의 열정. 사랑과 욕망, 아픔과 열정이 공존하는 신비로운 그 도시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가는 일은 진정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 P13

그중에서도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이 도시가 지니고있는 그런 모호함 때문일까,
아르헨티나의 한 작가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왕국의 신비로운 수도‘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더 깊이 알게 될수록 기대치 못했던 비밀과 놀라운 모습들이 드러난다 해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미로의 가장 은밀한 중심‘이라고도 불린다. 또 묘한 선율로 춤추는 이들의 몸을 움직이는 탱고와 같이 알 수 없는 힘으로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영원한유혹의 도시‘라는 별칭도 있다. - P17

무엇이 그토록 이 도시를 특별하게 하는가.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이 곳에 사랑과 미움을 함께 품게 되는 것일까. 그 안에감추어진 비밀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그리고 나는, ‘여행자의 영혼과도 같이 끝없이 떠도는 도시‘라는 이곳의 비밀을 얼마나 발견하고 또다시 바람처럼 떠나게 될 것인지.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공포와 아픔이며 바로 그런 이유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한 보르헤스처럼 이나라의, 또 이 도시의 숨겨진 고통과 상처까지도 온 마음으로 사랑하게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왠지 모를 쓸쓸함이 스며 있는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를 나는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 P19

새로운 여행지에 도착하면 나는 우선 여행 중인 떠돌이, 혹은 이방인의 신분에서 탈피해 최대한 현지인과 같은 기분을 느껴보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현지인과 같은 익숙함과 편안함이 여행자의 자유로움과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도록 조절하는 것은 여행을 200% 즐기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의외로 간단하다. 나만의 노하우 중 하나는 다름 아닌 ‘나 스스로를 길들이고 또 나에 의해 길들여질 장소를 물색하는 일이다. - P21

알고 보니 그곳은 아르헨티나의 저명한 과학자이자 문인인에르네스토 사바토가 <영웅과 무덤들에 관하여>(Sobre Heroesy Tumbas19세의 청년과 그가 사랑하는 여인, 그녀의 가족 이야기를 통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모습을 재조명한소설)라는 작품을 완성시킨 곳으로도 유명했다.  - P24

순간, 여행에 대한 기대로 벅차오른 내 가슴에 진한 커피향이 번졌다. 도시 전체에 가득한 예술의 향취와 정열이 더해진커피의 감동으로 내 가슴이 춤추기 시작했다. 천년 전 에티오피아의 고원에서 커피 열매를 먹고 춤을 추던 염소들처럼 아르헨티나 커피의 맛과 멋에 흠뻑 취한 채로……………… - P27

‘아사도‘Asado, 장작불이나 숯불에 놓고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구운 소고기, 고기를 그런 식으로 굽는 행위, 그런 요리를 먹으며 하는 파티도 모두 아사도라 불린다 - P29

아무래도 뭔가 숨겨진 비밀이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소금만 뿌려서도 이렇게 맛이 좋을까? 아르헨티나 소고기는뭐가 특별한 거지?" 다들 ‘글쎄...‘ 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보는데그 중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그야 간단하지. 아르헨티나 소들은 행복하거든. 그래서 맛이 좋은 거야." - P31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아, 아르헨티나 사람이시군요. 그렇다면 당신은어느 나라 사람이지요?"라는 앞뒤가 맞지 않는 질문을 흔하게듣는다. 그리고 그때부터 펼쳐지는 그 사람의 족보는 복잡하기짝이 없다 못해 어지러울 지경이다. 예를 들어 내 친구 마르틴의여자친구 로사리오의 경우 내가 처음 그녀에게 "너는 아르헨티나 사람이니까 그럼 어느 나라 사람이니?"라는 이상한(?) 질문을 했을 때 이렇게 답했다. "나는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주이긴한데 아랍과 러시아도 섞여 있어. 친할아버지는 이탈리아인, 친할머니는 러시아계 유대인, 외할아버지는 프랑스인, 그리고 외할머니는 이탈리아인, 친할아버지의 어머니는 아랍인이셔." - P37

사정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바로 아르헨티나의 이민 역사때문이다. 오죽하면 ‘멕시코인들은 아즈텍 문명에서 왔고, 페루인들은 잉카 문명에서 왔으며, 아르헨티나인들은 배에서 왔다‘ 라는 웃지 못할 얘기까지  생겨났을까. - P37

‘노아의 자손들이 다음의 홍수를 피하기위하여 하늘까지 닿는 돌탑을 쌓으므로 여호와가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통솔력을 중지시키시므로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 P39

실제로 많은 수의 아르헨티나인들은 자신이 과연 누구인가를 고민하면서 평생 해답을 찾지 못한 채 영원한 이방인처럼 살아간다고 한다. ‘아르헨티나 사람은 스페인어로 말하면서 프랑스인처럼 생각하고, 유대인처럼 일을 하며 스스로를 독일인이나영국인이라고 착각하는 이탈리아인이다‘라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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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관의 살인 ㅣ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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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배경 추적] 『시계관의 살인』의 무대를 찾아서
― 도쿄에서 오후나역을 거쳐 가마쿠라 이마이즈미까지


아야츠지 유키토의 『시계관의 살인』을 읽다 보면 사건의 무대가 되는 저택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실제 지명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7월 30일 일요일 오후, 취재반은 JR 오후나역(大船駅)에 모인 뒤 택시 두 대와 왜건 한 대에 나누어 타고 시계관으로 향한다. 이번 취재는 당일 일정이 아니다. 취재팀은 7월 30일부터 사흘 동안 시계관 안에 머물면서 고묘지 미코토를 영매로 여러 차례 교령회를 열고, 저택에 나타난다는 망령과의 접촉을 시도할 계획이었다.

저택의 위치는 가마쿠라시(鎌倉市) 북동부 이마이즈미(今泉)의 외곽으로 설명된다. 작품에는 하쿠산신사(白山神社)와 ‘산자이가이케 연못’이라는 실제 지명도 등장한다. 이 연못이 현재의 산자가이케(散在ガ池)다.

시계관 자체는 가공의 건물이지만 오후나역·이마이즈미·하쿠산신사·산자가이케는 모두 현실의 장소다. 그렇다면 작품 속 지명과 이동과정을 현재 지도와 위성사진, 과거 항공사진에 하나씩 올려놓으면 시계관은 과연 어디쯤에 자리하고 있었을까.


1. 도쿄에서 오후나역까지 ― 가와미나미가 향한 곳

작품에서 가와미나미는 도쿄(東京)에서 내려와 오후나역에서 취재반과 합류한다.

오후나역은 가나가와현(神奈川県) 가마쿠라시 북쪽의 주요 철도역이다. 도쿄역(東京駅)에서 JR 도카이도선(東海道線) 기준 철도 영업거리는 약 46.5km이며, 현재는 도카이도선이나 요코스카선(横須賀線)을 이용하면 환승 없이 갈 수 있다.

도카이도선은 대략 40분대 초반, 요코스카선은 50분 안팎이 걸린다.

오후나역에는 도카이도 신칸센(東海道新幹線)이 정차하지 않는다. 도카이도 신칸센은 도쿄·시나가와(品川)에서 신요코하마(新横浜) 방면으로 이어지며 오후나는 정차역이 아니다. 따라서 도쿄에서 오후나까지 환승 없이 가려면 재래선 직통열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오후나역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가마쿠라 관광의 중심인 가마쿠라역(鎌倉駅)보다 북쪽에 있고, 작품의 목적지인 이마이즈미에도 훨씬 가깝다. 취재반의 집결지가 가마쿠라역이 아니라 오후나역으로 설정된 것은 실제 지리를 놓고 보아도 자연스럽다.


2. 오후나역에서 이마이즈미로

현재 오후나역 동쪽 출구에서는 이마이즈미다이(今泉台)와 산자가이케 방면으로 버스가 운행된다.

가마쿠라시 안내에 따르면 오후나역에서 버스를 타고 이마이즈미후도(今泉不動)에서 내린 뒤 산자가이케 삼림공원까지는 걸어서 약 3분이다. 이마이즈미다이 일대에는 가마쿠라코한(鎌倉湖畔)과 한조보시타(半僧坊下) 등의 버스정류장도 있어 산자가이케와 주변 주택지·산림으로 걸어서 접근할 수 있다.

이 사실은 후쿠니시가 혼자 시계관을 찾아가는 장면과 연결하면 더욱 흥미롭다.

후쿠니시는 약도만 보고 버스정류장에서 저택까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걸어서 몇 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는 아닐 것이라고 판단한다. 돌아가는 버스도 밤늦게까지 있다고 생각한 그는 직접 저택을 보러 가기로 하고, 지도를 한 손에 든 채 버스가 다닐 수 있는 도로에서 동쪽 산기슭으로 접어드는 길을 걷기 시작한다.

후쿠니시가 어느 버스정류장에서 내렸는지는 작품에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의 특정 버스정류장을 작품 속 정류장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장면을 통해 한 가지는 분명해진다. 시계관은 버스정류장에서 몇 시간씩 산행해야 하는 깊은 산속이 아니었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서 접근할 수 있으면서, 버스가 다닐 수 있는 도로에서 산기슭으로 갈라져 들어가는 위치였던 것이다.


3. ‘산자이가이케’인가, ‘산자가이케’인가

한국어판 『시계관의 살인』에는 ‘산자이가이케 연못’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실제 장소인 산자가이케는 현재 지도와 관광안내 등에서 ‘산자가이케’에 해당하는 Sanzagaike로 표기되고 있다. 현지에서 ‘산자이가이케’에 가까운 독음이 사용된 사례도 있어 한국어판 표기를 단순한 오류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글에서는 현재 지도와 현행 안내 표기에 맞추어 산자가이케로 통일한다.

산자가이케는 현지에서 가마쿠라호(鎌倉湖)라는 별칭으로도 불리지만, 내가 읽은 한국어판의 해당 대목에는 이 명칭이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작품 배경을 추적하는 이 글에서는 별칭보다 작품에 직접 등장하는 산자가이케라는 지명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4. 산자가이케의 형성과 현재 모습

산자가이케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호수가 아니라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조성된 저수지다.

가마쿠라시 자료에 따르면 안세이 연간(安政年間)에는 이 일대를 ‘우라이마이즈미’라 불렀으며, 메이지 2년(明治2年, 1869) 이와세(岩瀬)와 이마이즈미 주민들의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계곡을 막아 저수지를 조성하였다.

1957년부터 다시 개수공사가 진행되어 1959년 높이 13.3m, 길이 56.5m의 흙 제방을 갖춘 현재 계통의 저수지가 완성되었다. 이후 1967~1968년 주변에 주택지가 조성되면서 조정지 기능도 정비되었다.

현재 산자가이케의 수면적은 약 9,495㎡, 호안 길이는 772m, 최대 수심은 7.6m다. 연못을 둘러싼 산자가이케 삼림공원(散在ガ池森林公園)에는 약 2.4km의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작품에서 산자가이케는 시계관이 바로 연못가에 있다는 단서라기보다, 저택이 자리한 이마이즈미 일대를 독자에게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지리적 기준점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5. 작품이 남긴 결정적인 단서 ― 버스정류장, 주택가, 외등 없는 숲길

시계관의 위치를 좁히는 데에는 작품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이동 묘사가 매우 중요하다.

후쿠니시는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저택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약도만으로 정확한 거리는 알 수 없었지만 몇 시간씩 걸릴 거리는 아니라고 판단했고, 버스가 다닐 수 있는 도로에서 동쪽 산기슭으로 접어드는 길을 따라간다.

그가 계속 걸어가자 주택가를 빠져나오는 순간 풍경이 갑자기 달라진다.

좁은 오르막길이 울창한 숲으로 이어지고 외등은 하나도 없다. 일몰이 가까워지면서 사방은 금세 어두워진다.

이 대목은 시계관의 위치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단서다.

저택은 분명 걸어서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사람들이 오가는 평범한 주택가 안에 있다는 뜻은 아니다. 버스와 주택지라는 생활권에 가까우면서도, 그 끝을 벗어나는 순간 외등 하나 없는 좁은 산길과 숲으로 바뀌는 경계부에 놓여 있었다.

길의 폭에 관한 단서도 있다.

후쿠니시가 더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려 할 즈음 파란 폭스바겐 골프 한 대가 그의 앞길을 막는 듯 서 있다. 자동차 한 대가 길에 서 있는 모습이 ‘앞길을 막는 꼴’로 보였다는 것은 길이 넓은 일반도로라기보다 상당히 좁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후 취재반이 자동차로 시계관으로 향하는 장면에서도 한적한 주택가를 벗어나 몇 번 모퉁이를 돌자 갑자기 풍경이 변하고, 울창한 숲과 급경사의 비포장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저택에 더욱 가까워지면서 길의 폭은 계속 좁아진다. 자동차가 더 이상 다닐 수 있을지를 걱정할 즈음 진행 방향 왼쪽에 높은 문이 나타나고, 왜건과 택시 두 대가 모두 그 문 안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작품에 흩어진 단서를 합치면 시계관 주변은 다음과 같은 공간이 된다.

· 가마쿠라시 북동부 이마이즈미의 외곽
· 하쿠산신사와 산자가이케가 주변의 지리적 기준점
· 버스가 다닐 수 있는 도로가 가까이에 있음
· 버스정류장에서 걸어서 접근할 수 있는 거리
· 버스가 다닐 수 있는 도로에서 동쪽 산기슭으로 접어듦
· 한적한 주택가를 지나감
· 주택가가 끝나자 갑자기 외등 하나 없는 숲으로 바뀜
· 좁은 오르막길이 울창한 산림으로 이어짐
· 자동차 한 대가 서 있으면 길이 막힌 듯 보일 정도로 길이 좁음
· 비포장 급경사길이 이어짐
· 자동차는 저택의 대문까지 들어갈 수 있음
· 갈수록 길의 폭이 더욱 좁아짐
· 진행 방향 왼쪽에 높은 대문이 나타남
· 저택의 탑이 나무 사이로 보임

또 택시기사는 이마이즈미에 사는 여동생 부부를 통해 이 저택에 관한 유령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시계관은 누구도 존재를 모르는 깊은 산속의 비밀 저택이라기보다, 이마이즈미 주민들에게 존재와 소문은 알려져 있고 버스정류장에서 걸어서도 접근할 수 있지만, 주택지를 벗어나 외등 없는 좁은 산길을 따라 들어가야 하는 외딴 저택이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6. 현재 지도와 위성사진에서 시작한 후보지 추적

처음에는 작품에 산자가이케가 직접 등장한다는 점 때문에 저택도 자연스럽게 산자가이케 삼림공원 가까이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지도를 넓혀 이마이즈미 주변 전체를 살펴보니 단순히 연못 가까운 곳만 볼 수는 없었다. 작품은 저택이 ‘산자가이케 부근’에 있다고 하지 않고, ‘하쿠산신사와 산자이가이케 연못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마이즈미의 외곽’이라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현재 지도에서도 산자가이케 주변에는 대규모 주택지가 형성되어 있고, 그 바깥으로 산림 구역들이 남아 있다.

처음에는 산자가이케 동쪽과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넓은 녹지대를 유력하게 보았다. 그러나 위성사진을 확대하면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확인했다.

그 넓은 녹지의 상당 부분이 가마쿠라 컨트리클럽(鎌倉カントリークラブ)이었다.

가마쿠라 컨트리클럽은 1968년 이미 문을 열었고, 조성 과정에서도 산을 깎고 골짜기를 만들며 대규모 토공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작품의 사건 시점인 1989년에도 이곳은 이미 골프장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현재 위성사진에서 녹색으로 보인다고 해서 모두 1989년 당시의 숲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에 따라 처음 유력하게 보았던 골프장 부지는 후보에서 제외하였다.


7. 1989년의 지형을 확인하다 ― 국토지리원 과거 항공사진과의 교차검증

현재의 위성사진만으로 1989년 당시의 지형을 판단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현재 숲으로 보이는 곳이 그때도 숲이었는지, 현재 주택지로 바뀐 곳이 당시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골프장과 같은 시설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그래서 일본 국토지리원(国土地理院)이 제공하는 과거 항공사진도 확인하였다.

국토지리원은 여러 시기의 항공사진을 제공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1987~1990년 촬영 항공사진은 작품의 사건 시점인 1989년을 포함하는 가장 가까운 시기의 자료다.

이를 현재 지도와 위성사진, 골프장의 개장 연혁 등과 대조하면서 이마이즈미 주변의 토지이용을 다시 검토하였다.

검토 기준은 단순했다.

현재 녹지인가가 아니라 1989년 전후에도 산림이었는가, 당시 이미 주택지나 골프장으로 개발된 곳은 아닌가, 그리고 작품에 나온 이마이즈미 외곽·버스 접근·주택가·산기슭이라는 조건을 함께 만족하는가를 보는 것이다.

그 결과 골프장 부지는 작품 당시 이미 골프장이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고, 이마이즈미 외곽에는 당시에도 산림이 남아 있던 구역들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시계관 후보지는 현재 지도만 보고 임의로 정한 것이 아니라 작품의 지명과 이동 묘사, 현재 지도와 위성사진, 1987~1990년 과거 항공사진, 당시 토지이용 기록을 서로 대조하면서 범위를 좁힌 것이다.

다만 국토지리원의 자료는 ‘1987~1990년’이라는 촬영기간으로 묶여 있어 각 지점의 사진이 반드시 1989년에 촬영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작품의 사건 시점과 겹치는 가장 가까운 시기의 국가기관 항공사진이라는 점에서 당시 지형을 검토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8. 이마이즈미 외곽에서 남은 세 후보지

현재 지도와 위성사진, 과거 항공사진, 작품 속 버스와 도보 이동까지 함께 놓고 보니 세 곳의 산림대가 최종 후보로 남았다.

세 후보 모두 주택가와 인접한 외곽 산림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고, 현재의 교통망에서도 주변 주택지에 버스정류장이 존재한다. 따라서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걸어서 저택으로 향했다’는 후쿠니시의 이동조건은 세 후보 모두 어느 정도 충족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현재의 버스정류장이 1989년에도 같은 위치와 노선으로 존재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므로, 버스 접근성은 후보를 탈락시키는 결정적 기준이라기보다 작품의 공간구조와 양립하는지를 확인하는 보조조건으로 사용하였다.

최종 순위는 산자가이케와 하쿠산신사라는 실제 지명과의 관계, 주택지에서 산림으로 바뀌는 지형, 당시의 토지이용, 가마쿠라시라는 위치조건을 함께 고려하여 정하였다.


가. 1순위 ― 산자가이케에 가장 가까운 이마이즈미 외곽 산림

현재 가장 유력하게 보는 곳은 산자가이케와 가장 가까우면서 주택지의 바깥쪽에 남아 있는 이마이즈미 외곽 산림대다.

무엇보다 작품에 직접 등장하는 산자가이케와 가장 가깝다는 점이 크다.

작가는 이마이즈미를 설명하면서 하쿠산신사와 산자가이케를 함께 언급한다. 그렇다면 두 장소는 단순한 배경 장식이 아니라 저택의 대략적인 위치를 독자에게 알려주는 현실의 기준점으로 볼 수 있다.

이 지역은 현재도 주택지에 버스정류장이 있고, 그곳에서 산림 가장자리까지 걸어서 접근할 수 있다. 따라서 후쿠니시가 버스에서 내려 저택을 향해 걸었다는 조건도 충분히 성립한다.

특히 주택지와 산림이 가까이 맞붙어 있어

버스정류장
→ 버스가 다닐 수 있는 도로
→ 한적한 주택가
→ 동쪽 산기슭으로 접어드는 길
→ 외등 없는 좁은 오르막길
→ 울창한 산림

이라는 작품 속 공간 전환을 상정하기 좋다.

물론 현재의 특정 정류장을 후쿠니시가 내린 정류장이라고 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버스가 다니는 주택지에서 걸어서 산림에 접근할 수 있는 공간구조 자체다.

산자가이케라는 작품 속 명시적 지명과 주택지·산림의 배치, 도보 접근조건을 함께 만족한다는 점에서 1순위 후보지로 비정한다.


나. 2순위 ― 이마이즈미 외곽에서 시시마이가야쓰 방향으로 이어지는 산림

두 번째 후보는 이마이즈미 외곽에서 시시마이가야쓰(獅子舞ヶ谷) 방향으로 이어지는 산림대다.

이곳의 가장 큰 장점은 지형이다.

현재 지도에서도 상당한 산림과 계곡·능선이 이어져 있어 작품의 좁은 오르막길과 급경사 비포장도로, 외등 없는 울창한 숲, 외딴 저택을 설정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세 후보 가운데 지형의 분위기만 놓고 본다면 시계관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버스 접근조건도 후보에서 제외할 이유는 없다. 이 일대 역시 주변 주택지까지 버스가 들어오고, 정류장에서 내려 걸어서 산림 방향으로 접근할 수 있는 지형이다. 따라서 후쿠니시가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몇 시간씩 걷지 않고 저택을 찾아갔다는 묘사와도 크게 충돌하지 않는다.

즉 버스정류장과 도보 접근이라는 조건은 이 후보 역시 어느 정도 충족한다.

다만 산자가이케와 하쿠산신사라는 작품 속 실제 기준점에서는 첫 번째 후보보다 멀어진다.

또 시시마이가야쓰 자체는 니카이도(二階堂) 쪽으로 이어지므로, 후보지는 계곡 자체라기보다 이마이즈미 외곽에서 그 방향으로 이어지는 산림대로 한정해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따라서 버스 접근성에는 큰 문제가 없고 숲과 지형의 조건은 매우 강하지만, 작품에 직접 등장하는 실제 지명과의 연결성에서 1순위보다 한 단계 낮아 2순위 후보지로 본다.


다. 3순위 ― 하쿠산신사 북동쪽, 요코하마시 경계에 접한 이마이즈미 외곽 산림

세 번째 후보는 하쿠산신사에서 북쪽·북동쪽으로 이어지는 산림 가운데 가마쿠라시 이마이즈미 쪽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곳의 가장 큰 장점은 작품에 직접 등장하는 하쿠산신사와 매우 가깝고, ‘이마이즈미의 외곽’이라는 표현과도 잘 맞는다는 점이다.

버스 접근조건 역시 충분히 검토할 수 있다. 하쿠산신사와 이마이즈미 북부의 주택지에도 버스가 다니는 도로와 정류장이 있고, 주택지에서 주변 산림까지 걸어서 접근할 수 있다.

따라서 후쿠니시가 버스에서 내려 주택가를 지나 산기슭으로 걸어 들어갔다는 조건만 놓고 보면 이 후보 역시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오히려 하쿠산신사라는 작품 속 실제 지명과 버스교통 생활권의 관계만 보면 상당히 유력한 곳이다.

그러나 현재 지도에서 하쿠산신사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산림의 일부는 요코하마시(横浜市)에 들어간다. 작품은 시계관이 가마쿠라시에 있다고 명시하고 있으므로 요코하마시 안쪽의 산림을 그대로 후보로 삼을 수는 없다.

따라서 실제 후보지는 그 산림대를 따라 조금 남쪽으로 내려와 요코하마시와 맞닿는 경계 안쪽, 가마쿠라시 이마이즈미에 해당하는 산림으로 조정해서 보아야 한다.

또 산자가이케와는 첫 번째 후보보다 거리가 더 벌어진다.

따라서 버스 접근성과 하쿠산신사와의 연결성은 충분히 강하지만, 가마쿠라시라는 위치조건과 산자가이케와의 관계까지 종합하여 3순위 후보지로 본다.


9. 현재의 최종 비정

지금까지의 추적 결과를 종합하면 후보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순위 : 산자가이케에 가장 가까운 이마이즈미 외곽 산림

산자가이케와 가장 가깝고, 주택지에서 산림으로 갑자기 바뀌는 지형과 도보 접근조건을 균형 있게 만족한다.


2순위 : 이마이즈미 외곽에서 시시마이가야쓰 방향으로 이어지는 산림

급경사·좁은 길·울창한 숲이라는 지형조건은 매우 뛰어나고 버스정류장에서의 도보 접근도 가능하지만, 산자가이케와 하쿠산신사라는 작품 속 실제 지명과의 연결성은 1순위보다 약하다.


3순위 : 하쿠산신사 북동쪽, 요코하마시와 맞닿는 경계 안쪽의 이마이즈미 산림

하쿠산신사와 가깝고 버스 접근조건과 ‘이마이즈미 외곽’이라는 조건도 잘 맞지만, 북쪽 산림 일부가 요코하마시에 걸쳐 있어 후보지를 가마쿠라시 안쪽으로 조정해야 하며 산자가이케와는 거리가 더 벌어진다.


세 후보 모두 버스정류장에서 걸어서 접근할 수 있는 주택지 외곽의 산림이라는 조건은 어느 정도 충족한다.

따라서 버스정류장의 존재만으로 세 후보의 우열을 가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번 추적에서 버스 관련 묘사가 알려주는 핵심은 저택의 정확한 정류장이 어디였느냐보다, 시계관이 어떤 공간에 있었느냐는 점이다.

후쿠니시는 버스를 타고 와서 직접 걸었다. 몇 시간씩 걸어야 하는 거리는 아니었다. 버스가 다닐 수 있는 도로에서 동쪽 산기슭으로 접어들었고, 주택가를 빠져나온 뒤에는 외등 하나 없는 좁은 오르막 숲길을 걸었다.

즉 시계관은

‘버스정류장과 주택지가 있는 생활권에서 걸어서 닿을 수 있으면서도, 그 생활권의 끝을 벗어나는 순간 외등 없는 산림으로 바뀌는 경계부’

에 자리한 저택이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이 조건은 세 후보 모두 어느 정도 만족하지만, 산자가이케라는 작품 속 실제 지명과 가장 가깝다는 점까지 더하면 현재로서는 산자가이케에 가장 가까운 이마이즈미 외곽 산림이 가장 유력하다.

반면 산자가이케 동쪽·북동쪽의 가마쿠라 컨트리클럽 부지는 작품의 사건 시점인 1989년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미 골프장으로 이용되고 있었으므로 후보에서 제외한다.


10. 실제로 답사한다면

현재 산자가이케 삼림공원에는 약 2.4km의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구글지도에 올라온 사진을 살펴보면 작은 연못 주위로 숲이 둘러서 있고, 수면 가까이 이어지는 길과 나무 사이로 들어가는 오솔길이 함께 보인다. 계절에 따라 단풍이 물든 숲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현지 표지에는 관리사무소와 화장실 방향이 표시되어 있고, 별도의 산책길에는 ‘느긋하게 걷는 오솔길(のんびり小径) 약 800m’이라는 안내도 있다. 연못 주변에는 낚시 금지 표지판도 세워져 있다.

현재의 산자가이케는 시민들이 산책을 즐기는 잘 관리된 삼림공원이지만, 이 모습을 그대로 1989년 작품 속 시계관 진입로의 모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실제 답사의 핵심은 오히려 공원 자체보다 산자가이케 주변에서 주택지가 어디까지 이어지고, 어디에서 산기슭과 숲으로 바뀌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후쿠니시의 이동 장면까지 고려한다면 답사 동선은 다음과 같이 잡아보고 싶다.

도쿄역
→ JR 도카이도선
→ JR 오후나역
→ 이마이즈미 방면 버스
→ 산자가이케와 이마이즈미 주변 주택지
→ 산자가이케 삼림공원
→ 버스가 다닐 수 있는 도로와 산기슭이 만나는 곳
→ 이마이즈미 주택지의 끝
→ 1순위로 비정한 산림 일대

현재의 특정 버스정류장이 작품 속 정류장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작품에는 정류장 이름이 나오지 않으므로 현재의 정류장들은 작품 속 이동과 현실의 지형을 비교하기 위한 기준점일 뿐이다.

현장에서 가장 확인해보고 싶은 것은 ‘버스가 다닐 수 있는 도로에서 동쪽 산기슭으로 접어드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면서 한적한 주택가가 어디에서 끝나는지, 주택가를 빠져나온 뒤 실제로 풍경이 갑자기 숲으로 바뀌는 곳이 있는지 살펴보고 싶다.

또 외등이 없는 좁은 오르막길, 자동차 한 대가 서 있으면 길이 막힌 듯 보일 만한 폭의 도로, 차량이 통행할 수 있으면서 점차 좁아지는 산길, 그리고 진행 방향 왼쪽에 저택의 높은 대문을 놓을 수 있을 법한 지형이 남아 있는지도 확인해보고 싶다.

1순위 후보뿐 아니라 시간이 허락한다면 시시마이가야쓰 방향 산림과 하쿠산신사 북동쪽의 이마이즈미 외곽 산림도 함께 살펴보고 싶다. 세 후보를 직접 걸어보면 지도와 위성사진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경사와 도로폭, 주택지와 산림의 거리, 외등의 유무 등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 가마쿠라를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언젠가 가마쿠라를 찾게 된다면 유명한 사찰과 관광지만 둘러보는 데 그치지 않고 오후나역에서 이마이즈미로 들어가 이 길을 직접 걸어보고 싶다.

가능하다면 요코하마와 가마쿠라를 하나의 일정으로 묶어 이 주변까지 천천히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11. 몇 줄의 지명에서 시작된 작품 배경 추적

처음에는 작품에 등장한 오후나역과 산자가이케라는 실제 지명을 지도에서 찾아본 것이 시작이었다.

산자가이케 주변을 살펴보고, 지도를 넓혀 이마이즈미 전체를 확인하고, 위성사진에서 산림과 주택지·골프장을 구분했다.

처음 유력하게 보았던 넓은 녹지 가운데 상당 부분이 가마쿠라 컨트리클럽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후보지를 다시 검토했고, 골프장의 개장 시기를 확인해 작품 시점인 1989년에도 이미 골프장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현재의 위성사진만으로 당시 지형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일본 국토지리원의 1987~1990년 항공사진도 대조했다.

그리고 작품을 더 읽으면서 후쿠니시가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직접 걸어서 저택을 찾아갔다는 사실, 버스가 다닐 수 있는 도로에서 동쪽 산기슭으로 접어들었다는 묘사, 주택가를 빠져나오자 외등 하나 없는 좁은 오르막 숲길이 시작됐다는 단서까지 하나씩 더해졌다.

버스정류장의 조건을 세 후보에 다시 대입해보니 세 곳 모두 주택가의 버스정류장에서 산림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공간구조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

결국 버스정류장의 존재 자체보다는 산자가이케와 하쿠산신사라는 작품 속 실제 지명, 주택지가 끝나면서 갑자기 산림으로 바뀌는 지형, 1989년 당시의 토지이용, 가마쿠라시 북동부 이마이즈미 외곽이라는 조건을 종합하여 후보 순위를 정하였다.

그 결과 현재 가장 유력하게 비정하는 곳은 산자가이케에 가장 가까우면서 주택지와 산림이 맞닿는 이마이즈미 외곽의 산림대다.

두 번째는 이마이즈미 외곽에서 시시마이가야쓰 방향으로 이어지는 산림, 세 번째는 하쿠산신사 북동쪽에서 요코하마시와 맞닿는 경계 안쪽의 이마이즈미 산림이다.

정확한 필지를 특정할 수는 없다.

시계관은 애초에 허구의 저택이며 작가가 실제 모델의 위치를 밝혀놓은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 작업은 현실에 존재했던 ‘시계관 터’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남겨진 실제 지명과 이동 묘사를 현실의 지형 위에 하나씩 겹쳐보면서 작가가 시계관을 배치했을 법한 공간을 비정해보는 과정이다.

시계관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몇 줄의 지명과 길에 대한 묘사를 따라가면서 현재 지도와 위성사진, 1989년 전후의 항공사진, 버스와 도보 이동까지 하나씩 맞춰보고 작품 속 허구의 저택이 현실의 가마쿠라 어느 공간쯤에 놓여 있었을지를 좁혀가는 과정 자체가 또 하나의 독서가 되었다.


[주]

① 작품의 한국어판에는 ‘산자이가이케 연못’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이 글에서는 현재 지도와 현행 안내 표기에 따라 실제 지명을 ‘산자가이케’로 표기함.

② ‘가마쿠라호’는 산자가이케의 현지 별칭으로, 이 글에서 확인한 작품 대목에는 해당 명칭이 등장하지 않음.

③ 작품에는 후쿠니시가 내린 버스정류장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지 않음. 현재의 각 버스정류장은 작품 속 이동과 현실의 지형을 비교하기 위한 기준점으로 사용함.

④ 세 후보 모두 현재의 주택지와 버스정류장에서 주변 산림으로 걸어서 접근할 수 있는 공간구조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으므로, 버스 접근성 자체를 후보 순위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지 않음.

⑤ 현재의 버스노선·정류장과 도로 형태는 작품의 사건 시점인 1989년과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를 당시의 교통망과 동일한 것으로 단정하지 않음.

⑥ 시계관의 공식 모델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본문의 후보지는 작품에 제시된 실제 지명과 이동 묘사, 현재 지도와 위성사진, 일본 국토지리원의 과거 항공사진 및 확인 가능한 토지이용 기록을 서로 대조하여 비정한 것임.

⑦ 1989년 전후의 토지이용 검토에는 일본 국토지리원이 제공하는 1987~1990년 촬영 항공사진을 활용함. 해당 자료는 촬영기간으로 분류된 자료이므로 개별 지점의 촬영연도가 반드시 1989년이라는 의미는 아님.


자료 조사·정리 : Chat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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