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기다려온 운명적인 사랑을 찾아 - P4
여행은 때에 따라 한순간의 즐거움, 특별한 기억, 혹은 그저 시간과에너지를 낭비한 허무한 과거로 남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아주 가끔 인생의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커다란 계기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기도 하는데 내게는 아르헨티나가 그랬다. - P4
내가 아르헨티나에 마음을 뺏기기 시작한 것은 보르헤스의 시를 공부하던 학창 시절.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모습은 봄날의 바람처럼 내게 막연한 꿈을 안겨다 주었다. 천재 작가 보르헤스의황홀한 시어들을 통해 더욱 아름답고 신비로운 모습으로 빚어진 도시를 직접 거닐어 보고 싶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내가 소망했던 일이다. - P4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어렵고 복잡하지. 한마디로 여자와 같다고나 할까. 없으면 울게 되고, 곁에 있으면 너무 좋을 때도 있고 던져버리고 싶을 때도 있고, 하지만 아무리 화가 치밀게 한다 해도 다시 보지 않겠단 말은 할 수 없는 존재. 영원히 헤어질 수는 없는 존재 말이야…왜냐고? 그야 물론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지. 이해하기 힘든 존재. 하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 그래서 한번 사랑에 빠진 후에는 아무리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도 반드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 미워질 때가 있더라도 그냥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영원히, 그 누구보다사랑스러운 나만의 여인 같은 그런 존재, 그게 바로 부에노스아이레스지. - P6
이 대사를 듣던 순간, 내 안에서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옷장 안에 넣어두었던 가방을 꺼내어 짐을 꾸려서 지구 저편의 세상에 몸을 던질 때가 된 것이었다. 당시 나는 인생의커다란 도전과 고비를 동시에 맞고서 힘겨워 하고 있었다. 무너진 사랑으로 인해 세상 모든 진실에 대한 믿음까지 흔들렸고 끔찍한 외로움과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누구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절망감, 어떻게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막막함, 아무도 나를 이해해 줄수 없을 것 같은 고독감,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짓누르며 무너뜨리려 하고있을 때 함께 울어주겠다고, 그 슬픔을 이해할 수 있다고, 그 정도 일쯤으로 쓰러져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 상처 받은 마음을 안아주겠다고 아르헨티나가 얘기하고 있었다. - P6
Nuevo Mundoen Buenos Aires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이름이 주는 환상과로망, 그것을 뛰어넘는 도시 곳곳의 열정. 사랑과 욕망, 아픔과 열정이 공존하는 신비로운 그 도시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가는 일은 진정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 P13
그중에서도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이 도시가 지니고있는 그런 모호함 때문일까, 아르헨티나의 한 작가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왕국의 신비로운 수도‘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더 깊이 알게 될수록 기대치 못했던 비밀과 놀라운 모습들이 드러난다 해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미로의 가장 은밀한 중심‘이라고도 불린다. 또 묘한 선율로 춤추는 이들의 몸을 움직이는 탱고와 같이 알 수 없는 힘으로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영원한유혹의 도시‘라는 별칭도 있다. - P17
무엇이 그토록 이 도시를 특별하게 하는가.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이 곳에 사랑과 미움을 함께 품게 되는 것일까. 그 안에감추어진 비밀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그리고 나는, ‘여행자의 영혼과도 같이 끝없이 떠도는 도시‘라는 이곳의 비밀을 얼마나 발견하고 또다시 바람처럼 떠나게 될 것인지.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공포와 아픔이며 바로 그런 이유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한 보르헤스처럼 이나라의, 또 이 도시의 숨겨진 고통과 상처까지도 온 마음으로 사랑하게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왠지 모를 쓸쓸함이 스며 있는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를 나는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 P19
새로운 여행지에 도착하면 나는 우선 여행 중인 떠돌이, 혹은 이방인의 신분에서 탈피해 최대한 현지인과 같은 기분을 느껴보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현지인과 같은 익숙함과 편안함이 여행자의 자유로움과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도록 조절하는 것은 여행을 200% 즐기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의외로 간단하다. 나만의 노하우 중 하나는 다름 아닌 ‘나 스스로를 길들이고 또 나에 의해 길들여질 장소를 물색하는 일이다. - P21
알고 보니 그곳은 아르헨티나의 저명한 과학자이자 문인인에르네스토 사바토가 <영웅과 무덤들에 관하여>(Sobre Heroesy Tumbas19세의 청년과 그가 사랑하는 여인, 그녀의 가족 이야기를 통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모습을 재조명한소설)라는 작품을 완성시킨 곳으로도 유명했다. - P24
순간, 여행에 대한 기대로 벅차오른 내 가슴에 진한 커피향이 번졌다. 도시 전체에 가득한 예술의 향취와 정열이 더해진커피의 감동으로 내 가슴이 춤추기 시작했다. 천년 전 에티오피아의 고원에서 커피 열매를 먹고 춤을 추던 염소들처럼 아르헨티나 커피의 맛과 멋에 흠뻑 취한 채로……………… - P27
‘아사도‘Asado, 장작불이나 숯불에 놓고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구운 소고기, 고기를 그런 식으로 굽는 행위, 그런 요리를 먹으며 하는 파티도 모두 아사도라 불린다 - P29
아무래도 뭔가 숨겨진 비밀이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소금만 뿌려서도 이렇게 맛이 좋을까? 아르헨티나 소고기는뭐가 특별한 거지?" 다들 ‘글쎄...‘ 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보는데그 중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그야 간단하지. 아르헨티나 소들은 행복하거든. 그래서 맛이 좋은 거야." - P31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아, 아르헨티나 사람이시군요. 그렇다면 당신은어느 나라 사람이지요?"라는 앞뒤가 맞지 않는 질문을 흔하게듣는다. 그리고 그때부터 펼쳐지는 그 사람의 족보는 복잡하기짝이 없다 못해 어지러울 지경이다. 예를 들어 내 친구 마르틴의여자친구 로사리오의 경우 내가 처음 그녀에게 "너는 아르헨티나 사람이니까 그럼 어느 나라 사람이니?"라는 이상한(?) 질문을 했을 때 이렇게 답했다. "나는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주이긴한데 아랍과 러시아도 섞여 있어. 친할아버지는 이탈리아인, 친할머니는 러시아계 유대인, 외할아버지는 프랑스인, 그리고 외할머니는 이탈리아인, 친할아버지의 어머니는 아랍인이셔." - P37
사정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바로 아르헨티나의 이민 역사때문이다. 오죽하면 ‘멕시코인들은 아즈텍 문명에서 왔고, 페루인들은 잉카 문명에서 왔으며, 아르헨티나인들은 배에서 왔다‘ 라는 웃지 못할 얘기까지 생겨났을까. - P37
‘노아의 자손들이 다음의 홍수를 피하기위하여 하늘까지 닿는 돌탑을 쌓으므로 여호와가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통솔력을 중지시키시므로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 P39
실제로 많은 수의 아르헨티나인들은 자신이 과연 누구인가를 고민하면서 평생 해답을 찾지 못한 채 영원한 이방인처럼 살아간다고 한다. ‘아르헨티나 사람은 스페인어로 말하면서 프랑스인처럼 생각하고, 유대인처럼 일을 하며 스스로를 독일인이나영국인이라고 착각하는 이탈리아인이다‘라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 P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