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묘관의 살인 ㅣ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레나는 목이 졸려 죽은 것이 아니었다. 죽은 후에 약에 취한 누군가가 레나가 죽은 줄 모르고 스카프를 감아 목을 졸랐다. 이것이그 사건의 진상이다.

실제로 그 판단은 옳았다. 해가 진 후에도 눈은 쉴 새 없이 내려서 점점 더 쌓여갔다. 레나의 짐을 비닐봉지에 담아서 뒤뜰 소각로로 옮겼을 때에는 완전히 눈보라였다. 우산은 거의 쓸모가 없었고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땅을 파고드는 발이 무거워서 목적지까지도착하는 데 평소의 배가 넘는 거리를 걸은 듯했다.

물론 그날 밤 주방의 냉장고는 이미 고장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이스박스에 옮겨 담은 약간의 얼음은 가자마 유키가 다 써버렸고, 제빙실의 서리도 다 녹았다. 적어도 저택 안에서는 얼음을 새로 만들기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단 한 가지다.
범인은 건물 밖에 쌓인 눈을 아이스박스에 담아서 가져온 것이다.

진상을 알면서도 나는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오히려 히카와가 다가왔을 때 시체의 얼굴에 옷을 덮어 그들의 눈에서 진실을 감추려 했다. 물론 살인으로 꾸며 젊은이들을 유도하면 경찰 신고를 막을 수 있다는 계산 아래 한 일이다. 설령 진상이 병사였든, 약물 남용으로 인한 중독사였든 변사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경찰관이 떼거지로 저택에 드나드는 것은 내게 결코 바람직한 일이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눈을 가져올 수 있었던 사람은 한 명으로 한정된다.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 사람은 바로 그 청년, 히카와 하야토다.

장서실 바닥에 지하로 통하는 비밀 구멍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조금이나마 고뇌가 사그라졌을 것이다. 현장이 밀폐되어있지 않았다면 ‘네 사람 중 하나‘라는 빠듯한 확률이 다소나마 낮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의 비밀 구멍이 장서실 쪽에서만 열린다는 것을 알고 그의 고뇌는 다시 같은 수준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나보다 먼저 일어나 살롱에 온 기노우치 신이 탁자의 아이스박스를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박스 속에는 물이 들어 있었다. 전날 밤 가자마가 아이스박스를 거꾸로 들고 속을 비웠는데 말이다. 이것이 바로 밤중에 누가 그 박스에 눈을 채웠다는 증거아니겠는가.

자신의 명확한 의지 아래 살인을 저질러서 자신을 살인의 심리적인 속박에서 해방시키려 한 것이다. 희생자로 아사오를 선택한 것은 글씨체를 흉내 내기 쉽고, 몸집이 작으며, 레나 사건과는 관계없이 자살할 동기가 있다는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었기 때문임이틀림없다.
이상이 아사오 겐지로의 죽음에 관해 내가 내린 결론이다.

핵심은 바로 ‘이성‘이다.
둘째 날 오후, 장서실 회랑에서 히카와는 대담하게 딱 잘라 말했다. 자신에게 ‘신‘은 자기 자신의 이성이라고.
같은 범죄 행위를 저지른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이성의 지배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듯 ‘이성‘에 대한 강한의지를 드러냈다.

따라서 범인이 눈을 입수하려면 현관이나 뒷문, 둘 중 하나로 밖에 나가야 한다. 그날 밤 이 문들은 둘 다 잠겨 있어서 열쇠 없이는안에서도 열지 못하는 상태였다. 다음 날 아침에 문을 억지로 비틀어 연 흔적도 없었다. 그리고 문을 열기 위한 열쇠는 둘 다 하룻밤 내내 히카와가 보관하고 있었다.

‘진상‘은 바뀌어야 한다. 쓰바키모토 레나를 죽인 것은 네 사람 중 하나가 아니다. 자신을 제외한 특정 인물 한 명이었다는 식으로바뀌어야 한다.

이성을 잃은 상태로 자신이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진상‘은 도저히 견딜 수 없다. 그 진상을 여러 사람이 인정하는 ‘현실‘로서 이대로 방치하다니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절대로.......그리하여 그는 이런 결의를 굳히기에 이르렀다.

벌써 10년도 더 전일까. 이 저택의 이 방에서 이성을 잃고 그 아이의 목을 조른 내 모습이 환상이 되어 피어오른다. 거울 반대편에세운 또 하나의 저택에서 직접 그린 그 아이의 초상화를 지하 통로로 가져가서 미친 듯이 난도질하던 내 모습이 그 환영에 겹쳐서흔들린다........

지난달 초순, 멜버른에 사는 그의 형 아다치 모토하루足立基春 씨(재미있게도 그는 내가 학창시절 때 친하게 지낸 구마시로 노스케라는 남자의 지인인 모양이다)에게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 날아들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런 결의를 굳히기에 이르렀다.

벌써 10년도 더 전일까. 이 저택의 이 방에서 이성을 잃고 그 아이의 목을 조른 내 모습이 환상이 되어 피어오른다. 거울 반대편에세운 또 하나의 저택에서 직접 그린 그 아이의 초상화를 지하 통로로 가져가서 미친 듯이 난도질하던 내 모습이 그 환영에 겹쳐서흔들린다........

지난달 초순, 멜버른에 사는 그의 형 아다치 모토하루足立基春 씨(재미있게도 그는 내가 학창시절 때 친하게 지낸 구마시로 노스케라는 남자의 지인인 모양이다)에게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 날아들었다는 것이다.

흑묘관과 시계관, 같은 건축가가 만들어낸 두 건물에서 똑같은 시기에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기묘한 현실을 나는 도대체 어떤기분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받아들이려 하고 있는가. 여기에는 굳이 쓰지 않도록 하겠다.
슬슬 석양이 질 시간이다. 어제와 오늘 공교롭게도 바깥 날씨는 나빴지만, 기분 때문인지 쏟아지는 빗소리는 온기를 띠고 있는 것같았다.

1989년 9월 5일.
이곳 타스마니아 섬의 겨울은 천천히 봄을 향하고 있다.

이성이라는 ‘신‘ 때문에 친구를 살해한 그 청년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역시 욕망과 격정을 이성으로 억누르지 못했던 과거의 나와 그를 비교해보고 어두운 생각에 사로잡히고 만다.

모토하루 씨의 아내 데루미는 원래 성이 ‘고가‘로, 고가 정계사의 회장이었던 고가 미치노리 씨의 친동생이라는데, 고가 씨가 세상을 떠난 후 데루미가 후견인을 맡아온 후계자 아들이 올해 8월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듣건대 그 아들은 가마쿠라의 ‘시계관’이라 불리는 저택에 살았는데, 그곳을 찾아온 사람 몇 명을 살해한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시계관이라는 그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가 나카무라 세이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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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쯤 더 나아가자 통로는 수기의 내용과는 달리 막혀 있지 않고 들어왔을 때와 똑같은 회색 문이 나타났다. 시시야가 문을 열자땅 위로 올라가는 비탈진 계단이 있었다.

덧붙여 이상한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소녀의 얼굴에서 가슴, 배 사이에 사방팔방으로 검은 균열이 수도 없이 많이 생긴 것이다.
누가 날붙이로 캔버스를 난도질한 듯했다.

"이야. 안개가 싹 걷혔네."
푸른 하늘에서 내리쬐는 오후 햇살이 눈부신 듯이 손차양을 치고 시시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와미나미는 청바지 호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시가 넘었다. 이 저택에 도착한 지 아직 두 시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쩐지 두배도 넘는 시간을 지하의 어둠 속에서 헤맨 것 같았다.

가와미나미는 놀라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 그는 분명히 ‘리사코’라고 말했다. 리사코理沙子라고.

캔버스에는 등나무 의자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소녀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하늘색 블라우스에 멜빵바지. 가슴께에 늘어뜨린 갈색 머리카락. 머리에 얹은 베레모....... 수기에 나온 장서실의 유화와 똑같은 구도다. 하지만.
다른 곳이 딱 한군데 있었다. 소녀의 무릎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는 검은 고양이가 그려져 있지 않았다.

시시야가 손을 뻗어 천을 걷었다. 그러자 세 사람 앞에 은색 액자에 담긴 캔버스 한 장이 나타났다.
"과연!"

"20년 전, 일을 의뢰하러 온 아모 박사의 본성을 꿰뚫어본 나카무라 세이지는 개구쟁이 기질이 발동했는지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를 맛깔나게 살려서 저택을 설계한 거라고."

아유타 도마와 아모 다츠야는 동일인물이다.
가와미나미는 어제 그 사실을 알았다. 시시야의 방을 찾아간 바로 그때였다.

"어쩐지 이상하네요."
가와미나미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분명 수기에는 건물이 새카맣다고 적혀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야 생각났어? 자네도 참 어지간하군."

"아니야. 그 수기는 첫머리에 필자가 선언한 대로 ‘허위 사실을 일체 배제하고 쓴 거야. 나는 그렇게 확신해."

"저건 고양이가 아니라 토끼야. 흰 토끼지."
"하지만 그게......."
"앨리스야, 코난 군. 앨리스라고. 이 집은 ‘거울‘이 아니라 ‘이상한‘ 쪽이었어."
"앨리스?"
"어제 이야기했잖아. 도지슨은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 즉 루이스 캐럴의 본명이라고."

"풍향고양이가...... 앗, 저것도 색이 다르네. 검은색이 아니라 연한 회색이야. 원래는 흰색이나 상아색이었겠죠."

"검게 칠한 벽에 창틀과 문도 전부 검은색이었어. 2층의 욕조도 검은색. 바닥은 빨간색과 흰색의 바둑판 무늬 곳곳에 검은색으로악센트를 준 타일. 그 수기에는 그렇게 묘사되어 있었지. 그런데 지금 자네가 보고 있는 저 집은 어땠지?"

"벽은 상아색이죠. 문도 똑같은 색이었고요. 욕조는 흰색, 어쩐지 그때 좀 묘하다 싶기는 했었는데. 바닥은...... 아아, 빨간색과 검은색의 바둑판 무늬예요. 거기에 흰색으로 악센트를 줬죠. 그러고 보니 장서실의 비밀 구멍을 여는 ‘열쇠‘ 타일도 색이 달랐던가."
"수기에서는 검은색, 아까 내가 빼낸 건 흰색이었어."

"아까 전 그림이 방아쇠가 되어 기억이 제법 많이 되살아나지 않았습니까? 자신이 누구인지, 이제 아시겠죠? 아유타 씨...... 아니,
아모 다츠야 박사님."

"이 집은 ‘흑묘관‘이 아니야. 굳이 이름을 짓자면 저 ‘풍향토끼‘에 빗대어 ‘백묘관‘이라고 해야겠지. 진짜 흑묘관은 다른 곳에, 거울반대편에 세워져 있어."

그는 가자마에게 따끔하게 못을 박았어. ‘아버님이 이 집을 남에게 넘기거나 철거하지 않도록 앞으로 도련님이 신경을 잘 써주셔야한다는 말씀입니다‘라고. 이리하여 주인은 저택을 팔거나 관리인인 그를 해고하지도 못해.

"이것 역시 그가 아모 다츠야라는 걸 알고 나면 그리 신기한 이야기도 아니야. 아사오 겐지로의 시체를 관찰한 것도 그렇고. 문외한의 짧은 소견이지만, 아모 박사는 생물학, 그것도 동물학과 연관된 연구실에 오래 있었잖아. 어쩌면 의학부의 해부학 교실과 관계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실제로 내 옛날 친구 중에 그런 녀석이 있어. 이학부에서 동물학을 전공한 뒤에 의학부에서 해부학 조수로 일했지. 지금은 휴스턴 대학에 있어서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지만. 그러니 아유타 도마 즉 아모 다츠야가 초보적인 법의학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이야. 구마시로 선생님의 말씀대로 일찍이 란포와 세이시의 소설을 좋아했다면 더 말할나위가 없지."

"보험?"
"자신이 앞으로도 계속 흑묘관에 살기 위한 보험이지."

그 백골시체는 행방불명된 아모 박사의 양녀, 리사코였다. 리사코를 죽이고 시체를 지하 통로에 숨긴 것은 당시 저택의 소유주였던박사 자신이었다고 추정된다. 아유타 도마가 아모 박사와 동일인물이라면 당연히 그는 지하 통로의 존재와 거기에 숨겨진 시체에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래서 그는 경찰에 신고하기를 꺼렸다. 섣불리 경찰을 불러들였다가 만에 하나 지하 통로의 시체가 발견되는 사태가 벌어지면 큰일이라고 두려워한 것이다.......

"젊은이들이 마약을 즐겼다는 것을 묵인했으니까.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 하지만 그는 그 이상으로 변사 사건을 수사하러 온 경찰들이 저택 안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닐까 봐 불안했어."

엽서의 글씨체가 아유타 도마가 쓴 수기의 글씨체와 아주 흡사했기 때문이다.
엽서와 수기, 둘 다 같은 사람이 쓴 것이다. 둘을 나란히 놓고 글씨체를 비교해보기도 했지만, 전문가에게 감정을 부탁할 필요도없을 만큼 그 사실은 명백했다.

예를 들어 지하에서 백골사체를 발견했을 때는 이래. ‘나는 왼손을 가슴에 꼭 갖다 대어 두근거림을 가라앉히며 공황상태에 빠진젊은이들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욕실에서 아사오의 시체 앞에 섰을 때는 이랬고. ‘왼손을 가슴에 대고 필사적으로 동요를 억누르며 나는 눈앞에 매달린 시체의 상태를 관찰했다.‘

나는 무심코 왼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심장 고동이 빨라졌다.‘ 코난군, 심장을 누를 때 자넨 어느 쪽 손을 쓰지?"
"그러니까...... 오른손이죠. 오른손으로 이렇게."

"아모 다츠야는 전내장 역위증이었다. 이게 결정적인 단서였어."
"어째서요?"
"이 수기에 아유타 씨 역시 전내장 역위증이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 몇 군데 있거든."

"루이스 캐럴은 알지?"
"예, 그건 알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쓴 사람이잖아요."
"그럼 그의 본명은?"
가와미나미는 "글쎄요"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시시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씩 웃었다.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 이게 캐럴의 본명이야."

보통 속이 트릿할 때에는 오른쪽을 아래로 하고 자면 좋다고들 하잖아. 위의 위치상 그래야 소화가 잘 되거든. 그런데 그는 반대로왼쪽을 아래로 하고 누웠어. 왜냐? 위의 위치가 보통 사람과는 반대라서 그래.

세이지는 의뢰는 받아들여 아칸의 숲속에 흑묘관을 세우게 됐는데, 나중에 그는 건축주 아모 다츠야에 대해 ‘그 사람은 도지슨‘이라는 평을 남겼어.

하지만 그 후의 행로는 비참했어. 역시 리사코를 잃은 충격이 컸겠지. 술독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문제를 일으켜서 대학에서쫓겨났고, 결국은 파산해서 삿포로에도 머물지 못하게 됐어.

"일을 협의하느라 아모 박사와 몇 번 만나 이야기하는 사이에 나카무라 세이지는 그의 그런 본성을 꿰뚫어본 거지. 아모는 ‘여자‘가 되기 이전의 ‘소녀‘밖에 사랑하지 못하는 남자다. 그리고 현재 그는 양녀 리사코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야. 마을에서떨어진 숲속에 별장을 세운 것도 분명 자신과 리사코 둘만 머물 수 있는 곳이 필요해서였겠지.
아칸의 별장 흑묘관이 완성되자 아모는 기회 있을 때마다 거기로 리사코를 데려가서 둘만의 시간을 보냈어. 가끔은 친구를 초대하기도 했겠지만. 그리고 세월이 흐르자 리사코는 당연히 쑥쑥 성장했어. 아모는 딸을 사랑했지. 하지만 리사코가 이제 곧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는 분명 발작적인 격정에 사로잡혀 자기 손으로 그 애를 죽였을 거야......."

"사랑했지. 단 어디까지나 ‘소녀‘ 리사코를. 그래서 그는 리사코를 죽였어. ‘소녀‘에서 더러운 ‘여자‘로 성장해가는 리사코를 용서할수 없었던 거야. 열두 살쯤이라 가슴이 커지고 초경을 하는 등 어떤 의미에서는 아이에서 어른으로 변해가는 시기였지."

아모 박사는 리사코를 죽였어.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기르던 검은 고양이도 같이 죽였을 거야. 둘의 사체를 저택지하의 비밀 통로로 옮기고 통로 입구를 벽으로 막은 후, 표면상 딸이 행방불명된 것으로 꾸며 자신의 범죄를 잘 은폐하는 데는 성공했지.

"아주 미남이라 관심을 보이는 여자도 적지 않았다고 구마시로 선생님도 그러셨지. 하지만 그는 내내 독신으로 지냈어. 다치바나교수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셨지. 아모 선생님은 여자에 그다지 흥미가 없으셨을 거예요, 라고."

"이건 유명한 이야기인데, 캐럴은 성적으로 약간 이상한 취향을 지니고 있었어. 성숙한 보통 여성에게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 그의 흥미는 오로지 열세 살 이하의 소녀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는 거야."
"소녀...... 아하. 롤리타 콤플렉스였나요?"

뭐, 어쨌거나 대결이 가상 중요한 단계다.
한숨을 크게 내쉰 시시야가 스스로를 달래듯이 말했다.
"아무튼 흑묘관이다. 실제로 저택에 가보면 아유타 씨의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지. 내 위화감 역시 해소될지도 모르고."

"히카와의 어머니는 청각 장애 때문에 전화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거로군요."

동쪽이 왼쪽이라면 흑묘관은 현관을 북쪽으로 두고 서 있다는 말이다. 가와미나미는 수기 속의 묘사를 떠올리려 기를 썼지만, 그런세세한 점까지는 역시 기억나지 않았다. 하다못해 그 노트에 건물 평면도라도 딸려 있었다면, 하는 생각이 짜증과 함께 솟구쳤다.

"전부 반대야......."
계단은 왼편 안쪽에 있다. 장서실은 왼쪽 옆. 복도는 오른쪽으로 뻗어 있다. 위치관계가 전부 들고 있는 평면도와 좌우 반대인 것이다. 그렇다,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여기 와서 이 저택이 수기의 무대인 흑묘관과는 다른 집이란 걸 알았습니다. 20년 전 아모 박사는 다른 곳에 별장을 한 채 더 세운 걸로 짐작됩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의 수기를 읽고 처음으로 설정한 문제로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즉, 흑묘관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문제죠."

"정말 애먹었습니다, 아유타 씨. 이런저런 위화감은 들었지만, 기본적으로 저는 흑묘관이 이곳 아칸의 숲속에 있다고 굳게 믿었거든요. 검은 고양이와 체스가 나오기에 거울 나라의 앨리스』와 저택을 잘 버무렸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막상 와보니이렇습니다. 건물의 색이 달라요. 좌우는 반대고요. 게다가 모티브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정말 속 썩였습니다. 20년 전 아모 박사의 의뢰로 나카무라 세이지가 설계한 별장은 사실 두 채였다. 그런 건 생각지도 못했어요."

"아까 밖에서 말했다시피 이건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 어젯밤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읽었다고 그랬지? 그럼 그 책의 내용은 기억나겠네. 앨리스는 흰 토끼를 쫓아 구멍에 뛰어들었어. 도착한 곳은 ‘하트의 여왕‘이 맹위를 떨치는 트럼프 왕국이지."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앨리스가 새끼 검은 고양이를 안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장면으로 시작돼. 그리고 거기서 앨리스가 모험을펼치는 곳은 체스의 왕국이지."

"당신은 흑묘관을 거울 반대편에 세웠어요. 그 거울은 적도 위에 서 있었습니다. 적도를 사이에 두고 아칸과 지구 반대편에 위치하는 곳, 즉 당신이 관리인으로 일하던 흑묘관은 오스트레일리아 타스마니아 섬에 있습니다."

"시시야 씨, 당신은......."
노인은 가벼운 놀라움의 빛을 띤 얼굴로 상대의 눈을 쳐다보았다.
"저보고 어떻게 하라고?"
"별달리 드릴 말씀 없는데요."
대답하고 나서 시시야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바인더를 가방에 넣고 남쪽 창문을 향해 후리후리한 몸을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이 집에는 범죄의 흔적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인간의 시체는커녕 고양이 사체 한 구도 없었습니다."

"혹시 이 수기에는 다음 편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미래의 나를 위해 쓰는 탐정소설‘의 ‘해결편‘에 해당하는 두 번째 노트가."
자조를 얼굴에 머금은 채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짧지만 확실히 있었습니다. 불이 났을 때 타버렸겠죠. 아무래도 불이 났을 때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을 모양입니다."
"거기에는 마지막 밀실사건의 진상이 적혀 있었겠군요. 범인의 이름, 그리고 동기......."
"벌써 다 알고 계실 텐데요? 이제 와서 제가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리사코를 잃고 대학에서 쫓겨나 삿포로에도 살 수 없게 된 당신이 도망친 곳은 아칸이 아니라 타스마니아였습니다. 수기에 당신자신이 ‘세상의 끝 같은 이런 곳‘이라고 평한 장소의 숲속에 세운, 일찍이 자신의 소유물이었던 별장. 당신은 이 지방의 대리인‘으로서 예전부터 알고 지낸 호버트 시의 일본인 아다치 히데아키 씨의 배려로 아유타 도마로 이름을 바꾸고 저택 관리인이라는 명목으로 저택에 살게 된다."

"하필이면 당신 같은 사람에게 ‘사건을 의뢰하다니........"
"후회하십니까?"
시시야의 질문에 아유타 도마, 즉 아모 다츠야는 "아니요" 하고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저는 평생 운명론자를 바보 취급해왔지만 슬슬 생각을 바꿀 때가 온 것 같군요."

"갑시다. 아모, 아니 아유타 씨. 흑묘관이라는 저택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수기는 전부 당신이 ‘악몽‘을 동경해서 쓴소설이었어요. 저와 코난 군에게는 그게 ‘현실‘이라고 해두죠."

그 ‘유서‘에서 아사오는 자신이 쓰바키모토 레나를 죽였다고 고백했다. 자신이 죽였음을 똑똑히 기억한다고 썼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녀는, 쓰바키모토 레나는 아사오에게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레나는 아사오에게 살해당하지 않았다. 아니, 살해가 다 뭔가. 레나는 아무에게도 살해당하지 않았다.

장서실에서 레나의 시체를 관찰했을 때 나는 바로 알아차렸다. 레나는 교살당한 것이 아니라 심장마비 따위의 다른 원인으로 죽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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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그, 나는......."
"지나간 일을 들춰봤자 아무 소용 없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거 돌려드리겠습니다. 뭐라고 해야 하나, 그, 누를 끼쳐서 정말로......."
"이제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마십시다. 아까 기노우치 씨한테도 말했는데, 지나간 일을 들춰봤자 아무 소용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슬퍼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이제 예전처럼 ‘그쪽 세계‘에 동경을 품지 않는...... 아니, 품지 못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변질된 마음을 싫든 좋든 직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어쩌면 내 내면의 그러한 변화는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세계를 거부하고, 세계에게 거부당해 거기서 달아난 자가 다다르는, 그것은 분명 가련한 숙명인 것이다.......

칼로를 안고 욕실에서 나오려는데 소리가 나는 것을 깨달았다. 어딘가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난 것이다. 내가 깜빡하고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 욕실의 바로 위에 해당하는 2층 욕실에서 누가 물을 쓰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때는특별히 수상하게 느끼지 않았다.

"아직도 샤워하는 소리가 나. 문은 잠겨 있고,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어. 침실도 들여다봤는데 아무도 없었고."
나는 시계를 보았다. 벌써 11시가 다 되었다. 기노우치의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이건 이상하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오래 욕실에 혼자 틀어박혀 있다는 건.......

내가 얼굴을 씻은 후에 알아차린 물소리는 아사오 겐지로가 샤워하는 소리였을까. 살롱에서 기노우치를 본 것이 9시 반, 얼굴은 살롱에 가기 몇 분 전에 씻었으니 시간관계는 지금 이야기와 일치한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려는데 샤워기 쓰는 소리가 나더라고. 말을 걸어봤지만 대답은 없었어. 물소리 때문에 안 들리는구나 싶어서, 히카와가 일어난 것 같기에 하는 수 없이 그쪽 화장실을 썼어."

"우리가 아니라 그 여자의 잘못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래. 우리는 별로 잘못한 게 없어. 살인이 아니라 사고라고, 사고. 책임은 걔한테 있어. 응, 그렇지?"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혹시나 싶었는지 히카와는 욕실 문 오른쪽에 있는 반침의 쌍바라지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옷장 안은 아무 이상도 없었다. 그 옆에서 나는 어떻게든 밖에서 문을 열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던 끝에 문 자체를 부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히카와가 다시 손잡이를 잡고 힘을 주었다. 하지만 문은 역시 열리지 않았다. 안쪽 걸쇠가 내려져 있는 것이다.

더는 숨길 수 없다.
이러다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다.
어젯밤에 그 여자를 죽인 건 저입니다.
똑똑히 기억합니다.
모두에게 누를 끼쳐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해주세요.
아사오

아사오는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발로 자신의 체중을 지탱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서 있지 않았다. 그의 몸은 매달려 있었다........
"목을 맸어."
마지막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비명을 지른 기노우치를 돌아보고 가자마가 말했다.
"이 자식, 자살했어."

편지지에는 낯익은 검은 볼펜 글씨가 줄지어 있었다. 한순간 활자로 착각할 만큼 각지고 반듯한 글자, 그것은 그저께 오후에 우연히 본 비디오테이프의 라벨에 쓰인 글자와 똑같은 글씨체였다.

"저기에 이런 게."
기노우치가 침대 옆의 탁자를 뾰족한 턱으로 가리켰다. 나를 향해 내민 그의 손에는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그 녀석이, 겐지로가 쓴 거예요. 유서 아닐까요?"
"정말입니까?"

문제의 ‘유서‘를 어젯밤 히카와가 빼앗은 비디오테이프와 함께 뒤뜰 소각로에서 태운 후에 나는 젊은이들과 다시 한 번 저마다 증언해야 할 사항과 절대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사항을 확인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어제 사건을 검토할 때 그는 그 ‘진상‘을 모두에게 밝힐 수 없었다. 다른 세 사람의 기억이 몹시 애매했던 것을 기회 삼아 그는 자신의 범행을 숨겼지만, 결국 어젯밤 사람을 죽였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필요도 없이 사건을 경찰에 알리느냐 마느냐는 문제였다. 이 문제에는 나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최선의 대책을 강구했다. 전날 레나의 사건과는 달리 아사오의 죽음 그 자체를 세간의 시선에서 숨기기는 불가능하다. 그가 밴드 멤버들과 함께 이 저택에 왔다는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어설피 은폐 공작을 하다가는 쓸데없는 의심을 살 뿐이라는 것이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어제 사건을 검토할 때 그는 그 ‘진상‘을 모두에게 밝힐 수 없었다. 다른 세 사람의 기억이 몹시 애매했던 것을 기회 삼아 그는 자신의 범행을 숨겼지만, 결국 어젯밤 사람을 죽였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필요도 없이 사건을 경찰에 알리느냐 마느냐는 문제였다. 이 문제에는 나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최선의 대책을 강구했다. 전날 레나의 사건과는 달리 아사오의 죽음 그 자체를 세간의 시선에서 숨기기는 불가능하다. 그가 밴드 멤버들과 함께 이 저택에 왔다는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어설피 은폐 공작을 하다가는 쓸데없는 의심을 살 뿐이라는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신고를 받고 저택으로 달려온 경찰관들은 현장 상황과 우리 네 명의 증언을 근거로 뜻밖에도 아주 빨리 ‘자살‘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시체를 검사한 전문가의 소견도 다행히 그 판정을 뒷받침했고(사망 추정 시각은 대략 4일 오전 1시부터 4시 사이라고 한다), 수사원들이 지하실에 들어갈지도 몰라 마음을 졸였지만 별 탈 없이 마무리되어 며칠 후에 젊은이들은 무사히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잠겨 있던 문 두 개에 대해서는 앞에 쓴 것과 거의 동일하다. 걸쇠 및 그 근처에 수상한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고, 문과 문틀 사이에는 약간의 틈도 없었다. 나는 나중에 더 꼼꼼한 관찰과 실험을 통해 이 문들의 ‘밀폐성‘을 다시금 확인했다.

쓰바키모토 레나라는 여자는 이 저택에 온 적이 없다. 아사오 겐지로는 개인적인 고민 때문에 스스로 목을 맸다.
이것이 1989년 8월에 일어난 사건의 전부라고 여기면 그만이다. 그래, 그게 제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 말고 다른 가능성은 없을지 생각했다. 즉, 그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아니,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아사오 겐지로는 정말 죽을 각오로 자살을 꾀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동기, 그것을 나타내는 ‘유서‘, 그리고 밀실이었던 현장.......

하지만 나는 그것 말고 다른 가능성은 없을지 생각했다. 즉, 그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아니,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이윽고 시시야가 차에 실린 자동차 수리용 공구를 들고 돌아왔다. 그걸로 잠긴 문을 비틀어 여는 데 15분 정도 걸렸을까. "좋아"
하고 만족스러운 듯이 중얼거린 시시야는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앞장서서 건물로 들어갔다.

그때 끼긱, 하고 삐걱대는 소리가 높이 울려 퍼졌다. 아유타 노인이 입구에서 보아 왼편 벽에 있는 상아색 쌍바라지 문을 밀어서 연것이다.
열린 문 안으로 사라지는 아유타를 보고 시시야는 팔짱을 풀고 뒤를 쫓았다. 가와미나미도 허둥지둥 따라갔다.

그렇게 중얼거리고 시시야가 손가락을 뻗었다. 금속음이 작게 울려 퍼지며 타일 넉 장 분량, 한 변 80센티미터 정도의 정사각형 문이 아래로 열렸다.

완전히 황폐해진 저택 안. 책이 없는 책장. 벽에 걸려 있지 않은 그림. 아유타의 수기에 그려진 작년 8월 시점의 흑묘관과 이렇게다르다니, 묘하다면 확실히 묘하기는 한데.......

시시야는 동전을 타일 사이에 끼우고 비틀 듯이 힘을 주었다. 빠각, 하는 둔한 소리와 함께 ‘열쇠‘ 타일이 들려 올라갔다. 그 타일을바닥에서 빼낸 후 옆의 검은 타일에 손을 대고 옆으로 미끄러뜨렸다. 과연 이것은 어릴 적에 하고 놀았던 ‘15게임‘의 요령이다.

이때 시시야의 얼굴에는 뭔가 터무니없이 불가해한 사태에 직면한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가와미나미는 뭐라 해야 될지 몰라공연히 실내를 훑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방을 둘러싼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저마다 트럼프의 도안을 모티브로 했다고 추정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끝에서부터 순서대로저건 ‘스페이드 킹‘, 다음은 ‘다이아 퀸‘인가....... 회랑 위에는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를 메우듯이 수많은 책장이 나란히 서 있었다. 히지만 여기서 보건대 책장은 전부 텅 빈 듯했다. 책이 한 권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리려고 시시야를 돌아다본 가와미나미는 한 가지를 더 알아차렸다. 입구 문 옆에 걸려 있다고 수기에 쓰여 있던 유회가 보이지 않았다.
"그림이 없네요."

"그 후에 무슨 사정이 생겨서 아유타 씨는 여기서 나가야 했다. 그리고 가구류는 주인이 몽땅 팔아치웠다.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짚이는 바가 없으세요?"
"저는......."
아유타는 고개를 계속 저으며 쉰 목소리로 난감한 듯이 대답했다.
"저는 아무것도."

커다란 누름돌을 얹어 마음속 어딘가의 물속에 가라앉혀두었던 기억들이 이 저택 안에 발을 들여놓은 것을 계기로 드디어 눈에 띄게 움직이기 시작했음이 틀림없다. 지금까지는 고작해야 살짝 꿈적거리는 정도였지만, 혹시 지금 누름돌을 밀어제칠 만큼 격렬하게 꿈틀대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후에 시시야와 가와미나미는 2층을 보러 갔다.
이때 아유타 노인은 계단을 오르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혼자 1층에 남았는데, 가와미나미는 아까부터 그의 표정과 태도가 미묘하게 변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예를 들어 처음에 신주쿠의 호텔에서 그와 만났을 때와 비교해보면 한층 명백했다. 그때 아유타는 에떻게든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싶어 안달하는 것처럼 보였다. 설령 그 기억이 어떠한 것이든, 무엇 하나 기억해내지 못하는 현재상태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라고 주저 없이 단정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

지금 아유타의 얼굴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숨기기 힘든 두려움이었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다. 불길한 기억이 이윽고 의식의 수면으로 떠오르리라는 예감에 겁을 먹은 것이다.......

"이걸 이렇게 비스듬히 올린 상태로 아래를 밀랍으로 메워서 고정해. 문을 닫은 후 밖에서 무슨 방법으로 열을 가해 밀랍을 녹이면걸쇠는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받이쇠로 떨어지지. 마찬가지로 종이성냥을 끼워서 걸쇠를 고정하는 방법도 있어. 불을 붙이고나서 재빨리 문을 닫아. 성냥이 다 타면 걸쇠가 떨어지겠지."

"확실히 튼튼하게 잘 만들었어. 문틀과 문 사이에 틈이 전혀 없었다고 딱 잘라 말했을 정도니까, 적어도 사건이 일어난 시점에서는분명 그랬겠지."
"바늘과 실로 밖에서 걸쇠를 내리는 것도 불가능했다는 거로군요."

"그 밖에도 몇 가지 변형이 있는데, 요컨대 아유타 씨는 그런 종류의 트릭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하나하나 소거해나간 거야. 밀랍을 사용했다면 그 흔적이 남을 것이다, 뭔가를 태웠다면 검댕이 묻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이야. 히카와의 방에 있던 P. D. 제임스*의 원서를 보고 ‘그에게 이런 취미도 있었나‘라고 바로 이해했을 정도니까 아유타 씨도 미스터리 소설을 꽤나 좋아했다고 볼수 있지. 밀실 트릭에 대해 이 정도쯤은 알아도 별로 이상할 것 없어.
* 미국과 영국 추리작가협회에서 최고의 영예인 ‘그랜드 마스터‘와 ‘다이아몬드 대거‘ 칭호를 받은 영국의 여성 추리작가.
그 결과 그는 수상한 점은 전혀 없었다고 적었어. 히카와와 가자마가 재빨리 그런 흔적을 지울 틈도 없었다고 단언했지. 우리는일단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어."

"하항. 그렇다면...... 아니, 설마. .아, 그렇구나. 거울 세계에 사는 사람...... 거울이라. 과연. 그렇다면...... 그건?
지?. ..그건? ......아아, 그것도, 그것도 그렇구나......."

"아유타 씨는 수기 마지막 부분에 ‘꼼꼼한 관찰과 실험‘을 했다고 적었어. 분명 이 방법도 ‘실험해봤을 거야. 그리고 아마 지금 내가 말한 것과 똑같은 이유로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을까 해."

"이 여닫이창을 ‘최대한 열어도 고작 10센티미터도 안 되는 틈이 생길 뿐이지만‘이라고 설명한 부분이 있었지."
"잘 기억하시네요."
"지긋지긋할 만큼 읽었으니까."
시시야는 양손을 맞부딪쳐 먼지를 털면서 말했다.

"예. 그건 그저께 삿포로에서 들었죠."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어. 그 말을 가르쳐주신 구마시로 선생님 역시 아무것도 몰랐고."
"하지만."

저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수기에 등장하는 다섯 명이 백골이 된 소녀와 고양이를 발견했다는 건가. 어쩌면 1년 전에 장서실에서 죽은 쓰바키모토 레나의 시체 역시 거기로 옮겼을지 모른다. 지금쯤은 이미 백골이 되어....... 가와미나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새삼스레 몸을 움츠렸지만.
"아무것도 없네요."

"어떻습니까, 아유타 씨. 보시다시피 여기에는 백골사체가 한 구도 없어요."

거기에 벽 같은 건 없었다. 일찍이 그러한 것이 있었던 흔적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문 너머에는 좁은 통로가 어둠 속 깊은 곳을 향해 뻗어 있었다.

시시야가 어깨의 가방을 고쳐 메고 문으로 다가갔다. 손전등을 왼손으로 바꿔 들고 오른손을 손잡이로 뻗으려는데 "시시야 씨, 잠깐만요" 하고 아유타가 말렸다.
"제가......."
"제가 열겠습니다."

거기에는 쌓아올린 벽돌 위에다 모르타르를 칠해서 만든 위장용 벽이 있어야 할 터였다. 그런데.
"앗!"

손전등으로 문 안쪽을 비추었다. 똑바로 뻗은 통로의 어디에도 수상한 낌새는 없었다.
"코난 군도. 자, 어서."
세 사람은 다시 한 줄로 서서 어둠 속을 걷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지하수가 스며 나오는지 통로 바닥 여기저기에 물웅덩이가 생겨서 발이 젖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좌우의 벽에 팔이 닿을 때마다 차가워서 무심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세 사람이 지하에서 올라와 당도한 곳은 사방이 높이 2미터 남짓 되는 정원수로 둘러싸인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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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타 씨의 수기에 나온 백골시체, 그게 행방불명된 리사코라고 가정할까. 십여 년 전에 리사코는 흑묘관에서 죽었어. 시체가 지하 통로에 숨겨져 있었으니 누구에게 살해당했다고 보는 게 맞겠지. 그리고 수기 속에서 히카와 하야토가 단정한 것처럼 범인은 리사코의 양아버지이자 별장의 주인이기도 한 아모 다츠야일 가능성이 높아."

구시로에는 오후 3시가 되기 전에 도착했다. 삿포로도 이맘때의 도쿄에 비하면 지내기 훨씬 수월하지만, 여기는 더 시원하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긴소매가 단연 많았다. 들은 바로는 한여름에도 평균 최고 기온이 20도를 넘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안개가 희미하게 낀 거리에서는 전체적으로 물이 살며시 번진 듯이 신비한 운치가 느껴졌다.

"그럼 아이누족*에게 무Mu대륙**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는 건 아십니까?"
*일본의 홋카이도와 러시아의 사할린, 쿠릴열도 등지에 있는 소수 민족.
** 고대에 남태평양에 존재했다고 일컬어지는 가상의 대륙.

"이게 감옥 터로군. 왜, 수기에서 히카와 하야토가 아유타 씨를 상대로 이야기했잖아."
가와미나미는 시시야의 손맡을 들여다보았다. 구시로 시의 북동쪽에 위치한 광대한 구시로 습원 동쪽에 ‘도로코 호수‘라는 가늘고 긴 호수가 있었다.
"향토관이라고 적혀 있지. 실은 이게 일찍이 홋카이도 집치감集治監* 구시로 분감의 본관이었던 건물이야. 아바시리 형무소의전신이라고도 일컬어지지."
*현대 형무소의 전신으로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졌다.

"그 수기 초반에 아다치 히데아키라는 이름이 나왔잖아."
"아아, 예. 이쪽에서 가자마 씨의 대리인으로 일한다는 사람이었던가요?"
"그래. 아마도 그 사람은 아모 박사가 별장을 넘겼을 때부터 매각과 운영의 창구로 활약한 현지 업자가 아닐까 해. 그렇다면 구시로 시내에 있을 가능성이 높지. 전화번호부로 찾아내면 횡재다 싶었는데."

"이곳의 느낌은 어떻습니까. 뭔가 기억이 날 것 같으세요?"
가와미나미가 묻자 아유타는 왼쪽 눈을 가린 안대의 위치를 바로잡으며 "글쎄요"라고 중얼거렸다.

"내일은 분명 무슨 진전이 있을 겁니다."
미소를 지었지만 가와미나미는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무슨 진전, 그것이 과연 이 만신창이의 노인에게 바람직한 일일까. 어쩌면 이대로 자신의 과거를 잊고 사는 편이 행복하지는 않을까.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레나의 시체를 눈앞에 두었을 때 냉정하게 대응한 것도 그래. 맥을 짚고 사후경직의 진행 상황으로 별 어려움 없이 사망시각을 추정했는데......."
"솜씨가 너무 좋다고요?"
"그렇지. 아직 더 있어. 그 후에 레나의 시체를 지하실에 숨기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그는 강하게 반대하려 들지 않았어. 이것역시 이상하게 느껴진단 말이야. 그리고 그 방법에 찬성하기로 했을 때 그는 이렇게 생각했어. ‘어쩌면 다른 방법으로는 얻기 힘든이점이 있지 않겠느냐‘ 도대체 그 ‘이점은 뭐였을까?"

가와미나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라고 말을 걸자 아유타는 안도한 듯한 표정으로가와미나미를 돌아다보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겨우 도착했네요."

시시야가 봉투의 내용물을 꺼내며 말했다. 그것은 누렇게 변색된 한 장의 엽서였다.
"아아, 히로요 씨가 보내줬군요. 옛날에 구마시로 선생님께 왔다는 아모 박사의 엽서?"

"코난 군, 그 수기를 읽고 이런 의문을 느끼지 않았어? 젊은이들이 쓰바키모토 레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째서 아유타 씨는 경찰에 신고를 못 하게 하려는 히카와의 의견에 그렇게 쉽게 따랐을까?"

"그리고 레나의 시체를 눈앞에 두었을 때 냉정하게 대응한 것도 그래. 맥을 짚고 사후경직의 진행 상황으로 별 어려움 없이 사망시각을 추정했는데……."

"솜씨가 너무 좋다고요?"

"그렇지. 아직 더 있어. 그 후에 레나의 시체를 지하실에 숨기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그는 강하게 반대하려 들지 않았어. 이것 역시 이상하게 느껴진단 말이야. 그리고 그 방법에 찬성하기로 했을 때 그는 이렇게 생각했어. ‘어쩌면 다른 방법으로는 얻기 힘든 이점이 있지 않겠느냐.’ 도대체 그 ‘이점’은 뭐였을까?"

구시로 시내에는 아침부터 짙은 안개가 끼어 고작 몇 미터 앞을 걷는 사람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노란 안개등이 느릿느릿하게 오가는 시가지를 빠져나와 국도 240호선을 타고 아칸으로 달렸다. 시내에서 멀어지자 안개도 개어서 차의 속도를 높였다.

"최근에 그 집에서 사람이 죽는 사건이 일어난 적은요?"

"음.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전파상 주인은 옛날 기억을 더듬어 별장으로 가는 길을 표시한 간단한 지도를 그려주었다. 시시야는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그 지도를 아유타에게 건네주고 차를 출발시켰다.

죽은 쓰바키모토 레나의 창백한 얼굴. 가느다란 목에 감긴 핏빛 스카프. 지하의 어둠 속에서 나를 노려본 그 공허한 눈구멍. 그리고 그 발치에 드러누워 있던 고양이의 사체…….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지금도 그것들은 내 망막에 새겨져 떨어지지 않는다. 귀를 기울이면 땅속에서 소녀의 쓸쓸한 흐느낌과 고양이의 원망스러운 울음소리가 겹쳐서 울려 퍼지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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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여러분은 어제 거기서 약에 취해 모두 함께 그 여자와 성관계를 맺었다는 거로군요."

다 그 재수 없는 년 때문이라는 심정이 흠씬 묻어나는 말투로 가자마는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았다. 어제는 어떻게든 레나의 환심을사려고 개처럼 꼬리를 흔들던 주제에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이것은 행운으로 간주해도 되리라. 두 사람의 이야기에 따르면 레나가 어제 이 저택에 온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우리 다섯명밖에 없다는 뜻이니까.

이렇게 사건 그 자체에 관한 일련의 검토를 마친 시점에서 나의 의지는 확고해졌다. 즉, 쓰바키모토 레나의 죽음을 우리 다섯 사람만의 비밀로 삼아 어둠 속에 묻어버리려는 의지 말이다.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장서실에서 본 시체의 얼굴을 떠올리고 그때까지 한순간도 품지 않았던 연민을 느꼈다. 레나는 레나대로 나름의 고뇌와 좌절을 경험하며 스물 몇 해의 인생을 살아왔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의 개인적 사정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더 이상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 후에 나는 장서실에서 벌어진 변사 사건의 은폐공작을 돕게 되었다. 레나의 본명을 숨긴 것은 만에 하나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이 수기를 읽을 경우(그런 일은 없겠지만)에 대비한 일종의 예방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레나의 본적과 생년월일 및 키. 본적은 니가타. 생년월일의 정확한 숫자는 잊어버렸다. 다만 레나의 나이가 만 25세로 밝혀진것은 기억난다. 키는 분명 156센티미터였다.

"아아, 그야...... 아빠는 내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려 하시니까. 내가 이 집이 마음에 든다고 하면..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문제는 없을 것 같군요."

"포의 「검은 고양이」를 바탕에 둔 그 엉터리 이야기를 이끌어냈다. 그 이야기가 이번에는 흑묘관의 ‘현실‘에 영향을 미치려 하고 있다....... 기묘하다면 기묘하고, 아이러니하다면 몹시도 아이러니한 순환이었다.

"아아, 그야...... 아빠는 내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려 하시니까. 내가 이 집이 마음에 든다고 하면.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문제는 없을 것 같군요."

"저를 못 믿으시겠습니까?"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여기까지 온 이상 저는 엄연한 공범입니다."
나는 히카와의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여러분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원래 여기에 뼈를 묻을 작정이었으니 젊은 여러분을 위해 묘를 지켜드리지요."

"보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문을 열자 안쪽에는 우중충한 회색 벽이 버티고 서 있었다. 이쪽을 가만히 쳐다보는 히카와,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세 젊은이에게 나는 설명했다.
"처음부터 이랬습니다. 6년 전, 제가 이 집에 고용되었을 때부터요. 왜 이런 문이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는 오른팔을 들어 집게손가락을 폈다. 손가락은 엉거주춤 일어선 가자마의 어깨 부근을 똑바로 가리키고 있었다. 그제야 나도 이변을 알아차렸다. 그 부근의 벽에 벽돌 한 개분의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거기서 본 것은 더러운 하늘색 블라우스를 입고 빨간 베레모를 쓴 인간의 백골사체였다. 벽에 기대어 파란 멜빵바지를 입은두 다리를 바닥에 내팽개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발치에는 조그만 네발짐승의 백골이 하나 더 드러누워 있었다.

히카와의 추측대로 거기는 ‘방‘이 아니라 ‘복도‘였다. 폭이 1미터도 되지 않는 좁은 통로가 암흑 속으로 뻗어 있었다. 곰팡내 같기도하고 쉰내 같기도 한, 뭐라고도 형용하기 힘든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지하수가 스며 나오는지 발아래가 조금 젖어 있었다. 히카와가 든 손전등 빛에 의지해 우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죽였다...... 아모 박사가?"
"그렇겠죠.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그 그림 속의 여자아이는 박사의 딸인지도 모른다고 했던가요. 우리로서는 그가왜 자기 딸을 죽였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만."

"장서실에 걸려 있던 그 그림이에요. 거기 그려져 있던 여자아이, 하늘색 블라우스를 입고 빨간 베레모를 쓰고 있었잖아요."
"아아, 그러고 보니 분명."

"어제 기노우치가 죽은 그 여자를 상대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옛날에 이 집에서 무시무시한 사건이 벌어졌다. 정신이 나간 아모 박사가 아내를 죽여, 아내가 귀여워하던 검은 고양이와 함께 지하실 벽에 넣어버렸다. 그래서 이 저택은 흑묘관이라고 불린다.
그런 이야기죠. 물론 그 녀석이 농담 삼아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아마 어렸을 때 포의 「검은 고양이라도 읽었겠죠. 그러니 아까 이시체를 보고 제일 놀란 건 그 녀석이 아닐까 하는데요.

몽땅 달라붙어 무너뜨린 벽을 다시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부서진 낡은 벽돌을 치우고 새 벽돌을 쌓은 후 위에다 모르타르를 바르는작업이다. 젊은이들이 그런 미장이 일을 해본 경험이 있을 리 없으니 내가 세세하게 작업을 지시해야 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알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젯밤 사건의 범인이 꼭 여러분 네 명 가운데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거죠?"
"예, 그렇습니다."
히카와의 눈에서 절실함이 묻어났다. 나는 그런 그를 은근히 동정하며 장서실의 쌍바라지 문으로 향했다.

"그럼 역시 어젯밤에 이 방은 완전한 밀실 상태가 아니었군요."
"유감스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
나는 동정 어린 눈으로 청년의 진지한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 비밀 구멍의 존재를 알았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았습니다. 말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모르시겠습니까? 뭣하면 지하실에 내려가서 조사하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이 ‘문‘은 장서실에서만 열 수 있습니다. 아래에서는 열리지 않아요."
"그런."
히카와는 안경에 손을 대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으로 바닥에서 입을 벌린 검은 구멍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면......."
"상황에는 변화가 없다는 말입니다.

"걱정 마세요. 아유타 씨께는 더 이상 누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저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이성을 잃지 않을 겁니다. 믿어주세요."

"그 여자, 레이코를 닮았잖아."
"레이코를? ......아아, 뭐 그렇지."
"그러니까 어젯밤 네 눈에는 그 여자가 레이코로 보인 게 아닌가 싶어서."

"술 취하면 늘 떠들어댔잖아. 레이코, 망할것. 뒈져버리라고 했던가? 넌 그 욕구를 환각 속에서 실행에 옮겼어."
"내, 내가 죽였다는 거야?"
"그렇게 단정 짓는 건 아니야. 동기의 문제를 검토하는 것뿐이지."

하네다에서 지토세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시시야와 가와미나미는 대화를 나누었다. 가와미나미가 바쁜 탓에 두 사람은 사흘 만에야 만났다.
"난 사이타마의 가자마 씨에 대해서야. 확실히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냈어."

"말 그대로 히카와의 어머니는 전화를 못 받아. 전화라는 기계 그 자체를 못 쓰는 거야. 청각 장애와 언어 장애가 있어서."

"가자마 유키는 작년 말에 사고로 죽었어."
"뭐라고요?"
"유키뿐만이 아니야.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하나 있던 유키의 여동생까지 포함해 가족 모두가 한꺼번에 세상을 떠났지. 교통사고였다는군. 네 명이 타고 있던 차가 덤프트럭과 정면충돌했대."

"아유타 씨의 신원을 조사하던 경찰도 아마 여기서 좌절했을 거야."
시시야는 뾰족한 턱의 끄트머리를 긁적였다. 가와미나미는 의욕을 내어 물었다.
"그럼 가자마 씨의 소유물이었던 별장은 어떻게 됐나요?"
"개인자산이었던 모양이니까 평범하게 생각하면 상속권을 지닌 친척의 손에 넘어갔겠지."

그 수기 속에서 히카와는 가자마의 아버지를 ‘숙부‘라고 불렀다. 즉, 가자마의 아버지가 히카와의 부모 중 한쪽의 동생이거나, 가자마의 어머니가 히카와의 부모 중 한쪽의 동생이다* 가령 앞쪽일 경우, 히카와와 가자마의 성이 다르니 분명 히카와의 어머니가 가자마 씨의 누나에 해당한다는 이야기다.

가자마 유키는 사고사. 히카와 하야토는 주소불명. 나머지 두 사람, 기노우치 신과 아사오에 대해 조사할 방법은 거의 없다. 역시문제의 저택을 직접 찾아가 보는 것이 제일 빠른 길일 듯하다.

"나는 거울 세계에 사는 사람이다."
창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시시야는 불쑥 그렇게 말했다.

"팬이란 게 이렇게 고마운 존재일 줄이야."
가와미나미가 반쯤 놀리듯이 말하자 시시야는 아무 말도 없이 눈썹을 찌푸리더니 머리 뒤에 깍지를 끼고 시트에 몸을 깊이 묻었다.
"이상, 보고 끝."

"응. 나도 이상해서 물어봤는데 히카와는 아무래도 그쪽으로 가자마자 사는 곳을 옮긴 모양이야. 그런데 이사한 곳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이쪽에 알리지 않았대. 그래서 연말에 사고가 일어났을 때도 이쪽에서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는군."

"그렇게 사악한 생물은 또 없어. 이 나라의 정치인 놈들처럼 불결하고 교만하고 탐욕스러울뿐더러, 한낮에 카페에 모이는 아줌마들처럼 창피를 모르고 제멋대로에...... 아아, 생각만 해도 속이 거북해. 게다가 말이야, 코난 군."

"장마가 없어서?"
가와미나미 역시 그 점은 부러웠다. 하지만 규슈에서 나고 자란 그는 이곳의 겨울 추위를 견디지 못할 것이 뻔하니 이곳에 살고싶은 생각은 없었다. 시시야는 "흥" 하고 콧김을 내뿜었다.

"그래. 아모 박사는 도지슨이었다. 요점은 그거야."

자그마한 백발 노부인이었다. 가냘픈 몸에 비해 매우 큰 흰옷을 입은 그녀는 갈색 가죽을 댄 팔걸이의자에 가볍게 올라앉아 있었다. 두 사람을 보고 방긋 웃는 모습에서는 대학교 선생님이라기보다 시정의 마음씨 좋은 여의사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여사는 찻잔을 손에 든 채 내객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방긋방긋 미소 짓는 표정은 변함없지만, 시선만은 흠칫 놀랄 만큼 날카로웠다.

"예, 예. 분명 오스트레일리아의 타스마니아 대학에 이삼 년 계셨어요. 저보다 몇 살 어리신데...... 갓 서른이 되셨을 뿐인데 조교수로."
"우수한 분이었군요."
"우수하달까 천재 기질이 있는 분이었죠. 하지만 오히려 그게 걸림돌로 작용해서 학계에서는 고립되신 듯해요."

"예. 내일 구시로로 가서 아유타 씨와 합류할 예정입니다. 문제의 집은 모레에나 찾겠군요. 저기, 선생님. 아모 박사님의 별장에 관해 모르십니까? 흑묘관이라고 불렸다는데요."

"과음하신 탓에 일이 터졌죠. 술기운이 올라 선생님보다 지위가 높은 교수에게 덤벼들어 때렸다던가. 그것도 한낮에 대학 안에서일어난 일이었어요. 원래 학교 안에서도 별종 취급을 받던 분이라 아무도 감싸주는 사람이 없어서 결국......."

"예. 저도 구시로 출신이에요. 유학 가셨던 곳의 이야기 같은 걸 자주 들었어요. 차로 집까지 저를 바래다주기도 하셨고, 술을 좋아해서 술 마시러 갈 때 끼워주기도 하셨죠. 저 두 사람 수상하지 않냐고 수군대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이야기하면서 노부인은 그리운 듯이 눈을 감았다.

이번에 여사는 아까보다 훨씬 오래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여사에게 아모 박사의 추억은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꺼내기 힘든 이야기가 늘어나는 듯하다.

"선생님은 자신의 신체적인 특징을 말씀하신 거예요. 전내장 역위증이라고 아시죠? 심장뿐만 아니라 내장 전체가 좌우 반대인 거죠. 아모 선생님은 선천적으로 그렇게 태어나셨대요."
전내장 역위증.

이것은 핵심적인 문제였다. 아유타 도마의 수기에 나온 지하실의 백골시체는 도대체 누구인가. 지금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 백골시체는 행방불명된 리사코의 것일 가능성이 커지는데.......

그랬구나 하고 가와미나미는 마음속으로 손뼉을 쳤다. 내장 전체가 보통 사람과는 좌우가 뒤바뀐 위치에 있다. 그런 신체적인 기형을 그는 ‘거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는 비유를 사용해 공언(고백이라고 해도 될까)한 것이다.

"너무 단락적일지도 모르지만, 난 한 가지 결론을 내렸어. 다치바나 교수가 어쩐지 미묘한 말투로 그랬잖아. 박사는 여자에 흥미가없었을 거라고. 거기에다 아모 박사는 도지슨이라는 나카무라 세이지의 말을 덧붙여 생각해봐. 어때? 뭔가 감이 오지 않아?"

"그건 그렇고 그런 자신의 신체적 특징을 ‘거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는 말로 표현하다니, 아모 박사에게는 역시 학자보다 문학가나 화가의 자질이 있었다고 봐야겠군. 언젠가 꼭 그의 논문을 찾아서 읽어야겠어."

이럴 때는 무심코 4년 전의 ‘십각관‘ 사건이 떠오른다. 시시야와 둘이서 탐정 흉내를 내며 여기저기 돌아다닐 때마다 헛수고를 했다는 느낌과 자기혐오에 시달리던 기억....... 그때와 지금은 사정이 완전히 다르지만, 이런 꼴이 되고 보니 역시 자신은 ‘명탐정‘감이 아님을 통감한다. 아니, 이래서야 왓슨 역할조차 실격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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