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그, 나는......."
"지나간 일을 들춰봤자 아무 소용 없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거 돌려드리겠습니다. 뭐라고 해야 하나, 그, 누를 끼쳐서 정말로......."
"이제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마십시다. 아까 기노우치 씨한테도 말했는데, 지나간 일을 들춰봤자 아무 소용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슬퍼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이제 예전처럼 ‘그쪽 세계‘에 동경을 품지 않는...... 아니, 품지 못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변질된 마음을 싫든 좋든 직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어쩌면 내 내면의 그러한 변화는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세계를 거부하고, 세계에게 거부당해 거기서 달아난 자가 다다르는, 그것은 분명 가련한 숙명인 것이다.......

칼로를 안고 욕실에서 나오려는데 소리가 나는 것을 깨달았다. 어딘가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난 것이다. 내가 깜빡하고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 욕실의 바로 위에 해당하는 2층 욕실에서 누가 물을 쓰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때는특별히 수상하게 느끼지 않았다.

"아직도 샤워하는 소리가 나. 문은 잠겨 있고,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어. 침실도 들여다봤는데 아무도 없었고."
나는 시계를 보았다. 벌써 11시가 다 되었다. 기노우치의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이건 이상하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오래 욕실에 혼자 틀어박혀 있다는 건.......

내가 얼굴을 씻은 후에 알아차린 물소리는 아사오 겐지로가 샤워하는 소리였을까. 살롱에서 기노우치를 본 것이 9시 반, 얼굴은 살롱에 가기 몇 분 전에 씻었으니 시간관계는 지금 이야기와 일치한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려는데 샤워기 쓰는 소리가 나더라고. 말을 걸어봤지만 대답은 없었어. 물소리 때문에 안 들리는구나 싶어서, 히카와가 일어난 것 같기에 하는 수 없이 그쪽 화장실을 썼어."

"우리가 아니라 그 여자의 잘못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래. 우리는 별로 잘못한 게 없어. 살인이 아니라 사고라고, 사고. 책임은 걔한테 있어. 응, 그렇지?"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혹시나 싶었는지 히카와는 욕실 문 오른쪽에 있는 반침의 쌍바라지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옷장 안은 아무 이상도 없었다. 그 옆에서 나는 어떻게든 밖에서 문을 열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던 끝에 문 자체를 부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히카와가 다시 손잡이를 잡고 힘을 주었다. 하지만 문은 역시 열리지 않았다. 안쪽 걸쇠가 내려져 있는 것이다.

더는 숨길 수 없다.
이러다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다.
어젯밤에 그 여자를 죽인 건 저입니다.
똑똑히 기억합니다.
모두에게 누를 끼쳐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해주세요.
아사오

아사오는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발로 자신의 체중을 지탱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서 있지 않았다. 그의 몸은 매달려 있었다........
"목을 맸어."
마지막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비명을 지른 기노우치를 돌아보고 가자마가 말했다.
"이 자식, 자살했어."

편지지에는 낯익은 검은 볼펜 글씨가 줄지어 있었다. 한순간 활자로 착각할 만큼 각지고 반듯한 글자, 그것은 그저께 오후에 우연히 본 비디오테이프의 라벨에 쓰인 글자와 똑같은 글씨체였다.

"저기에 이런 게."
기노우치가 침대 옆의 탁자를 뾰족한 턱으로 가리켰다. 나를 향해 내민 그의 손에는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그 녀석이, 겐지로가 쓴 거예요. 유서 아닐까요?"
"정말입니까?"

문제의 ‘유서‘를 어젯밤 히카와가 빼앗은 비디오테이프와 함께 뒤뜰 소각로에서 태운 후에 나는 젊은이들과 다시 한 번 저마다 증언해야 할 사항과 절대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사항을 확인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어제 사건을 검토할 때 그는 그 ‘진상‘을 모두에게 밝힐 수 없었다. 다른 세 사람의 기억이 몹시 애매했던 것을 기회 삼아 그는 자신의 범행을 숨겼지만, 결국 어젯밤 사람을 죽였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필요도 없이 사건을 경찰에 알리느냐 마느냐는 문제였다. 이 문제에는 나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최선의 대책을 강구했다. 전날 레나의 사건과는 달리 아사오의 죽음 그 자체를 세간의 시선에서 숨기기는 불가능하다. 그가 밴드 멤버들과 함께 이 저택에 왔다는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어설피 은폐 공작을 하다가는 쓸데없는 의심을 살 뿐이라는 것이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어제 사건을 검토할 때 그는 그 ‘진상‘을 모두에게 밝힐 수 없었다. 다른 세 사람의 기억이 몹시 애매했던 것을 기회 삼아 그는 자신의 범행을 숨겼지만, 결국 어젯밤 사람을 죽였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필요도 없이 사건을 경찰에 알리느냐 마느냐는 문제였다. 이 문제에는 나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최선의 대책을 강구했다. 전날 레나의 사건과는 달리 아사오의 죽음 그 자체를 세간의 시선에서 숨기기는 불가능하다. 그가 밴드 멤버들과 함께 이 저택에 왔다는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어설피 은폐 공작을 하다가는 쓸데없는 의심을 살 뿐이라는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신고를 받고 저택으로 달려온 경찰관들은 현장 상황과 우리 네 명의 증언을 근거로 뜻밖에도 아주 빨리 ‘자살‘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시체를 검사한 전문가의 소견도 다행히 그 판정을 뒷받침했고(사망 추정 시각은 대략 4일 오전 1시부터 4시 사이라고 한다), 수사원들이 지하실에 들어갈지도 몰라 마음을 졸였지만 별 탈 없이 마무리되어 며칠 후에 젊은이들은 무사히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잠겨 있던 문 두 개에 대해서는 앞에 쓴 것과 거의 동일하다. 걸쇠 및 그 근처에 수상한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고, 문과 문틀 사이에는 약간의 틈도 없었다. 나는 나중에 더 꼼꼼한 관찰과 실험을 통해 이 문들의 ‘밀폐성‘을 다시금 확인했다.

쓰바키모토 레나라는 여자는 이 저택에 온 적이 없다. 아사오 겐지로는 개인적인 고민 때문에 스스로 목을 맸다.
이것이 1989년 8월에 일어난 사건의 전부라고 여기면 그만이다. 그래, 그게 제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 말고 다른 가능성은 없을지 생각했다. 즉, 그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아니,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아사오 겐지로는 정말 죽을 각오로 자살을 꾀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동기, 그것을 나타내는 ‘유서‘, 그리고 밀실이었던 현장.......

하지만 나는 그것 말고 다른 가능성은 없을지 생각했다. 즉, 그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아니,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이윽고 시시야가 차에 실린 자동차 수리용 공구를 들고 돌아왔다. 그걸로 잠긴 문을 비틀어 여는 데 15분 정도 걸렸을까. "좋아"
하고 만족스러운 듯이 중얼거린 시시야는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앞장서서 건물로 들어갔다.

그때 끼긱, 하고 삐걱대는 소리가 높이 울려 퍼졌다. 아유타 노인이 입구에서 보아 왼편 벽에 있는 상아색 쌍바라지 문을 밀어서 연것이다.
열린 문 안으로 사라지는 아유타를 보고 시시야는 팔짱을 풀고 뒤를 쫓았다. 가와미나미도 허둥지둥 따라갔다.

그렇게 중얼거리고 시시야가 손가락을 뻗었다. 금속음이 작게 울려 퍼지며 타일 넉 장 분량, 한 변 80센티미터 정도의 정사각형 문이 아래로 열렸다.

완전히 황폐해진 저택 안. 책이 없는 책장. 벽에 걸려 있지 않은 그림. 아유타의 수기에 그려진 작년 8월 시점의 흑묘관과 이렇게다르다니, 묘하다면 확실히 묘하기는 한데.......

시시야는 동전을 타일 사이에 끼우고 비틀 듯이 힘을 주었다. 빠각, 하는 둔한 소리와 함께 ‘열쇠‘ 타일이 들려 올라갔다. 그 타일을바닥에서 빼낸 후 옆의 검은 타일에 손을 대고 옆으로 미끄러뜨렸다. 과연 이것은 어릴 적에 하고 놀았던 ‘15게임‘의 요령이다.

이때 시시야의 얼굴에는 뭔가 터무니없이 불가해한 사태에 직면한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가와미나미는 뭐라 해야 될지 몰라공연히 실내를 훑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방을 둘러싼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저마다 트럼프의 도안을 모티브로 했다고 추정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끝에서부터 순서대로저건 ‘스페이드 킹‘, 다음은 ‘다이아 퀸‘인가....... 회랑 위에는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를 메우듯이 수많은 책장이 나란히 서 있었다. 히지만 여기서 보건대 책장은 전부 텅 빈 듯했다. 책이 한 권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리려고 시시야를 돌아다본 가와미나미는 한 가지를 더 알아차렸다. 입구 문 옆에 걸려 있다고 수기에 쓰여 있던 유회가 보이지 않았다.
"그림이 없네요."

"그 후에 무슨 사정이 생겨서 아유타 씨는 여기서 나가야 했다. 그리고 가구류는 주인이 몽땅 팔아치웠다.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짚이는 바가 없으세요?"
"저는......."
아유타는 고개를 계속 저으며 쉰 목소리로 난감한 듯이 대답했다.
"저는 아무것도."

커다란 누름돌을 얹어 마음속 어딘가의 물속에 가라앉혀두었던 기억들이 이 저택 안에 발을 들여놓은 것을 계기로 드디어 눈에 띄게 움직이기 시작했음이 틀림없다. 지금까지는 고작해야 살짝 꿈적거리는 정도였지만, 혹시 지금 누름돌을 밀어제칠 만큼 격렬하게 꿈틀대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후에 시시야와 가와미나미는 2층을 보러 갔다.
이때 아유타 노인은 계단을 오르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혼자 1층에 남았는데, 가와미나미는 아까부터 그의 표정과 태도가 미묘하게 변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예를 들어 처음에 신주쿠의 호텔에서 그와 만났을 때와 비교해보면 한층 명백했다. 그때 아유타는 에떻게든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싶어 안달하는 것처럼 보였다. 설령 그 기억이 어떠한 것이든, 무엇 하나 기억해내지 못하는 현재상태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라고 주저 없이 단정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

지금 아유타의 얼굴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숨기기 힘든 두려움이었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다. 불길한 기억이 이윽고 의식의 수면으로 떠오르리라는 예감에 겁을 먹은 것이다.......

"이걸 이렇게 비스듬히 올린 상태로 아래를 밀랍으로 메워서 고정해. 문을 닫은 후 밖에서 무슨 방법으로 열을 가해 밀랍을 녹이면걸쇠는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받이쇠로 떨어지지. 마찬가지로 종이성냥을 끼워서 걸쇠를 고정하는 방법도 있어. 불을 붙이고나서 재빨리 문을 닫아. 성냥이 다 타면 걸쇠가 떨어지겠지."

"확실히 튼튼하게 잘 만들었어. 문틀과 문 사이에 틈이 전혀 없었다고 딱 잘라 말했을 정도니까, 적어도 사건이 일어난 시점에서는분명 그랬겠지."
"바늘과 실로 밖에서 걸쇠를 내리는 것도 불가능했다는 거로군요."

"그 밖에도 몇 가지 변형이 있는데, 요컨대 아유타 씨는 그런 종류의 트릭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하나하나 소거해나간 거야. 밀랍을 사용했다면 그 흔적이 남을 것이다, 뭔가를 태웠다면 검댕이 묻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이야. 히카와의 방에 있던 P. D. 제임스*의 원서를 보고 ‘그에게 이런 취미도 있었나‘라고 바로 이해했을 정도니까 아유타 씨도 미스터리 소설을 꽤나 좋아했다고 볼수 있지. 밀실 트릭에 대해 이 정도쯤은 알아도 별로 이상할 것 없어.
* 미국과 영국 추리작가협회에서 최고의 영예인 ‘그랜드 마스터‘와 ‘다이아몬드 대거‘ 칭호를 받은 영국의 여성 추리작가.
그 결과 그는 수상한 점은 전혀 없었다고 적었어. 히카와와 가자마가 재빨리 그런 흔적을 지울 틈도 없었다고 단언했지. 우리는일단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어."

"하항. 그렇다면...... 아니, 설마. .아, 그렇구나. 거울 세계에 사는 사람...... 거울이라. 과연. 그렇다면...... 그건?
지?. ..그건? ......아아, 그것도, 그것도 그렇구나......."

"아유타 씨는 수기 마지막 부분에 ‘꼼꼼한 관찰과 실험‘을 했다고 적었어. 분명 이 방법도 ‘실험해봤을 거야. 그리고 아마 지금 내가 말한 것과 똑같은 이유로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을까 해."

"이 여닫이창을 ‘최대한 열어도 고작 10센티미터도 안 되는 틈이 생길 뿐이지만‘이라고 설명한 부분이 있었지."
"잘 기억하시네요."
"지긋지긋할 만큼 읽었으니까."
시시야는 양손을 맞부딪쳐 먼지를 털면서 말했다.

"예. 그건 그저께 삿포로에서 들었죠."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어. 그 말을 가르쳐주신 구마시로 선생님 역시 아무것도 몰랐고."
"하지만."

저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수기에 등장하는 다섯 명이 백골이 된 소녀와 고양이를 발견했다는 건가. 어쩌면 1년 전에 장서실에서 죽은 쓰바키모토 레나의 시체 역시 거기로 옮겼을지 모른다. 지금쯤은 이미 백골이 되어....... 가와미나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새삼스레 몸을 움츠렸지만.
"아무것도 없네요."

"어떻습니까, 아유타 씨. 보시다시피 여기에는 백골사체가 한 구도 없어요."

거기에 벽 같은 건 없었다. 일찍이 그러한 것이 있었던 흔적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문 너머에는 좁은 통로가 어둠 속 깊은 곳을 향해 뻗어 있었다.

시시야가 어깨의 가방을 고쳐 메고 문으로 다가갔다. 손전등을 왼손으로 바꿔 들고 오른손을 손잡이로 뻗으려는데 "시시야 씨, 잠깐만요" 하고 아유타가 말렸다.
"제가......."
"제가 열겠습니다."

거기에는 쌓아올린 벽돌 위에다 모르타르를 칠해서 만든 위장용 벽이 있어야 할 터였다. 그런데.
"앗!"

손전등으로 문 안쪽을 비추었다. 똑바로 뻗은 통로의 어디에도 수상한 낌새는 없었다.
"코난 군도. 자, 어서."
세 사람은 다시 한 줄로 서서 어둠 속을 걷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지하수가 스며 나오는지 통로 바닥 여기저기에 물웅덩이가 생겨서 발이 젖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좌우의 벽에 팔이 닿을 때마다 차가워서 무심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세 사람이 지하에서 올라와 당도한 곳은 사방이 높이 2미터 남짓 되는 정원수로 둘러싸인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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