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쯤 더 나아가자 통로는 수기의 내용과는 달리 막혀 있지 않고 들어왔을 때와 똑같은 회색 문이 나타났다. 시시야가 문을 열자땅 위로 올라가는 비탈진 계단이 있었다.
덧붙여 이상한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소녀의 얼굴에서 가슴, 배 사이에 사방팔방으로 검은 균열이 수도 없이 많이 생긴 것이다. 누가 날붙이로 캔버스를 난도질한 듯했다.
"이야. 안개가 싹 걷혔네." 푸른 하늘에서 내리쬐는 오후 햇살이 눈부신 듯이 손차양을 치고 시시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와미나미는 청바지 호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시가 넘었다. 이 저택에 도착한 지 아직 두 시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쩐지 두배도 넘는 시간을 지하의 어둠 속에서 헤맨 것 같았다.
가와미나미는 놀라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 그는 분명히 ‘리사코’라고 말했다. 리사코理沙子라고.
캔버스에는 등나무 의자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소녀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하늘색 블라우스에 멜빵바지. 가슴께에 늘어뜨린 갈색 머리카락. 머리에 얹은 베레모....... 수기에 나온 장서실의 유화와 똑같은 구도다. 하지만. 다른 곳이 딱 한군데 있었다. 소녀의 무릎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는 검은 고양이가 그려져 있지 않았다.
시시야가 손을 뻗어 천을 걷었다. 그러자 세 사람 앞에 은색 액자에 담긴 캔버스 한 장이 나타났다. "과연!"
"20년 전, 일을 의뢰하러 온 아모 박사의 본성을 꿰뚫어본 나카무라 세이지는 개구쟁이 기질이 발동했는지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를 맛깔나게 살려서 저택을 설계한 거라고."
아유타 도마와 아모 다츠야는 동일인물이다. 가와미나미는 어제 그 사실을 알았다. 시시야의 방을 찾아간 바로 그때였다.
"어쩐지 이상하네요." 가와미나미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분명 수기에는 건물이 새카맣다고 적혀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야 생각났어? 자네도 참 어지간하군."
"아니야. 그 수기는 첫머리에 필자가 선언한 대로 ‘허위 사실을 일체 배제하고 쓴 거야. 나는 그렇게 확신해."
"저건 고양이가 아니라 토끼야. 흰 토끼지." "하지만 그게......." "앨리스야, 코난 군. 앨리스라고. 이 집은 ‘거울‘이 아니라 ‘이상한‘ 쪽이었어." "앨리스?" "어제 이야기했잖아. 도지슨은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 즉 루이스 캐럴의 본명이라고."
"풍향고양이가...... 앗, 저것도 색이 다르네. 검은색이 아니라 연한 회색이야. 원래는 흰색이나 상아색이었겠죠."
"검게 칠한 벽에 창틀과 문도 전부 검은색이었어. 2층의 욕조도 검은색. 바닥은 빨간색과 흰색의 바둑판 무늬 곳곳에 검은색으로악센트를 준 타일. 그 수기에는 그렇게 묘사되어 있었지. 그런데 지금 자네가 보고 있는 저 집은 어땠지?"
"벽은 상아색이죠. 문도 똑같은 색이었고요. 욕조는 흰색, 어쩐지 그때 좀 묘하다 싶기는 했었는데. 바닥은...... 아아, 빨간색과 검은색의 바둑판 무늬예요. 거기에 흰색으로 악센트를 줬죠. 그러고 보니 장서실의 비밀 구멍을 여는 ‘열쇠‘ 타일도 색이 달랐던가." "수기에서는 검은색, 아까 내가 빼낸 건 흰색이었어."
"아까 전 그림이 방아쇠가 되어 기억이 제법 많이 되살아나지 않았습니까? 자신이 누구인지, 이제 아시겠죠? 아유타 씨...... 아니, 아모 다츠야 박사님."
"이 집은 ‘흑묘관‘이 아니야. 굳이 이름을 짓자면 저 ‘풍향토끼‘에 빗대어 ‘백묘관‘이라고 해야겠지. 진짜 흑묘관은 다른 곳에, 거울반대편에 세워져 있어."
그는 가자마에게 따끔하게 못을 박았어. ‘아버님이 이 집을 남에게 넘기거나 철거하지 않도록 앞으로 도련님이 신경을 잘 써주셔야한다는 말씀입니다‘라고. 이리하여 주인은 저택을 팔거나 관리인인 그를 해고하지도 못해.
"이것 역시 그가 아모 다츠야라는 걸 알고 나면 그리 신기한 이야기도 아니야. 아사오 겐지로의 시체를 관찰한 것도 그렇고. 문외한의 짧은 소견이지만, 아모 박사는 생물학, 그것도 동물학과 연관된 연구실에 오래 있었잖아. 어쩌면 의학부의 해부학 교실과 관계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실제로 내 옛날 친구 중에 그런 녀석이 있어. 이학부에서 동물학을 전공한 뒤에 의학부에서 해부학 조수로 일했지. 지금은 휴스턴 대학에 있어서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지만. 그러니 아유타 도마 즉 아모 다츠야가 초보적인 법의학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이야. 구마시로 선생님의 말씀대로 일찍이 란포와 세이시의 소설을 좋아했다면 더 말할나위가 없지."
"보험?" "자신이 앞으로도 계속 흑묘관에 살기 위한 보험이지."
그 백골시체는 행방불명된 아모 박사의 양녀, 리사코였다. 리사코를 죽이고 시체를 지하 통로에 숨긴 것은 당시 저택의 소유주였던박사 자신이었다고 추정된다. 아유타 도마가 아모 박사와 동일인물이라면 당연히 그는 지하 통로의 존재와 거기에 숨겨진 시체에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래서 그는 경찰에 신고하기를 꺼렸다. 섣불리 경찰을 불러들였다가 만에 하나 지하 통로의 시체가 발견되는 사태가 벌어지면 큰일이라고 두려워한 것이다.......
"젊은이들이 마약을 즐겼다는 것을 묵인했으니까.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 하지만 그는 그 이상으로 변사 사건을 수사하러 온 경찰들이 저택 안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닐까 봐 불안했어."
엽서의 글씨체가 아유타 도마가 쓴 수기의 글씨체와 아주 흡사했기 때문이다. 엽서와 수기, 둘 다 같은 사람이 쓴 것이다. 둘을 나란히 놓고 글씨체를 비교해보기도 했지만, 전문가에게 감정을 부탁할 필요도없을 만큼 그 사실은 명백했다.
예를 들어 지하에서 백골사체를 발견했을 때는 이래. ‘나는 왼손을 가슴에 꼭 갖다 대어 두근거림을 가라앉히며 공황상태에 빠진젊은이들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욕실에서 아사오의 시체 앞에 섰을 때는 이랬고. ‘왼손을 가슴에 대고 필사적으로 동요를 억누르며 나는 눈앞에 매달린 시체의 상태를 관찰했다.‘
나는 무심코 왼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심장 고동이 빨라졌다.‘ 코난군, 심장을 누를 때 자넨 어느 쪽 손을 쓰지?" "그러니까...... 오른손이죠. 오른손으로 이렇게."
"아모 다츠야는 전내장 역위증이었다. 이게 결정적인 단서였어." "어째서요?" "이 수기에 아유타 씨 역시 전내장 역위증이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 몇 군데 있거든."
"루이스 캐럴은 알지?" "예, 그건 알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쓴 사람이잖아요." "그럼 그의 본명은?" 가와미나미는 "글쎄요"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시시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씩 웃었다.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 이게 캐럴의 본명이야."
보통 속이 트릿할 때에는 오른쪽을 아래로 하고 자면 좋다고들 하잖아. 위의 위치상 그래야 소화가 잘 되거든. 그런데 그는 반대로왼쪽을 아래로 하고 누웠어. 왜냐? 위의 위치가 보통 사람과는 반대라서 그래.
세이지는 의뢰는 받아들여 아칸의 숲속에 흑묘관을 세우게 됐는데, 나중에 그는 건축주 아모 다츠야에 대해 ‘그 사람은 도지슨‘이라는 평을 남겼어.
하지만 그 후의 행로는 비참했어. 역시 리사코를 잃은 충격이 컸겠지. 술독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문제를 일으켜서 대학에서쫓겨났고, 결국은 파산해서 삿포로에도 머물지 못하게 됐어.
"일을 협의하느라 아모 박사와 몇 번 만나 이야기하는 사이에 나카무라 세이지는 그의 그런 본성을 꿰뚫어본 거지. 아모는 ‘여자‘가 되기 이전의 ‘소녀‘밖에 사랑하지 못하는 남자다. 그리고 현재 그는 양녀 리사코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야. 마을에서떨어진 숲속에 별장을 세운 것도 분명 자신과 리사코 둘만 머물 수 있는 곳이 필요해서였겠지. 아칸의 별장 흑묘관이 완성되자 아모는 기회 있을 때마다 거기로 리사코를 데려가서 둘만의 시간을 보냈어. 가끔은 친구를 초대하기도 했겠지만. 그리고 세월이 흐르자 리사코는 당연히 쑥쑥 성장했어. 아모는 딸을 사랑했지. 하지만 리사코가 이제 곧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는 분명 발작적인 격정에 사로잡혀 자기 손으로 그 애를 죽였을 거야......."
"사랑했지. 단 어디까지나 ‘소녀‘ 리사코를. 그래서 그는 리사코를 죽였어. ‘소녀‘에서 더러운 ‘여자‘로 성장해가는 리사코를 용서할수 없었던 거야. 열두 살쯤이라 가슴이 커지고 초경을 하는 등 어떤 의미에서는 아이에서 어른으로 변해가는 시기였지."
아모 박사는 리사코를 죽였어.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기르던 검은 고양이도 같이 죽였을 거야. 둘의 사체를 저택지하의 비밀 통로로 옮기고 통로 입구를 벽으로 막은 후, 표면상 딸이 행방불명된 것으로 꾸며 자신의 범죄를 잘 은폐하는 데는 성공했지.
"아주 미남이라 관심을 보이는 여자도 적지 않았다고 구마시로 선생님도 그러셨지. 하지만 그는 내내 독신으로 지냈어. 다치바나교수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셨지. 아모 선생님은 여자에 그다지 흥미가 없으셨을 거예요, 라고."
"이건 유명한 이야기인데, 캐럴은 성적으로 약간 이상한 취향을 지니고 있었어. 성숙한 보통 여성에게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 그의 흥미는 오로지 열세 살 이하의 소녀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는 거야." "소녀...... 아하. 롤리타 콤플렉스였나요?"
뭐, 어쨌거나 대결이 가상 중요한 단계다. 한숨을 크게 내쉰 시시야가 스스로를 달래듯이 말했다. "아무튼 흑묘관이다. 실제로 저택에 가보면 아유타 씨의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지. 내 위화감 역시 해소될지도 모르고."
"히카와의 어머니는 청각 장애 때문에 전화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거로군요."
동쪽이 왼쪽이라면 흑묘관은 현관을 북쪽으로 두고 서 있다는 말이다. 가와미나미는 수기 속의 묘사를 떠올리려 기를 썼지만, 그런세세한 점까지는 역시 기억나지 않았다. 하다못해 그 노트에 건물 평면도라도 딸려 있었다면, 하는 생각이 짜증과 함께 솟구쳤다.
"전부 반대야......." 계단은 왼편 안쪽에 있다. 장서실은 왼쪽 옆. 복도는 오른쪽으로 뻗어 있다. 위치관계가 전부 들고 있는 평면도와 좌우 반대인 것이다. 그렇다,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여기 와서 이 저택이 수기의 무대인 흑묘관과는 다른 집이란 걸 알았습니다. 20년 전 아모 박사는 다른 곳에 별장을 한 채 더 세운 걸로 짐작됩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의 수기를 읽고 처음으로 설정한 문제로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즉, 흑묘관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문제죠."
"정말 애먹었습니다, 아유타 씨. 이런저런 위화감은 들었지만, 기본적으로 저는 흑묘관이 이곳 아칸의 숲속에 있다고 굳게 믿었거든요. 검은 고양이와 체스가 나오기에 거울 나라의 앨리스』와 저택을 잘 버무렸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막상 와보니이렇습니다. 건물의 색이 달라요. 좌우는 반대고요. 게다가 모티브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정말 속 썩였습니다. 20년 전 아모 박사의 의뢰로 나카무라 세이지가 설계한 별장은 사실 두 채였다. 그런 건 생각지도 못했어요."
"아까 밖에서 말했다시피 이건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 어젯밤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읽었다고 그랬지? 그럼 그 책의 내용은 기억나겠네. 앨리스는 흰 토끼를 쫓아 구멍에 뛰어들었어. 도착한 곳은 ‘하트의 여왕‘이 맹위를 떨치는 트럼프 왕국이지."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앨리스가 새끼 검은 고양이를 안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장면으로 시작돼. 그리고 거기서 앨리스가 모험을펼치는 곳은 체스의 왕국이지."
"당신은 흑묘관을 거울 반대편에 세웠어요. 그 거울은 적도 위에 서 있었습니다. 적도를 사이에 두고 아칸과 지구 반대편에 위치하는 곳, 즉 당신이 관리인으로 일하던 흑묘관은 오스트레일리아 타스마니아 섬에 있습니다."
"시시야 씨, 당신은......." 노인은 가벼운 놀라움의 빛을 띤 얼굴로 상대의 눈을 쳐다보았다. "저보고 어떻게 하라고?" "별달리 드릴 말씀 없는데요." 대답하고 나서 시시야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바인더를 가방에 넣고 남쪽 창문을 향해 후리후리한 몸을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이 집에는 범죄의 흔적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인간의 시체는커녕 고양이 사체 한 구도 없었습니다."
"혹시 이 수기에는 다음 편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미래의 나를 위해 쓰는 탐정소설‘의 ‘해결편‘에 해당하는 두 번째 노트가." 자조를 얼굴에 머금은 채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짧지만 확실히 있었습니다. 불이 났을 때 타버렸겠죠. 아무래도 불이 났을 때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을 모양입니다." "거기에는 마지막 밀실사건의 진상이 적혀 있었겠군요. 범인의 이름, 그리고 동기......." "벌써 다 알고 계실 텐데요? 이제 와서 제가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리사코를 잃고 대학에서 쫓겨나 삿포로에도 살 수 없게 된 당신이 도망친 곳은 아칸이 아니라 타스마니아였습니다. 수기에 당신자신이 ‘세상의 끝 같은 이런 곳‘이라고 평한 장소의 숲속에 세운, 일찍이 자신의 소유물이었던 별장. 당신은 이 지방의 대리인‘으로서 예전부터 알고 지낸 호버트 시의 일본인 아다치 히데아키 씨의 배려로 아유타 도마로 이름을 바꾸고 저택 관리인이라는 명목으로 저택에 살게 된다."
"하필이면 당신 같은 사람에게 ‘사건을 의뢰하다니........" "후회하십니까?" 시시야의 질문에 아유타 도마, 즉 아모 다츠야는 "아니요" 하고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저는 평생 운명론자를 바보 취급해왔지만 슬슬 생각을 바꿀 때가 온 것 같군요."
"갑시다. 아모, 아니 아유타 씨. 흑묘관이라는 저택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수기는 전부 당신이 ‘악몽‘을 동경해서 쓴소설이었어요. 저와 코난 군에게는 그게 ‘현실‘이라고 해두죠."
그 ‘유서‘에서 아사오는 자신이 쓰바키모토 레나를 죽였다고 고백했다. 자신이 죽였음을 똑똑히 기억한다고 썼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녀는, 쓰바키모토 레나는 아사오에게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레나는 아사오에게 살해당하지 않았다. 아니, 살해가 다 뭔가. 레나는 아무에게도 살해당하지 않았다.
장서실에서 레나의 시체를 관찰했을 때 나는 바로 알아차렸다. 레나는 교살당한 것이 아니라 심장마비 따위의 다른 원인으로 죽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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