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대학교(University)는 어원상 일반인도 참여하는 ‘조합’이란 뜻이다. 카를대학교의 역사를 보아도 조합이란 표현이 맞는 거였다.

체코는 카를대학교를 통해 서유럽 여러 나라에서 발전한 새로운 이론과 주장을 수용했다. 얀 후스처럼 출중한 인물이 나온 것도 개방적인 국가 간 문물교류의 결과였다. 예부터 개방과 자유는 대학의 생명줄이었다.

이 대학의 졸업생 가운데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 많았다. 특히 근현대의 탁월한 문인들이 많았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비롯해 프란츠 카프카, 카렐 차페크, 밀란 쿤데라가 대표적이다. 릴케와 카프카는 현대 독문학계의 큰 별이었다.

차페크는 사회비판 정신이 넘치는 작가였다. 쿤데라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작가로,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한계에 신음하는 인간존재의 비극을 탐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현대 문학계의 최고 거장으로 정평이 있다.

브라헤는 탁월한 천문학자였다. 그는 덴마크인으로 성격이 괴팍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 번은 사촌과 결투하다가 코가 잘렸단다. 그래서 황동으로 만든 코를 달고 다녔다. 브라헤는 최후의 순간도 극적이었다. 갑자기 방광이 터지는 바람에 운명했다고 전한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준비했다는데, "그는 현명하게 살다가 바보처럼 죽었다"는 기이한 글귀였다.

프라하 시절, 청년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가 브라헤의 문하로 들어왔다. 케플러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그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프라하로 온 것이었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수용했다. 또한, 스승 브라헤의 관측 결과를 토대로 행성이 타원형의 궤도를 따라 움직인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것이 ‘행성운동’의 제1법칙이다. 그 밖에도 그는 면적과 속도가 보존된다는 내용의 ‘행성운동’ 제2법칙도 발견했다. 또, 행성과 태양의 거리와 운동 주기에 관한 제3 법칙도 알아냈다. 케플러는 평생 신앙의 자유를 찾아 헤매다 쓸쓸히 사망했다. 그의 탁월한 학문적 성과를 재확인한 이는 영국의 뉴턴이었다.

프라하의 봄
자유를 향한 프라하의 행진은 시간의 장벽을 넘어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프라하의 봄’(Prague Spring)을 기억한다. 1968년 8월이었다. 소련군을 선두로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탱크가 프라하를 침략했다.

체코 공산당은 공산체제의 근간을 위협하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목표는 민주적인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이었다. 동구 공산권의 맹주 소련은 당황했다. 그들은 동유럽의 여러 공산주의 국가들과 함께 체코를 압박했다. 이에 대항하여 체코 지식인들은 이른바 ‘2천어 선언’을 발표했다. 그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시민운동으로 맞섰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얀 후스의 후계자임이 명백했다.

1968년 8월 20일, 바르샤바조약기구에 가입한 5개국이 20만 명의 연합군을 편성해 프라하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삽시간에 체코 개혁파를 숙청했다. 개혁파로 분류된 50여만 명의 당원도 체코 공산당에서 모두 제명되었다.

‘프라하의 봄’을 꽃피운 작가 출신 대통령 하벨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축구로 유명하다. 레알 마드리드라는 팀이 있어서다. 그런데 이 도시는 현대사의 깊은 암울을 간직하고 있다. 청년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이가 좀 든 시민들은 스페인의 악명 높은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1892~1975)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히틀러와도 거래한 인물이었다. 그는 1930년대에 우파를 총동원해 스페인 내전(1936~1939)을 치르기도 하였다.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는 이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 종군했다. 그는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소설을 썼다. 소설은 많은 이들에게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그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다. 그의 말에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드리드에서 교수형을 받고 죽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드리드에서는 도저히 제 명대로 살 수 없다는 말이다. 얼마나 끔찍한 혹평인가.

내가 가장 주목한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게르니카>다. 누구나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이 그림은,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에 소장되어 있다. 나는 이 유명한 걸작 앞에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게르니카는 지명이다. 그것도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바스크라면 스페인에서도 소수민족이 사는 특별한 지역이다.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내란 당시 프랑코 군을 지원하던 히틀러의 독일 공군이 이 마을을 무차별 폭격했다. 삽시간에 2,000여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피카소는 사후에야 조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였다. 자유분방하기 짝이 없었던 이 화가에게도 이처럼 꼿꼿한 일면이 있었다. 조선 시대 선비를 떠올리게 하는 꼬장꼬장함이 아닌가.

역시 스페인 화가였던 고야는 조국이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았을 때를 잊지 못했다. 그는 침략군에게 직접 저항을 표시할 만큼 용기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침략군이 물러난 다음, 고야는 과거의 비참한 광경을 그림으로 재현했다. 그는 1808년 5월 3일에 벌어진 프랑스군의 학살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스페인에서 무고한 양민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역사책을 읽어보면 어디서나 끔찍한 전쟁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고야와 피카소처럼 전쟁의 비극을 날카롭게 고발한 화가는 별로 없었다.

침략자들은 금과 은에 걸신이 들린 마귀처럼 아즈텍과 잉카의 보물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였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수천만을 헤아리던 원주민을 강제노동으로 내몰았다. 금과 은을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열악한 노동 조건으로 고통을 받던 원주민들이 몰사했고, 그에 더하여 유럽에서 건너온 각종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원주민들은 한두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거의 멸종하고 말았다. 그러자 스페인 사람들은 서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끌고 와서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착취한 금은 보배를 이용해 새로운 산업을 육성한 것도 아니고, 전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스페인의 침탈로 인해 위대한 잉카 문명이 사라졌고, 그들이 앞장섰던 종교전쟁을 통해 유럽의 분열은 더욱 골이 깊어졌다.

1930년대에는 내전의 고통도 겪었다. 그때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스페인을 찾았다. 마침 그가 쓴 기행문이 남아 있어 읽는 이의 가슴을 적신다. 작가는 황량하고 쓸쓸한 스페인의 풍경을 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마을과 패잔병이 가득한 도시의 골목길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돈키호테가 말하고자 하는 것
때는 스페인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할 때였다. 홀연 세르반테스라는 작가가 등장했다. 그는 작중 인물 돈키호테를 통해 스페인 사회의 치부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예리하게 분석하였듯, 돈키호테와 그의 하인 산초는 곧 스페인의 원초적인 초상이었다.

돈키호테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를 저돌적인 행동파라고 분류하기 쉽다. 사람들은 사색적인 햄릿의 반대편에 돈키호테가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가세트의 평가는 달랐다. 그는 돈키호테야말로,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는 스페인의 혼이라고 했다. 언제까지나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이라는 말이다.

첫째, 눈앞의 사물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때로 보이는 것도 지워야 한다. 그 대신에 보이지 않는 모습을 그려야 한다. 스페인 미술의 거장들이 걸어간 길에서 배운 바이다. 마드리드에 오기 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점이다.

둘째, 마드리드에서 내가 만난 역사의 거인들은 뚜렷한 개성의 소유자였다. 그들은 삶을 구속하는 기성체제의 비판자들이었다. 자연히 그들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들은 곤욕을 치렀고, 세상은 그들을 곧 망각했다. 그러나 얼마 뒤 새 세상이 밝아올 때면 그들은 다시 찬란하게 부활했다.

유럽에는 흥미로운 속담이 하나 있다. "신은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그 나라 사람들이 창조했다." 많은 사람의 눈에 이 나라는 쓸모없는 땅덩어리로 보였다. 그래서 서양 중세의 탐욕스러운 귀족과 성직자들조차 외면했다.

덕분에 역사적 반전이 일어났다. 용감한 평민들이 암스테르담의 개펄을 일궈 옥토로 만들었다. 그들의 이마에서 흐른 구슬땀이 한 뼘 한 뼘 땅덩어리가 됐다. 말이 쉽지 바닷물을 뽑아내고, 파도를 막아 밭을 일구고 마을과 도시를 만드는 작업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도시가 지켜온 관용의 전통 때문에 나는 이 도시를 특별하게 여긴다. 그들의 관용은 개방적인 문화 또는 자유의 정신과 안팎을 이룬다. 이야말로 암스테르담의 생명력이 아닐까 한다.

세상 풍조에 무조건 영합하기보다 자유로운 예술정신을 추구했던 렘브란트였다. 그는 성찰적인 화가였다. 20대 청년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100여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자화상은 그의 자서전이었다.

어느 모로 보든 렘브란트는 강한 개성의 소유자였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예술가의 삶이 있었기에, 관용과 자유는 암스테르담을 지배하는 정신이 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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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가운데 1907년에는 자연환경이 또다시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바닷물이 이 도시와 북해를 다시 하나로 연결하였다. 브뤼헤는 문자 그대로 물 만난 고기가 되었다. 도시 경제가 힘차게 회생하기 시작하였다. 중세 이래 그 물길이 막히고 트이고를 반복할 때마다 행운과 불행이 교차하였다. 역사에 보기 드문 사례였다.

프라하는 날씨가 비교적 따뜻한 편이다. 습도도 낮아서 살기 편하다고 생각한다. 연간 강수량은 한국의 절반 이하인데 7월의 프라하는 기온이 지나치게 높지 않고 공기도 쾌적하다. 사철 다 좋지만, 여름의 프라하는 최상의 여행지가 아닐까 한다.

19세기의 프라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굴지의 공업 도시로 인정받게 되었다. 특산품 중에는 정교한 무기도 포함되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군도 체코제 기관총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68년 1월, 프라하에서 일어난 자유화 운동은 소련에 대한 반발심에서 비롯되었다. 온 세계인의 주목을 받은 사건이었다. 그보다 10여 년 앞서 역시 동구권의 일부였던 헝가리에서도 자유화 운동이 일어났다(1956년 10월). 김춘수 시인은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란 시를 지어 소련의 군홧발에 짓이겨진 헝가리 자유화 운동의 비극을 노래했다.

프라하에서 벌어진 이 사건을 분수령으로, 소련 다음으로 강성했던 현실 사회주의 국가 동독이 붕괴했다.

이어서 체코와 헝가리 및 폴란드 등 동구권 전체가 흔들렸고 곧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프라하는 소련의 지배체제에 대한 본격적인 저항의 출발점이자 동구의 몰락에 결정타를 날린 종착지였다고 말해도 좋겠다.

얀 후스의 저항 정신이 살아 있는 곳

서로 사랑하라. 사람들 앞에서 진실 즉, 정의를 결코 부정하지 말라!

후스의 옥중서신에 나오는 문장이다. 그에게 사랑이란 정의를 실천하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불의한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었다.

종교개혁가 얀 후스(Jan Hus, 1372~1415)는 복음주의자였다. 그는 성서야말로 신앙의 유일한 근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로마가톨릭교회의 부패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러나 그 점이 문제가 되어 결국 콘스탄츠공의회에 불려갔고, 화형에 처해지고 말았다(1415년).

그런데 그에게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 후스는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 개인의 신앙적 자유를 추구했다. 『교회론(Deecclesia)』과 『강론집』 등의 저술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영혼의 구원은 신이 예정한 대로 이뤄진다. 따라서 돈을 주고 구매한 <면벌부>(면죄부) 따위로는 죄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우리가 보기에는 당연한 말이었으나, 당시에는 위험천만한 주장이었다. 후스는 <면벌부> 판매에 골몰하던 가톨릭교회와 정면충돌하였다.

루터와 후스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다행스럽게도 루터 곁에는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활자가 있었다. 루터는 활자라는 새로운 매체의 가능성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금속활자로 인쇄된 글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온 세상에 널리 알렸다. 곧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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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유네스코는 브뤼헤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구시가지 전부, 곧 430헥타르(약 130만 평)가 그 영예를 누린다. 이 도시를 찾은 방문객으로서 내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성모교회였다. 이 교회의 첨탑 높이는 무려 115미터이다. 혹자는 이 첨탑이야말로 브뤼헤 상인의 자존심을 상징했다고 말한다. 그럴 법한 주장이다. 사이먼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것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벽돌 건물이다.

한 마디로, 브뤼헤는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유럽의 교차로였다. 그렇게 된 데는 무엇보다도 브뤼헤의 훌륭한 입지 조건이 한몫했다.

1400년경 브뤼헤 인구는 최대 20만 명을 헤아렸다. 현재 인구가 12만 명 수준임을 고려할 때 실로 꿈같은 일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가장 번화한 도시라도 5~6만 명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브뤼헤는 단연코 중세 최고의 도시라 해도 손색이 전혀 없었다.

인구로만 단순 비교를 하자면 그때 우리나라의 한양(서울)과 유사한 수준이었다. 다만 질적인 차이가 컸다. 한양은 통치기구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던 데 비해 브뤼헤는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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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들 수중에 있었던 베니스공화국, 그 정식 명칭은 좀 길다. ‘가장 고귀한 공화국 베니스(원어 Serenìsima Repùblica de Vèneta)’이다. 그들의 자존심이 그대로 반영된 국호였다. 8세기부터 1797년까지 베니스는 무려 1천 년 동안 독립성을 유지했다. 실로 유서 깊은 도시국가였다.

물의 도시 베니스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흥미롭게도 그것은 비극에서 출발했다. 5세기의 일이었다. 게르만족이 북이탈리아로 침입해오자, 사람들은 배를 타고 석호로 도망쳤다. 베니스는 일종의 피난처였다(452년). 피난지에 불과했던 볼품없는 마을들이 차츰 부유한 상업 도시로 발전했다. 막히면 통한다(窮則通)는 옛말이 생각난다.

찬란한 영광
그들은 갈수록 다양한 물품을 거래했다. 처음에는 목재와 노예가 주요 상품이었다. 그런데 교역망이 점점 확대되자 상품의 종류와 물량도 꾸준히 증가했다. 1000년경, 베니스는 동지중해의 명실상부한 강자로 부상했다. 그들은 헝가리,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달마티아 등 교역하던 여러 나라를 차례로 제압했다.

1204년, 베니스 공화국은 위험한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그들은 제4차 십자군 원정을 후원하는 실력자로 등장하였다. 문제는 그들이 교황의 의지를 무시하면서까지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했다는 점이다. 신앙상의 목적으로 파견된 십자군이 동방의 기독교 국가를 약탈한 끔찍한 사건이었다.

120여 년 동안 두 나라는 네 차례 전쟁을 치를 정도였다. 전쟁의 마지막 승자는 베니스였다. 이후 세상에서는 베니스를 ‘레반트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레반트는 ‘태양이 떠오르는 땅’이라는 뜻이므로, 베니스가 이제 동방의 지배자로 등극했다는 미칭(美稱)이었다.

역사를 바꾼 모험가, 마르코 폴로
역사란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베니스의 운명을 기울게 만든 사건이 대항해시대의 개막이라는 점은 누구나 안다. 그런데 그 시발점에는 한 사람의 베니스 상인이 있었다. 호기심 때문에 어떠한 모험도 마다하지 않은 불굴의 인물, 마르코 폴로(Marco Polo)였다. 『동방견문록』의 주인공 말이다. 그는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서 당시 서구 사람들이 세상의 끝이라 여기던 중국까지 여행했다. 길을 떠날 당시 마르코는 17살이었다.

우리는 카사노바를 제대로 모른다
이 도시의 역사를 음미해보면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다.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과 모험심이 그것이다. 마르코 폴로의 경우가 대표적이었다. 그에 버금가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었으니, 지아코모 카사노바(1725~1798)다.

카사노바는 단순한 난봉꾼이 아니었다. 그는 미지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탐험한 대단한 모험가였다. 그는 저술을 통해 귀족 사회의 위선을 여지없이 폭로하기도 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욕망과 쾌락을 긍정하는 새로운 관점을 온 세상에 공표하였다. 그의 저서 『카사노바, 나의 편력』은 그런 점에서 인간성의 보편적인 측면을 세상에 알린 계몽주의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카사노바는 법학박사로서 한때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로 일했다. 나중에는 음악가이자 외교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유럽 여러 나라를 종횡으로 주유했다. 베를린, 마드리드, 프라하, 런던과 파리에 이르기까지 그의 활동 공간은 가히 국제적이었다. 게다가 그는 풍부한 인간성의 소유자였다. 왕후장상부터 거리의 부랑아에 이르기까지 기꺼이 다양한 사람들과 친교를 맺었다. 그의 친구 중에는 볼테르와 루소 등 당대의 이름난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여러 명이었다.

그는 뛰어난 상상력의 소유자로서 공상 소설 『20일 이야기』(1888)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쥘 베른의 『지저(地底) 여행』의 예고편이라 해도 좋을 것이었다. 프란츠 카프카 역시 카사노바에게 영감을 받아, 『소송』을 창작했다고 고백하였다. 카사노바의 진정한 모습을 우리는 여태 잘 모르고 있었다.

1천 년가량 지중해 무역의 중요한 축이었던 베니스공화국이다. 매력적인 그 장소에서 나는 시대를 앞서 살았던 카사노바와 폴로를 떠올렸다. 역사를 비춘 찬란한 과거의 빛이 아직 남아 있는 공간에서, 선구자들의 불꽃 같은 생을 조용히 음미하는 것은 꽤 운치 있는 일이다.

브뤼헤(Brügge, 브뤼게라고도 부름)라는 도시를 아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별로 많지 않다. 인구 11만의 중소도시라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역사 속 브뤼헤는 간단히 지나쳐도 좋을 정도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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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에게는 농토가 부족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끝없이 노력하였다. 차마 웃지 못할 것이 그린란드라는 이름의 유래였다. 사실 그 섬에는 녹색의 초지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농경에 대한 꿈을 지닌 이주민을 많이 모으려고, ‘녹색의 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비겁한 속임수라고 비웃기에는 바이킹의 소망이 너무도 절실했다.

뿔 달린 투구 쓴 바이킹은 없었다

바이킹의 가장 인상적인 활동은 동서남북으로 전개된 침략 활동이었다. 그들은 영국,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스페인 해안을 습격하여 값진 보물을 약탈했다. 나중에는 이탈리아까지 쳐들어갔다.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고,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납치해 거액의 몸값을 요구했다. 상당수의 포로를 노예시장에 내다팔았다.

잔인한 약탈자로만 알려진 바이킹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진정한 평화를 추구했다. 또, 바이킹의 대부분은 전사가 아니라 어부와 농부였다. 바이킹 사회에는 본래 솜씨가 탁월한 금은세공업자도 많았다. 해적질에 종사한 바이킹은 부족장 휘하의 몇몇 용사들뿐이었다. 우리가 잘 몰랐던 사실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생각난다. 유럽의 주요 도시를 하나로 이어주는 호화로운 철도여행 중에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다룬 명탐정 이야기다. 소설의 무대인 오리엔트 특급은 실제로 존재했다. 1889년 6월 1일, 첫 번째 특급열차가 파리를 떠나 이스탄불로 향했다. 1977년 5월 19일까지 이스탄불은 이 노선의 동쪽 종착점이었다. 이후 비행기가 여행 산업의 주류로 떠올랐고, 오리엔트 특급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승객이 계속해서 줄어든 결과, 2009년 12월에 결국 노선 자체가 폐지되었다.

실크로드가 있었기에

콘스탄티노플의 융성은 실크로드(비단길)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동아시아에서 시작된 이 무역로의 서쪽에는 여러 도시가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콘스탄티노플은 로마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실크로드의 가장 서쪽에 버티고 있었다. 거기서 동쪽으로 가면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바스라와 바그다드 등이 차례로 나타났다.

‘실크로드’라는 용어는 비교적 새로운 것이다. 19세기 독일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이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중국에서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거쳐 유럽으로 이어진 고대의 교역로를 연구하다가 주된 교역상품이 중국산 비단이었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그래서 독일어로 ‘자이덴 슈트라쎄(Seiden Straße)’, 곧 ‘비단길’이라 이름 지었다.

비단길은 한국과 일본은 물론 베트남이나 타이 등 유럽과 중동 및 아시아의 많은 나라를 직접 간접으로 이어주었다.

다시 400년이 흐른 15세기 중반 동로마제국이 명을 다했다.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의 지배 아래 들어가자 소피아 대성당도 모스크로 변신하였다. 본래 기독교 신앙을 묘사한 모자이크는 회칠해서 감춰졌다. 대성당에는 새로 미흐랍(mihrab)과 미나레(minare)가 설치되었다. 전자는 메카를 향해 만든 우묵하고 둥근 모양의 예배실이요, 후자는 이슬람 사원 특유의 첨탑이다.

십자군, 콘스탄티노플의 보배를 약탈하다

3일간 원정대는 무려 은화 90만 마르크 상당의 전리품을 얻었다. 그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웠던, 동방의 찬란한 기독교 도시가 이른바 십자군원정대의 말발굽 아래 처참하게 짓밟혔다. 기독교 국가가 십자군원정대의 침략으로 초토화되고 말았다!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재앙은 쉬 끝나지 않았다. 이 사건이 일어난 뒤에도 주변 여러 민족이 잇따라 침략을 감행했다. 가진 것이 많아도 지킬 힘이 부족하면 도리어 재앙만 거듭될 뿐이다.

1453년, 드디어 운명의 날이 오고야 말았다. 나는 풍상을 이기고 아직 남아 있는 이 도시의 성벽 밑을 거닐었다. 산책 중에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을 추억했다. 군사전략에 빼어난 오스만튀르크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콘스탄티노플을 빼앗아 이슬람제국의 새로운 중심지로 삼고 싶어 했다.

메흐메트 2세가 거느린 7만 대군이 물밀 듯 밀려왔다. 헝가리 출신의 기술자 우르반은 원정대를 위해 초대형 청동 대포를 만들었다. 53일 동안 69문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5만 발의 무거운 돌덩어리가 성벽을 연속해서 때렸다. 날마다 1천 발의 포탄이 쏟아지자 드디어 철옹성이 무너졌다. 성벽의 길이는 6킬로미터, 높이는 30미터였는데, 포탄의 힘을 이기지 못했다.

이스탄불은 여전히 대륙 간의 중요한 교차로이다. 지금도 러시아와 미국의 이익이 여기서 굉음을 내며 서로 충돌한다. 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양대 문화가 갈등을 벌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양자는 꾸준히 교섭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스탄불의 어제와 오늘이 뚜렷이 증명하는 바이다.

산마르코 대성당에 가본 적이 있는 이라면 알 것이다. 나는 대성당의 장엄함에 감탄했다. 성당 내부를 둘러보고 광장 앞에 나섰을 때, 5월 한낮의 햇살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마치 샤워라도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나폴레옹이 했다는 그 말을 떠올렸다.

"산마르코 대성당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다!"

셰익스피어의 4대 희곡 가운데 하나가 『베니스의 상인』이다. 작중 인물 샤일록은 소문난 구두쇠였다. 냉혈한인 그는 부채를 제때 청산하지 못한 채무자 밧사니오의 심장을 꺼내 달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베니스의 상인들 가운데는 샤일록과 같은 수전노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베니스 상업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곳 상인들은 아프리카 황금을 두카트라는 금화로 만들어 유럽 금융시장을 거머쥐었다. 베니스 상인들은 무에서 유를 창출한 사람들이었다. 비엔날레를 기획한 상인들은 다름 아닌 그 후예였다.

피난처에서 부유한 상업 도시로

상인들의 용기와 모험정신이 이 도시를 키웠다. 그들은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왕정(王政)을 거부했다. 경제가 정치 권력에 종속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베니스 상인들은 공화국을 선택했고, 부유한 상인들이 집권해 과두정치로 도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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