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에게는 농토가 부족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끝없이 노력하였다. 차마 웃지 못할 것이 그린란드라는 이름의 유래였다. 사실 그 섬에는 녹색의 초지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농경에 대한 꿈을 지닌 이주민을 많이 모으려고, ‘녹색의 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비겁한 속임수라고 비웃기에는 바이킹의 소망이 너무도 절실했다.
뿔 달린 투구 쓴 바이킹은 없었다
바이킹의 가장 인상적인 활동은 동서남북으로 전개된 침략 활동이었다. 그들은 영국,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스페인 해안을 습격하여 값진 보물을 약탈했다. 나중에는 이탈리아까지 쳐들어갔다.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고,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납치해 거액의 몸값을 요구했다. 상당수의 포로를 노예시장에 내다팔았다.
잔인한 약탈자로만 알려진 바이킹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진정한 평화를 추구했다. 또, 바이킹의 대부분은 전사가 아니라 어부와 농부였다. 바이킹 사회에는 본래 솜씨가 탁월한 금은세공업자도 많았다. 해적질에 종사한 바이킹은 부족장 휘하의 몇몇 용사들뿐이었다. 우리가 잘 몰랐던 사실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생각난다. 유럽의 주요 도시를 하나로 이어주는 호화로운 철도여행 중에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다룬 명탐정 이야기다. 소설의 무대인 오리엔트 특급은 실제로 존재했다. 1889년 6월 1일, 첫 번째 특급열차가 파리를 떠나 이스탄불로 향했다. 1977년 5월 19일까지 이스탄불은 이 노선의 동쪽 종착점이었다. 이후 비행기가 여행 산업의 주류로 떠올랐고, 오리엔트 특급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승객이 계속해서 줄어든 결과, 2009년 12월에 결국 노선 자체가 폐지되었다.
실크로드가 있었기에
콘스탄티노플의 융성은 실크로드(비단길)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동아시아에서 시작된 이 무역로의 서쪽에는 여러 도시가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콘스탄티노플은 로마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실크로드의 가장 서쪽에 버티고 있었다. 거기서 동쪽으로 가면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바스라와 바그다드 등이 차례로 나타났다.
‘실크로드’라는 용어는 비교적 새로운 것이다. 19세기 독일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이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중국에서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거쳐 유럽으로 이어진 고대의 교역로를 연구하다가 주된 교역상품이 중국산 비단이었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그래서 독일어로 ‘자이덴 슈트라쎄(Seiden Straße)’, 곧 ‘비단길’이라 이름 지었다.
비단길은 한국과 일본은 물론 베트남이나 타이 등 유럽과 중동 및 아시아의 많은 나라를 직접 간접으로 이어주었다.
다시 400년이 흐른 15세기 중반 동로마제국이 명을 다했다.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의 지배 아래 들어가자 소피아 대성당도 모스크로 변신하였다. 본래 기독교 신앙을 묘사한 모자이크는 회칠해서 감춰졌다. 대성당에는 새로 미흐랍(mihrab)과 미나레(minare)가 설치되었다. 전자는 메카를 향해 만든 우묵하고 둥근 모양의 예배실이요, 후자는 이슬람 사원 특유의 첨탑이다.
3일간 원정대는 무려 은화 90만 마르크 상당의 전리품을 얻었다. 그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웠던, 동방의 찬란한 기독교 도시가 이른바 십자군원정대의 말발굽 아래 처참하게 짓밟혔다. 기독교 국가가 십자군원정대의 침략으로 초토화되고 말았다!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재앙은 쉬 끝나지 않았다. 이 사건이 일어난 뒤에도 주변 여러 민족이 잇따라 침략을 감행했다. 가진 것이 많아도 지킬 힘이 부족하면 도리어 재앙만 거듭될 뿐이다.
1453년, 드디어 운명의 날이 오고야 말았다. 나는 풍상을 이기고 아직 남아 있는 이 도시의 성벽 밑을 거닐었다. 산책 중에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을 추억했다. 군사전략에 빼어난 오스만튀르크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콘스탄티노플을 빼앗아 이슬람제국의 새로운 중심지로 삼고 싶어 했다.
메흐메트 2세가 거느린 7만 대군이 물밀 듯 밀려왔다. 헝가리 출신의 기술자 우르반은 원정대를 위해 초대형 청동 대포를 만들었다. 53일 동안 69문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5만 발의 무거운 돌덩어리가 성벽을 연속해서 때렸다. 날마다 1천 발의 포탄이 쏟아지자 드디어 철옹성이 무너졌다. 성벽의 길이는 6킬로미터, 높이는 30미터였는데, 포탄의 힘을 이기지 못했다.
이스탄불은 여전히 대륙 간의 중요한 교차로이다. 지금도 러시아와 미국의 이익이 여기서 굉음을 내며 서로 충돌한다. 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양대 문화가 갈등을 벌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양자는 꾸준히 교섭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스탄불의 어제와 오늘이 뚜렷이 증명하는 바이다.
산마르코 대성당에 가본 적이 있는 이라면 알 것이다. 나는 대성당의 장엄함에 감탄했다. 성당 내부를 둘러보고 광장 앞에 나섰을 때, 5월 한낮의 햇살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마치 샤워라도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나폴레옹이 했다는 그 말을 떠올렸다.
"산마르코 대성당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다!"
셰익스피어의 4대 희곡 가운데 하나가 『베니스의 상인』이다. 작중 인물 샤일록은 소문난 구두쇠였다. 냉혈한인 그는 부채를 제때 청산하지 못한 채무자 밧사니오의 심장을 꺼내 달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베니스의 상인들 가운데는 샤일록과 같은 수전노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베니스 상업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곳 상인들은 아프리카 황금을 두카트라는 금화로 만들어 유럽 금융시장을 거머쥐었다. 베니스 상인들은 무에서 유를 창출한 사람들이었다. 비엔날레를 기획한 상인들은 다름 아닌 그 후예였다.
상인들의 용기와 모험정신이 이 도시를 키웠다. 그들은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왕정(王政)을 거부했다. 경제가 정치 권력에 종속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베니스 상인들은 공화국을 선택했고, 부유한 상인들이 집권해 과두정치로 도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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