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대학교(University)는 어원상 일반인도 참여하는 ‘조합’이란 뜻이다. 카를대학교의 역사를 보아도 조합이란 표현이 맞는 거였다.

체코는 카를대학교를 통해 서유럽 여러 나라에서 발전한 새로운 이론과 주장을 수용했다. 얀 후스처럼 출중한 인물이 나온 것도 개방적인 국가 간 문물교류의 결과였다. 예부터 개방과 자유는 대학의 생명줄이었다.

이 대학의 졸업생 가운데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 많았다. 특히 근현대의 탁월한 문인들이 많았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비롯해 프란츠 카프카, 카렐 차페크, 밀란 쿤데라가 대표적이다. 릴케와 카프카는 현대 독문학계의 큰 별이었다.

차페크는 사회비판 정신이 넘치는 작가였다. 쿤데라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작가로,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한계에 신음하는 인간존재의 비극을 탐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현대 문학계의 최고 거장으로 정평이 있다.

브라헤는 탁월한 천문학자였다. 그는 덴마크인으로 성격이 괴팍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 번은 사촌과 결투하다가 코가 잘렸단다. 그래서 황동으로 만든 코를 달고 다녔다. 브라헤는 최후의 순간도 극적이었다. 갑자기 방광이 터지는 바람에 운명했다고 전한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준비했다는데, "그는 현명하게 살다가 바보처럼 죽었다"는 기이한 글귀였다.

프라하 시절, 청년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가 브라헤의 문하로 들어왔다. 케플러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그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프라하로 온 것이었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수용했다. 또한, 스승 브라헤의 관측 결과를 토대로 행성이 타원형의 궤도를 따라 움직인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것이 ‘행성운동’의 제1법칙이다. 그 밖에도 그는 면적과 속도가 보존된다는 내용의 ‘행성운동’ 제2법칙도 발견했다. 또, 행성과 태양의 거리와 운동 주기에 관한 제3 법칙도 알아냈다. 케플러는 평생 신앙의 자유를 찾아 헤매다 쓸쓸히 사망했다. 그의 탁월한 학문적 성과를 재확인한 이는 영국의 뉴턴이었다.

프라하의 봄
자유를 향한 프라하의 행진은 시간의 장벽을 넘어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프라하의 봄’(Prague Spring)을 기억한다. 1968년 8월이었다. 소련군을 선두로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탱크가 프라하를 침략했다.

체코 공산당은 공산체제의 근간을 위협하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목표는 민주적인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이었다. 동구 공산권의 맹주 소련은 당황했다. 그들은 동유럽의 여러 공산주의 국가들과 함께 체코를 압박했다. 이에 대항하여 체코 지식인들은 이른바 ‘2천어 선언’을 발표했다. 그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시민운동으로 맞섰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얀 후스의 후계자임이 명백했다.

1968년 8월 20일, 바르샤바조약기구에 가입한 5개국이 20만 명의 연합군을 편성해 프라하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삽시간에 체코 개혁파를 숙청했다. 개혁파로 분류된 50여만 명의 당원도 체코 공산당에서 모두 제명되었다.

‘프라하의 봄’을 꽃피운 작가 출신 대통령 하벨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축구로 유명하다. 레알 마드리드라는 팀이 있어서다. 그런데 이 도시는 현대사의 깊은 암울을 간직하고 있다. 청년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이가 좀 든 시민들은 스페인의 악명 높은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1892~1975)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히틀러와도 거래한 인물이었다. 그는 1930년대에 우파를 총동원해 스페인 내전(1936~1939)을 치르기도 하였다.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는 이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 종군했다. 그는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소설을 썼다. 소설은 많은 이들에게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그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다. 그의 말에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드리드에서 교수형을 받고 죽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드리드에서는 도저히 제 명대로 살 수 없다는 말이다. 얼마나 끔찍한 혹평인가.

내가 가장 주목한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게르니카>다. 누구나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이 그림은,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에 소장되어 있다. 나는 이 유명한 걸작 앞에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게르니카는 지명이다. 그것도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바스크라면 스페인에서도 소수민족이 사는 특별한 지역이다.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내란 당시 프랑코 군을 지원하던 히틀러의 독일 공군이 이 마을을 무차별 폭격했다. 삽시간에 2,000여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피카소는 사후에야 조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였다. 자유분방하기 짝이 없었던 이 화가에게도 이처럼 꼿꼿한 일면이 있었다. 조선 시대 선비를 떠올리게 하는 꼬장꼬장함이 아닌가.

역시 스페인 화가였던 고야는 조국이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았을 때를 잊지 못했다. 그는 침략군에게 직접 저항을 표시할 만큼 용기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침략군이 물러난 다음, 고야는 과거의 비참한 광경을 그림으로 재현했다. 그는 1808년 5월 3일에 벌어진 프랑스군의 학살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스페인에서 무고한 양민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역사책을 읽어보면 어디서나 끔찍한 전쟁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고야와 피카소처럼 전쟁의 비극을 날카롭게 고발한 화가는 별로 없었다.

침략자들은 금과 은에 걸신이 들린 마귀처럼 아즈텍과 잉카의 보물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였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수천만을 헤아리던 원주민을 강제노동으로 내몰았다. 금과 은을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열악한 노동 조건으로 고통을 받던 원주민들이 몰사했고, 그에 더하여 유럽에서 건너온 각종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원주민들은 한두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거의 멸종하고 말았다. 그러자 스페인 사람들은 서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끌고 와서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착취한 금은 보배를 이용해 새로운 산업을 육성한 것도 아니고, 전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스페인의 침탈로 인해 위대한 잉카 문명이 사라졌고, 그들이 앞장섰던 종교전쟁을 통해 유럽의 분열은 더욱 골이 깊어졌다.

1930년대에는 내전의 고통도 겪었다. 그때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스페인을 찾았다. 마침 그가 쓴 기행문이 남아 있어 읽는 이의 가슴을 적신다. 작가는 황량하고 쓸쓸한 스페인의 풍경을 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마을과 패잔병이 가득한 도시의 골목길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돈키호테가 말하고자 하는 것
때는 스페인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할 때였다. 홀연 세르반테스라는 작가가 등장했다. 그는 작중 인물 돈키호테를 통해 스페인 사회의 치부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예리하게 분석하였듯, 돈키호테와 그의 하인 산초는 곧 스페인의 원초적인 초상이었다.

돈키호테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를 저돌적인 행동파라고 분류하기 쉽다. 사람들은 사색적인 햄릿의 반대편에 돈키호테가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가세트의 평가는 달랐다. 그는 돈키호테야말로,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는 스페인의 혼이라고 했다. 언제까지나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이라는 말이다.

첫째, 눈앞의 사물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때로 보이는 것도 지워야 한다. 그 대신에 보이지 않는 모습을 그려야 한다. 스페인 미술의 거장들이 걸어간 길에서 배운 바이다. 마드리드에 오기 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점이다.

둘째, 마드리드에서 내가 만난 역사의 거인들은 뚜렷한 개성의 소유자였다. 그들은 삶을 구속하는 기성체제의 비판자들이었다. 자연히 그들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들은 곤욕을 치렀고, 세상은 그들을 곧 망각했다. 그러나 얼마 뒤 새 세상이 밝아올 때면 그들은 다시 찬란하게 부활했다.

유럽에는 흥미로운 속담이 하나 있다. "신은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그 나라 사람들이 창조했다." 많은 사람의 눈에 이 나라는 쓸모없는 땅덩어리로 보였다. 그래서 서양 중세의 탐욕스러운 귀족과 성직자들조차 외면했다.

덕분에 역사적 반전이 일어났다. 용감한 평민들이 암스테르담의 개펄을 일궈 옥토로 만들었다. 그들의 이마에서 흐른 구슬땀이 한 뼘 한 뼘 땅덩어리가 됐다. 말이 쉽지 바닷물을 뽑아내고, 파도를 막아 밭을 일구고 마을과 도시를 만드는 작업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도시가 지켜온 관용의 전통 때문에 나는 이 도시를 특별하게 여긴다. 그들의 관용은 개방적인 문화 또는 자유의 정신과 안팎을 이룬다. 이야말로 암스테르담의 생명력이 아닐까 한다.

세상 풍조에 무조건 영합하기보다 자유로운 예술정신을 추구했던 렘브란트였다. 그는 성찰적인 화가였다. 20대 청년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100여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자화상은 그의 자서전이었다.

어느 모로 보든 렘브란트는 강한 개성의 소유자였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예술가의 삶이 있었기에, 관용과 자유는 암스테르담을 지배하는 정신이 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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