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가운데 1907년에는 자연환경이 또다시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바닷물이 이 도시와 북해를 다시 하나로 연결하였다. 브뤼헤는 문자 그대로 물 만난 고기가 되었다. 도시 경제가 힘차게 회생하기 시작하였다. 중세 이래 그 물길이 막히고 트이고를 반복할 때마다 행운과 불행이 교차하였다. 역사에 보기 드문 사례였다.
프라하는 날씨가 비교적 따뜻한 편이다. 습도도 낮아서 살기 편하다고 생각한다. 연간 강수량은 한국의 절반 이하인데 7월의 프라하는 기온이 지나치게 높지 않고 공기도 쾌적하다. 사철 다 좋지만, 여름의 프라하는 최상의 여행지가 아닐까 한다.
19세기의 프라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굴지의 공업 도시로 인정받게 되었다. 특산품 중에는 정교한 무기도 포함되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군도 체코제 기관총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68년 1월, 프라하에서 일어난 자유화 운동은 소련에 대한 반발심에서 비롯되었다. 온 세계인의 주목을 받은 사건이었다. 그보다 10여 년 앞서 역시 동구권의 일부였던 헝가리에서도 자유화 운동이 일어났다(1956년 10월). 김춘수 시인은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란 시를 지어 소련의 군홧발에 짓이겨진 헝가리 자유화 운동의 비극을 노래했다.
프라하에서 벌어진 이 사건을 분수령으로, 소련 다음으로 강성했던 현실 사회주의 국가 동독이 붕괴했다.
이어서 체코와 헝가리 및 폴란드 등 동구권 전체가 흔들렸고 곧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프라하는 소련의 지배체제에 대한 본격적인 저항의 출발점이자 동구의 몰락에 결정타를 날린 종착지였다고 말해도 좋겠다.
서로 사랑하라. 사람들 앞에서 진실 즉, 정의를 결코 부정하지 말라!
후스의 옥중서신에 나오는 문장이다. 그에게 사랑이란 정의를 실천하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불의한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었다.
종교개혁가 얀 후스(Jan Hus, 1372~1415)는 복음주의자였다. 그는 성서야말로 신앙의 유일한 근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로마가톨릭교회의 부패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러나 그 점이 문제가 되어 결국 콘스탄츠공의회에 불려갔고, 화형에 처해지고 말았다(1415년).
그런데 그에게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 후스는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 개인의 신앙적 자유를 추구했다. 『교회론(Deecclesia)』과 『강론집』 등의 저술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영혼의 구원은 신이 예정한 대로 이뤄진다. 따라서 돈을 주고 구매한 <면벌부>(면죄부) 따위로는 죄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우리가 보기에는 당연한 말이었으나, 당시에는 위험천만한 주장이었다. 후스는 <면벌부> 판매에 골몰하던 가톨릭교회와 정면충돌하였다.
루터와 후스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다행스럽게도 루터 곁에는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활자가 있었다. 루터는 활자라는 새로운 매체의 가능성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금속활자로 인쇄된 글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온 세상에 널리 알렸다. 곧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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