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인들 수중에 있었던 베니스공화국, 그 정식 명칭은 좀 길다. ‘가장 고귀한 공화국 베니스(원어 Serenìsima Repùblica de Vèneta)’이다. 그들의 자존심이 그대로 반영된 국호였다. 8세기부터 1797년까지 베니스는 무려 1천 년 동안 독립성을 유지했다. 실로 유서 깊은 도시국가였다.

물의 도시 베니스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흥미롭게도 그것은 비극에서 출발했다. 5세기의 일이었다. 게르만족이 북이탈리아로 침입해오자, 사람들은 배를 타고 석호로 도망쳤다. 베니스는 일종의 피난처였다(452년). 피난지에 불과했던 볼품없는 마을들이 차츰 부유한 상업 도시로 발전했다. 막히면 통한다(窮則通)는 옛말이 생각난다.

찬란한 영광
그들은 갈수록 다양한 물품을 거래했다. 처음에는 목재와 노예가 주요 상품이었다. 그런데 교역망이 점점 확대되자 상품의 종류와 물량도 꾸준히 증가했다. 1000년경, 베니스는 동지중해의 명실상부한 강자로 부상했다. 그들은 헝가리,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달마티아 등 교역하던 여러 나라를 차례로 제압했다.

1204년, 베니스 공화국은 위험한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그들은 제4차 십자군 원정을 후원하는 실력자로 등장하였다. 문제는 그들이 교황의 의지를 무시하면서까지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했다는 점이다. 신앙상의 목적으로 파견된 십자군이 동방의 기독교 국가를 약탈한 끔찍한 사건이었다.

120여 년 동안 두 나라는 네 차례 전쟁을 치를 정도였다. 전쟁의 마지막 승자는 베니스였다. 이후 세상에서는 베니스를 ‘레반트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레반트는 ‘태양이 떠오르는 땅’이라는 뜻이므로, 베니스가 이제 동방의 지배자로 등극했다는 미칭(美稱)이었다.

역사를 바꾼 모험가, 마르코 폴로
역사란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베니스의 운명을 기울게 만든 사건이 대항해시대의 개막이라는 점은 누구나 안다. 그런데 그 시발점에는 한 사람의 베니스 상인이 있었다. 호기심 때문에 어떠한 모험도 마다하지 않은 불굴의 인물, 마르코 폴로(Marco Polo)였다. 『동방견문록』의 주인공 말이다. 그는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서 당시 서구 사람들이 세상의 끝이라 여기던 중국까지 여행했다. 길을 떠날 당시 마르코는 17살이었다.

우리는 카사노바를 제대로 모른다
이 도시의 역사를 음미해보면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다.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과 모험심이 그것이다. 마르코 폴로의 경우가 대표적이었다. 그에 버금가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었으니, 지아코모 카사노바(1725~1798)다.

카사노바는 단순한 난봉꾼이 아니었다. 그는 미지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탐험한 대단한 모험가였다. 그는 저술을 통해 귀족 사회의 위선을 여지없이 폭로하기도 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욕망과 쾌락을 긍정하는 새로운 관점을 온 세상에 공표하였다. 그의 저서 『카사노바, 나의 편력』은 그런 점에서 인간성의 보편적인 측면을 세상에 알린 계몽주의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카사노바는 법학박사로서 한때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로 일했다. 나중에는 음악가이자 외교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유럽 여러 나라를 종횡으로 주유했다. 베를린, 마드리드, 프라하, 런던과 파리에 이르기까지 그의 활동 공간은 가히 국제적이었다. 게다가 그는 풍부한 인간성의 소유자였다. 왕후장상부터 거리의 부랑아에 이르기까지 기꺼이 다양한 사람들과 친교를 맺었다. 그의 친구 중에는 볼테르와 루소 등 당대의 이름난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여러 명이었다.

그는 뛰어난 상상력의 소유자로서 공상 소설 『20일 이야기』(1888)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쥘 베른의 『지저(地底) 여행』의 예고편이라 해도 좋을 것이었다. 프란츠 카프카 역시 카사노바에게 영감을 받아, 『소송』을 창작했다고 고백하였다. 카사노바의 진정한 모습을 우리는 여태 잘 모르고 있었다.

1천 년가량 지중해 무역의 중요한 축이었던 베니스공화국이다. 매력적인 그 장소에서 나는 시대를 앞서 살았던 카사노바와 폴로를 떠올렸다. 역사를 비춘 찬란한 과거의 빛이 아직 남아 있는 공간에서, 선구자들의 불꽃 같은 생을 조용히 음미하는 것은 꽤 운치 있는 일이다.

브뤼헤(Brügge, 브뤼게라고도 부름)라는 도시를 아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별로 많지 않다. 인구 11만의 중소도시라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역사 속 브뤼헤는 간단히 지나쳐도 좋을 정도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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