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도성으로 뇌물 심부름 갔던 해무량의 심복 왕가희가 태사 신작에게 곤장 30대를 맞고 겨우 돌아오자 해무량은 진노하고 말았다.
"내가 보낸 진귀한 물선을 거절한 것도괘씸한데 심복에게 태질까지 했으니 이는곧 나를 때린 것이다."

"금불상을 만들 형편이면 가난하고 병든자를 구휼해야 한다며, 한 번 더 뇌물을 보내면 그때는 탐관오리로 알고 삭탈하고 가산을 적몰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왕가희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눈초리가 야릇하게 번뜩였다.
"너는 어째서 금불상을 태사에게 주었느냐?"
"자사께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이런 소식이 어찌 조정에 닿지 않았을까마는 그때마다 조정 대신들은 해무량을 감싸기에 급급했다. 이에 황제는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시어사 고덕술을 염주로 파견했다.
강직한 충신으로 알려진 그는 태태후 고운목의 조카이자 백관을 감찰하는 중정대출신으로, 공명정대함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이 소식은 지체 없이 염주자사에게알려졌다.

고덕술의 행차는 조촐했다. 소문대로 깐깐하고 강직했다. 영접사로 도성 밖 30리지경에 마중 나간 연타골을 야단쳐 들여보내고 스스로 관아를 찾아왔다. 고덕술은 관작이 높음에도 자사 해무량의 병상을 찾아먼저 예를 갖추었다.

고덕술은 조정에서 파악한 비위 사실은모함이거나 은폐되었거나 둘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다. 백관과 변방을 감찰해보면 어디든 크고 작은 비위가 적발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시일이 갈수록 흠잡을 데가없다는 게 점점 더 이상했다. 
"해무량이 사가와 관고의 재물을 은밀히빼돌려 바다 건너 섬으로 옮겼다는 제보가있습니다. 허락해주시면 배를 내어 다녀올까 합니다."

"조정에서 어사가 내려오는 바람에 모든장마당을 폐철했으니 죽을 지경이오. 그것도 모르고 가시오?"
사공은 안됐다는 듯 혀를 찼다.
"어사 출두와 장마당이 무슨 상관이오?"
"답답도 하시오. 용두섬에 가면 세상에없는 게 없는데……. 이놈 입이 방정이오만조정에서 내려온 벼슬아치들은 죄다 자사가 진상한 계집들과 뒹굴다 갈 테니 어찌원망하지 않겠소?"

고덕술은 두려운 생각에 적발한 물목을품속 깊이 넣었다.
"어서 떠나자."
이렇게 많은 재물을 숨겨두는 것은 권신의 비호를 받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아직도 감찰할 게 많습니다. 어사께서먼저 배에 오르시면 저희들이 뒤따라가겠습니다."
수행 관리는 더 많은 비위를 찾아낼 수있을 거라 말했다.
"더 이상 머물다가는 변을 당할 것 같다.해무량이 알기 전에 떠나자."

배는 온통 화염에 싸였다. 어사 고덕술부터 죄 없는 사공까지 불에 타 죽거나 물에빠져 죽었다. 배는 고스란히 바닷물 속으로가라앉고 말았다. 흔적이라고는 타다 남은송판과 배에 실려 있던 물건들뿐이었다.

"어사의 시신 속에 이미 새로 꾸며 만든장계를 넣어두었습니다. 내일 바다에 떠오른 시체를 소금에 채워 도성으로 보내겠습니다. 어사 일행을 돈 많은 상인으로 알고공격한 해적들을 자사께서 몸소 추격하여침몰시켰다고 주달하면 됩니다."

"폐하, 어사 고덕술이 해적에게 살해된사건은 의혹이 있나이다. 선제께서 어세하시는 동안 뭍에는 비적이 없고, 바다에는해적이 없었나이다. 어사 일행 중에 섬으로감찰 나간 자는 단 한 사람도 살아 오지 못했나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고덕술의 시신만 떠올랐고, 그 품속에서 나온 장계가 해무량의 치적만 나열했겠나이까. 다시 어사를 보내되 암행하게 하옵소서."
해무량은 내시감 해지량의 사촌아우여서 내밀하게 어사를 보내 암암리에 감찰해야 했다.

"천하의 주인은 폐하뿐이나이다. 어사는폐하의 칙서를 받들고 출사했나이다. 어사를 죽임은 곧 폐하를 능멸한 것이니, 반드시 밝혀 국기를 바로 세우소서."

"해씨 가문에서 강직하고 흉금이 넓은자를 골라 보내옵소서."
"해씨 가문에서 고르라면……."
"나중에 태후마마께서 아시더라도 공정했다고 할 수 있나이다."
"과연 양책이오."
대이진은 해동정에게 밀명을 내려 어사를 제수하고 염주로 암행하라고 명하였다.해동정은 성정이 곧고 바른말하는 데 앞장섰으며, 당나라 유학생을 선발할 때 아들해초경이 으뜸으로 뽑힐 만큼 박학다식한선비였다. 장안의 태학에 들어가 당나라의걸출한 인재들과 겨루는 유학생은 소년급제를 했거나 학식과 지혜가 뛰어난 자를 선발했다. 이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거정, 주승명, 고수해는 동량지재라 하여 젊은나이에도 관작을 높이 받았다.

"병사한 게 아니라, 염주자사의 비리를고발했다가 독살당했습니다."
순간 해동정은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 말이 사실이오?"
"어찌 생명의 은인 앞에서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건강하셨던 아버님은 염포 거상박무덕의 집 잔치에서 교묘히 독살당했습니다. 독살이 아니고서야, 아버님이 쓰러지자마자 해무량의 수하들이 들이닥쳐 시신을 거둬갔겠습니까? 수하 중에 다행히 아버님과 절친한 사람이 있어 귀띔해 주었습니다. 언젠가 내막을 소상히 밝혀 조정에상주하려고 은밀한 곳에 감춰두었습니다."

해동정은 좌우를 물리친 해무량에게 두손을 모아 예를 갖추었다.
"자사께서는 내가 누구이며, 왜 이곳에왔는지 알고 있소. 내가 덫에 걸렸으니 살아날 수 있는 길을 일러주시오. 이렇게 참담한 누명을 쓰고 살기 싫소. 조정에서 도대체 어느 누가 자사와 밀통하는지 알고싶소."

"폐하, 폐하의 성덕을 널리 받들어야 할권신은 천하만민이 우러를 만한 만부지망의 인재를 중용해야 하나이다. 그럼에도 해씨 가문을 사사로이 중용했고, 입신양명에만 혈안이 된 자와 절조 없는 자, 뇌물을 바쳐 벼슬을 구걸했거나 백성을 괴롭힌 자,인륜을 그르치거나 줏대 없는 자에게 너무무거운 감투를 씌웠나이다. 장차 나라의 손실이 침중할 것이니, 폐하의 재결을 거두어주소서."

이듬해 이른 봄 해무량은 드디어 용원부도독을 제수받았다. 해동정은 대중정 자리에 올랐다. 대이진이 계위한 이래 처음으로큰 폭의 관작 개편이 이루어졌다. 눈에 띄는 것은 태후 해수련 측근들이 대거 발탁되었다는 사실이다. 태후의 등등한 위세 앞에감히 반대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황제의스승인 태사 신작은 편전대령한 문무백관앞에서 간쟁을 서슴지 않았다.

"아무리 짐에게 경전을 강의하는 스승이지만 지나치시오. 나라가 이만큼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이 태후마마의 은사임을 어찌모르시오?"
"폐하의 위엄은 천둥처럼 무서워야 하고권위는 태산처럼 무거워야 하나이다. 현명한 황제는 반드시 천하의 주인임을 잊지 않나이다."
옳은 소리였으나, 서궁에서 편전 소리를모두 듣고 있는 태후가 걱정이었다. 대이진은 스스로 꼭두각시라는 걸 알고 있었다.조정 대신과 변방의 장수들까지 모두 태후에게 조아리고 있어, 태후의 말 한마디면아우인 대건황에게 천하를 넘겨야 할지도모른다.
"물러가시오. 짐이 찾을 때까지는 입궐을 금하겠소!"

신작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표정이 결연해 보였다. 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해지량은 고개를 저으며 혼잣소리를했다.
"조금 훔치면 도둑이 되지만, 많이 훔치면 군주가 된다고 했소. 태사는 너무 많은걸 훔치려 하고 있소. 충역을 뛰어넘기에는너무 정직하오."

"황상께 아뢰시오. 불경에 이르기를 불이 나서 뭇 생명이 죽을 지경에 작은 앵무새 한 마리가 제 깃털에 물을 적셔 불을 끄려고 했소. 그랬더니 원이 이루어져 불을끄고 뭇 생명도 구했다 했소. 신이 아무리앵무새 노릇을 하고 싶어도 물이 멀리 있으면 깃털을 적실 수 없다고 아뢰시오."

"황상께 한시라도 쉴 틈을 주지 말라. 천하 미인들을 물색해 끝없이 향락에 빠지게해서 책과 충신의 말을 멀리하고 조정대사를 귀찮아하게 하라."
대이진은 어려서부터 싫증을 잘 내는 성미였다. 후궁들도 수시로 바꾸어 침궁에 들게 할 만큼 변덕이 심했다.
"골라 바친 후궁은 탐염이 진동하여 황상의 총첩이 되어야 한다."

황제 대이진은 총애하는 후궁들과 대신들을 거느리고 파천하듯 홀한해에 행궁을차렸다. 병란은 아니라도 가뭄으로 지친 백성들이 아우성치고 굶어죽어 난리와 다름없었다. 이런 판국에 황제가 도성을 떠나자민심은 더 흉흉해졌다. 황제가 황음무도하고 태후의 섭정으로 하늘이 진노한 것이라는 풍문도 나돌았다.

병란을 알리는 봉화였다.그리고 뒤따라 동경용원부에서 병란이 일어났다는 파발이 도성으로 날아들었다. 학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봉기하여 염포현승 기국청과 염주자사 은사공을 죽였고, 동경용원부 도독 해무량은 중경 쪽으로 도망쳤다는 급보였다.
반란의 수괴는 거상 장사경과 율창직이었다. 그들이 봉기하자 놀랍게도 군사들이기다렸다는 듯 반란에 합류하여 동경용원부를 함락했다. 농어민은 물론이고 염전의역부들과 상인, 삯일꾼들까지 반란 대열에뛰어들었다. 급보를 받은 해태후는 분기를누르지 못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동경용원부 도독해무량이 변방 수장 가운데 가장 많은 공물을 보냈사옵니다. 백성들이 학정에 시달리다 못해 봉기한 것이옵니다."
"어찌 수습할 수 있겠는고?"
"조금 더 지켜보면 반드시 수습할 길이있을 것이옵니다."
태후궁에서 물러나오는 장덕진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앞날을 예견할 수 없는 정황이었다.

태후궁의 젊고 다부진 내관들은 밤마다 태후 침소에 들어 온몸으로 해수련을섬겼다. 그래서 백성들은 태후가 아끼는 총신들을 은밀히 육총신이라 불렀다.
해수련은 태후에 오른 뒤에야 비로소 황제들이 여색을 탐하는 까닭을 이해하였다.
여인으로 태어나 가장 높이 오르는 자리가 태후로되 가장 외로운 자리도 그 자리였다. 남색의 황홀경이 이리 좋고, 권세 또한 이리 좋은 걸 왜 진작 몰랐던가. 천하를호령하고 있으니 이리 황홀한 것을…….

"황상께서 환궁하여 친정하게 하옵소서.목마르고 배고픈 건 군사들도 마찬가지옵니다. 진병한 군사들도 불만이 터뜨려지면회군할지 모르옵니다. 그때는 마마의 안위가 근심이옵니다. 그러나 황상께서 몸소 군사를 이끌면 사방에서 충성스런 군사와 현사들이 모여들고 반란군은 명분을 잃고 내홍에 휩싸이게 되옵니다. 통촉하옵소서."

"이참에 신작과 황친을 비롯하여 간쟁을일삼는 자들을 숙청하옵소서. 반란군이 그들을 섬기고 있으니 절호이옵니다."
"옳은 말이로다."

"참으로 답답하시오. 반적들은 폐하를폐하고 신작을 옹립하려고 하오. 지난날의을사유신을 받들어 사족과 양민을 구별하지 않고 노비와 부곡을 양민이 되게 하려는것이오."
뜻밖의 소리에 당황한 대이진의 낯빛이굳어졌다.
"설마하니 신작이……."
해수련이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반란군이 신작 만세를 외치는 걸 모르시오?"

해지량과 신작의 모습이 겹쳐졌다. 신작의 직간이 떠올랐다.
"엄인을 내시감으로 삼으면 밤낮없이 황궁에 기거하면서 폐하의 뜻을 잘 탐지하여비위에 맞는 소리만 하게 되옵니다. 죄를숨겨 간교를 품고, 미혹한 재간으로 폐하를속이며, 황궁 밖의 진실을 어지럽게 하여폐하께서 보고 듣는 것을 혼미하게 되옵니다. 환관이 궁성에 자리잡으면 계속 환관을 길러 궁성으로 끌어들인 뒤 그들끼리 아첨으로 폐하의 환심을 사는 재주를 익힐 것이옵니다. 그리하여 끝내 폐하께서 책을 멀리하고 충신을 내쫓고 여색으로 미혹케 되어 반드시 경술을 배척하므로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은 누란지세에 빠지게 되옵니다."
대이진은 때때로 해지량의 중용을 후회했다. 생김새부터 싫었다. 나이 마흔인데쭈글쭈글 늙었고 졸린 듯한 눈과 기이한음성, 비쩍 마른 몸과 구부정한 어깨, 걸을때마다 앞으로 고꾸라질 듯 겅둥거리는 게싫었다. 그러나 한편, 그런 그가 옆에 없으면 불안했다. 해지량이 건네주는 여인이 없으면 심심했고 아첨하는 말이 없으면 짜증났다.

계책을 마련한 것은 해무량과 그의 심복왕가희였다. 순시 나섰다가 치소인 동경성을 빼앗긴 해무량은 중경으로 도망쳤다가다시 상경으로 달려왔다. 살길을 찾지 못하면 영락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그래서 살궁리 끝에 반간계를 쓰되, 태후와 해지량이가장 싫어하는 신작을 끌어들이기로 했다.
계책이 기이하다고 생각한 해지량은 태후에게 먼저 아뢰었다. 해수련은 고심 끝에청을 받아들였다. 해수련의 고심은 두 가지였다. 황제가 친정군을 이끌고 대승을 거두면 황제의 위상이 높아질 것이고, 만약 친정군이 패하거나 내분이 일어 도성이 함락되면 치욕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태후를 폐하여 사가로 내쫓김을 당한 척하여 병란이 수습된다면, 신작과 같은 구신들을 한꺼번에 처단하고 계속 섭정할 수 있을것이다.

"암계가 분명합니다. 태후를 폐했다면돌멩이도 웃습니다. 도망갔던 해무량이 제발로 기어들어온 것도 기이합니다. 천하에간특한 해무량이 스스로 참수당할 줄 알면서 뇌옥에 갇혔겠습니까?"

신작은 다 꿰고 있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목숨이 열 개라도 바치겠다. 누가 이기든 수많은 백성이죽는다. 기근에 허덕이는 나라에서 내전이일면 어찌 외적들이 두고 보겠느냐?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내 목숨이 무에 그리 소중하겠는가."

"대부시여, 운명을 하늘에 맡기시라. 그대들은 수만 백성을 살려냈는데 무엇이 두려운가?"
신작과 반란의 주역들이 막 남문을 통과하는 순간, 창검궁시로 무장한 금군들이 달려들어 사정없이 찌르고 베었다. 삽시였다.신작 일행이 들어서는 순간을 기다린 것이다.

"대부시여, 운명을 하늘에 맡기시라. 그대들은 수만 백성을 살려냈는데 무엇이 두려운가?"
신작과 반란의 주역들이 막 남문을 통과하는 순간, 창검궁시로 무장한 금군들이 달려들어 사정없이 찌르고 베었다. 삽시였다.신작 일행이 들어서는 순간을 기다린 것이다.

"대씨의 사직이 분명한데, 해씨가 치세하고 있나이다. 선제와 선조들께서 무어라하시겠나이까?"
대이진은 가슴만 파고들 뿐 입을 열지않았다.
"이대로 계시면 오래지 않아 선위하고태상황이 되시나이다."
태상황이란 살아 있는 동안에 황위를 물려주고 물러앉는 것이었다.
"짐은 태상황이 되고 싶소."

"폐하 곁에는 해지량 같은 간신들이 있어 무엇이든 숨길 수 없나이다. 신첩을 믿고 맡기면 어의를 편케 하겠나이다."
"현책이 궁금하오."
"황궁 출입을 하는 자는 누구나 기찰을받나이다. 그러나 서궁 출입하는 여인들은자유롭나이다."
"여인이라…… 과연 절묘하오."

남쪽 바닷가에 있는 남경남해부 도독 신대남은 많은 봉물을 마련했지만, 해태후를즐겁게 하기 위해 기이한 재주를 가진 자들을 뽑아 잔치마당에서 마음껏 작희를 뽐내기로 했다.

시해 음모의 전말은 잔치 후 사흘 만에밝혀졌다. 남경 예인들을 깊은 산속에 묶어두고 예인인 척 어화원 잔치에서 군무를 추며 태후에게 비도를 던진 무리는 황후 주신강의 사주를 받은 오사마의 무리였다. 오사마는 황후의 시위로 잠시 서궁에 머물다가궁성을 떠나 용마사에 머물렀다.

오사마는 남녀 20명을 선발하여 황후의뜻을 받들기로 맹약하고 해태후를 주살할궁리를 하고, 생신잔치에서 태후의 심장에칼을 꽂을 참이었다. 태후를 주살하는 순간황제가 칙지를 내려 태후를 처단했음을 선포하기로 했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했다

"마마, 누구라도 황후마마를 혹독히 다루어 효수경중하리라 생각하옵니다. 사가에서도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해하려 했다면 살아날 길이 없사옵니다. 이럴 때 마마께서 두터운 은혜를 보이시면 모두 마마의섭정을 흠숭하게 되옵니다."
"그 요망한 것이 두터운 은혜를 잊고 암계를 부리지 않겠느냐?"
"마마, 머지않아 반드시 요망한 꼬리가잡혀 스스로 자결할 것이옵니다."

내시감은 황제의 근신이지 태후의 근신이 아닌데도 태후는 수시로 해지량을 서궁으로 불러들였다. 마마의 변이 수습되면서태후의 섭정은 더욱 강화되었다. 황제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대이진은 대전에 나가지 않았다. 국사는 모두 권지국사가 된 해태후에게 일임한 채 후궁이나 궁녀들 치마폭에 싸여 세월과 여인을 희롱하였다. 모두들 오태후가 권지국사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던 때를 연상했다.

"남근이 없는 사람만이 엄인이겠느냐.구중궁궐에서 긴긴밤을 홀로 지새며 달빛이 지아비 얼굴인 줄 아는 여인도 분명 엄인이다."
그 한마디에 해지량은 고개를 더 깊숙이숙였다. 해태후는 밤마다 남색을 즐겼다.그녀가 아끼는 남총만도 족히 대여섯 명은되었다. 말로는 외로운 척하지만, 밤 깊도록 환락경에 빠지기 위해 혼몽약을 찾았다.

권세를 빼앗겨 허수아비가 된 황제는 외로움과 분노를 달래기 위해 밤마다 여색에취하고 천하지존으로 군림하는 태후는 권세가 지나쳐 위망을 견디지 못해 남색을 취했다. 세월은 황제 대이진을 더 몽롱하게만들었고, 태후 해수련을 무치하게 만들었다.

"덕산대사가 바쳐 올린 금불상은 바라만봐도 악심이 사라지고 선심이 생기옵니다.당나라 황제는 내부 혼란을 밖으로 돌리기위해 우리를 공격할 궁리를 할 것이옵니다.그러니 금불상을 보내옵소서."
"안대문을 사신으로 삼아라."
해태후는 금불상을 물선으로 내놓았다.당나라와 화친하기 위해 무엇이든 아끼지않고 귀한 물선을 보냈다. 전쟁을 치르려면막대한 인력과 물력을 소비할 것이기 때문이다.

금불상을 가지고 당나라에 갔던 안대문은 환대받지 못한 채 돌아왔다. 깜짝 놀라연유를 묻자 안대문이 대답했다.
"당나라 황제는 도교를 숭상하여 불교와경교, 마니교와 배화교를 싫어한다고 하였사옵니다."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마마, 그런 청을 하는 순간 금불상을 파할지 모르옵니다. 당제에게 변고가 생기지않은 것을 보면 불상은 아직 온전한 듯하옵니다."
송경신은 당나라 궁성에서 금불상을 보관하는 것이 좋다고 우겼다. 한쪽 눈을 뜨고 있는 불상이 당나라 궁성을 지켜보기 때문에 감히 발해를 공략할 궁리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송경신은 천문에 해박하고 학문이 깊은 명신이어서 해태후가 중용했다.

내시감 해지량이 궁성으로 아편을 반입한 후 발해 궁성에서는 앵속화를 황상화라고 불렀다. 아편은 당나라에서 구해오는 것도 있었지만 어화원 양지바른 곳에 심은 여춘화의 덜 익은 열매 껍질을 칼로 에어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진으로 직접 만들기도했다. 그래서 여춘화가 피어 있는 곳에는항시 금군이 창검을 들고 지켰다

해태후는 아편을 금하기로 작정하고 과감하게 손을 떼었다. 황제와 둘째아들 대건황이 하루가 멀다 하게 즐기고 해지량까지아편에 취하자 단호하게 마음먹었다. 해태후는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대건황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태후궁 창고를 개조하여 가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이진이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다. 자손도 없었다. 해태후는 혼수상태에 빠진 대이진을 쳐다보고 어금니를 악물고 돌아섰다. 병석에 누운 지 불과닷새 만에 대이진은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정축(857)년 정월 열이틀이었다. 재위 26년 동안 어머니 해태후에게 정사를넘긴 채 혼몽한 상태로 살다가 힘없이 무너졌다.
황태제 대건황이 계위하여 연호를 대정으로 바꾸고 선제 대이진의 시호를 장황제로, 묘호를 장종으로 했다. 26년 동안 섭정하며 천하를 주무른 해태후는 작은아들 버릇을 고치기 위해 태후궁 창고를 개조하여 가두었다.

태후를 질책하고 논힐하며 해씨 일족들의 전횡을 야단치던 황친 중에는 비명횡사하거나 밤사이 자객의 손에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다. 황친들은 그것이 태후의 은밀한 징계라는 걸 알았다.

황친들의 사치는 끝이 없었다. 더러는 그들 때문에 관고를 걱정해야했다. 이에 해태후는 황친들을 대거 숙청할 궁리를 했다.
"마마, 황친의 수효를 줄이고, 그들에게나누어준 식읍을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사직을 보전하기 어렵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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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홀한성을 점령한 대창해는 태자 대신덕을 동궁에 가두고 서궁을 봉쇄했다. 그러면서도 대신덕과 황태후 고운목의 저항이 큰 걱정이었다. 대가 약한 대신덕은 순순히 국새를 내놓고 동궁에 갇혔지만, 고태후는 끝까지 굴종하지 않았다

고태후는 교지를 한눈에 읽고 찢어버렸다. 창검을 든 군사들의 서슬 퍼런 눈초리에도 전혀 굴할 기세가 아니었다.
참다 못한 대창해는 호위 군사를 대동하고 서궁으로 갔다. 고태후가 갇혀 있는 태후궁은 한 팔 간격으로 무장한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못할 만큼 삼엄했다.

고태후는 가볍게 웃었다.
"잘 새겨들으시오. 여인이지만 칼날이두려워 초목이 모두 적군으로 보일 만큼 어리석지는 않소이다. 비록 힘이 모자라 역신의 손에 죽는다면 기꺼이 죽으리다. 구천에올라 모든 선제들께 고하고 악귀가 되어 역신의 무리를 참하겠소."

"초륜하지 못한 자가 제위에 오르면 나라가 어지럽고 백성이 곤궁해지는 법이니부디 역신의 너울을 벗겨내고 과욕을 삼가시오."
칼을 받아야 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고태후의 표정은 너무나 대범했다. 대창해는 칼을 치켜들었다.

"불자라면 지켜야 할 금계가 있소이다.중생을 죽이지 말라고 했는데 그대는 황제의 신하와 군사들을 죽이고 범궐하여 태후마저 죽이려 하니 첫 번째 금계를 어겼소.훔치지 말라 했거늘 언감생심 황위를 훔치려 하고 사직을 찬탈하려 하니 두 번째 금계를 어겼소. 또한 거짓말을 하지 말라 했는데 황상께서 붕어했다고 거짓을 말하고천하가 역적에게 굴종했다는 헛소리를 했으니 세 번째 금계를 어겼소."

"내게 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황상뿐이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태자를 풀어주고 대전에 엎드려 석고대죄하시오. 그러면 죽음은 면할 것이오. 황상께서 진격하면 도성이 삽시에 조아릴 것을 왜 모르시오."

황친과 신료들이 황제를싫어할망정 태후는 받들었다. 후덕해서 황친들을 꼼꼼히 챙긴 탓도 있지만 성정이 다사로워 두루 화친했기 때문이다. 지금 태후를 참하면 황친들이 등을 돌릴 수도 있었다

동경용원부도독 고좌민과 장령부도독 임기록, 솔빈부도독 최가림과 휘하 변방 장수들이 뜻밖에 황명을 받들어 토평군에 가담했다는 소식이 대창해에게 전해졌다. 뿐만아니라 변방의 도독, 자사, 현승과 장수들이 대창해에게 군사를 증원해 주지 않기로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태자의 교지만 있어도 대인수를 폐하고계위할 수 있습니다. 남쪽에서는 황제의 친정군이 달려오고 궁성에는 태자가 버티고있습니다. 이참에 태자를 주살하고 등극해야 합니다."

물론 토평군에는 천하명장이라는 장수와충성스런 군사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타나면 포악한 짐승도 놀란다는 주홍기사단과 황제를 호위하는 시위와 금군들이 즐비하지만 모두 합쳐야 수천 명에 불과했다. 도성에 남겨두었던 금군은 반란군에게 제압당했으니 군사력으로 본다면 반란군의 군세가 훨씬 우세했다.

"폐황 대인수를 사로잡거나 참하지 않고는 계위할 수 없습니다. 만약 대인수가 신기한 전술로 도성을 함락하면 현책이란 없습니다. 우리 모두 역적이 되고 멸문지화당할 것을 왜 염두에 두지 않습니까? 대군께서 황위에 오르시려면 군사를 휘몰고 남정하여 대인수를 주멸해야 합니다. 그렇지않으면 대군께서는 결코 천심을 얻지 못합니다. 대인수가 살아 있는 한 등극할 수 없습니다."
원로대신이자 황친인 대신명이 호통치듯말했다.

"자고로 사람이 많으면 하늘도 이긴다고했소. 우리가 남정하는 사이에 대인수의 군사가 도성을 침입할 수 있으니 백성과 노비를 조련시켜 도성을 사수하면 보다 많은 군사를 이끌고 대인수를 공격할 수 있소."
대창해는 하루빨리 대인수를 물리치고황위에 오르기 위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대곤명을 홀한성 수성 대총관으로 명했으니 귀신이라도 준동하지 못하오."
대곤명은 황친이지만 서자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하고도 낮은 관작으로 비탄에 젖어 살던 자였다. 대인수는 그의 뛰어난 무예와 용맹함을 높이 사 전투마다 선봉을 삼았고, 혁혁한 공을 세울 때마다 여러 차례초천하여 대장군으로 삼았다. 그에게 초천장군이란 별호가 붙은 것도 그런 사연이었다.

대곤명은 황제의 총신이었지만 대창해가 반란을 일으키자 선뜻 가담했다. 대창해가 황위에 오르면 무관으로서 더 이상 오를데가 없는 진단대장군 겸 태복경에 봉하기로 약조했기 때문이다.

반란의 주역들은 대곤명을 선봉에 세우지 않았다. 그가 큰 공을 세우는 것도 싫었고, 혹시나 군사를 이끌고 변심할 가능성도 있었다.

태자 대신덕이 그의 아들 대이진과 함께볼모가 되었으니 자칫하면 사직이 어지러워질 수 있는 중대 고비였다.
"사직과 백성의 안위를 위해 어느 정도의 참화를 각오해야 하오."
대인수는 이미 태자와 황실의 참화를 각오하고라도 사직의 안녕을 도모할 작정이었다. 무서운 결심이었다.

"폐하,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 있나이다. 시일이 걸리더라도 반란군을 평정하면 폐하께서 을사유신을 제대로 펼칠 수 있나이다. 어쩌면 하늘이 폐하의 성덕을 크게일굴 수 있게 시련을 준 듯하옵니다."
신작의 위로가 대인수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는 없었다. 대인수는 단숨에 짓쳐들어 역적의 무리를 단칼에 베고 싶은 분노를참을 수 없었다.

"파저라는 게 있사옵니다. 신은 물결 밑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일 뿐이옵니다. 좋은세상이 가까워졌으니 옥체를 보전하옵소서."
대곤명은 큰절을 올리고 일어섰다. 당당한 체구에 훤칠한 장부의 기개가 느껴지는장수였다.
대곤명이 돌아가자 고운목은 혼잣소리로 파저라는 말을 되새김질했다. 물결의 밑을 파저라고 했다. 그렇다면 물결 밑에서헤엄치는 물고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뭔가 예사롭지 않은 여운에 끌려 곰곰이 새겨보았지만 뚜렷이 잡히는 게 없었다.

"장수 대곤명이 거느린 군사는 거개가노비와 부곡이 아니면 양민이옵니다. 그들은 폐하를 흠숭하고 있나이다. 영리한 대곤명이 어찌 그것을 모르겠나이까? 때를 기다리는 것 같으니 마마께서 모른 체하시고옥체를 보전하옵소서."
대사연은 귀띔하듯 말하고 서둘러 돌아갔다. 감시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황상의 성덕을 따르는 게 하늘의 뜻이요, 역적을 따르는 게 백성을 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분하여 대장군을참하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인의를 버린 대장군은 장수가 아니라 혼신일 뿐입니다."
순간 대곤명은 사방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대장군의 수급을 하늘 높이 매달고 역적의 무리를 모조리 베고 성문을 열겠습니다. 그리고 대창해를 주살하겠습니다. 여봐라! 대문을 열고 횃불을 올려라!"
대도만덕이 소리쳤다. 그러자 대문이 활짝 열렸다. 횃불이 앞뒤 좌우로 번지는데궁성이 온통 군사로 에워싸인 듯했다. 대곤명은 이미 대도만덕이 도성을 장악했다는걸 알았다.

대곤명의 목을 벤 대도만덕은 밀지를 주워 읽었다. 황제의 밀지가 분명했다. 대곤명은 한순간의 잘못을 뉘우치고 첩을 올려충성을 맹약한 것 같았다.
대도만덕은 눈앞이 캄캄했다. 경솔했다는 걸 알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역적들을 한 놈도 살려두지 말라. 남김없이 도륙하라!"
대도만덕의 외침은 분노로 가득했다. 끝까지 지켰어야 할 태자가 주살되었으니 원통함에 가슴이 찢기는 듯했다. 분노한 군사들은 닥치는 대로 도망치는 역적들을 찾아목을 베었다.
새벽녘에 대도만덕은 군사를 이끌고 태후 앞에 부복하고 죄를 청했다.

"태자의 죽음이 나라를 잃은 것보다 더슬프단 말이냐?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라 역적을 토평하고 백성들을 진무할 때다.출진 채비를 서두르라!"

반란군의 모주인 왕축경은 갑자기 불어난 도성 수비군의 허실을 대번에 눈치챘다.
"공성무기 없이 공격하기에는 우리 군사의 손실이 너무 크지 않겠느냐?"
"노비와 부곡은 보잘것없어서 처음에는짐승처럼 용맹하지만 기가 꺾이면 놀란 짐승처럼 도망칩니다. 천 명만 희생시키면 성문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대창해의 수급을 자루에 담아든 대도만덕은 황제 앞에 꿇어 엎드렸다. 대도만덕은무모하게 황궁을 장악하려다가 태자를 시해하게 만든 죄를 청했다. 황제가 그 죄를물으면 천하 없는 공을 세웠더라도 살 길이없었다.
"장하고도 장하도다!"
황제의 옥음은 뜻밖이었다. 대도만덕은더 깊이 조아렸다.

대인수는 대사령과 함께 을사년(825)에선포했던 유신을 더욱 강화했다. 그토록 유신을 반대했던 대소신료들도 모두 침묵했다. 대인수는 신작을 태사로 봉하고 을지후문을 태복경 겸 진단대장군으로 삼았다

"이것은 가림토 정음 38자로 오래 전에새긴 듯하옵니다."
누가 새겼고 왜 새겼는지 밝힐 수 있는단서는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가림토 정음38자만 세로로 새겨 있을 뿐이었다. 대인수가 석판을 매만지며 새벽녘에 꾼 꿈을 털어놓자 신작이 해몽을 했다.

대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성들이 책을 읽고 과거를 보려 해도 당문이 아니면가림토인데, 당문은 배우고 쓰기 어렵고,뜻마저 다양해서 익히기 쉽지 않았다. 가림토는 그보다 쉽지만 정음의 수가 많고, 뜻이 오묘해서 시를 짓고 문장을 다듬는 데는적격이지만 양민이 배워 익히기에는 결코쉽지 않았다.

가림토가 제대로 쓰이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족들이 당문을 선호해서 신분을 가르고, 존귀함과 비천함을 구별하려는욕심 때문이었다. 즉, 당문으로 시문을 지으면 지체 높게 생각하고 가림토로 시문을읊으면 서인 취급했다.

"신은 폐하의 성덕을 받아 당나라에 다녀왔사옵니다. 당나라는 조정 안팎이 어지러워 밖으로 눈 돌릴 틈이 없고, 신라 역시김헌창과 김범문의 반란 이후 정세가 어지럽사옵니다. 일본은 여러 해 동안 기궁하여교빙조차 꺼릴 지경이옵니다. 그러나 폐하의 성덕은 사해로 번져 백성들은 근면하고신료들은 충성스럽사옵니다. 어찌 강역이넓고 사람이 많음에 견주겠사옵니까?"

"백제를 침략한 소정방은 국서고를 불태워 조선과 백제 역사를 모두 없앴고, 설인귀는 고구려의 국서고를 불태워 옛 역사와고구려 역사를 없애버렸도다. 선비들이 이를 통탄하지 않으면 모화 선비가 아니고 무엇인고? 선비나 신료들이 우리 역사인 단기고사가 가림토로 쓰였다고 탐독하지 않으니 또한 통분할 일이로다. 오죽하면 황조복이 단기고사를 당문으로 옮겼겠느냐?"

"이미 고구려 때 가림토 문자를 일본에전했도다. 조선 제3대 가륵단군께서 을보륵을 시켜 만들었으니 우리 선조의 숨결이어려 있는 문자가 아니더냐? 지금으로부터3천여 년 전에 창제된 문자이니 흐른 세월만큼이나 잘 갈고 닦아 써야 하도다."

"태평성대를 구가하기 위해서 반드시 문자가 간결하고 쓰기 쉬워야 하도다. 그렇게익힌 문자로 옛 역사를 배워 익히고 앞날을예견하는 지혜를 터득하면 어찌 천하 대국이 되지 않겠는고?"

"본디 가림토는 가림다라고도 불렀사옵니다. 가는 더하고 다는 많아진다는 뜻이옵니다. 즉 수는 더해지면 많아지고 빼면 줄어드는 것인데, 그런 수의 원리를 따르므로삼라만상의 모든 사물을 다 표현할 수 있는문자라는 뜻이옵니다. 이는 곧 천, 지, 인의의미를 글자에 담아 하늘의 소리이든 땅의소리이든 사람의 소리이든 흉내 내지 못하는 게 없사옵니다."

을사유신과 북벌, 당나라를 비롯한 신라와 일본과의 다양한 교역, 해를 이은 풍년,병들고 기궁한 백성들을 나라에서 구휼한덕에 발해 강역은 태평성대를 누렸다.

그런데 황제 대인수가 병상에 누웠다. 온백성이 황제의 쾌유를 빌고 있다는 소식은멀리 당나라 장안까지 날아들었다.
이담의 뒤를 이어 정미(827)년에 계위한당제 이앙은 대인수를 위로하기 위하여 이숭선을 발해 도성으로 보냈다. 이숭선은 병상에 있는 대인수를 알현하고 당나라 황제의 신한을 올렸다.
‘해동성국 대발해.’
병상에서 대인수는 이앙에게 휘호를 돌려주고, 사신 이숭선을 옥에 가두라고 명했다. 영문 모르는 내시감 임산록이 부복했다.

"발해를 동쪽 바다의 나라라 칭함은 결국 우리를 멸시함이다. 당나라가 세상의 중심이고 우리가 동쪽 바닷가에서 융성한 나라를 가꾸었다는 뜻이 아니더냐? 짐이 당제 이앙에게 해서성국 대당이란 휘호를 보내면 곱게 두 손으로 받겠느냐?"
임산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황공하옵니다."
"사신 이숭선을 보름 동안 가두고 풀어주어라. 그리고 품속에 짐의 휘호를 넣어보내라. 그리하면 발해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리니……."
대인수가 내린 휘호에는 해서성국 대당이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명심하여 받들겠사옵니다."

"폐하의 성지를 받들어 선조들이 남겨준소리글자 가림토 정음 38자를 23자로 줄여무지한 백성들이라도 익히기 쉽고 쓰기 편케 했사옵니다. 오로지 폐하의 훈유를 받든것이옵니다."
대인수는 누운 채 손을 들었다 놓았다.
"경들의 수고로움에 경탄하도다. 정음스물석 자를 발해 문자로 삼을 테니 부디백성들을 고루 편케 하라."

"입술은 반쯤 열면서 내는 소리 ㅁ, 혀끝을 꼬부리면서 내는 소리 ㄴ, 숨을 아랫니쪽으로 내뿜으며 내는 소리 ∧, 입천장과코로 숨을 내쉬면서 내는 소리 ㆆ, 숨을 입천장으로 몰아내는 소리 ㄱ, 입천장에 혀끝을 대었다 떼면서 내는 소리ㅿ, 입천장에아랫니를 대고 숨을 내보내며 내는 소리ㅈ."
양지강의 목소리가 끊겼다. 황제 대인수는 그토록 열망하던 발해 문자 소리를 다듣지 못하고 승하했다. 때는 경술년 섣달스무닷새, 건흥 12년이었다. 새해를 며칠앞두고 백성들에게 성인으로 추앙받던 대인수는 숨을 거두었다.

대인수의 을사유신에 맞섰던 황친은 물론이요, 대소신료와 만백성은 섣달 그믐께승하한 황제를 숭례하느라 모두 소복하여설을 맞았으며, 대인수를 위해 제례상에 따로 술 한 잔을 올렸다. 황제의 붕어를 천하가 그토록 슬퍼하고 치세를 흠숭할지 대인수는 알지 못했다.
대인수의 뒤를 이어 맏손자 대이진이 계위했다. 선제 묘호를 성종으로, 시호를 선황제로 하고, 신해(831)년 정초에 발해 제11대 황제로 등극한 대이진은 연호를 함화로 바꾸었다. 반란군에게 아버지 대신덕을잃은 그는 나이가 어린데다 성품도 유약했다.

발해 문자 정음 23자는 선제의 성덕과큰 베풂으로 탄생했다 하여 백성들 사이에선문으로 불리었다. 대인수의 시호가 선황제인 탓도 있지만 백성들은 대인수의 성덕을 큰 베풂으로 여겼다. 선문을 발해 강역의 학당마다 가르치고, 도성에 있는 주자감에서 가르쳤다.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해서글공부하는 백성들이 도처에서 모여들었다.

대이진은 할아버지의 위망에 눌려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머니 말이 옳다고 여겼다.
"근신인 내시감과 대신인 대내상을 새로명하고 변방을 진무하시오."
대이진은 어머니 뜻에 따라 만인지상인대내상에 대공정을, 내시감에 해지량을 임명하고 변방의 도독과 자사를 비롯하여 장수들을 교체했다. 대공정은 황친으로 덕망이 높았다.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이래 대신의 반열에 오를 때까지두루 화친한 성품으로 평판이 좋았다. 내시감 해지량은 태후 해수련의 친조카로, 오라버니 해수청의 장자였다. 해지량은 품계를뛰어넘어 황제의 근신인 내시감이 되었다.

해수련이 조카 해지량을 지극히 아끼는까닭은, 젊은 시절 사냥터에서 사고를 당해사내의 상징인 옥근이 절단되었기 때문이다. 해지량은 문과에 장원급제할 만큼 머리가 좋았고, 무과에도 급제할 정도로 출중한 인재였다. 문무를 겸비한 동량지재라 하여 선제 대인수가 무척 아꼈지만 신료들과어울리지 못해 중용하지 못했다. 사고당하기 전에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지만 사내구실을 못하자 아내를 친정으로 보내 재혼하게 할 만큼 통이 큰 사내였다

"폐하, 자고로 백성이 고루 현명하면 정사를 제대로 펼칠 수 없었사옵니다. 백성이우둔해야 다스리기 쉽사옵니다. 글을 깨우쳐 유식해지면 불평하는 법을 먼저 배우게되옵니다."
"꼭 그러하더냐?"
"고금을 막론하고 충역을 뛰어넘는 자나역심을 품었거나 무리를 이끌고 준동한 자는 모두 유식한 자들이었사옵니다. 통촉하옵소서."

"그러하옵니다. 그러나 태사의 한마디가폐하의 옥음보다 귀하고, 태사를 따르는 무리가 폐하를 따르는 백성보다 많사옵니다.태사는 지난 날에 선제의 그림자였고 지금은 선제의 현신과 같사옵니다."
신작은 발해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기에 대이진은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어쩌란 말이냐?"
"서서히 물리쳐야만 하옵니다. 머지않아반드시 폐하께 간언할 테니 그때 징치하옵소서."
"태사가 그른 말을 하지는 않을텐데……."

"폐하, 선제의 을사유신으로 양민 중에는 크게 농경을 일구고 교역을 하여 재물을모은 호족이 많사옵니다. 노비나 부곡 중에부호가 많고, 변방에서 올린 장계를 보면그들은 관리의 말을 잘 듣지 않을 뿐더러위세가 관리보다 높다 하옵니다. 백성들도글을 깨우쳐 사리를 따지는 자가 많사옵니다."

사촌형 해지량이 내시감이 되자 해무량은 스스로 변방의 자사 자리를 달라고 애걸했다. 자사로서 너른 땅을 다스리고 싶었던 것이다. 염주는 바닷가에 치소를 둔 곳으로, 염전이 많고 교역선이 수시로 드나드는데다 농사가 잘되고 사냥거리가 많아 풍족했다. 특히 염주 소금은 품질이 좋고 염도가 높아비싼 값에 팔리며 염세가 많이 걷혀 치소의재정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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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신의 대발해 8 - 오태후의 야망 ㅣ 김홍신의 대발해 8
김홍신 지음 / 아리샘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독서보고] 김홍신의 『대발해』 8권, 오태후의 야망 – 오태후의 야망을 꺾고 발해 중흥의 기치를 든 대인수

1. 대발해 8권 전체 개요

가. 목적
ㅇ (계승혼란분석) 대원의 제거 이후 대화여에서 대명충으로 이어지는 단명과 불안한 황위 계승 과정을 분석함
ㅇ (외척전횡고찰) 무기력한 황권 속에서 오태후와 미사천이 권력을 장악하며 빚어진 황실 사유화와 궁중 정치의 폐단을 조명함
ㅇ (중흥과정규명) 대인수의 반격과 즉위, 그리고 북방 정벌과 을사유신을 통해 발해가 다시 중흥을 모색하는 과정을 고찰함

나. 시대적 및 공간적 배경
ㅇ (시대적 배경) 대체로 793년(계유년) 대흠무 붕어 직후부터 824년(갑진년) 전후 대인수의 개혁과 반란 진압 국면까지의 시기로, 발해는 짧고 불안한 황위 계승, 외척 정치, 궁중 암투, 민란과 반역, 북방 정벌, 제도 개혁을 차례로 겪으며 혼란 속에서 다시 중흥의 길을 모색하는 국면에 놓임.
ㅇ (공간적 배경) 상경성과 동경성, 오태후와 미사천이 권력을 틀어쥔 황궁과 도성, 제나라 및 당과 외교·전쟁이 이어지는 산동과 등주 일대, 그리고 철리·흑수·월희·말갈 제부가 분포한 북방 변방이 주요 무대로 제시됨.

다. 핵심 요지
ㅇ (계승 혼란과 황권 약화) 대원의 제거 이후에도 발해는 곧바로 안정을 되찾지 못하고, 대화여·대숭린·대원유·대언의·대명충으로 이어지는 불안한 계승 속에서 황권이 빠르게 약화됨.
ㅇ (외척 정치와 궁중 전횡) 대원의 시대가 끝난 뒤에도 오태후와 미사천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면서 황실과 조정은 외척과 권신 중심의 궁중 정치에 깊이 흔들림.
ㅇ (대인수의 반격과 중흥 모색) 대인수는 궁중 전횡과 황실 혼란을 정리하고 황위에 올라 정통과 군심을 회복하며, 철리·흑수, 당의 등주, 장성 정벌과 을사유신을 통해 다시 강한 발해를 세우려 함.

2. 주요 내용 전개

가. 대원의 제거와 대화여의 재즉위
ㅇ (상경성 회복) 대숭린은 대원의를 치기 위해 상경성과 동경성을 포위하나, 무명선사와 신사정 등은 상경성 백성 또한 발해 백성이므로 무리한 공격은 피해야 한다고 간언함. 이에 대숭린이 상경성도독 대상의에게 항복을 권하는 칙서를 내리자, 대상의는 뜻밖에도 이를 받아들여 항복함.
ㅇ (동경성 함락과 대원의 최후) 흑수가 쳐내려오고 내부 신하들마저 차츰 대원의의 명을 거역하면서 그의 세력은 빠르게 흔들림. 내부 혼선까지 겹친 끝에 동경성은 무너지고, 대원의는 대사루의 칼에 죽고 대사루도 자결함. 이로써 7권 이래 이어지던 대원의의 권신 정치도 피로써 막을 내림.
ㅇ (대화여의 회복과 단명) 나송옥은 의녀 오수지의 도움을 받아 제니풀을 달여 먹여 대화여의 광증을 가라앉히고, 대화여는 살아남기 위해 한동안 미친 척을 이어 감. 이후 세 황자에 의해 다시 황제로 옹립되지만, 상경 천도 후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독 중독을 이기지 못하고 죽고 숙부 대숭린을 후사로 정함.

나. 대숭린 치세의 한계와 계승 불안
ㅇ (수습형 군주의 한계) 대숭린은 대원의의 난을 정리하고 질서를 어느 정도 회복하는 데 기여하였으나, 즉위 뒤에는 신사정·무명선사·고건 같은 충신들을 두려워하고 멀리하면서 사람을 넓게 쓰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냄. 그는 운문선사에게 조세와 군정에 관한 여러 계책을 듣고 상당 부분 시행하지만, 충신들을 다시 기용하라는 가장 중요한 조언만큼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음.
ㅇ (외교와 사치의 그림자) 대숭린은 밀아고를 당나라에 보내 제나라와 연합해 당을 압박하려 하나, 당이 보낸 물선과 미녀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셋을 자신이 차지하고 나머지를 근신에게 나누어 주는 등 군주의 절제와 품격에서는 분명한 한계를 드러냄.
ㅇ (반역과 민란의 확산) 장마와 가뭄이 이어지고 나라의 피로가 누적되는 틈을 타 이복동생 대청윤이 반역을 일으키고, 대숭린이 용천을 폐쇄하자 백성들의 불만은 커져 곳곳에서 봉기와 약탈이 일어나 많은 백성과 군사가 희생됨.
ㅇ (제물의 비극) 무녀 백난별은 용신의 노여움을 풀려면 동남동녀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때 신사문이 두 남매 신달진과 신달지를 바치겠다고 나섬.

다. 대원유 즉위와 오태후·미사천의 전횡
ㅇ (무기력한 황제와 외척 정치의 재연) 대숭린이 죽은 뒤 장자 대원유가 즉위하나, 그는 무예를 게을리하고 식탐이 심하며 정치 감각도 떨어지는 군주로 묘사됨. 그 결과 모후 오태후가 섭정에 나서고, 오씨 가문이 궁중과 조정을 사실상 장악하면서 발해는 다시 외척 정치의 악순환에 빠짐.
ㅇ (미사천의 부상과 황실 사유화) 오태후가 기용한 미사천은 선제 때 밀려난 고씨 왕족의 마음을 붙잡고, 신씨·난씨 일가를 중용하자는 방책을 내세워 빠르게 실권자가 됨. 그는 배제된 세력을 다시 끌어들여 권력 기반을 넓히는 정치 기술자형 인물로 기능하며, 오태후와 결합해 황실과 조정을 더욱 사유화함.
ㅇ (오태후의 황위 욕망) 오태후는 대원유의 아들 대태성을 독살하고 자기 아들까지 제거한 뒤 스스로 황위에 오르려 하나, 대인수의 거병으로 그 계획은 좌절됨. 이후 대언의와 대명충이 차례로 황위에 오르지만 모두 허약한 통치 속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죽음.

라. 대인수의 반격과 즉위
ㅇ (정통 세력의 결집) 대인수는 위협 속에서 밀려나 있으나, 여전히 고구려 왕족의 정통과 군심을 모으는 상징적 존재로 남아 있었고, 마침내 오태후의 전횡을 참지 못한 측근들의 배신과 반발 속에서 반격에 나섬.
ㅇ (정권 교체와 새 시대의 개막) 대인수는 오태후와 미사천 시기의 궁중 정치를 정리하고 황위에 올라, 무너진 정통과 군심을 다시 모으는 중심으로 떠오름. 이는 단순한 왕위 교체가 아니라 발해가 다시 국가 운영의 방향을 바로잡기 시작했음을 뜻함.
ㅇ (대외 정세의 변화) 한편 제나라 이사도는 제거되고, 고구려 후손이 세운 치청국도 역사 속으로 사라짐. 당은 제나라를 정벌한 뒤 발해를 향해 압박을 강화하며, 발해는 더 이상 외부 동맹에 기대기보다 스스로 변경 질서를 정비해야 하는 처지에 놓임.

마. 대인수의 친정과 발해 중흥의 완성
ㅇ (북방 정벌의 결단) 대인수는 철리와 흑수를 먼저 정리해야 한다고 보고 친정을 단행하며, 보다 기동성 있는 군제와 전투 장비 정비를 추진함.
ㅇ (당나라 정벌) 대인수는 북방 정벌에 그치지 않고 당의 등주와 장성까지 공략하며, 발해가 더 이상 수세에 머무르지 않고 당을 상대로도 공세적 위상을 회복하고 있음을 보여줌.
ㅇ (대외 공세와 최대 판도) 철리·흑수 정벌과 등주·장성 공략을 통해 발해는 최대 판도에 이르고, 대인수 치세는 대외 팽창과 국경 안정이 함께 이루어진 시기로 자리함.
ㅇ (중흥 군주의 면모) 이러한 정벌은 대인수가 오태후 시기의 궁중 정치에서 벗어나 다시 대외 질서와 변방 통제력을 회복하고, 발해를 강한 나라로 다시 일으켜 세운 군주였음을 보여줌.

바. 을사유신과 개혁 저항
ㅇ (개혁의 선포) 대인수는 등주와 장성을 정벌한 뒤 을사유신을 선포하고, 제도와 국정을 바로 세우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냄. 그는 신작에게 가림토 문자를 바탕으로 발해 문자 개발에 힘쓰게 하며 제도와 문화의 독자성까지 모색함.
ㅇ (기득권의 반발) 그러나 귀족과 황친, 기득권 세력은 유신을 주도한 신작을 공격하고, 심지어 태자 폐위 상소까지 올리며 격렬히 반발함. 대인수는 개혁의 방향은 옳게 보았으나 반대파를 끝까지 제압하지 못하고 신작을 태백산으로 귀양 보내는 한계를 드러냄.
ㅇ (새 반란의 조짐) 대인수가 태백산에 행차한 사이 대청해의 반란 소식이 전해지고, 신작과 을지후문이 다시 비상 수습에 나서게 됨. 이는 발해 중흥이 시작되었어도 개혁과 안정을 둘러싼 싸움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줌.

3. 인물 및 통치 평가

가. 군주들의 명암
ㅇ (대숭린의 한계) 대숭린은 혼란 수습에는 기여했으나, 충신을 넓게 품지 못하고 절제에서도 한계를 보여 중흥 군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함.
ㅇ (오태후의 전횡) 오태후는 섭정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황위까지 넘보며, 발해 황실을 가장 심한 궁중 정치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음.
ㅇ (대인수의 중흥 군주상) 대인수는 정통과 군심을 회복하고 철리·흑수 정벌과 을사유신을 추진하며 발해를 다시 일으키려 한 군주로 제시됨. 다만 개혁 반대 세력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한계도 함께 드러남.

나. 권신과 충신의 대비
ㅇ (미사천의 성격) 미사천은 권력 재편과 세력 흡수에 능했으나, 그 재능을 공적 개혁이 아니라 오태후와 결합한 사적 권력 강화에 써 조정을 더 깊은 혼란으로 밀어 넣음.
ㅇ (신작의 의미) 신작은 대인수 개혁의 핵심을 떠받치는 충신으로, 정치와 제도, 문자와 문화까지 함께 고민한 인물로 묘사됨. 그러나 그는 끝내 귀양을 가게 되고, 이는 대인수조차 개혁의 정당성을 믿으면서도 저항 세력의 벽을 끝내 넘어가지 못했음을 보여줌.

4. 거시적 고찰 및 역사적 함의

가. 황위 계승의 불안과 궁중 정치의 심화
ㅇ (짧아진 치세와 골육상잔) 대흠무 이후 발해 황제들의 치세는 급격히 짧아지고, 황위 다툼과 골육상잔이 반복되며 황권의 안정성이 크게 약화됨.
ㅇ (외척 정치의 악순환) 대원의 시대가 끝난 뒤에도 오태후와 미사천이 다시 권력을 틀어쥐는 모습은, 발해가 외척 정치의 악순환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줌.

나. 대인수 즉위의 의미와 개혁의 딜레마
ㅇ (혼란 봉합을 넘어선 전환) 대인수의 즉위는 단순한 반정의 성공이 아니라, 무너진 정통과 군심을 다시 모으고 나라의 바깥 질서까지 바로잡으려는 본격적 전환의 시작임.
ㅇ (중흥의 완성) 철리와 흑수 정벌, 당의 등주·장성 정벌, 을사유신 추진은 대인수 치세가 단순한 혼란 수습에 그치지 않고, 발해를 다시 강한 나라로 일으켜 세우는 중흥의 과정이었음을 보여줌.
ㅇ (개혁 저항의 현실) 그러나 귀족과 황친들의 반발, 태자 폐위 상소, 대청해의 반란은 개혁이 옳더라도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일 정치적 결단과 지지세력이 없으면, 끝내 기득권의 반격에 짓눌려 꺾일 수 있음을 보여줌.

5. 종합 결론

가. 오태후의 야망과 황실 혼란
ㅇ (궁중 전횡의 극점) 대발해 8권은 오태후와 미사천의 전횡이 황실 내부의 계승 질서를 어지럽히고, 조정을 외척과 권신의 사적 권력 공간으로 바꾸어 가는 국면을 드러냄.

나. 대인수의 반격과 발해 중흥의 시작
ㅇ (정통 회복과 국운 반전) 그러나 대인수는 이 혼란을 정리하고 황위에 올라 민심과 군심을 회복하고, 철리와 흑수를, 당의 등주와 장성을 정복하여 발해 최대 판도를 이룸.

다. 개혁의 가능성과 미완의 과제
ㅇ (을사유신의 의미) 결국 8권은 발해가 가장 깊은 궁중 혼란과 권력 투쟁을 통해 다시 강한 나라로 나아갈 가능성을 되찾는 과정인 동시에, 나라를 바로세우는 일보다 기득권을 걷어내는 일이 더 어렵고, 가진 자의 욕심은 끝내 개혁의 발목을 잡는다는 사실을 보여줌.

존명(尊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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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수는 출병했던 군사 가운데 둔전병을 뽑아 서쪽으로 진병하게 했다. 이는 다분히 당나라를 의식한 것이다. 번진을 토평하고제나라까지 멸망시켰으니 당나라는당연히 발해를 넘볼 것이다.

뱃머리가 노들섬에 닿자 멀리 암자에서사람들이 달려왔다."정진중이라 저녁 공양 때가 아니면 나오지 않을 것이옵니다."나이든승려가 암자 뒤편 토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신작과 난타뿐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토굴에서 정진하여 불러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황제가 행차하면 마땅히 나와서 알현해야 하는데 그들은 당당했다."정진을 훼방했으니 스님께서 널리 헤아려주시오."

저녁때가 되어서야 토굴에서 참선하던 신작과 난타가 급한 걸음으로 황제를알현했다. 대인수는 좌우를 물리고 마주 앉았다."천하를살펴보니 짐의 능력이 참으로보잘것 없었소. 짐에게 바른말로 논힐하고짐의 모자람을 채워줄 현사가 절실하오."황제가 몸소 먼 길을찾아와 태사 자리를 권하니, 신작은 차마 거절하기 어려웠다

"짐이 작정한 것이요, 이미 옥음을 내렸는데 어찌 번복하겠소? 짐이 부덕하여 마땅히 스승을 모셔야 하고 황자와 공주들에게도스승이 필요하오.""신은 한 번도 정사에 참여한 적 없는 백면서생일 뿐이옵니다. 오랫동안 조정대사를 논한 대소신료들에게 염치가없사옵니다. 통촉하옵소서."

"신은 3공의 아랫자리인 사공이면 족하옵니다.""그러면 난타는 어찌 귀하게 쓸 수 있소이까?" "난타는 의술과 마의술에 뛰어나니태의로 삼고 장차 태복경을 맡기옵소서."

"사공은 짐과 황실의 스승이 될 수 없소.그러니 태보로 봉하겠소."이렇게 해서 대인수는 신작을 태보로, 난타를 태의로 명했다.

대인수가 여세를 몰아 곧장 흑수를 토평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흑수를 공격하는 사이 당나라가 변경을 침노할 것을걱정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흉맹한 흑수와 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군사를 잃을까 하는 근심에서였다.

"흑수와 월희 군사보다 한 발 빠른 기동력과 작고 가벼우면서도 멀리 나가는 과간편한 양식이 필요하옵니다. 또한 가볍지만 튼실한투구도 만들어야 하옵니다." "과연 짐을 가르칠 만한 스승이오."대인수는 뒤엉킨 실타래가 풀어진 듯 기뻐했다.

"지금까지는 고구려의 전술과 편제로 군사를 다스렸사옵니다. 그러나 기마병 중심으로 기습하고 도주하는 흑수 군사와 응전하기위해서는 5병제를 버리고 10진제로군대를 편제해야 하옵니다. 즉 십, 백, 천,만으로 구별하면 통솔하기 쉽사옵니다."

"통솔하는 무리가 많으면 명령을 내리는자도 많기 마련이옵니다. 명령하는 자가 많으면 규율에 얽매여 공수가 느려지고 손발이 묶여적의 침공을 받게 되옵니다. 지금까지는 장수가 뒤에서 군사를 몰았지만 앞으로는 장수가 앞장서서 군사를 이끌어야하옵니다."

"기마병의 반이나 정진대가 되어야하오?"어느 병법에도 나와 있지 않는 전술로기마병의 반수가 특공대 역할을 하는 것이기이했다.

"전투식량 만드는 묘책이 무엇이오?" "짐승을 잡아 털을 벗기고 잘게 저며 햇빛에 말렸다가 빻으면 양이 얼마 되지 않사옵니다.
그것을 짐승의 오줌보 말린 것에넣으면 좋은 전투식량이 되옵니다. 또한 곡물을 가루 내어 가지고 다니면 그 역시 좋은전투식량이옵니다."

대인수는 난타의 등을 두드렸다."그대의 손에 발해의 운명이 걸렸음을 명심하라. 짐이 죽어 천 마리의 말로 환생할 수만 있다면 발해군마로 태어나 저 광활한 북방을 한없이 달리고 싶다."

대인수는 가볍고 탄력이 좋은 각궁을 들어 시위를 당겼다. 살의 허릿간 길이와 촉의 무게, 궁깃의 넓이와 오늬의 크기를 매일 바꾸어최대 사거리를 모색하기 때문에수많은 활과 화살이 쌓여 있었다. 대인수가표적을 향해 날린 화살은 자로 잰 듯 표적을 뚫었다. 각궁은무려 백척이나 날았다.사거리를 확인한 대인수는 크게 기뻐하며궁공들에게 사급을 내렸다.

신축(821)년 초가을, 드디어 발해 황제친정군이 사열을 마치고 북방을 향해 진병했다. 이하앙과 장두불이 정예부대를 이끌고 앞서나가고, 전경채의 주홍기사단이 황제를 옹위하고 드넓은 벌을 내달렸다.

지난 전투 때만 해도 황제는 후군을 맡아 전황을 살펴 군사를 투입하고, 이번 전투는 북방 강자 흑수를 상대하기에 황제가몸소 적과응전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발해 친정군이 흑수전에 나섰다는 급보를 받은 당나라 조정은 달구와 철리가 힘없이 무너지자 요서를 방비하는 한편 흑수를지원했다. 그래서 많은 운전금과 군마와 병장기를 보냈고, 병법에 능하고 신통술까지부린다는 장수왕시성을 흑수의 장사로 삼아 흑수 군사를돕게 했다.

"예부터 소각(작은 나팔) 소리는 용의 울음소리 같다고 했사옵니다. 적을 교란하기위해 소각과 전고를 삽시에 아우성치게 하면 적의군마는 놀라 날뛸 것이옵니다. 말은 꾀가 많지만 겁이 많은 짐승이어서 폐하의 뜻대로 부릴 수 있사옵니다."

"공격하라!"대인수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무수한 발해 기치가 오르며 펄럭였다. 나팔과 전고소리가 자지러지고 북소리도 콩 볶듯했다.고함소리도 되알졌다. 여기서 두들기면 저기에서 불고, 저기에서 고함치면 여기서두들기는데 마치 지옥의 암굴에서억조창생이 한꺼번에 분탕질하는 듯했다.흑수군 기마병들이 놀란 말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흑수군에 정신없이 도망치던 발해 군사들이 갑자기 뒤돌아섰다. 둔덕 아래 숨어있던 주홍기사단이 먼저 소리화살을 날리자 숨어 있던궁노수들도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마치 하늘에서 검은 빗방울이 쏟아지는 듯했다. 흑수 군사들은 쓰러지고 뒹굴고비명을 질렀다.
죽어가는 군사들의 비명은애처로웠다.

좌웅과 우웅이 협공을 하자 흑수 군사들의 예기가 꺾였다. 병에는 기가 있는 법, 적군의 전의를 꺾으면 아무리 용맹해도패하게 마련이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내달려 성 가까이 당도한 옥작소는 성곽을 쳐다보며 아연실색했다. 흰 바탕에 승천하는 황룡이 새겨진기치가 바람에펄럭이고 있었다. 바로 발해황제를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뿐만 아니라황색 바탕에 효포하는 백호가 수놓아진 기치가 성곽 좌우에서힘차게 펄럭였다. 점령당한 게 분명했다.

발해군은 흑수군을 맞아 치열하게 싸웠다. 난전이었다. 그러나 우측에서 장척안의 군사들이 흑수군에게 한바탕 칼부림을하면,
어느새 좌측에서 윤호세의 군사들이한바탕 칼부림을 했다. 분병필패라 했던가.분한 마음으로 악에 받쳐 덤벼들 때는 꽤아귀차게보이지만 오래 못가 전의를 상실하기 마련이었다.

"복건성 성루 위에 백기가 펄럭입니다."뜬금없는 소식이었다. 항복을 뜻하는 백기를 내걸었으면 마땅히 적장이 걸어나와무릎을꿇어야 했다." 지키는 군사는 얼마나 되더냐?" "군사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전의를 잃고 도망친 듯합니다."

장두불이 명을 내리자 뒤따르던 군사들이 성안으로 달려들었다. 장두불도 곧 그뒤를 쫓았다. 바로 그때 화살이 먹구름처럼날아와발해 군사들을 덮쳤다. 사방에 몸을숨기고 있던 흑수 군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땅속에서 기어나오고, 지붕을 뚫고나오고,풀더미를 헤집고 달려들고, 성루에서 뛰어내리는 군사들의 기세는 물 만난 악머구리 같았다.

"남김 없이 도륙하라! 한 놈도 살려두지말라!"흑수군의 함성이 하늘을 흔들었다.발해군은 도망갈 길 없이 독 안에 든 꼴이었다.
저항하면 칼을 맞았고 무릎 꿇으면포박을 당했다.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성안으로 들어갔던 2천 군사는 가을바람에흩날리는가랑잎처럼 나뒹굴었다. 장두불은 적의 칼날 앞에 주검이 되었고, 군사들은 창검 한번 제대로 써 보지 못했다. 이런걸 두고 궤멸이라하는 걸까. 도망갈 길이없는 발해 군사들은 손쉽게 항복했고 끝까지 싸우던 군사들은 창졸간에 목숨을 놓았다.

"흑수군이 쫓기는 마당에 호기를 부린것은 말미를 벌기 위함인데 그것을 모르고덤벼들다니 참으로 안타깝소." "드릴 말씀이없습니다."장수들은 장두불의 죽음이 마치 자신들의 책임인 양 어쩔 줄 몰라 했다.

날이 부옇게 밝아오자 신작은 공성을 명했다. 발해의 공성무기가 사정없이 성문을때리고 성루를 부쉈다. 마침내 남문이 불길에•휩싸이더니 무너졌다. 성곽도 일부가 무너져내렸다.옥작소는 수하 기병들을 거느린 채 동문쪽으로 내달렸다. 동문 밖은 창검을 든발해 군사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군사를 물린 대인수는 날이 밝자 정탐병을 보내 적정을 탐지하고 군사를 풀어 시신을 한곳으로 모았다. 먼저 적의 시신을 위해 제사지낸 뒤 아군을 위해 제사 지냈다. 또 산신과 지신을 위무하는 제사도 잊지 않았다.

예부터 흑수를 정벌하기 어려웠던 것은패하면 군사를 이끌고 한없이 북방으로 도망쳤다가 날이 풀리면 군사를 휘몰아 공격해오기때문이었다. 만약 대인수가 환궁하면 어김없이 또 변경을 침노하여 백성을 죽이고 부녀자를 빼앗고 마소와 양곡을 남김없이 쓸어갈것이다.

"폐하, 적은 우리의 동태를 면밀히 주시하고 있사옵니다. 군사를 풀어 사냥으로 식량을 확보하고, 조련을 통해 군사들마음을 다잡으며 봄이 올 때까지 기다리셔야 하옵니다. 지금 적을 제압하지 않으면 반드시또 준동할 것이옵니다."신작은 오히려 봄을맞을 때까지 전선을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작의 예견은 적중했다. 흑수군 대수령옥작소는 발해군이 철수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자 백기를 든 장수를 보내 발해 황제대인수와단둘이 창검을 겨루어 승패를 가르자는 군첩을 보냈다. 성을 빼앗긴 채 먼곳까지 도망간 옥작소는 마지막 승부수를던진 것이다. 대국의 황제가 결코 응하지않을 것을 셈속에 넣은 제안이었다.

"전쟁이란 어느 한쪽이 일방으로 이길수 없도다. 우리가 적을 열 명 죽이면 우리군사 한 명쯤은 잃게 마련이다. 짐이 칼을들고 나아가옥작소를 잡는다면 천하가 조용해지지 않겠느냐. 한 나라의 주인이면 마땅히 한 명의 백성이라도 살리는 게 주인된 도리이다."

"태보는 어찌 말이 없으신고?"대인수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신작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신작은눈을 뜨며 빙긋이웃었다. 황제도 따라 웃었다."진병하실 때 반드시 명광개를 갖추옵소서. 적을 능히 눈부시게 할 것이옵니다."신작과 대인수의 눈빛이마주쳤다. 장수들이 반대해도 대인수는 흑수 사신을 되돌려 보냈다.

칼을 치켜들자 사내가 두 손으로 칼을 막는 시늉을 했다."살려주시오! 나는 단지 명을 받고 대수령의 갑옷과 투구를 썼소."황금빛투구를 쓴 장수는 재빨리 사내를말에 태우고 밧줄로 몸을 묶어 안장에 걸었다. 그리고는 고삐를 채어 잡고 진영으로돌아왔다.

투구를 벗은 대인수의 형형한 눈빛은 천하를 호령할 기세였다. 그때 신작이 썩 앞으로 나섰다."겨루실 때는 반드시 투구를 쓰고햇빛을 받으며 공격하옵소서."막아섰던 장수들이 일어나 머리를 조아렸다. 대인수도 단기필마였다. 저만치에서옥작소가 철편을꼬나들어 허공을 갈랐다.
222/307(72%)예견하고 대처했지만 옥작소의간계에 속지 않은 것에 모두 안도했다.

옥작소는 살기 등등 했다. 대인수의 장검에 몇 차례 갑주가 찢겨 속살이 벌겋게 드러났어도 기세는 여전했다. 칼과 철편이 부딪쳐불꽃이 튕겼다. 철편이 직하하면 칼날이 직상하며 불꽃을 터뜨리곤 했다.

옥작소는 대인수의 뜻을 알아차린 듯 한손으로 칼을 집었다. 그의 눈에는 증오도분노도 없었으며, 애통이나 비애도 서려 있지 않았다. 옥작소가 살아 돌아간다고 해도수령들이 그냥 둘 리 만무했다. 어쩌면 옥작소가 참패하기를 기다리는 자가 많을지도 모른다. 옥작소는 평소 대수령 자리를노리던 수령들의 얼굴에 비웃음과 잔인함이 배어드는 걸 떠올렸다.

항복의 절차는 복잡하지 않았다. 머리를풀어 헤치고 무릎을 꿇은 채 목을 내밀었다. 목을 치거나 항복을 받아들이거나 발해황제 뜻에따르겠다는 굴종의 예였다.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고 복속을 맹약한 신하였기에 응당 반역죄로 다스려야 했다.

발해 장수들이 도열한가운데 흑수 수령들도 함께 제사 지냈다.제사가 끝나자 대인수는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고루 호궤하고 전공에 따라 후사했다. 흑수 장졸들은 발해 황제의 성은에모두 흠복했다. 대인수는 수령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골타를대수령으로 삼아 돌려보내고, 흑수를감찰할 장사에 진부달을 명했다.

"폐하, 월희는 흑수의 사주를 받아 출병했사옵니다. 흑수를 보내면 우리 군사의 손실 없이 항복을 받을 수 있사옵니다."장수이하앙이 주품했다."만약 월희가 흑수 손에 정벌되면 언제까지나 흑수를 상국으로 섬길 테니 우리 군사의 손실을 각오하고 토평해야한다."

"대장군에게도 훈공의 기회를 주어야 하옵니다."신작이 거들고 나서자 대인수는 기꺼이을지후문에게 부월을 주었다.
을지후문은대종과 화달에게 선봉을 맡기고 동쪽으로군사를 휘몰았다.월희를 공격한 지 보름 만에 월희부 대수령 야사리가 휘하 수령나야발, 오기리를대동하고 항복했다. 밧줄에 묶여 수레에 실려 온 야사리는 맨땅에 꿇어 엎드려 목숨을구걸했다.

"아! 말갈 제부를 평정했도다."대인수의 입에서 절로 환호가 터졌다. 발해를 창업한 지 120여 년 만에 고구려 옛땅은 물론 당나라 땅일부와 말갈제부, 흉맹하고 반복무상한 흑수 말갈과 월희까지평정하여 번속을 삼았다.드디어 성무고황제의 유지를 받들어 사방 5천리를 경략하게 되었다.

말갈제부 가운데 가장 흉맹한 부족은 제일 북쪽에 있는 흑수부였고, 버금으로는 철리부와 월희부였다. 흑수와 철리,
월희는 세력다툼을 해왔지만 발해가 강성해지면서불열과 우루부를 구슬려 동맹을 맺고 발해와 맞서려 했다.

대인수는 고순작에게 물었다."흑수부는 남으로 흑수에서 시작해 북으로 머나먼 동토에 이르며, 철리, 불열, 월희와 이웃하여 광활한영토를 가졌사옵니다.강성했던 서쪽의 거란과 돌궐도 가로막힌망망한 수림과 험한 길 때문에 흑수를 넘보지 못했으며, 당나라도침공하지 못했사옵니다. 오직 흑수를 위협하고 정복한 나라는고구려와 발해뿐이었사옵니다. 이제 흑수를 남북으로 나누어 남쪽을발리부로 하고, 북쪽을 흑수부라 하옵소서."

대인수는 고순작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고 조서를 내려 발리부도독에 골타를, 흑수부도독에 오소진몽을 제수했다. 또한 골타와오소진몽에게 아속을 내려 각기 발리군왕과 흑수군왕으로 봉작했다. 드넓은 땅을두고 남쪽 땅을 서로 차지하려고 맞서던 흑수는대인수의 탕평책을 받아들여 남북으로 강역을 나누고 이때부터 흑수와 발리로구분했다.

발해 강도가 완성된 것은 장장 2년 뒤였다. 동원된 인원만 무려 2천 명이었다. 2년 동안 병사하거나 변고로 목숨 잃은 자만도 50여 명이나 되었고, 부상당한 자만도백여 명이었다. 깊은 산골에서 짐승에게 먹히기도 하고, 독사에 물려 죽거나 강물에빠져 죽은 자도있었다. 바다에서 풍랑으로고기밥이 된 자도 있고, 장맛비를 미처 피하지 못해 불어난 계곡물에 휩쓸리거나 겨울에 눈사태에 파묻혀죽은 자도 있었다.

발해는 광활한 국토를 5경 15부 62주로나누어 다스렸고, 북방에 흑수부와 발리부를 두어 말갈족을 복속했다.대인수는 태보 신작과을지후문, 시종장과 시위만을 대동하고 전서구를 기르는 구사를 찾았다. 아군끼리 연통하는 데 이용하는 비둘기를 조련시키는 장수양위음이 조련장으로 안내했다. 양위음은 독수리와 매사냥에 조예가 남다른 장수였다.

대인수는 황궁으로 돌아와 선대 개국공신 신재용이 남긴 서책을 펼쳐들고 찬찬히살폈다. 여러 가지 글씨와 그림이 어우러진책으로, 어선과 군선, 전선의 그림들이 가득했다. 대인수는 수군으로 명성을 떨쳤던장문휴와 양소화 장군이 그려놓은 서책도펼쳐보았다. 맹선을 비롯해서 옥선, 유격선등 갖가지 전선이 그려져 있었다.큰 전선 1척에는 무려 3백 수십 명이 탈정도였으며, 어떤 배는 누선의형태였다.이런 배들은 한결같이 선각이 든든해서 모두 접근전에 유리하게 만들었는데, 수밀격벽이 잘 이루어지고 배 밑바닥이이중저로된 것이 특징이었다. 격벽은 물이 새지 않게 막아주고, 이중저는 배 밑에 내저판을두어 선체가 손상되더라도 쉽게침수하거나 좌초하지 않게 만들었다.

대인수는 태보 신작의 청을 받아들여 품질 좋기로 소문난 위성 철을 다량 확보했다. 철로 돌격선이나 전투선을 비롯하여 지휘선의용골과 늑골을 꾸몄다. 선제 대무예가영주벌을 토평할 때 검거를 투입하여 당나라 군사들의 혼을 빼앗고 섬멸했던 것처럼,돌격선뱃머리에 철곡을 빼곡하게 박아 적의 배를 당파시키려는 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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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와 등주 일원에 나가 있던 세작과정탐병으로부터 급보를 받은 발해 조정은전전긍긍했다. 제나라가 패망하면 군사 요충지등주와 영주에서 당나라 군사가 동시에 발해를 공격할 수 있었다. 말갈의 할거도 심상찮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제나라를 위해군사를 일으키자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런 주장을 했다가 고역을 치른 신료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급보가 궁궐로 들이닥친 것은 자시가 막지날 무렵이었다. 옥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던 대인수가 탈옥했다는 것이었다. 연달아금군대장군 오작청이 괴한의 손에 목이 달아나고, 경기군 대총관 왕경례도 독살에 맞아 사경을 헤맨다는 흉보가 날아들었다.

그때 오태후앞에 칼을 들고 썩 나선 것은 놀랍게도 황후 고운목이었다. "무엇들 하느냐? 어서 참하라!"오태후는 호위하는 시종과시위에게 호통쳤다."이미 황궁은 의분한 신료와 군사들에게포위되었사옵니다. 황상을 시해한 죄상을숨길 수 없는데 어찌 용상을탐내시옵니까?"고운목은 칼날을 태후에게 겨냥한 채 목청을 세웠다

"네 이놈!"오태후가 눈을 부릅뜨고 손가락질하며소리를 지른 것은 대인수를 호위하는 대장군 묘정수 때문이었다. 아끼고 따르던심복이요, 밤에 침궁으로 불러들였던 남총이 아니던가. 대인수를 잡아들인 공을 세워 개국백으로 봉작까지 하지 않았던가. 묘정수가대인수를 호위함은 진작부터 밀통했다는뜻이었다.

낭자 시절, 고운목은 발해 사가의 낭자들처럼 시문을 닦고 무예에도 출중한 솜씨를 뽐냈다. 늙은 태후쯤은 가볍게 목을 칠 수 있는솜씨였다.고운목은 기어이 칼을 휘둘렀다. 오태후의 틀어 올린 머리채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무술(818)년 7월 스무아흐레, 황위에 오른 대인수는 연호를 건흥으로 고치고, 선제대명충의 시호를 간황제, 묘호를 철종으로했다. 이로써 황위는 개국 황제 대조영의 직계손에서 대야발의 후손으로 이어졌다. 대인수가 황친국척의 환대와 백관의 환호를 받으며등극하자 나라를 그르친 오태후를 효수 경중하자는 상소가 끊이질 않았다.

대인수의 옥음은 부복해 있는 신하들 가슴에 시원한 바람이 되었다."죄인 오귀남이 섭정을 하매 경들 또한부화뇌동하여 바른 정사를펴지 못했도다.짐은 지난 죄를 모두 묻고 오직 창민을 편케 하겠노라."어느 누구도 황제의 옥음에 반대할 수없었다. 고개가 더 숙여질뿐이었다.

대인수가 황위에 오르자 사직은 안정되고 민심은 빠르게 안돈되었다. 그러나 바다건너 제나라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시시각각위태로웠다. 당나라의 다음 행보가 어디인지를 뻔히 알기에 대인수는 바다 건너 소식에 귀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쌀쌀한 겨울날씨가 대륙을 추위에 떨게 하던 날, 이사도는 부하 장수 유오의 반란으로 사로잡히고 말았다. 사력을다해 적과 싸워도힘이 부칠 텐데 동족의배반은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다.

유오는 이사도의 목을 베어 위박절도사전홍정에게 바쳤다. 이사도가 재위한 지 13년이요, 이정기가 치청 왕국을 세운 지 55년만이었다. 고구려 후손이 세운 제나라가당나라의 요충지를 50여 년 동안 지배한채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고구려 후손 제나라가 멸망하고 제왕이사도가 승하했도다. 이에 우리가 동맹의굳은 약조를 지키지 못한 죄과를 엎드려 빌어야하리라. 발해의 사직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기꺼이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를 공격했어야 옳았도다. 우리를 믿고 기다렸을 이사도의절박한 심정을 생각하면 어찌 가슴이 시리지 않겠느냐?"

대인수는 병법에도 밝아서 친히 징과 북, 크고 작은 깃발을 들어 나아가고 물러서며앉고 일어서는 절도를 밝혀, 군사들의 마음과행동을 모으는 데 능했다. 또한 친히 창검궁시로 찌르고 베고 쏘고 말 달리는 시범을 보임으로써 군사들의 마음을 하나로 뭉쳐 조련에임했다.

대신덕을 태자로 봉하면서 대인수는 문무 제신과 각처에 있는 장수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집결한 장수들에게 사급을 내려 그들의노고를 진무하니 감격하지 않는 자가없었다.

"북동쪽의 흉맹한 흑수를 먼저 토벌해야하지만 북서쪽으로 진병하는 것은 말갈을제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나라를 놀라게 하기위함이다. 짐이 군사를 이끌고 친정하면 당나라가 함부로 준동하지 못할 것이다. 적의 세작들이 사방에서 지켜보고 있음을 잊지말라."

"흑수의 사주를 받은 철리군이 부여부쪽으로 진격하고 있습니다."양적중은 한차례 몸을 떨고는 칼끝으로동쪽을 가리켰다. 대장군이하앙의 눈빛도금세 불꽃이 튈 듯했다.

이튿날 새벽, 철리 군사 2만 군이 양산산자락을 거침없이 공격했다. 발해군 기치가 바람을 가르자 함성이 협곡에 메아리쳤다. 기세오른 철리군은 올망개의 진두지휘로 맞함성을 질렀다. 하늘이 뚫리고 땅이 갈라지는 듯한 함성이 천지를 뒤흔드는데 대도를 든이하앙이말고삐를 쥐고 적진으로 달렸다. 울분이그의 손끝을 타고 칼날로 뻗치는 게 느껴졌다. 올망개도 말 잔등 위에서 장창을세운 채 솟구친 자세로 진격해왔다.

"우리가 황상의 성덕을 받드는 게 당연합니다."화달이 웃는 낯으로 말을 받았다. 그랬다. 지난 날 대인수가 순람 길에 벼랑에서떨어져 크게 다쳤을 때 홍투산에서 백기족의도움을 받았다. 대인수는 황위에 오르자 바로 사급을 내려 고마움을 표시했다. 백기족은말갈 제부의 습성과 전투력, 병법과 영역에 대해서 소상히 알았다. 그들이 선봉에서면 말갈을 토벌하는 데 한결 수월할 것이다.

"옆으로 길게 버들 방천이 있습니다. 밤바람에 버들가지가 흔들리고 먹구름은 달빛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뒤에는 울창한 수림이막아섰습니다. 적은 병법에 능하고 용맹합니다. 복병을 숨기고 기습전을 감행하면 막을 길이 없습니다."

가소계가 말하는 버들 방천은 산자락을타고 휘돌았다. 개울을 따라 버드나무가 길게 늘어서 있어서 그 사이로 적이 접근할수도 있는형세였다. 그러나 무사히 아군이진을 친 곳에 당도했다는 안도감에 계수랑의 눈에는 그것이 들어오지 않았다.

"저는 계수랑 장군 수하인 가소계라 합니다."방성통곡하는 연유라도 있는가?""제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어리석음으로 우리 군사들이 무리죽음을 당한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사로잡혔으니 소장이 할 수 있는 게 먼저간 군사들을위해 통곡으로 제사를 지내는것뿐입니다."

양적중은 칼을 빼들었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바람을 가르며 보검이 가소계를 쓰러뜨렸다. 축 늘어진 가소계를내려다보는 양적중의 눈가에 웃음이 질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뜬 가소계가 무릎을 꿇고 소리 높여 말했다. "소장을수치스럽게 한 것입니다. 장수가 칼등에 맞고 혼절했다 깼으니 이런 수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적진을 은밀히 살피고 돌아온 정첩들은달구의 상황을 상세히 고했다. 적의 정세를정밀하게 살핀 대인수는 군사들을 전광석화같은기개로 짓쳐나가게 했다. 이미 적진에서도 발해 황제가 친정한 것을 알았다.

달구 장수들은 군졸을 독려하여 성문을열고 나왔다. 최후 결사를 각오한 출정이었다. 그러나 이미 적의 항전을 예견한 발해 군사들이창검으로 사정없이 도륙하니견디지 못한 달구군은 가까스로 혈로를 뚫고 우측 산으로 도망쳤다.

장검 한번 휘두르지 않은 황제 대인수가 군사를 거느리고입성했다. 달구 대수령 올아고와 수령들은오라에 묶인 채 대인수 앞에무릎을 꿇었다

"신의 죄는 죽어 마땅하옵니다. 당나라꾐에 빠져 폐하께 대역죄를 지었사옵니다.살려주시면 사력을 다해 충성하겠사옵니다."
올아고는 땅바닥에 코를 박고 목숨을 구걸했다.

정서대장군 양적중은 황제의 명을 받아성문 밖에 형장을 차리고 대수령 올아고와휘하 수령 가운데 발해 백성을 잔혹하게 죽인 자를골라 오라를 지었다. 올아고의 두아들도 아버지보다 더 악랄한 짓을 했기에함께 형장으로 끌려나왔다.

"참하라!"대장군의 부월이 허공을 갈랐다. 그들의목숨이 칼날 아래 저승으로 떨어졌다. 성안에 있던 달구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올아고와 그 휘하 수령들은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이제 철리를 평정하겠다. 철리는 흑수와 이웃하여 그 흉맹이 흑수에 버금가니 신중해야 한다. 신속하게 토벌하되 장졸과 백성은죽이지 말고 수령은 반드시 죽여라.수령이 도망치면 끝까지 추격해 목을베라!"

대인수의 명에 따라 성을 빼앗고 고을을 점령해도 백성과 장졸들은 죽이지 않았다. 대신 수령 중에 흉맹한 자는 반드시참수했다. 장졸들은 도망가도 쫓지 않았다. 병장기와 갑옷, 군마와 군복은 빼앗아도 양곡은 빼앗지 않았다. 말갈 부녀자를 겁간하지 못하게 했고오히려 양곡과 옷감을 나누어주었다.

대인수는 항복한 말갈 수령을 불러 칙서를 쥐어 철리의 대수령 실다몽과 금하구에게 보냈다. 항복하면 살려주겠지만 거역하면처절하게 도륙하고 모든 고을과 성을 불태우겠다는 최후통첩이었다.

실다몽과 금하구는 스스로 오라에 묶인 채 머리를 풀고 맨발로 수령과 장수들을 거느린 채 대인수 앞으로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항복을 선언하며살려줄 것을 간청했다. 이들은 철리 벌을가득 메운 발해 대군의 장엄한 기치에 기가질렸다. 달구 대수령과 수령들을•철저히 도륙하고 흑수를 도와 전장에 나섰던 철리 수령들 또한 가차 없이 참수 당한 것을 이미알았다. 처음부터 발해군과•전면전으로는승산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무혈입성한 대인수는 대장군 두황련을장사로 삼아 철리부를 감독케 하고 사타진에게 군사를 주어 흑수 지경에 나아가 적정을 탐지케했다. 그리고 군사를 거두어 환궁을 공표했다

대인수는 출병했던 군사 가운데 둔전병을 뽑아 서쪽으로 진병하게 했다. 이는 다분히 당나라를 의식한 것이다. 번진을 토평하고제나라까지 멸망시켰으니 당나라는당연히 발해를 넘볼 것이다.

뱃머리가 노들섬에 닿자 멀리 암자에서사람들이 달려왔다."정진중이라 저녁 공양 때가 아니면 나오지 않을 것이옵니다."나이든승려가 암자 뒤편 토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신작과 난타뿐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토굴에서 정진하여 불러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황제가 행차하면 마땅히 나와서 알현해야 하는데 그들은 당당했다."정진을 훼방했으니 스님께서 널리 헤아려주시오."

저녁때가 되어서야 토굴에서 참선하던 신작과 난타가 급한 걸음으로 황제를알현했다. 대인수는 좌우를 물리고 마주 앉았다."천하를살펴보니 짐의 능력이 참으로보잘것 없었소. 짐에게 바른말로 논힐하고짐의 모자람을 채워줄 현사가 절실하오."황제가 몸소 먼 길을찾아와 태사 자리를 권하니, 신작은 차마 거절하기 어려웠다

"짐이 작정한 것이요, 이미 옥음을 내렸는데 어찌 번복하겠소? 짐이 부덕하여 마땅히 스승을 모셔야 하고 황자와 공주들에게도스승이 필요하오." "신은 한 번도 정사에 참여한 적 없는 백면서생일 뿐이옵니다. 오랫동안 조정대사를 논한 대소신료들에게 염치가없사옵니다. 통촉하옵소서."

"신은 3공의 아랫자리인 사공이면 족하옵니다.""그러면 난타는 어찌 귀하게 쓸 수 있소이까?" "난타는 의술과 마의술에 뛰어나니태의로 삼고 장차 태복경을 맡기옵소서."

"사공은 짐과 황실의 스승이 될 수 없소.그러니 태보로 봉하겠소."이렇게 해서 대인수는 신작을 태보로, 난타를 태의로 명했다.

대인수가 여세를 몰아 곧장 흑수를 토평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흑수를 공격하는 사이 당나라가 변경을 침노할 것을걱정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흉맹한 흑수와 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군사를 잃을까 하는 근심에서였다.

"흑수와 월희 군사보다 한 발 빠른 기동력과 작고 가벼우면서도 멀리 나가는 활과간편한 양식이 필요하옵니다. 또한 가볍지만 튼실한투구도 만들어야 하옵니다." "과연 짐을 가르칠 만한 스승이오."대인수는 뒤엉킨 실타래가 풀어진 듯 기뻐했다.

"지금까지는 고구려의 전술과 편제로 군사를 다스렸사옵니다. 그러나 기마병 중심으로 기습하고 도주하는 흑수 군사와 응전하기•위해서는 5병제를 버리고 10진제로군대를 편제해야 하옵니다. 즉 십, 백, 천,만으로 구별하면 통솔하기 쉽사옵니다."

"통솔하는 무리가 많으면 명령을 내리는자도 많기 마련이옵니다. 명령하는 자가 많으면 규율에 얽매여 공수가 느려지고 손발이 묶여적의 침공을 받게 되옵니다. 지금까지는 장수가 뒤에서 군사를 몰았지만 앞으로는 장수가 앞장서서 군사를 이끌어야하옵니다."

"기마병의 반이나 정진대가 되어야하오?"어느 병법에도 나와 있지 않는 전술로기마병의 반수가 특공대 역할을 하는 것이기이했다.

"전투식량 만드는 묘책이 무엇이오?""짐승을 잡아 털을 벗기고 잘게 저며 햇빛에 말렸다가 빻으면 양이 얼마 되지 않사옵니다. 그것을 짐승의 오줌보 말린 것에넣으면 좋은 전투식량이 되옵니다. 또한 곡물을 가루 내어 가지고 다니면 그 역시 좋은전투식량이옵니다."

대인수는 난타의 등을 두드렸다."그대의 손에 발해의 운명이 걸렸음을명심하라. 짐이 죽어 천 마리의 말로 환생할 수만 있다면 발해군마로 태어나 저 광활한 북방을 한없이 달리고 싶도다."

대인수는 가볍고 탄력이 좋은 각궁을 들어 시위를 당겼다. 살의 허릿간 길이와 촉의 무게, 궁깃의 넓이와 오늬의 크기를 매일 바꾸어최대 사거리를 모색하기 때문에수많은 활과 화살이 쌓여 있었다. 대인수가표적을 향해 날린 화살은 자로 잰 듯 표적을 뚫었다. 각궁은무려 백척이나 날았다.사거리를 확인한 대인수는 크게 기뻐하며궁공들에게 사급을 내렸다.

신축(821)년 초가을, 드디어 발해 황제친정군이 사열을 마치고 북방을 향해 진병했다. 이하앙과 장두불이 정예부대를 이끌고 앞서나가고, 전경채의 주홍기사단이 황제를 옹위하고 드넓은 벌을 내달렸다.

지난 전투 때만 해도 황제는 후군을 맡아 전황을 살펴 군사를 투입하고, 이번 전투는 북방 강자 흑수를 상대하기에 황제가몸소 적과응전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발해 친정군이 흑수전에 나섰다는 급보를 받은 당나라 조정은 달구와 철리가 힘없이 무너지자 요서를 방비하는 한편 흑수를지원했다.
그래서 많은 운전금과 군마와 병장기를 보냈고, 병법에 능하고 신통술까지부린다는 장수왕시성을 흑수의 장사로 삼아 흑수 군사를돕게 했다.

"예부터 소각(작은 나팔) 소리는 용의 울음소리 같다고 했사옵니다. 적을 교란하기위해 소각과 전고를 삽시에 아우성치게 하면 적의군마는 놀라 날뛸 것이옵니다. 말은 꾀가 많지만 겁이 많은 짐승이어서 폐하의 뜻대로 부릴 수 있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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