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나라와 등주 일원에 나가 있던 세작과정탐병으로부터 급보를 받은 발해 조정은전전긍긍했다. 제나라가 패망하면 군사 요충지등주와 영주에서 당나라 군사가 동시에 발해를 공격할 수 있었다. 말갈의 할거도 심상찮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제나라를 위해군사를 일으키자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런 주장을 했다가 고역을 치른 신료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급보가 궁궐로 들이닥친 것은 자시가 막지날 무렵이었다. 옥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던 대인수가 탈옥했다는 것이었다. 연달아금군대장군 오작청이 괴한의 손에 목이 달아나고, 경기군 대총관 왕경례도 독살에 맞아 사경을 헤맨다는 흉보가 날아들었다.

그때 오태후앞에 칼을 들고 썩 나선 것은 놀랍게도 황후 고운목이었다. "무엇들 하느냐? 어서 참하라!"오태후는 호위하는 시종과시위에게 호통쳤다."이미 황궁은 의분한 신료와 군사들에게포위되었사옵니다. 황상을 시해한 죄상을숨길 수 없는데 어찌 용상을탐내시옵니까?"고운목은 칼날을 태후에게 겨냥한 채 목청을 세웠다

"네 이놈!"오태후가 눈을 부릅뜨고 손가락질하며소리를 지른 것은 대인수를 호위하는 대장군 묘정수 때문이었다. 아끼고 따르던심복이요, 밤에 침궁으로 불러들였던 남총이 아니던가. 대인수를 잡아들인 공을 세워 개국백으로 봉작까지 하지 않았던가. 묘정수가대인수를 호위함은 진작부터 밀통했다는뜻이었다.

낭자 시절, 고운목은 발해 사가의 낭자들처럼 시문을 닦고 무예에도 출중한 솜씨를 뽐냈다. 늙은 태후쯤은 가볍게 목을 칠 수 있는솜씨였다.고운목은 기어이 칼을 휘둘렀다. 오태후의 틀어 올린 머리채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무술(818)년 7월 스무아흐레, 황위에 오른 대인수는 연호를 건흥으로 고치고, 선제대명충의 시호를 간황제, 묘호를 철종으로했다. 이로써 황위는 개국 황제 대조영의 직계손에서 대야발의 후손으로 이어졌다. 대인수가 황친국척의 환대와 백관의 환호를 받으며등극하자 나라를 그르친 오태후를 효수 경중하자는 상소가 끊이질 않았다.

대인수의 옥음은 부복해 있는 신하들 가슴에 시원한 바람이 되었다."죄인 오귀남이 섭정을 하매 경들 또한부화뇌동하여 바른 정사를펴지 못했도다.짐은 지난 죄를 모두 묻고 오직 창민을 편케 하겠노라."어느 누구도 황제의 옥음에 반대할 수없었다. 고개가 더 숙여질뿐이었다.

대인수가 황위에 오르자 사직은 안정되고 민심은 빠르게 안돈되었다. 그러나 바다건너 제나라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시시각각위태로웠다. 당나라의 다음 행보가 어디인지를 뻔히 알기에 대인수는 바다 건너 소식에 귀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쌀쌀한 겨울날씨가 대륙을 추위에 떨게 하던 날, 이사도는 부하 장수 유오의 반란으로 사로잡히고 말았다. 사력을다해 적과 싸워도힘이 부칠 텐데 동족의배반은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다.

유오는 이사도의 목을 베어 위박절도사전홍정에게 바쳤다. 이사도가 재위한 지 13년이요, 이정기가 치청 왕국을 세운 지 55년만이었다. 고구려 후손이 세운 제나라가당나라의 요충지를 50여 년 동안 지배한채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고구려 후손 제나라가 멸망하고 제왕이사도가 승하했도다. 이에 우리가 동맹의굳은 약조를 지키지 못한 죄과를 엎드려 빌어야하리라. 발해의 사직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기꺼이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를 공격했어야 옳았도다. 우리를 믿고 기다렸을 이사도의절박한 심정을 생각하면 어찌 가슴이 시리지 않겠느냐?"

대인수는 병법에도 밝아서 친히 징과 북, 크고 작은 깃발을 들어 나아가고 물러서며앉고 일어서는 절도를 밝혀, 군사들의 마음과행동을 모으는 데 능했다. 또한 친히 창검궁시로 찌르고 베고 쏘고 말 달리는 시범을 보임으로써 군사들의 마음을 하나로 뭉쳐 조련에임했다.

대신덕을 태자로 봉하면서 대인수는 문무 제신과 각처에 있는 장수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집결한 장수들에게 사급을 내려 그들의노고를 진무하니 감격하지 않는 자가없었다.

"북동쪽의 흉맹한 흑수를 먼저 토벌해야하지만 북서쪽으로 진병하는 것은 말갈을제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나라를 놀라게 하기위함이다. 짐이 군사를 이끌고 친정하면 당나라가 함부로 준동하지 못할 것이다. 적의 세작들이 사방에서 지켜보고 있음을 잊지말라."

"흑수의 사주를 받은 철리군이 부여부쪽으로 진격하고 있습니다."양적중은 한차례 몸을 떨고는 칼끝으로동쪽을 가리켰다. 대장군이하앙의 눈빛도금세 불꽃이 튈 듯했다.

이튿날 새벽, 철리 군사 2만 군이 양산산자락을 거침없이 공격했다. 발해군 기치가 바람을 가르자 함성이 협곡에 메아리쳤다. 기세오른 철리군은 올망개의 진두지휘로 맞함성을 질렀다. 하늘이 뚫리고 땅이 갈라지는 듯한 함성이 천지를 뒤흔드는데 대도를 든이하앙이말고삐를 쥐고 적진으로 달렸다. 울분이그의 손끝을 타고 칼날로 뻗치는 게 느껴졌다. 올망개도 말 잔등 위에서 장창을세운 채 솟구친 자세로 진격해왔다.

"우리가 황상의 성덕을 받드는 게 당연합니다."화달이 웃는 낯으로 말을 받았다. 그랬다. 지난 날 대인수가 순람 길에 벼랑에서떨어져 크게 다쳤을 때 홍투산에서 백기족의도움을 받았다. 대인수는 황위에 오르자 바로 사급을 내려 고마움을 표시했다. 백기족은말갈 제부의 습성과 전투력, 병법과 영역에 대해서 소상히 알았다. 그들이 선봉에서면 말갈을 토벌하는 데 한결 수월할 것이다.

"옆으로 길게 버들 방천이 있습니다. 밤바람에 버들가지가 흔들리고 먹구름은 달빛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뒤에는 울창한 수림이막아섰습니다. 적은 병법에 능하고 용맹합니다. 복병을 숨기고 기습전을 감행하면 막을 길이 없습니다."

가소계가 말하는 버들 방천은 산자락을타고 휘돌았다. 개울을 따라 버드나무가 길게 늘어서 있어서 그 사이로 적이 접근할수도 있는형세였다. 그러나 무사히 아군이진을 친 곳에 당도했다는 안도감에 계수랑의 눈에는 그것이 들어오지 않았다.

"저는 계수랑 장군 수하인 가소계라 합니다."방성통곡하는 연유라도 있는가?""제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어리석음으로 우리 군사들이 무리죽음을 당한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사로잡혔으니 소장이 할 수 있는 게 먼저간 군사들을위해 통곡으로 제사를 지내는것뿐입니다."

양적중은 칼을 빼들었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바람을 가르며 보검이 가소계를 쓰러뜨렸다. 축 늘어진 가소계를내려다보는 양적중의 눈가에 웃음이 질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뜬 가소계가 무릎을 꿇고 소리 높여 말했다. "소장을수치스럽게 한 것입니다. 장수가 칼등에 맞고 혼절했다 깼으니 이런 수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적진을 은밀히 살피고 돌아온 정첩들은달구의 상황을 상세히 고했다. 적의 정세를정밀하게 살핀 대인수는 군사들을 전광석화같은기개로 짓쳐나가게 했다. 이미 적진에서도 발해 황제가 친정한 것을 알았다.

달구 장수들은 군졸을 독려하여 성문을열고 나왔다. 최후 결사를 각오한 출정이었다. 그러나 이미 적의 항전을 예견한 발해 군사들이창검으로 사정없이 도륙하니견디지 못한 달구군은 가까스로 혈로를 뚫고 우측 산으로 도망쳤다.

장검 한번 휘두르지 않은 황제 대인수가 군사를 거느리고입성했다. 달구 대수령 올아고와 수령들은오라에 묶인 채 대인수 앞에무릎을 꿇었다

"신의 죄는 죽어 마땅하옵니다. 당나라꾐에 빠져 폐하께 대역죄를 지었사옵니다.살려주시면 사력을 다해 충성하겠사옵니다."
올아고는 땅바닥에 코를 박고 목숨을 구걸했다.

정서대장군 양적중은 황제의 명을 받아성문 밖에 형장을 차리고 대수령 올아고와휘하 수령 가운데 발해 백성을 잔혹하게 죽인 자를골라 오라를 지었다. 올아고의 두아들도 아버지보다 더 악랄한 짓을 했기에함께 형장으로 끌려나왔다.

"참하라!"대장군의 부월이 허공을 갈랐다. 그들의목숨이 칼날 아래 저승으로 떨어졌다. 성안에 있던 달구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올아고와 그 휘하 수령들은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이제 철리를 평정하겠다. 철리는 흑수와 이웃하여 그 흉맹이 흑수에 버금가니 신중해야 한다. 신속하게 토벌하되 장졸과 백성은죽이지 말고 수령은 반드시 죽여라.수령이 도망치면 끝까지 추격해 목을베라!"

대인수의 명에 따라 성을 빼앗고 고을을 점령해도 백성과 장졸들은 죽이지 않았다. 대신 수령 중에 흉맹한 자는 반드시참수했다. 장졸들은 도망가도 쫓지 않았다. 병장기와 갑옷, 군마와 군복은 빼앗아도 양곡은 빼앗지 않았다. 말갈 부녀자를 겁간하지 못하게 했고오히려 양곡과 옷감을 나누어주었다.

대인수는 항복한 말갈 수령을 불러 칙서를 쥐어 철리의 대수령 실다몽과 금하구에게 보냈다. 항복하면 살려주겠지만 거역하면처절하게 도륙하고 모든 고을과 성을 불태우겠다는 최후통첩이었다.

실다몽과 금하구는 스스로 오라에 묶인 채 머리를 풀고 맨발로 수령과 장수들을 거느린 채 대인수 앞으로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항복을 선언하며살려줄 것을 간청했다. 이들은 철리 벌을가득 메운 발해 대군의 장엄한 기치에 기가질렸다. 달구 대수령과 수령들을•철저히 도륙하고 흑수를 도와 전장에 나섰던 철리 수령들 또한 가차 없이 참수 당한 것을 이미알았다. 처음부터 발해군과•전면전으로는승산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무혈입성한 대인수는 대장군 두황련을장사로 삼아 철리부를 감독케 하고 사타진에게 군사를 주어 흑수 지경에 나아가 적정을 탐지케했다. 그리고 군사를 거두어 환궁을 공표했다

대인수는 출병했던 군사 가운데 둔전병을 뽑아 서쪽으로 진병하게 했다. 이는 다분히 당나라를 의식한 것이다. 번진을 토평하고제나라까지 멸망시켰으니 당나라는당연히 발해를 넘볼 것이다.

뱃머리가 노들섬에 닿자 멀리 암자에서사람들이 달려왔다."정진중이라 저녁 공양 때가 아니면 나오지 않을 것이옵니다."나이든승려가 암자 뒤편 토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신작과 난타뿐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토굴에서 정진하여 불러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황제가 행차하면 마땅히 나와서 알현해야 하는데 그들은 당당했다."정진을 훼방했으니 스님께서 널리 헤아려주시오."

저녁때가 되어서야 토굴에서 참선하던 신작과 난타가 급한 걸음으로 황제를알현했다. 대인수는 좌우를 물리고 마주 앉았다."천하를살펴보니 짐의 능력이 참으로보잘것 없었소. 짐에게 바른말로 논힐하고짐의 모자람을 채워줄 현사가 절실하오."황제가 몸소 먼 길을찾아와 태사 자리를 권하니, 신작은 차마 거절하기 어려웠다

"짐이 작정한 것이요, 이미 옥음을 내렸는데 어찌 번복하겠소? 짐이 부덕하여 마땅히 스승을 모셔야 하고 황자와 공주들에게도스승이 필요하오." "신은 한 번도 정사에 참여한 적 없는 백면서생일 뿐이옵니다. 오랫동안 조정대사를 논한 대소신료들에게 염치가없사옵니다. 통촉하옵소서."

"신은 3공의 아랫자리인 사공이면 족하옵니다.""그러면 난타는 어찌 귀하게 쓸 수 있소이까?" "난타는 의술과 마의술에 뛰어나니태의로 삼고 장차 태복경을 맡기옵소서."

"사공은 짐과 황실의 스승이 될 수 없소.그러니 태보로 봉하겠소."이렇게 해서 대인수는 신작을 태보로, 난타를 태의로 명했다.

대인수가 여세를 몰아 곧장 흑수를 토평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흑수를 공격하는 사이 당나라가 변경을 침노할 것을걱정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흉맹한 흑수와 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군사를 잃을까 하는 근심에서였다.

"흑수와 월희 군사보다 한 발 빠른 기동력과 작고 가벼우면서도 멀리 나가는 활과간편한 양식이 필요하옵니다. 또한 가볍지만 튼실한투구도 만들어야 하옵니다." "과연 짐을 가르칠 만한 스승이오."대인수는 뒤엉킨 실타래가 풀어진 듯 기뻐했다.

"지금까지는 고구려의 전술과 편제로 군사를 다스렸사옵니다. 그러나 기마병 중심으로 기습하고 도주하는 흑수 군사와 응전하기•위해서는 5병제를 버리고 10진제로군대를 편제해야 하옵니다. 즉 십, 백, 천,만으로 구별하면 통솔하기 쉽사옵니다."

"통솔하는 무리가 많으면 명령을 내리는자도 많기 마련이옵니다. 명령하는 자가 많으면 규율에 얽매여 공수가 느려지고 손발이 묶여적의 침공을 받게 되옵니다. 지금까지는 장수가 뒤에서 군사를 몰았지만 앞으로는 장수가 앞장서서 군사를 이끌어야하옵니다."

"기마병의 반이나 정진대가 되어야하오?"어느 병법에도 나와 있지 않는 전술로기마병의 반수가 특공대 역할을 하는 것이기이했다.

"전투식량 만드는 묘책이 무엇이오?""짐승을 잡아 털을 벗기고 잘게 저며 햇빛에 말렸다가 빻으면 양이 얼마 되지 않사옵니다. 그것을 짐승의 오줌보 말린 것에넣으면 좋은 전투식량이 되옵니다. 또한 곡물을 가루 내어 가지고 다니면 그 역시 좋은전투식량이옵니다."

대인수는 난타의 등을 두드렸다."그대의 손에 발해의 운명이 걸렸음을명심하라. 짐이 죽어 천 마리의 말로 환생할 수만 있다면 발해군마로 태어나 저 광활한 북방을 한없이 달리고 싶도다."

대인수는 가볍고 탄력이 좋은 각궁을 들어 시위를 당겼다. 살의 허릿간 길이와 촉의 무게, 궁깃의 넓이와 오늬의 크기를 매일 바꾸어최대 사거리를 모색하기 때문에수많은 활과 화살이 쌓여 있었다. 대인수가표적을 향해 날린 화살은 자로 잰 듯 표적을 뚫었다. 각궁은무려 백척이나 날았다.사거리를 확인한 대인수는 크게 기뻐하며궁공들에게 사급을 내렸다.

신축(821)년 초가을, 드디어 발해 황제친정군이 사열을 마치고 북방을 향해 진병했다. 이하앙과 장두불이 정예부대를 이끌고 앞서나가고, 전경채의 주홍기사단이 황제를 옹위하고 드넓은 벌을 내달렸다.

지난 전투 때만 해도 황제는 후군을 맡아 전황을 살펴 군사를 투입하고, 이번 전투는 북방 강자 흑수를 상대하기에 황제가몸소 적과응전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발해 친정군이 흑수전에 나섰다는 급보를 받은 당나라 조정은 달구와 철리가 힘없이 무너지자 요서를 방비하는 한편 흑수를지원했다.
그래서 많은 운전금과 군마와 병장기를 보냈고, 병법에 능하고 신통술까지부린다는 장수왕시성을 흑수의 장사로 삼아 흑수 군사를돕게 했다.

"예부터 소각(작은 나팔) 소리는 용의 울음소리 같다고 했사옵니다. 적을 교란하기위해 소각과 전고를 삽시에 아우성치게 하면 적의군마는 놀라 날뛸 것이옵니다. 말은 꾀가 많지만 겁이 많은 짐승이어서 폐하의 뜻대로 부릴 수 있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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