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 홀한성을 점령한 대창해는 태자 대신덕을 동궁에 가두고 서궁을 봉쇄했다. 그러면서도 대신덕과 황태후 고운목의 저항이 큰 걱정이었다. 대가 약한 대신덕은 순순히 국새를 내놓고 동궁에 갇혔지만, 고태후는 끝까지 굴종하지 않았다
고태후는 교지를 한눈에 읽고 찢어버렸다. 창검을 든 군사들의 서슬 퍼런 눈초리에도 전혀 굴할 기세가 아니었다. 참다 못한 대창해는 호위 군사를 대동하고 서궁으로 갔다. 고태후가 갇혀 있는 태후궁은 한 팔 간격으로 무장한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못할 만큼 삼엄했다.
고태후는 가볍게 웃었다. "잘 새겨들으시오. 여인이지만 칼날이두려워 초목이 모두 적군으로 보일 만큼 어리석지는 않소이다. 비록 힘이 모자라 역신의 손에 죽는다면 기꺼이 죽으리다. 구천에올라 모든 선제들께 고하고 악귀가 되어 역신의 무리를 참하겠소."
"초륜하지 못한 자가 제위에 오르면 나라가 어지럽고 백성이 곤궁해지는 법이니부디 역신의 너울을 벗겨내고 과욕을 삼가시오." 칼을 받아야 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고태후의 표정은 너무나 대범했다. 대창해는 칼을 치켜들었다.
"불자라면 지켜야 할 금계가 있소이다.중생을 죽이지 말라고 했는데 그대는 황제의 신하와 군사들을 죽이고 범궐하여 태후마저 죽이려 하니 첫 번째 금계를 어겼소.훔치지 말라 했거늘 언감생심 황위를 훔치려 하고 사직을 찬탈하려 하니 두 번째 금계를 어겼소. 또한 거짓말을 하지 말라 했는데 황상께서 붕어했다고 거짓을 말하고천하가 역적에게 굴종했다는 헛소리를 했으니 세 번째 금계를 어겼소."
"내게 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황상뿐이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태자를 풀어주고 대전에 엎드려 석고대죄하시오. 그러면 죽음은 면할 것이오. 황상께서 진격하면 도성이 삽시에 조아릴 것을 왜 모르시오."
황친과 신료들이 황제를싫어할망정 태후는 받들었다. 후덕해서 황친들을 꼼꼼히 챙긴 탓도 있지만 성정이 다사로워 두루 화친했기 때문이다. 지금 태후를 참하면 황친들이 등을 돌릴 수도 있었다
동경용원부도독 고좌민과 장령부도독 임기록, 솔빈부도독 최가림과 휘하 변방 장수들이 뜻밖에 황명을 받들어 토평군에 가담했다는 소식이 대창해에게 전해졌다. 뿐만아니라 변방의 도독, 자사, 현승과 장수들이 대창해에게 군사를 증원해 주지 않기로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태자의 교지만 있어도 대인수를 폐하고계위할 수 있습니다. 남쪽에서는 황제의 친정군이 달려오고 궁성에는 태자가 버티고있습니다. 이참에 태자를 주살하고 등극해야 합니다."
물론 토평군에는 천하명장이라는 장수와충성스런 군사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타나면 포악한 짐승도 놀란다는 주홍기사단과 황제를 호위하는 시위와 금군들이 즐비하지만 모두 합쳐야 수천 명에 불과했다. 도성에 남겨두었던 금군은 반란군에게 제압당했으니 군사력으로 본다면 반란군의 군세가 훨씬 우세했다.
"폐황 대인수를 사로잡거나 참하지 않고는 계위할 수 없습니다. 만약 대인수가 신기한 전술로 도성을 함락하면 현책이란 없습니다. 우리 모두 역적이 되고 멸문지화당할 것을 왜 염두에 두지 않습니까? 대군께서 황위에 오르시려면 군사를 휘몰고 남정하여 대인수를 주멸해야 합니다. 그렇지않으면 대군께서는 결코 천심을 얻지 못합니다. 대인수가 살아 있는 한 등극할 수 없습니다." 원로대신이자 황친인 대신명이 호통치듯말했다.
"자고로 사람이 많으면 하늘도 이긴다고했소. 우리가 남정하는 사이에 대인수의 군사가 도성을 침입할 수 있으니 백성과 노비를 조련시켜 도성을 사수하면 보다 많은 군사를 이끌고 대인수를 공격할 수 있소." 대창해는 하루빨리 대인수를 물리치고황위에 오르기 위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대곤명을 홀한성 수성 대총관으로 명했으니 귀신이라도 준동하지 못하오." 대곤명은 황친이지만 서자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하고도 낮은 관작으로 비탄에 젖어 살던 자였다. 대인수는 그의 뛰어난 무예와 용맹함을 높이 사 전투마다 선봉을 삼았고, 혁혁한 공을 세울 때마다 여러 차례초천하여 대장군으로 삼았다. 그에게 초천장군이란 별호가 붙은 것도 그런 사연이었다.
대곤명은 황제의 총신이었지만 대창해가 반란을 일으키자 선뜻 가담했다. 대창해가 황위에 오르면 무관으로서 더 이상 오를데가 없는 진단대장군 겸 태복경에 봉하기로 약조했기 때문이다.
반란의 주역들은 대곤명을 선봉에 세우지 않았다. 그가 큰 공을 세우는 것도 싫었고, 혹시나 군사를 이끌고 변심할 가능성도 있었다.
태자 대신덕이 그의 아들 대이진과 함께볼모가 되었으니 자칫하면 사직이 어지러워질 수 있는 중대 고비였다. "사직과 백성의 안위를 위해 어느 정도의 참화를 각오해야 하오." 대인수는 이미 태자와 황실의 참화를 각오하고라도 사직의 안녕을 도모할 작정이었다. 무서운 결심이었다.
"폐하,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 있나이다. 시일이 걸리더라도 반란군을 평정하면 폐하께서 을사유신을 제대로 펼칠 수 있나이다. 어쩌면 하늘이 폐하의 성덕을 크게일굴 수 있게 시련을 준 듯하옵니다." 신작의 위로가 대인수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는 없었다. 대인수는 단숨에 짓쳐들어 역적의 무리를 단칼에 베고 싶은 분노를참을 수 없었다.
"파저라는 게 있사옵니다. 신은 물결 밑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일 뿐이옵니다. 좋은세상이 가까워졌으니 옥체를 보전하옵소서." 대곤명은 큰절을 올리고 일어섰다. 당당한 체구에 훤칠한 장부의 기개가 느껴지는장수였다. 대곤명이 돌아가자 고운목은 혼잣소리로 파저라는 말을 되새김질했다. 물결의 밑을 파저라고 했다. 그렇다면 물결 밑에서헤엄치는 물고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뭔가 예사롭지 않은 여운에 끌려 곰곰이 새겨보았지만 뚜렷이 잡히는 게 없었다.
"장수 대곤명이 거느린 군사는 거개가노비와 부곡이 아니면 양민이옵니다. 그들은 폐하를 흠숭하고 있나이다. 영리한 대곤명이 어찌 그것을 모르겠나이까? 때를 기다리는 것 같으니 마마께서 모른 체하시고옥체를 보전하옵소서." 대사연은 귀띔하듯 말하고 서둘러 돌아갔다. 감시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황상의 성덕을 따르는 게 하늘의 뜻이요, 역적을 따르는 게 백성을 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분하여 대장군을참하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인의를 버린 대장군은 장수가 아니라 혼신일 뿐입니다." 순간 대곤명은 사방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대장군의 수급을 하늘 높이 매달고 역적의 무리를 모조리 베고 성문을 열겠습니다. 그리고 대창해를 주살하겠습니다. 여봐라! 대문을 열고 횃불을 올려라!" 대도만덕이 소리쳤다. 그러자 대문이 활짝 열렸다. 횃불이 앞뒤 좌우로 번지는데궁성이 온통 군사로 에워싸인 듯했다. 대곤명은 이미 대도만덕이 도성을 장악했다는걸 알았다.
대곤명의 목을 벤 대도만덕은 밀지를 주워 읽었다. 황제의 밀지가 분명했다. 대곤명은 한순간의 잘못을 뉘우치고 첩을 올려충성을 맹약한 것 같았다. 대도만덕은 눈앞이 캄캄했다. 경솔했다는 걸 알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역적들을 한 놈도 살려두지 말라. 남김없이 도륙하라!" 대도만덕의 외침은 분노로 가득했다. 끝까지 지켰어야 할 태자가 주살되었으니 원통함에 가슴이 찢기는 듯했다. 분노한 군사들은 닥치는 대로 도망치는 역적들을 찾아목을 베었다. 새벽녘에 대도만덕은 군사를 이끌고 태후 앞에 부복하고 죄를 청했다.
"태자의 죽음이 나라를 잃은 것보다 더슬프단 말이냐?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라 역적을 토평하고 백성들을 진무할 때다.출진 채비를 서두르라!"
반란군의 모주인 왕축경은 갑자기 불어난 도성 수비군의 허실을 대번에 눈치챘다. "공성무기 없이 공격하기에는 우리 군사의 손실이 너무 크지 않겠느냐?" "노비와 부곡은 보잘것없어서 처음에는짐승처럼 용맹하지만 기가 꺾이면 놀란 짐승처럼 도망칩니다. 천 명만 희생시키면 성문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대창해의 수급을 자루에 담아든 대도만덕은 황제 앞에 꿇어 엎드렸다. 대도만덕은무모하게 황궁을 장악하려다가 태자를 시해하게 만든 죄를 청했다. 황제가 그 죄를물으면 천하 없는 공을 세웠더라도 살 길이없었다. "장하고도 장하도다!" 황제의 옥음은 뜻밖이었다. 대도만덕은더 깊이 조아렸다.
대인수는 대사령과 함께 을사년(825)에선포했던 유신을 더욱 강화했다. 그토록 유신을 반대했던 대소신료들도 모두 침묵했다. 대인수는 신작을 태사로 봉하고 을지후문을 태복경 겸 진단대장군으로 삼았다
"이것은 가림토 정음 38자로 오래 전에새긴 듯하옵니다." 누가 새겼고 왜 새겼는지 밝힐 수 있는단서는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가림토 정음38자만 세로로 새겨 있을 뿐이었다. 대인수가 석판을 매만지며 새벽녘에 꾼 꿈을 털어놓자 신작이 해몽을 했다.
대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성들이 책을 읽고 과거를 보려 해도 당문이 아니면가림토인데, 당문은 배우고 쓰기 어렵고,뜻마저 다양해서 익히기 쉽지 않았다. 가림토는 그보다 쉽지만 정음의 수가 많고, 뜻이 오묘해서 시를 짓고 문장을 다듬는 데는적격이지만 양민이 배워 익히기에는 결코쉽지 않았다.
가림토가 제대로 쓰이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족들이 당문을 선호해서 신분을 가르고, 존귀함과 비천함을 구별하려는욕심 때문이었다. 즉, 당문으로 시문을 지으면 지체 높게 생각하고 가림토로 시문을읊으면 서인 취급했다.
"신은 폐하의 성덕을 받아 당나라에 다녀왔사옵니다. 당나라는 조정 안팎이 어지러워 밖으로 눈 돌릴 틈이 없고, 신라 역시김헌창과 김범문의 반란 이후 정세가 어지럽사옵니다. 일본은 여러 해 동안 기궁하여교빙조차 꺼릴 지경이옵니다. 그러나 폐하의 성덕은 사해로 번져 백성들은 근면하고신료들은 충성스럽사옵니다. 어찌 강역이넓고 사람이 많음에 견주겠사옵니까?"
"백제를 침략한 소정방은 국서고를 불태워 조선과 백제 역사를 모두 없앴고, 설인귀는 고구려의 국서고를 불태워 옛 역사와고구려 역사를 없애버렸도다. 선비들이 이를 통탄하지 않으면 모화 선비가 아니고 무엇인고? 선비나 신료들이 우리 역사인 단기고사가 가림토로 쓰였다고 탐독하지 않으니 또한 통분할 일이로다. 오죽하면 황조복이 단기고사를 당문으로 옮겼겠느냐?"
"이미 고구려 때 가림토 문자를 일본에전했도다. 조선 제3대 가륵단군께서 을보륵을 시켜 만들었으니 우리 선조의 숨결이어려 있는 문자가 아니더냐? 지금으로부터3천여 년 전에 창제된 문자이니 흐른 세월만큼이나 잘 갈고 닦아 써야 하도다."
"태평성대를 구가하기 위해서 반드시 문자가 간결하고 쓰기 쉬워야 하도다. 그렇게익힌 문자로 옛 역사를 배워 익히고 앞날을예견하는 지혜를 터득하면 어찌 천하 대국이 되지 않겠는고?"
"본디 가림토는 가림다라고도 불렀사옵니다. 가는 더하고 다는 많아진다는 뜻이옵니다. 즉 수는 더해지면 많아지고 빼면 줄어드는 것인데, 그런 수의 원리를 따르므로삼라만상의 모든 사물을 다 표현할 수 있는문자라는 뜻이옵니다. 이는 곧 천, 지, 인의의미를 글자에 담아 하늘의 소리이든 땅의소리이든 사람의 소리이든 흉내 내지 못하는 게 없사옵니다."
을사유신과 북벌, 당나라를 비롯한 신라와 일본과의 다양한 교역, 해를 이은 풍년,병들고 기궁한 백성들을 나라에서 구휼한덕에 발해 강역은 태평성대를 누렸다.
그런데 황제 대인수가 병상에 누웠다. 온백성이 황제의 쾌유를 빌고 있다는 소식은멀리 당나라 장안까지 날아들었다. 이담의 뒤를 이어 정미(827)년에 계위한당제 이앙은 대인수를 위로하기 위하여 이숭선을 발해 도성으로 보냈다. 이숭선은 병상에 있는 대인수를 알현하고 당나라 황제의 신한을 올렸다. ‘해동성국 대발해.’ 병상에서 대인수는 이앙에게 휘호를 돌려주고, 사신 이숭선을 옥에 가두라고 명했다. 영문 모르는 내시감 임산록이 부복했다.
"발해를 동쪽 바다의 나라라 칭함은 결국 우리를 멸시함이다. 당나라가 세상의 중심이고 우리가 동쪽 바닷가에서 융성한 나라를 가꾸었다는 뜻이 아니더냐? 짐이 당제 이앙에게 해서성국 대당이란 휘호를 보내면 곱게 두 손으로 받겠느냐?" 임산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황공하옵니다." "사신 이숭선을 보름 동안 가두고 풀어주어라. 그리고 품속에 짐의 휘호를 넣어보내라. 그리하면 발해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리니……." 대인수가 내린 휘호에는 해서성국 대당이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명심하여 받들겠사옵니다."
"폐하의 성지를 받들어 선조들이 남겨준소리글자 가림토 정음 38자를 23자로 줄여무지한 백성들이라도 익히기 쉽고 쓰기 편케 했사옵니다. 오로지 폐하의 훈유를 받든것이옵니다." 대인수는 누운 채 손을 들었다 놓았다. "경들의 수고로움에 경탄하도다. 정음스물석 자를 발해 문자로 삼을 테니 부디백성들을 고루 편케 하라."
"입술은 반쯤 열면서 내는 소리 ㅁ, 혀끝을 꼬부리면서 내는 소리 ㄴ, 숨을 아랫니쪽으로 내뿜으며 내는 소리 ∧, 입천장과코로 숨을 내쉬면서 내는 소리 ㆆ, 숨을 입천장으로 몰아내는 소리 ㄱ, 입천장에 혀끝을 대었다 떼면서 내는 소리ㅿ, 입천장에아랫니를 대고 숨을 내보내며 내는 소리ㅈ." 양지강의 목소리가 끊겼다. 황제 대인수는 그토록 열망하던 발해 문자 소리를 다듣지 못하고 승하했다. 때는 경술년 섣달스무닷새, 건흥 12년이었다. 새해를 며칠앞두고 백성들에게 성인으로 추앙받던 대인수는 숨을 거두었다.
대인수의 을사유신에 맞섰던 황친은 물론이요, 대소신료와 만백성은 섣달 그믐께승하한 황제를 숭례하느라 모두 소복하여설을 맞았으며, 대인수를 위해 제례상에 따로 술 한 잔을 올렸다. 황제의 붕어를 천하가 그토록 슬퍼하고 치세를 흠숭할지 대인수는 알지 못했다. 대인수의 뒤를 이어 맏손자 대이진이 계위했다. 선제 묘호를 성종으로, 시호를 선황제로 하고, 신해(831)년 정초에 발해 제11대 황제로 등극한 대이진은 연호를 함화로 바꾸었다. 반란군에게 아버지 대신덕을잃은 그는 나이가 어린데다 성품도 유약했다.
발해 문자 정음 23자는 선제의 성덕과큰 베풂으로 탄생했다 하여 백성들 사이에선문으로 불리었다. 대인수의 시호가 선황제인 탓도 있지만 백성들은 대인수의 성덕을 큰 베풂으로 여겼다. 선문을 발해 강역의 학당마다 가르치고, 도성에 있는 주자감에서 가르쳤다.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해서글공부하는 백성들이 도처에서 모여들었다.
대이진은 할아버지의 위망에 눌려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머니 말이 옳다고 여겼다. "근신인 내시감과 대신인 대내상을 새로명하고 변방을 진무하시오." 대이진은 어머니 뜻에 따라 만인지상인대내상에 대공정을, 내시감에 해지량을 임명하고 변방의 도독과 자사를 비롯하여 장수들을 교체했다. 대공정은 황친으로 덕망이 높았다.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이래 대신의 반열에 오를 때까지두루 화친한 성품으로 평판이 좋았다. 내시감 해지량은 태후 해수련의 친조카로, 오라버니 해수청의 장자였다. 해지량은 품계를뛰어넘어 황제의 근신인 내시감이 되었다.
해수련이 조카 해지량을 지극히 아끼는까닭은, 젊은 시절 사냥터에서 사고를 당해사내의 상징인 옥근이 절단되었기 때문이다. 해지량은 문과에 장원급제할 만큼 머리가 좋았고, 무과에도 급제할 정도로 출중한 인재였다. 문무를 겸비한 동량지재라 하여 선제 대인수가 무척 아꼈지만 신료들과어울리지 못해 중용하지 못했다. 사고당하기 전에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지만 사내구실을 못하자 아내를 친정으로 보내 재혼하게 할 만큼 통이 큰 사내였다
"폐하, 자고로 백성이 고루 현명하면 정사를 제대로 펼칠 수 없었사옵니다. 백성이우둔해야 다스리기 쉽사옵니다. 글을 깨우쳐 유식해지면 불평하는 법을 먼저 배우게되옵니다." "꼭 그러하더냐?" "고금을 막론하고 충역을 뛰어넘는 자나역심을 품었거나 무리를 이끌고 준동한 자는 모두 유식한 자들이었사옵니다. 통촉하옵소서."
"그러하옵니다. 그러나 태사의 한마디가폐하의 옥음보다 귀하고, 태사를 따르는 무리가 폐하를 따르는 백성보다 많사옵니다.태사는 지난 날에 선제의 그림자였고 지금은 선제의 현신과 같사옵니다." 신작은 발해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기에 대이진은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어쩌란 말이냐?" "서서히 물리쳐야만 하옵니다. 머지않아반드시 폐하께 간언할 테니 그때 징치하옵소서." "태사가 그른 말을 하지는 않을텐데……."
"폐하, 선제의 을사유신으로 양민 중에는 크게 농경을 일구고 교역을 하여 재물을모은 호족이 많사옵니다. 노비나 부곡 중에부호가 많고, 변방에서 올린 장계를 보면그들은 관리의 말을 잘 듣지 않을 뿐더러위세가 관리보다 높다 하옵니다. 백성들도글을 깨우쳐 사리를 따지는 자가 많사옵니다."
사촌형 해지량이 내시감이 되자 해무량은 스스로 변방의 자사 자리를 달라고 애걸했다. 자사로서 너른 땅을 다스리고 싶었던 것이다. 염주는 바닷가에 치소를 둔 곳으로, 염전이 많고 교역선이 수시로 드나드는데다 농사가 잘되고 사냥거리가 많아 풍족했다. 특히 염주 소금은 품질이 좋고 염도가 높아비싼 값에 팔리며 염세가 많이 걷혀 치소의재정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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