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삼촌 ㅣ 현기영 중단편전집 1
현기영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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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보고] 현기영 중단편전집 1 『순이 삼촌』 중 「초혼굿」
: 취약한 내면과 4·3의 상흔이 겹쳐 빚어낸, 닿지 못하고 살아내지 못한 고향의 비극

1. 작품 개요

가. 작품의 기본 성격
ㅇ(작품성격) 「초혼굿」은 고향으로 가다 죽은 박진호의 사연인 「못 닿는 고향」과, 고향에 돌아온 뒤 죽은 익수의 사연인 「살」을 나란히 배치한 작품임.
ㅇ(구성방식) 이 작품은 「못 닿는 고향」과 「살」이라는 두 사연을 나란히 놓고, 죽은 젊은이들의 넋을 차례로 불러내듯 전개되는 병렬 구성의 작품임.
ㅇ(핵심내용) 작품은 박진호와 익수의 죽음을 제주 4·3의 상흔만으로 단순화하지 않음. 두 사람에게는 애초에 고향의 죽음 기억을 감당하지 못하는 취약한 내면이 있었고, 그 개인적 불안과 정신적 약함이 고향에 남은 4·3의 불길한 기운과 만나 자살로 이어짐.
ㅇ(검토방향) 「초혼굿」은 못 닿는 고향, 살, 넋, 굿, 자살바위, 바다의 이미지를 통해 개인적 취약성과 역사적 상처가 겹쳐질 때 한 사람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읽을 필요가 있음.

나. 제목의 의미
ㅇ(초혼굿의뜻) 초혼굿은 죽은 사람의 넋을 불러 위로하는 무속 의례임.
ㅇ(문학적의미) 작품은 박진호와 익수의 죽음을 단순한 사건기록처럼 정리하지 않고, 죽은 이들의 넋을 불러 왜 그들이 고향에 닿지 못했는지, 왜 고향에서 살아갈 수 없었는지를 묻는 방식으로 전개됨.
ㅇ(핵심의미) 「초혼굿」이라는 제목은 이 작품이 두 젊은이의 죽음을 쉽게 단죄하거나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개인적 약함과 역사적 상처가 겹쳐 만들어낸 불가해한 죽음을 문학이라는 굿판 위로 불러내는 글임을 보여줌.

2. 핵심 서사와 인물 분석

가. 박진호, 「못 닿는 고향」의 귀향 실패
ㅇ(인물상황) 박진호는 제대를 앞둔 병장으로, 내무실 최고 고참이 된 뒤 졸병들에게 주먹맛을 보여주는 의식을 주도할 만큼 겉으로는 강하고 거친 인물임.
ㅇ(군대식허세) 그는 밤중에 초소 경계 상황을 시험하듯 접근하고, 초소병들이 자신을 적으로 오인해 공포탄을 쏘자 오히려 초소 안으로 뛰어들어가 병사들을 거칠게 몰아붙임. 이는 박진호가 겉으로는 여전히 군대식 폭력성과 고참 병장의 허세를 지닌 인물임을 보여줌.
ㅇ(고향기억) 그러나 귀향이 가까워질수록 그가 떠올리는 고향 제주는 따뜻한 안식처가 아니라, 겨울바람과 음울한 풍경, 4·3난리 때 죽은 송장들을 파먹던 까마귀 떼의 기억이 서린 장소로 나타남.
ㅇ(내면취약성) 박진호는 군대 안에서는 강한 고참처럼 행동하지만, 고향의 기억 앞에서는 그 강함을 유지하지 못함. 이는 그의 죽음을 4·3의 상흔만으로 설명하기보다, 고향의 죽음 기억을 감당하지 못한 개인적 취약성과 함께 보아야 함을 보여줌.
ㅇ(사건결과) 제대 후 박진호는 목포에서 제주행 배에 오르지만,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바다로 떨어져 죽음에 이름.
ㅇ(핵심의미) 박진호는 물리적으로는 고향을 향해 갔지만 정신적으로는 끝내 고향에 닿지 못한 인물임. 그의 죽음은 강한 척하던 한 개인의 내면이 고향의 죽음 기억 앞에서 무너진 결과로 볼 수 있음.

나. 익수, 「살」의 귀향 후 파국
ㅇ(인물상황) 익수는 서울에서 대학 화공과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모교에서 화학을 가르치는 인물임. 처음에는 젊은 교사다운 열정과 생기를 지니고, 학생들도 그를 잘 따름.
ㅇ(불안의시작) 그러나 고향에 내려온 뒤 익수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과 악몽에 시달림. 그는 고향이 독처럼 몸속으로 파고드는 꿈을 꾸고, 어머니를 부르는 듯한 무서운 고함소리를 듣기도 함.
ㅇ(죽음의침입) 어느 날 학교로 양병주를 찾는 전화가 걸려오고, 전화를 받은 익수는 양병주가 누구인지 몰라 옆에 있던 정 선생에게 묻음. 정 선생은 양병주가 전에 이 학교에 있다가 사라봉 자살바위에서 죽은 사람이라고 알려줌.
ㅇ(살의전염) 양병주의 이름과 죽음은 전화 한 통을 통해 익수의 일상 안으로 불쑥 들어온 죽은 자의 기운처럼 작용함. 이후 익수는 말이 많아지고, 술에 기대며, 사람 만나는 일조차 두려워하고, 결국 직장도 그만둔 채 몸과 마음이 허물어짐.
ㅇ(사건결과) 익수는 결국 양병주가 죽은 사라봉 자살바위로 올라가 같은 방식으로 몸을 던짐.
ㅇ(핵심의미) 익수는 고향에 돌아왔지만 그 고향 안에서 살아내지 못한 인물임. 그의 죽음은 죽은 자의 이름과 고향의 불길한 기운이 취약한 내면을 지닌 사람에게 얼마나 파괴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줌.

3. 작품의 핵심 주제

가. 상실된 고향의 이중성
ㅇ(박진호의고향) 박진호에게 고향은 돌아가야 할 곳이지만 끝내 닿을 수 없는 곳임. 그는 제주행 배를 타고 고향을 향하지만, 고향에 도착하기 전에 죽음에 이름.
ㅇ(익수의고향) 익수에게 고향은 이미 돌아온 곳이지만 살아갈 수 없는 곳임. 그는 고향의 모교에서 교사로 일하지만, 그 땅에 남은 불길한 살과 죽음의 기운에 사로잡힘.
ㅇ(핵심의미) 작품 속 고향 제주는 단순한 향수의 공간이 아님.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힘들어도 살아내야 할 삶의 터전이지만, 박진호와 익수처럼 취약한 내면을 지닌 인물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의 장소가 됨.

나. 개인적 취약성과 역사적 상흔의 결합
ㅇ(개인적취약성) 박진호와 익수의 죽음을 모두 역사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음. 대부분의 사람들은 4·3의 상처를 안고도 힘겹게 살아갔고, 이 두 사람의 죽음에는 분명 개인적 불안과 정신적 취약성이 크게 작용함.
ㅇ(역사적상흔) 그러나 그 취약성이 아무 맥락 없이 생겨난 것도 아님. 고향 제주에는 4·3의 죽음, 억울한 넋, 설명되지 않은 공포가 남아 있고, 그 기억은 두 사람의 불안한 내면을 더 깊이 흔듦.
ㅇ(핵심의미) 이 작품의 핵심은 4·3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파괴했다는 데 있지 않음. 오히려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상처가 특히 취약한 내면을 지닌 인물들에게 더 날카롭게 파고들 수 있음을 보여주는 데 있음.

다. 트라우마의 무속적 형상화, 살
ㅇ(살의실체) 작품에 등장하는 살과 넋은 단순한 미신이나 귀신 이야기로만 볼 수 없음. 그것은 산 사람의 이성과 논리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죽음의 압력, 원한, 불안의 이름임.
ㅇ(무속적언어) 작가는 개인의 정신적 붕괴와 고향에 남은 역사적 상처를 ‘살을 맞았다’는 무속적 언어로 형상화함.
ㅇ(핵심의미) 살은 제주 4·3의 죽음들이 완전히 장례 치러지지 못한 채 고향의 땅과 바람 속에 남아, 취약한 사람의 몸과 마음을 찌르는 방식으로 나타난 것임.

라. 초혼굿으로서의 문학
ㅇ(넋부르기) 작품은 박진호와 익수의 죽음을 개인의 나약함만으로 조롱하거나, 반대로 역사적 희생으로만 단순화하지 않음. 대신 죽은 이들의 사연을 불러내어 그 죽음의 뿌리를 묻고, 그 넋을 위로하려 함.
ㅇ(진혼의형식) 초혼굿은 억울하게 죽은 넋을 불러 위로하는 의례임. 작품은 이 형식을 빌려, 개인적 취약성과 제주 4·3의 상흔이 겹쳐 죽어간 젊은이들의 사연을 문학 안으로 불러들임.
ㅇ(핵심의미) 「초혼굿」은 두 죽음의 원인을 하나로 단정하는 작품이 아니라, 개인의 약함과 고향의 상처가 뒤엉켜 만들어낸 불가해한 죽음을 불러내고 달래는 진혼의 형식을 지닌 작품임.

4. 종합 평가

가. 작품의 의의
ㅇ(작품의의) 「초혼굿」은 박진호와 익수라는 두 젊은이의 자살 사건을 통해, 개인적 취약성과 제주 4·3의 상흔이 겹칠 때 고향이라는 공간이 어떻게 죽음의 장소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임.
ㅇ(문학적의미) 작품은 논리적 인과관계를 직접 설명하기보다, 살, 악몽, 넋, 무당, 바다, 자살바위 같은 무속적·상징적 장치를 통해 이성과 과학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내면의 붕괴를 드러냄.
ㅇ(핵심의미) 이 작품의 힘은 두 죽음을 어느 한쪽으로만 몰아가지 않는 데 있음. 박진호와 익수의 죽음은 개인적 멘탈의 취약성과 고향에 남은 폭력의 기억, 특히 제주 4·3의 해결되지 않은 상흔이 겹쳐 만들어낸 비극임.

나. 최종 평가
ㅇ(종합평가) 「초혼굿」은 물리적 학살이 끝난 뒤에도 고향의 흙과 바람 속에 원혼과 살이 남아, 취약한 내면을 지닌 사람들의 일상과 정신을 어떻게 갉아먹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임.
ㅇ(최종정리) 작가는 닿지 못하고 죽어간 박진호와 고향에서 끝내 살아내지 못한 익수의 사연을 문학이라는 제단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단순한 개인적 나약함도 아니고 순수한 역사적 희생만도 아닌, 개인의 취약성과 폭력적인 역사의 잔상이 겹쳐 만들어낸 죽음들을 진혼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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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삼촌 ㅣ 현기영 중단편전집 1
현기영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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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보고] 현기영 중단편전집 1 『순이 삼촌』 중 「꽃샘바람」
: 산업화의 그늘과 사회적 방관 속에 실직과 낙태로 내몰린 여공의 차가운 청춘

1. 작품 개요

가. 작품의 기본 성격
ㅇ(작품성격) 「꽃샘바람」은 서울 공장 여공 인숙의 실직, 낙태, 도시 방황을 통해 산업화 시대 농촌 출신 여성 노동자의 고통을 그린 작품임.
ㅇ(시대배경) 작품의 배경에는 가난한 농촌 가정의 교육 기회 불평등, 아들 중심의 진학 구조, 딸을 도시 공장 노동으로 내보내던 시대 현실,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1970년대 여성 노동자의 삶이 놓여 있음.
ㅇ(주요사건) 인숙은 농촌에서 서울로 올라와 공장에 다니던 여공이지만,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일자리를 잃고, 준식에게 버림받아 홀로 낙태수술을 치른 뒤 지친 몸으로 도시의 골목을 떠돎.
ㅇ(핵심내용) 작품은 한 젊은 여성의 개인적 방황이 아니라, 농촌의 딸들이 교육 대신 노동으로 밀려나고, 도시 공장에서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채 몸과 삶을 소모해야 했던 시대의 구조적 문제를 보여줌.

나. 제목의 의미
ㅇ(제목상징) 꽃샘바람은 봄이 왔음에도 꽃을 시샘하듯 다시 몰아치는 찬바람임. 제목은 피어나야 할 젊은 인숙의 삶이 오히려 차가운 현실에 얼어붙는 상황을 상징함.
ㅇ(청춘의역설) 인숙은 젊은 나이에 도시로 올라왔지만, 그녀 앞에 놓인 것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아니라 실직, 낙태, 가난, 귀향 불능, 도시의 위험임.
ㅇ(핵심의미) 「꽃샘바람」이라는 제목은 농촌 출신 여공 인숙의 청춘을 덮치는 산업화 도시의 차가운 바람을 드러냄.

2. 시대 배경과 문제의식

가. 농촌의 딸과 교육 대신 노동
ㅇ(농촌현실) 인숙은 단순히 서울에서 방황하는 여성이 아니라, 농촌에서 도시 공장으로 올라온 여공임. 이는 당시 가난한 농촌 가정의 딸들이 겪었던 삶의 경로와 맞닿아 있음.
ㅇ(교육불평등) 집안 형편이 어려운 경우 교육 기회는 주로 아들이나 장남에게 먼저 돌아갔고, 딸들은 학교 대신 도시 공장으로 보내져 가족의 생계를 보태야 하는 경우가 많았음.
ㅇ(핵심의미) 인숙의 서울행은 자유로운 선택이라기보다, 가난한 농촌 가정에서 딸에게 주어진 제한된 선택지였음.

나. 서울 공장 여공의 현실
ㅇ(노동현실) 인숙이 놓인 공장 노동의 현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 불안정한 고용으로 요약됨. 공장은 젊은 여성 노동자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지만, 그들의 삶을 책임지지는 않았음.
ㅇ(고용불안) 공장이 문을 닫자 인숙은 곧바로 생계 기반을 잃음. 공장 노동은 안정된 직업이라기보다 언제든 끊어질 수 있는 임시 생존수단에 가까움.
ㅇ(전태일의외침) 이러한 현실 속에서 전태일 열사의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이 나올 수밖에 없었음. 「꽃샘바람」의 인숙 역시 바로 그 시대의 그늘 속에서 저임금 노동과 고용불안, 사회적 방관을 온몸으로 겪는 인물임.
ㅇ(시대적의미) 작품은 전태일 열사의 외침으로 대표되는 1970년대 노동 현실을 직접 구호로 설명하지는 않지만, 인숙의 실직과 낙태, 방황을 통해 그 시대 여성 노동자들이 얼마나 허약한 삶의 기반 위에 놓여 있었는지를 보여줌.

다. 여성의 몸에 떠넘겨진 책임
ㅇ(책임회피) 기억 속의 준식은 인숙에게 의지처처럼 보였지만, 결국 인숙을 임신하게 만들고도 책임지지 않은 채 군대로 떠남.
ㅇ(책임전가) 임신과 낙태의 결과는 인숙의 몸에만 남음. 남자는 현실에서 사라지고, 수술대 위에 눕는 것도 인숙이며, 수치심과 공포와 후유증을 감당하는 것도 오롯이 인숙임.
ㅇ(핵심의미) 작품은 가난한 여성 노동자가 노동 현장에서는 값싼 노동력으로, 남성과의 관계에서는 책임을 떠안는 몸으로 소비되는 이중의 착취 구조를 보여줌.

라. 사회적 방관의 구조
ㅇ(방관의현실) 인숙의 비극은 어느 한 사람의 잘못만으로 설명되지 않음. 가난한 농촌은 딸을 학교 대신 공장으로 보냈고, 공장은 여공의 고용을 보장하지 않았으며, 준식은 책임을 회피했고, 도시는 인숙을 돌보지 않음.
ㅇ(보호의부재) 인숙은 실직했을 때도, 낙태수술을 받을 때도, 지친 몸으로 골목을 헤맬 때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함. 그녀의 곁에는 책임지는 사람도, 제도도, 공동체도 없음.
ㅇ(핵심의미) 「꽃샘바람」의 차가움은 바로 이 사회적 방관에서 비롯됨. 인숙은 개인적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 속에서 서서히 밀려난 인물임.

3. 서사 구조와 주요 내용

가. 공장 폐쇄와 실직
ㅇ(공장폐쇄) 인숙이 다니던 공장은 문을 닫고, 공장장은 당분간 쉬라고 말함. 그러나 그 ‘당분간’은 곧 실직 상태와 다름없는 막막한 시간으로 이어짐.
ㅇ(생활붕괴) 공장 일이 끊기자 인숙은 돈도 떨어지고 갈 곳도 마땅치 않은 처지가 됨. 도시에서의 삶은 공장이 멈추는 순간 함께 흔들림.
ㅇ(핵심의미) 공장은 농촌 출신 여공들에게 단순한 일터가 아니라 생존 기반이었지만, 그 기반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을 만큼 허약했음.

나. 준식의 부재와 낙태수술
ㅇ(준식의부재) 준식은 현재의 서사에 실질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인숙의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서만 환기됨.
ㅇ(낙태수술) 인숙은 남자의 부재 속에서 홀로 병원 수술대에 오름. 병원의 냄새, 계단, 어지럼증은 수술 전후 인숙이 고립된 채 감당해야 하는 육체적 공포를 그대로 드러냄.
ㅇ(핵심의미) 낙태수술 장면은 인숙의 비극이 단순한 연애 실패가 아니라, 책임져야 할 남성의 부재와 사회적 보호 장치의 결여가 여성의 몸에 직접 새겨지는 사건임을 보여줌.

다. 동숙을 찾아 헤매는 방황
ㅇ(가상의피난처) 수술 후 지친 인숙은 유일한 위안으로 동숙의 자취방을 찾아 헤매지만, 동숙은 이미 그곳에 없는 인물로 제시됨.
ㅇ(닿지못한의지처) 인숙은 동숙에게 기대고 싶어 하지만, 복잡한 골목과 지친 몸 때문에 그곳에 도달하지 못함. 이는 위기에 처한 여성 노동자가 기댈 수 있는 최소한의 사적 의지처마저 얻지 못하는 상황을 보여줌.
ㅇ(귀향불능) 인숙은 고향으로 내려가라는 말 앞에서도 쉽게 돌아가지 못함. 고향은 피난처라기보다 실패와 수치가 드러나는 장소로 느껴지기 때문임.
ㅇ(핵심의미) 준식의 부재가 책임의 공백이라면, 동숙의 부재는 위로의 공백임. 이 두 부재가 겹치면서 인숙의 방황은 더 깊은 고립으로 이어짐.

라. 낯선 남자와 금붕어의 상징
ㅇ(도시의위협) 인숙은 지친 몸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낯선 남자의 손길과 위협을 겪으며 또 다른 폭력에 노출됨.
ㅇ(금붕어상징) 작품 속 금붕어는 인숙이 잃어버린 생명, 낙태 이후의 죄책감, 몸속에 남은 상처와 겹쳐짐.
ㅇ(버림의의미) 인숙이 끝내 금붕어를 감당하지 못하고 버리는 장면은, 상처가 정리된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끌어안고 있을 최소한의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음을 드러냄.
ㅇ(핵심의미) 금붕어는 인숙의 죄의식이자 사라진 생명의 상징임. 작품은 이를 통해 낙태의 책임을 인숙 개인에게만 돌릴 수 없음을 드러냄.

4. 인물 분석

가. 인숙
ㅇ(인물성격) 인숙은 농촌에서 서울로 올라온 젊은 여성 노동자임. 그녀는 도시에서 자유를 찾아온 인물이 아니라, 가난 때문에 교육 대신 노동으로 밀려난 농촌의 딸에 가까움.
ㅇ(취약성) 인숙은 공장에서는 값싼 노동력이고, 남성과의 관계에서는 책임을 떠안는 몸이며, 고향에서는 돌아가기 어려운 실패자가 됨.
ㅇ(핵심의미) 인숙은 개인적으로 방황하는 여성이 아니라, 산업화 시대의 농촌, 가족, 공장, 남성, 도시가 함께 만들어낸 희생자임.

나. 준식과 동숙
ㅇ(부재의기능) 준식과 동숙은 모두 현재 서사에 실질적으로 등장하지 않으며, 인숙의 과거 기억이나 목적지로서만 존재하는 인물들임.
ㅇ(책임과위로의공백) 인숙을 임신시키고 떠난 준식의 부재가 남성 중심 사회의 무책임성을 보여준다면, 끝내 닿지 못한 동숙의 부재는 위로받을 곳 없는 인숙의 고립을 보여줌.
ㅇ(핵심의미) 두 인물의 부재는 인숙이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홀로 감당해야 하는 생존의 무게를 선명하게 드러냄.

5. 종합 평가

가. 작품의 의의
ㅇ(작품의의) 「꽃샘바람」은 실직한 여공의 낙태와 방황을 통해, 농촌의 딸들이 교육 대신 도시 공장 노동으로 밀려났던 산업화 시대의 구조적 비극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임.
ㅇ(문학적의미) 인숙의 병원, 골목, 공장, 금붕어를 통해 당시 여성 노동자들이 어떠한 폭력적 환경 속에서 몸과 삶을 소모해야 했는지를 서늘하게 증언함. 이 점에서 「꽃샘바람」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전태일 열사의 외침이 여성 노동자의 삶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절박한 현실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함.
ㅇ(핵심의미) 인숙의 비극은 가난한 농촌, 아들 중심 교육, 저임금 공장노동, 책임을 회피한 남성, 닿지 못한 의지처, 그리고 도시의 무관심이 하나로 얽혀 만들어낸 시대의 합작품임.

나. 최종 평가
ㅇ(종합평가) 「꽃샘바람」은 실직, 낙태, 방황이라는 비참한 경로를 통해 1970년대 여성 노동자의 삶이 얼마나 허약한 지반 위에 서 있었는지를 날카롭게 보여줌.
ㅇ(최종정리) 작품은 인숙의 지친 몸과 흔들리는 걸음을 통해, 화려한 산업화의 이면에 불어닥친 차가운 꽃샘바람이 가장 먼저 가난한 집안의 딸들과 몸 하나 기대기 어려웠던 젊은 여성들을 얼어붙게 만들었음을 뼈아프게 고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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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무서워 혼났구먼. 무슨 처녀가 그렇게 힘이 세어."
그는 목발을 양 겨드랑이에 끼더니 텅 빈 바짓가랑이의 무릎께를 득득 긁었다. 너는 외면하지도 않고 그 긁는 모양을 빤히 바라본다. 남자는 취중에도 익숙하게 목발을 떼면서 벽에서 나왔다.
"조심하세요."
너는 돌아서서 가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몸이 훈훈하게 덥다. 그때 뒤에서 그 남자가 혼자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하필 여기가 가려울까? 환장하겠네."
아저씨, 아저씨, 혹시 거기서 새살 돋아나오려는 거 아녜요? 봄되니깐 베어낸 그루터기에서 싹 트려고 가려울 거예요. 아저씨 너는 굴다리 밖으로 나오면서 올봄에는 저 아저씨에게 미끈한 종아리가 진짜로 돋아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참, 나도 약방에 들러야겠다. 그 의사가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려면 테라마이신을 사 먹으라고 했다. 어서 빨리 새살이 돋아나야지.
너는 약방 앞 쓰레기통 속에다 손수건에 싼 금붕어를 미련 없이집어넣어버린다. - P234

못 닿는 고향
제대 말년에 내 친구 박진호 병장은 돌연 사람이 변해버렸다.
제대를 한달 앞두고 내무실 최고 고참 병장이 되던 날, 진호는내무실 관례대로 졸병들을 집합시켰다. 누구나 최고 고참병이 되면 그 의식을 수행할 권리가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강자의 군림을은연중 알리고 그 기념으로 졸병들에게 돌아가며 더도 말고 딱 주먹 한대씩 골고루 배급해주는 일종의 세례식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비공식 행사는 부대가 주저항선으로 이동해온 후 세번이나 거르고 그냥 지나갔다. 열달 전에 제대한 하순필 병장은 워낙 위인이 심약해서 그랬다 치더라도 그뒤를 이은 제법 담차고 성깔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던 홍민기 병장이나 최근수 병장도 감히 그 의식을 거행하지 못하고 제대하고 말았다. 사실 그럴 수밖에없는 것이 적을 앞에 두고 실탄을 수시로 만지는 주저항선이고 보니, 혹시 졸병들 중에 어느 간땡이 부은 놈이 끼여 있어서 총을 들이대는 날이면 그건 진짜 낭패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진호는 주저 없이 이 행사를 결행한 것이다. 그는 이날을위해 특히 풀기 빳빳하고 주름을 날카롭게 세운 군복으로 갈아입고 팔각모를 깊숙이 눌러썼다. - P236

"모두 아구창을 꽉 물어! 이빨 부러져."
이 의식에는 일절 말이 없는 게 상례였으나, 진호는 아직 멋모르고 눈치를 살피는 신병 두 놈을 위해 특히 주의를 주었다.
한사람에게 딱 한대씩만 돌아가는 주먹맛을 어떻게 하면 본때있게 보여줄 수 있을까? 팔의 스윙이 너무 커서는 안된다. 팔을 힘껏 휘둘러 쳤다가 턱뼈가 어긋나거나 이빨이 부러지는 날이면 진짜 낭패인 것이다. 그러니 쇼트 훅으로 짧게 먹여 쓰러뜨려야 하는데 그게 기술이다. 진호는 손에 짝 달라붙는 양가죽 장갑을 끼면서궁리를 했다. 솜씨가 서툴렀다간 망신만 당한다. 상대가 단 한번에나가떨어지지 않으면 그놈은 두고두고 다루기가 힘들어지는 법이야 - P237

진호는 신속한 동작으로 몸을 부렸다. 억눌린 비명이 잇따라 터지고 내무실 안은 일시에 낭자하게 무너졌다. 쓰러졌던 졸병들은김 병장의 구령에 따라 다시 재빨리 일어나 정렬했다. 신병 한 놈이 피거품을 물고 있었다. 이빨이 나갔나? 빌어먹을, 아가리 꽉 다물라고 했는데, 진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해산을 명했다. - P238

결빙되어 소대장은 날마다 혼자서 스케이트날을 번쩍이며 얼음을지쳤다.
이제 진호는 2종계 사무를 조수에게 맡겨버리고 스스로 완전히열외로 빠져나갔다. 대신 그가 자원해서 맡은 일이란 허구한 날 내무실을 지키는 것이었다. 석유난로의 석면 유리를 통해서 널름거리는 불길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바람에 벙커의 문짝이 덜컹거리는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과 - P239

겨우내 강바람에 부대끼는 이곳은 바람 많은 진호의 고향 제주날씨와 비슷했다. 겨울바람이 스산스럽게 쓸고 다니는, 돌담이 높아 낮에도 컴컴한 골목쟁이, 그 얼어붙은 진창에 굵은소금 뿌린 듯희끗거리는 싸락눈, 4·3난리 때 죽은 송장들을 파먹고 날아올라 겨울바람 타는 바람까마귀떼, 이마를 누를 듯이 나직이 드리워져 좀처럼 걷히지 않던 음울한 구름떼. 그것이 얼마 후에 진호가 돌아가야한 고향이었다 - P239

"맞다. 이건 누에고치다. 제대 날, 나는 한마리 아름다운 성충이되어 뚫고 나갈 거야" 하고 진호는 중얼거려보는 거였지만 그때는이미 자기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질곡에 잡혀버린 것을 깨달았다.
썰렁한 내무실에서 침낭 안의 온기는 언제나 넉넉지 못했다. 항시 으스스 춥고 안달이 났다. 손을 아래로 가져가 바지 단추를 열고 그 오죽잖은 온기를 조물락거려보기도 했지만, 전신을 옭아매는 몸살 같은 기운은 영영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한마디로 슬픔이었다. 진호는 슬펐다. 그렇지만 나는 왜슬퍼할까? 왜? 진호는 울먹거리며 생각해보았지만 종내 그 정체를알 길이 없었다.
아무튼 이 불가사의한 슬픔은 무슨 독약처럼 몸에 퍼져 진호를쓰러뜨리고 허구한 날 누워 지내게 만들었다. 밤에는 자주 가위눌리는 꿈을 꾸었다. 가위눌릴 때는 식칼을 머리맡에 두고 자라고 하던가? 궁리 끝에 언젠가처럼 실탄을 장전한 총을 매트리스 밑에 넣고 베개 삼아 자기로 했다. 악몽을 쫓는 데는 아무래도 식칼보다는더 무서운 총이 효과적이겠지. - P240

진호는 이렇게 그 슬픈 침낭 속에 뚤뚤 묶여 벙커 한구석에서 야릇하게 썩어가고 있었다. 단 한가지 분명해진 것은 고향에 돌아가기 싫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서울 같은 도회에 살고 싶은 것도아니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이었다. - P241

"짜식, 놀라긴, 순찰 좀 돌고 와야겠어."
거의 스무날 동안 한번도 초소 순찰을 나가지 않던 사람이 무슨바람이 불어서 저럴까? 양 상병은 헤드폰을 벗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진호를 올려다보았다.
"제대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멋있게 순찰 돌고 와야겠어"
하고 진호는 방한복 위에다 탄대를 매면서 어설프게 씩 웃어 보였다. - P242

양 상병으로부터 그날 치 암호를 확인받고 나서 진호는 느닷없이 경비전화기를 붙잡았다.
"각 초소는 나와라. 1초소, 2초소, 3초소. 좋아, 나 박 병장이다.
각 초소는 똑똑히 들어라. 2중대 쪽에서부터 고무보트로 보이는 검은 물체가 우리 쪽으로 이동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모두 자물쇠를 풀고 전방을 살펴라." - P242

진호는 그늘진 갈대밭을 벗어나 엄폐물 하나 없는 달빛 환한 갯벌 위 살얼음판을 우적우적 요란하게 밟으며 주저 없이 걸어왔다.
그가 십 미터 전방까지 다가오길 기다려 윤 상병이 벼락같이 정지명령을 내지르면서 동시에 조준한 총구를 약간 쳐들어 상대방 머리 바로 위에다 공포를 쏘았다. 순간 그는 흠칫 놀라며 그 자리에우뚝 멈춰 선 것인데, 초소병들은 그제야 달빛 속에 드러난 그 수염투성이 얼굴이 진호임을 알아챘던 것이다. 너무 어이가 없었다.
생포할 생각으로 공포를 쏘았기 망정이지 바로 쏘았더라면 어떻게될 뻔했다. 초소병들은 후에 두고두고 그 일에 치를 떨었다.
그런데 적반하장 격으로, 공포를 쏜 뒤 꽉 쥐었던 경계를 풀어주자 진호는 초소 안으로 펄쩍 뛰어들며 엉뚱한 욕을 해대는 것이 아니던가.
"병신새끼들, 불과 십 미터 거리에서 사람 하나 제대로 못 맞혀?
금방 총 쏜 병신은 어떤 새끼야?"
그러고 나서 닷새 뒤에 제대를 했다. - P245

그렇다. 고향 가는 길은 정말 멀었다. 뿌연 새벽에 목포에 내린진호는 오후 다섯시 제주행 배를 타기 위해 하루 종일 기다려야 하고 그 배는 또 여덟시간 밤항해를 해야 할 판이었다. - P246

이렇게 배의 속력이 순식간에 떠들썩하던 선창가를 멀리 밀어내버리자 진호는 안달하면서 난간을 꽉 붙잡았다. 고향 간다는 생각이 실감으로 울컥 치밀어올랐던 것이다. 결국 고향에 가게 되는구나! 고향에 닿기 전에뭘 좀 생각해놔야 할 텐데... 이대로 그냥 갈 수는 없어. - P247

진호는 쇠줄 난간 위에 엎어져서 바다에다 으악으악 토악질을 시작했다. 뱃전을 기어오른 파도가 그의 등 위로 떨어졌다. 진호는 흠첫 난간에서 물러나면서 물 맞은 망아지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때 조타실로 가던 선원 한명이 진호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봐, 갑판에 나오면 위험해. 들어가라고!"
그러나 선원의 고함 소리는 파도 소리에 휩쓸려 아득하게 멀리들려왔다. 일단 시작된 토악질은 좀처럼 멎지 않았다. 그는 다시 쇠줄 난간에 엎어져서 토악질을 계속했다. - P249

삼십분쯤 후에 조타실에서 나온 아까 그 선원은 진호가 있던 자리에 훈련화 한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나흘 뒤 제주 산지 축항 제방 끝에서 멍석 한닢 깔아놓고 둥둥초혼굿이 벌어졌다. 무당은 진호가 남양호 갑판에 벗어놓았던 국방색 훈련화를 양손에 한짝씩 들고서 거친 겨울 바다를 향해 오래오래 흔들고 있었다.

넋이라도 돌아오라
넋이라도 돌아오라
구름에 싸여 오라
바람에 불려 오라
이신 신고 돌아오라
넋이여, 혼이여
넋이여, 혼이여 - P250

살
서울서 대학을 마치고 그해 고향의 모교에서 화학을 가르치던내 친구 익수가 가을 들어 이렇다 할 원인도 없이 별안간 병을 앓게 되었다. 머리가 그만 삐끗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하기는 마음만내키면 서울에서도 일류 회사에 얼마든지 취직할 수 있는 화공과출신이 낙향하여 훈장질을 시작한 것부터가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서울에서 내려온 그때 벌써 정신에 이상이 생겼지 않았나 하고 의심하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 P250

그러나 반년 남짓한 그의 교단생활은 짧았지만 별 탈 없이 지낸퍽 순조로운 것이었다.
그 반년 동안 그에게는 낙백(落魄)한 기미는커녕 오히려 신출내기 교사답게 남다른 정열로 충만해 있었다. 의욕 과잉으로 손찌검이 잦은 편이었지만, 학생들은 선배이기도 한 익수를 무척 따랐다.
그러니 발병은 어느날 느닷없이 닥쳐온 것이라고 한 그의 모친의말이 옳은 성싶다. 외딴 사람의 죽은 넋이 둘러씌인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발병의 조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무렵 익수는 내리 닷새 밤을 잠자리에서 가위눌리는 꿈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려고 베개에 머리를 뉘면 뒷골의 맥박이 전에 없이 팔딱팔딱무섭게 뛰놀았다. 그 맥박으로 베개 속의 메밀 껍질이 버석거리는소리가 귓속에 가득했다. - P251

이빨에 자신의 고환이 깨물리는 꿈.
그날밤도 잠들자마자 덜컥 그 이빨에 물렸다. 독아(毒)는 멀컹한 고환을 물고 조금씩 조금씩 깊이 파고들었다. 사력을 다해 버르적거리고 고함지르려고 애를 써도 전신이 생소금 맞은 갯지렁이처럼 흐물흐물 풀어져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손끝 하나 달싹할 수없는 무력감, 비명을 지르려고 바둥바둥 애를 쓰다가 간신히 잠에서 깨어났다. 외마디 고함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머니!" - P252

익수는 벌떡 일어났다. 고함 소리가 내 입에서 터져나온 것도 아니고, 잘못 들은 환청도 아니라는 것을 당장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것만 같다. 그래서 이 이상야릇한 동일시 현상에서 벗어나야만 해야겠다.
그때 어머니가 먼저 마루를 건너와 방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무서운 고함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어머니, 아까 그 고함 소리 들으셨죠? 이 동네 누가 미쳤나봐요.
그렇죠?"
"아니, 그 고함 소린 네 방에서 났는데……… 네가 또 무슨 나쁜 꿈을 꾼 게로구나."
어머니는 걱정스럽게 익수를 바라보았다. - P253

"양병조 선생이라고요? 여기엔 그런 분 없는데요.
"죄송합니다만, 한번 알아봐주세요. 혹시 다른 직장으로 옮기지않았나......"
"잠깐 기다려보세요. 양병조 선생이라고, 여기서 근무한 적 있어요? 화학선생이라고 하는데."
"아, 양병조가 아니라 양병주 선생인가본데 ・・・・・・ 그 전화 누굽니까? 월부장순가요?"
"서울서 내려온 사촌누이래요."
"사촌누이라고? 양병주 씬 죽은 지 삼년이 넘는데.....
"예?"
"부임한 지 두달 만에 자살해버렸어요. 저기 저 사라봉 자살바위에서 말이오. 육지 사람이었나본데…………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 사람이 양병줍니까, 양병줍니까? 예?
아, 그 사람 자살해버렸어요." - P255

그때부터 정말 육지 사내 양병주의 죽은 넋이 둘러씌었는지 익수는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냈다.
겉으로 보면 멀쩡한데 전에 없이 몹시 말을 더듬었다. 돌처럼 굳어지는 혓바닥을 누그러뜨려보려고 낮술을 걸쳤다. 술기운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교단에 설 수가 없었다. 교무실의 책상 서랍에는 항시 소주병이 가로누워 있었다.
심지어 다방 같은 데서 가까운 친구와 격의 없이 마주 앉아도 말을 더듬는 것이었다. 그래서 익수는 얘기 도중 잠깐 화장실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고 밖에 나가 몰래 소주를 마시고 들어오곤 했다.
갈수록 익수는 실어증의 진수렁에 깊이 빠져들어 허우적거렸다.
사람 만나는 것도 두렵다고 했다.
드디어 직장을 놓고 집에 들어앉자 익수는 완전히 자제력을 잃고 허물어져버렸다. 어머니가 불러다 해준 무당 푸닥거리도 소용없었다. - P256

그 절벽 끝에 널따란 자살바위가 돌출해 있었다. 그 밑을 이렇게밤새도록 서성거리다가 새벽에 돌아오는 그의 깎지 않은 수염에는언제나 성에같이 뿌연 바닷물 소금기가 올라 있었다.
이렇게 바닷가를 헤매던 어느날 밤, 익수는 사라봉 중턱 깎아지른 절벽 위의 그 자살바위로 기어올라 꽉 졸라맨 혁대 안에 두 손을 틀어넣고 허공에다 몸을 던졌다. 모래톱에 박힌 그의 몸뚱이는그렇게 두 손이 허리띠 속에 묶인 채 발견되었다. 아마 낙하 도중두 팔이 보기 싫게 허우적거리는 것이 싫어서 그랬으리라. - P257

버스정류장까지 거의 다 와서 인호는 택시를 타고 가자고 제의했다. 마침 빈 택시가 굴러온 것이다. 내가 얼른 반대할 구실이 떠오르지 않아 엉거주춤 망설이는데 인호와 상준은 눈 깜짝할 새에뒷좌석으로 굴러들어가 자리를 널찍하게 차지해버렸다. 자연히 운전사 옆 돈 내는 자리는 내 차지가 된 셈이었다.
저놈들이 택시요금을 나한테 떠맡길 작정이구나. 나는 일이 초장부터 어째 빗나가는 것같이 생각되어 기분이 언짢았다. 신길동까지 가려면 택시요금이 천원쯤 나올 텐데. 양일이 마련해달라고부탁한 만원 돈이 벌써 차질 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인호와 상준에게 할당해준 액수가 각각 삼천원씩이고 보면 나머지 사천원은내가 책임져야 할 몫이었다. - P260

가만있자, 궂은일이라..... 상준이 저놈은 이 말을 어디 딴 데서한 적이 있지, 아마 그렇지. 작년 겨울 눈길에서 교통사고로 죽은두진이 병원의 시체봉안실로 밤샘하러 가던 택시 안에서 지껄이던 소리다. 궂은일 보러 갈수록 택시 타고 가는 거라고.
나 혼자인 줄 알고 있다가 갑자기 셋이 나타난 걸 보고 양일은어떻게 느낄까?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그건 무척 기분 나쁜 일임에틀림없다. 아마 양일은 화가 나서 "이 새끼들 뭐야, 이 양일이가 죽었나 떼거지로 몰려들게" - P261

"너 양일이로구나" 하고 소리쳤던 것이다. 그렇게 양일의 출현은 나에게 반가운 노릇이던가? 하기야 사년 전에 이만원을 빌려간채 감감소식이던 녀석이 불쑥 나타나주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요즘 돈 이만원이라면 변두리에서 양복 한벌 맞추는 값밖에 안되지만사년 전엔 그것이 양복 두벌 값은 넉넉히 될 만한 돈이었다. 그러나 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 돈을 꼭 받아내겠다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결혼하기 전 일이니까 아내도 모르는 돈이다. - P262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드러내놓고 양일을 사년 동안착실히 죽여온 셈이다. 험담을 말아야지, 참아야지, 하고 다짐할수록 웬걸 가슴은 무슨 보람으로 뻑적지근해지고 자꾸 입술이 달싹거려지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그건 오장육부를 훑어내는 참기 어려운 가려움증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나는 그 돈을 빌려주는 순간부터 제발 갚지 말았으면 하고 은근히 바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아마 양일이 돈을 갚지 못할 지경으로 사정이 나빠지기를 소망했으리라. 그만큼 나한테는 붙잡고 늘어질 그의 약점이 소중했던 게 아닐까? 그는 일류 대학 출신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다니던 그 시골 학교에서 일년에 세명 배출할까 말까 한 대단한희소가치였다.1 - P263

이 해묵은 열등감, 그것은 고3 시절, 내가 양일을 상대로 벌였던무모한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양일과는 중2 때부터 가깝게 지내던 처지였는데 그게 그만 고3이 되자 여지없이 뒤틀리고 말았다.
학기 초 모의고사 때 저만치 뒤처져 있던 그가 여름방학 이후 나를앞질러버리자 내 눈에 불티가 일어난 것이었다. - P263

속살이 툭 튕겨나온다. 빌어먹을, 그래도 졸립다. 이번엔 집 밖으로나와 근처에 사는 양일네 집으로 염탐하러 간다. 대문 밖에서 기웃거리며 집 안 동정을 살핀다. 불기 한점 없이 집 안은 깜깜하다. 자식, 벌써 자는구나. 그제야 나는 비로소 안심이 되어 어둠속에서 배시시 웃는 것이었다. 두고 보자. 문턱 넘어갈 때가 중요한 거라구.
그러나 결국 일류대 지망에 멍든 것은 나였다. 두해 거푸 낙방맞고 겨우 낙착된 게 후기 대학 토목과였던 것이다. 그건 진짜 분통이 터질 노릇이 아닌가. 잠잘 것 다 자고 참견할 것 다 참견하던자식은 용케 합격하고...... 나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양일이이었혹시 날 속여가며 공부한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 P264

나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고향 친구들 모임에서 양일을 따돌릴궁리를 했다. 나의 주위 친구들 예닐곱이 모두 후기대 1, 2년생들이라 그 작업은 상당히 가능할 것같이 보였다. 게다가 나는 고3 때 반장을 지냈던 영향력을 십분 구사해서, 처음 몇개월은 그럭저럭 내의도대로 모임을 이끌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얼마나저열한 짓인지 그 당시는 미처 깨닫지 못할 지경으로 지독한 열패감에 시달렸던가보다.
따돌린다고 따돌려질 옛날의 양일이 아니었다. ‘일류‘의 힘은 실로 무서웠다. 밖에서 선배를 만나면 으레 우리는 도매금으로 양일의 동창으로 통해버렸다. 그가 우리 동기의 대명사로 우뚝 솟아버린 그 기정사실을 나는 도저히 뭉개뜨릴 재간이 없었다. 차츰 내주위 친구들은 하나씩 떨어져나가 양일을 옹위하기 시작했다. 몇개월 동안 공연히 나의 미친 편집증에 덩달아 휘말려들어 양일을배척하던 것을 후회하면서 말이다. - P265

이런 생각에서 아령을 시작했던 것인데 오히려 또 그게 화가 될 줄이야. 울퉁불퉁한 근육형은 십장이 제격이라고 위에서 생각했던지 나는 거의 이년 동안 지방의 현장을 전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시 서울 본사로 복귀되기는 했지만, 이미 지방에서 고생을 죽도록 한 터라, 나의 서울 근무는 자존심을 대폭 줄이는 것을의미했다. 부장 이하 일류대 출신들의 눈치 보는 일에 점점 이골이나자 내 팔뚝의 알통은 슬며시 맥 빠져 가라앉고 말았다. - P266

그때 별안간 양일이 눈에 띄었다. 나는 거의 무의식중에 철주 뒤로 가서 몸을 숨겼다. 내가 왜 그랬을까? 숨어 있다가 바로 코앞에불쑥 나타나 기습할 생각이었나? 아니다. 그게 아니었다. 비겁하게도 나는 양일을 아주 피해버린 것이었다. 그렇다. 양일은 터벅터벅걸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노란 헬멧을쓴 것도 아니고, 쇳녹물 먹은 작업복 입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이공사장 인부가 아닌 것이다. 때 묻은 와이셔츠를 바지 밖으로 너풀너풀 내놓고 맨발에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한길에서 슬리퍼를 끌다니, 혹시 저 녀석이 요 부근에 자동차 부속품상회를 가진 게 아닐까. 그런 가게가 요 근처에 즐비한데 - P270

그러나 역시 만날 사람은 만날 사람이다. 그날 그 자리만 모면했을 뿐, 양일을 만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오늘 또 어김없이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돈 만원을 가지고 신길동 진로주조 앞까지 나와달란다. 가래가 끓고 질긴 음색의 목소리. 나는 가슴이 섬뜩했다. 저 자식이 무슨 배짱일까? - P271

나는 생각다 못해 인호와 상준에게 전화를 걸어 원조를 청했다.
물론 억지로 그들을 끌어들인 것은 아니었다. 불원간 양일이 회사로 찾아갈 눈치더라고, 슬쩍 저들의 피해의식을 자극해주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겁주었더니, 그들은 툴툴거리면서도 미적미적 제발로 기어들어 이 일에 가담한 것이었다. - P272

"빌어먹을, 다방 말고 또 어데가 갈 데 있어?"
양일은 잠깐 주저하더니 거의 애원하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나 소주 딱 한잔만 사줘." 나는 그 절실한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이애가 정신 있나 없나, 돈이 필요한 건가 술이 필요한건가, 도대체. 이렇게 생각하다가 혹시 양일이 알코올중독이 아닐까 하는 예감이 불쑥 치밀었다. 아직 벌건 대낮인데 만나자마자 술부터 찾다니, 그저께도 대낮부터 술 취해서 비틀거리고 있었지 않은가. - P274

"아줌마, 여기 장사 좀 하시오!" 하고 인호는 여태 주문받으러오지 않는 주모에게 버럭 소리 질렀다. 저 자식이 술을 얼마나 팔아주려고 저렇게 큰소리지? 분명 물색 모르고 저 지랄은 아닐 테고필시 여기까지 끌려온 분풀이를 나한테 해볼 셈인가보다. 술값을왕창 나한테 뒤집어씌우려고? 어림도 없지. 술값은 절대 이백원을초과해서는 안되지, 안돼. 나는 이렇게 조바심이 생긴 나머지 다급하게 말했다.
"아주머니, 그냥 간단하게 주세요. 이홉들이 소주 반병하고 오이좀 주세요."
"히야, 많다. 소주 반병이라니." 인호는 내 속셈을 다 알겠다는듯 빈정거렸다.
상준이 탁자로 바싹 붙어앉더니 눈썹을 추켜올리고 양일을 건너다보았다.
"너 어떻게 된 거야, 그 꼴이?" - P276

"그렇게 마시고 싶거든 내 것도 가져가." 인호가 술잔을 앞으로내밀면서 한술 더 떴다. 그러나 양일은 어색한 웃음을 흘릴 뿐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앞에 술잔이 없으니깐 괜히 허전해서 그래." 하긴 그렇다. 술좌석에서 술 떨어지면 일어날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만난 지고작 삼십분, 아직 할 얘기도 많고 약속한 만원 돈도 있는데, 술은금방 떨어져버리고 양일은 그것이 불안한 것이리라.
"좋아, 그럼 더 먹지. 제기랄, 감질나게 소주 반병이 뭐야." 인호는 이미 양일이 쪽으로 밀려가 있던 술잔을 도로 찾아들고 홀짝 비우더니 주모에게 소리쳤다.
"아줌마, 여기 쐬주 한병 더 가져오시오. 돼지갈비도 한대씩 구워주시고, 제기랄, 삼수갑산 가더라도 먹어야지." - P278

드디어 양일이 ROTC 장교로서 복무한 군대에서 불명예제대를한 사실이 드러났다. 우리가 까맣게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당직사관 하던 날에 보급창고 퀀셋에 화재가 났던 것이다. 불명예제대,
이 치명적인 불명예를 우리 앞에 털어놓자 모든 것은 자명해졌다.
그때부터 줄곧 내리막길, 파면이란 결격사유 때문에 취직은 안되고 사업은 실패하고 결국 이백만원 빚을 지고 숨어 지내다보니 이지경에 이른 것이다. - P280

그런데 웬걸, 거기에도 실패가 있었어. 한달 전인데 도로 확장 공사에 쫓아다녔지.
연도의 집을 때려부수는 작업이었지. 참 신나게도 일했구나. 시멘트블록 벽에다 루핑 지붕 한 것들 있잖아. 그따위 판잣집은 나 혼자서 단 삼십분 내에 완전히 작살낼 수 있었지. 난 상체를 벌거벗고 망치를 휘둘렀어. 블록 벽은 참 허망하더라. 풀썩풀썩 매가리 없이 잘도 허물어지는 거야. 내가 하도 신바람 나게 일을 하니깐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철거민들이 날 미친놈이라고 욕질했어. 나하고한조가 되어 일하던 인부가 창피해할 지경이었다니깐. 그러거나말거나 난 마구 때려부쉈어. 제미, 어디 집 같은 걸 갖고 얘길 해야지, 이건 코딱지 같은 게, 그것도 집이라고 헐린다니깐 아쉬워서 서성거리는 꼴이라니. 에잇 빌어먹을, 나는 핏대가 나서 더 기승을 부렸던 거야.
이제 우리 셋은 양일이 일으켜놓은 흥분의 소용돌이에 여차하면 말려들 아슬아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상준은 갑자기 위치가뒤바뀌어 경청하는 입장이 된 것이 불안했던지 끙 하고 헛기침을했다. 인호도 건성으로 얘기를 들어준다는 듯이 딴전을 보기 시작했다. - P281

"그 집 부수다가 그만 허리를 비끗해먹었어. - P282

"이젠 너희들처럼 취직이나 해야지."
"아깐 불명예제대라고 하고선......" 인호가 물었다.
"너네들이 다니는 큰 기업체는 몰라도, 조그만 직장에 기계 담당쯤이야 안 받아줄라구, 설마. 말만 잘하면 다 된다더라. 대학 동기들도 만나보고 교수도 찾아볼 생각이야. 그래서 꼭 만원이 필요한거야."
그 말을 듣자 나는 여태 양일이 일류대 기계과 출신이라는 걸까맣게 잊고 있던 것처럼 정신이 바짝 들었다. 술기가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하긴 그래. 일류대 출신이 그까짓 결격사유 때문에 취직못할라구.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괜히 마음이 허전해졌다. 금방까지도 아등바등하던 일이 어이없게도 너무 쉽사리 결말난 것이다. - P284

"할 수 없잖아. 술값 이천삼백원, 택시비가 팔백원이야. 깎자구"
하고 상준은 만원에서 육천구백원으로 깎아내린 것이다. 양일은석쇠 위에 까맣게 타 돌멩이처럼 굳어진 돼지고깃점을 바라볼 뿐아무 대답이 없었다. 찡그린 이마에 더러운 땀이 뻘뻘 흘러내리고있었다. 화를 참는 게 분명했다. 육천구백원, 육천구백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는 참다못해 만원권 한장을 꼬불쳐둔 비상금을 꺼내려고 도장주머니에 손가락을 찔러넣었다. 그러나 대번꼬깃꼬깃 접힌 새 돈의 딱딱한 모서리가 손끝을 따끔 찌르자, 나는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깝게 생각은 마. 이 술을 네가 산다고 생각하면 간단한 거야.
자, 이 돈 받고 네 손으로 술값을 지불해" 하면서 상준은 돈을 양일의 앞에다 놓았다. - P285

"너 정신 있어, 없어? 그 돈 가지고 술 먹겠다니. 나가자구, 다 끝났는데 왜 앉아갖구 그래?" 내가 이렇게 쏘아붙이자 양일은 무섭게 나를 노려보았다. 돈 만원에 친구를 팔아먹은 자식, 너는 유다야, 유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왕 일이 이따위로 어긋난 바에야 내 나름의 핑계가 없을 수 없다. 나도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이 새끼야. 이게 무슨 꼬라지야. 넌 자존심도수치감도 포기해버렸냐? 네가 오늘 분노를 느꼈다면 그거야말로다행한 일인 줄 알아. 너의 죽은 감정을 일깨워준 것만 해도 무척고맙게 생각하라구.
양일을 소줏집에 놔둔 채 먼저 나온 우리 셋은 택시를 타고 강건너 마포 공덕동 네거리에 다다르자 한시간 동안 맥줏집에 들렀다. 단단히 곤욕을 치른 뒤라 맥주 맛은 각별히 좋았다. 거기서 우리는 양일이 틀림없이 알코올중독일 거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니 취직 얘기란 것도 다 엉터리이고 돈 떨어지면 또 나타날지모르니 그땐 아주 매정하게 굴어야 한다고 서로서로에게 다짐하였다.
팁까지 합쳐 그 집 술값은 만이천원이었다. - P286

창가에 앉아 바둑책을 뒤적거리며 종일 누이를 기다리던 완주는설핏 잠들었다 깬다. 꿈에 그는 어떤 흰 길을 곧장 걸어가서 막다른 골목의 벽에다 가슴팍을 부딪쳤는데 잠이 깬 다음에도 그 흰길의 어슴푸레한 잔영이 눈앞에 얼찐거리면서 좀처럼 물러가지 않는다. - P288

그때 문득 골목 안에 인기척이 났다. 시멘트 포석을 때리는 야무진 구두굽 소리. 똑똑똑. 숨을 바짝 죄면서 발소리의 궤적을 좇는다. 혹시 누이가 아닐까? 그러나 발소리는 조금 다가오다 말고 모퉁이를 돌아 홀연 사라져버리고, 뒤미처 자전거 지나가는 소리가들려왔다. 치르륵, 자전거 체인 감기는 소리가 흐르는 물소리처럼급히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이윽고 앞마당에서 수돗물 트는 소리가 시원스럽게 일어나고 빨래를 물에 휘휘 헹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이 집에는 완주말고도 방 한칸씩 세 든 가구가 셋이나 되어서 수돗가는 저렇게 하루 종일 붐빈다. - P289

한달 보름동안이나 저렇게 빨랫감을 쌓아놓고 있는 것은 순전히 누이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이제나저제나 조바심 태우며 기다리는 누이 때문인 것이다. 빨래는 줄곧 누이가 도맡아 해오던 일이 아닌가. 심지어는 나와 약혼 사이던 인정이가 하겠다고 나서도, 결혼한 다음에실컷 할 걸 뭐 벌써부터 그렇게 덤비느냐고 빈정거리면서 막무가내로 마다하던 누이가 아니던가. 그런 빨래인데 낸들 어떻게 손을대랴. 누이를 기다리며 쌓아놓은 저 빨랫감을 만약 지금 새삼스럽게 들고 나가 빨아버린다면 그건 어쩐지 기다리다 못해 지쳐서 누이를 아주 포기하는 것처럼 불길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기다리기를 포기하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야. - P290

그런데 아무 소식 없이 누이의 발길이 끊긴 지 벌써 한달 보름이되었다. 막내 완석이도 인정이도 오지 않는 저 골목길, 심지어는 완석이의 행방 때문에 극성맞게 찾아오던 정보과 최 형사도 발이 끊겼다. 설마 누이마저 잃어버리는 건 아닐 테지. 완주는 불길한 생각을 떨쳐내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 P292

그런 사이란 너무 오래 질질 끌면 안 좋다지 않니."우리막내 완석이 건 때문에 결혼을 미루어온 것을 뻔히 알고 있는 누이가 왜 하필이면 그날따라 그런 말을 했을까? 이젠 다 큰 동생의 세탁물 뒤치다꺼리가 지겨워졌다는 뜻일까? 혹시 인정이와의 관계가 이미 거덜나고 만 사실을 지레짐작하고서 슬쩍 넘겨짚어보느라고 한 말은 아닐까? 그게 끝장난 것도 지난 8월이었으니까 벌써 두달이 다 되어간다. - P294

서울에 도착하는 대로 전화해요. 한번만 더 만나요. 완주의 손에서 떨어진 엽서는 뜨거운 창틀에서 오그라붙고 있었다. 그런데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엽서를 받고 나흘 후 사무실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리려는데 갑자기 전화번호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는 건지? 일년 가까이 줄곧 그의 손가락 끝에 매달려 있던 그 타성의 숫자를까먹고 말다니, 정말 그럴 수도 있는 걸까? - P295

인정이 또 겨울이 왔네. 남녀가 갑자기 가까워지는 계절이지. 사람 체온이 환장하게 그리운, 음탕하게 오슬오슬 추운 계절이야. 그래서 약혼한 사이들은 요즘 부쩍 결혼을 서둔다지 않아. 겨우내 꼭붙어서 지내려고 말이지. 남들은 그런데 우리는 어쩌다 일이 거덜나고 말았나. - P296

그러다가 별안간 최 형사의 발길이 뚝 끊어지고 말았다. 혹시 완석이가 잡힌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수사를 중단할 까닭이 없을 텐데, 이번엔 노상 피해 다니던 완주 쪽에서 오히려 안달나서최 형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뜻밖의 사실은, 완석이가 처음 지목됐던 것처럼 주동자가 아니라는 것이 조사 결과 밝혀졌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자수 형식을 밟고 자진출두하지 않는 한 끝난 일이아니므로 완석이가 돌아오거든 즉시 데리고 와달라는 부탁이었다.
완석이 놈이 직접 그 소요의 주동자가 아니라는 말에 완주는 안심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새로운 불안이 더럭 치미는 것이었다. 중이 두려워 도망 다니는 게 아니라면 도대체 녀석의 행방불명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나? 단순한 실종? 어디서 뺑소니차에 치여서한강물에 버려진 거나 아닐까?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렇게 섣불리 죽을 놈이 아니야.
일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완석이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게다가 이젠 완석이의 행방을 알려고 드는 사람도 없다. 최 형사도이젠 그 일에 흥미없다는 표정이고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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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삼촌 ㅣ 현기영 중단편전집 1
현기영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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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보고] 현기영 중단편전집 1 『순이 삼촌』 중 「아내와 개오동」
: 1970년대 언론 통제 속 지식인의 고뇌와 좌절, 그리고 아내가 떠안은 생활고

1. 작품 개요

가. 작품의 기본 성격
ㅇ(작품성격) 「아내와 개오동」은 제주 4·3의 역사적 상처를 직접 다룬 작품이라기보다, 신문사 부조리 속에서 회사를 뛰쳐나온 전직 기자 석규의 무력감과 가정의 균열을 다룬 작품임.
ㅇ(시대배경) 작품의 배경에는 1970년대 유신체제하의 언론 통제, 신문사 내부의 갈등, 산업화 담론 속에서 은폐된 저임금 여성노동의 현실이 묵직하게 놓여 있음.
ㅇ(주요사건) 석규는 신문사를 그만둔 뒤 집 안에 틀어박혀 번역 일과 재취업을 생각하지만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아내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밖으로 나가 보험회사 외무사원 일을 하게 됨.
ㅇ(핵심내용) 작품은 조직의 부조리를 떠난 인물이 생활의 궁핍 앞에서 어떻게 무력해지는지, 그리고 그 무력감이 가장 가까운 사람인 아내에게 어떻게 부담으로 전가되는지를 보여줌.

나. 제목의 의미
ㅇ(제목구성) 제목의 두 축은 ‘아내’와 ‘개오동’임. 아내는 가장의 실직 후 생활을 감당하게 되는 현실의 인물이고, 개오동은 그 현실 앞에서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석규의 무력한 상태를 상징함.
ㅇ(대비구조) 아내는 집안 문제와 생활비를 실제로 감당하기 위해 움직이는 인물이고, 개오동은 집 안에 서 있으나 벌레와 불편만 만들어내는 존재임.
ㅇ(핵심의미) 「아내와 개오동」이라는 제목은 생활을 감당하는 아내와, 그 생활 앞에서 무력하게 굳어버린 석규의 모습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작품의 중심 갈등을 드러냄.

2. 서사 구조와 주요 내용

가. 벌레, 개오동, 방 안의 무력감
ㅇ(마당풍경) 작품은 석규가 혼자 빈집을 지키며 외출한 아내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시작됨. 마당의 개오동은 집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잎사귀에는 벌레가 들끓어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음.
ㅇ(생활불편) 개오동에서는 벌레와 똥이 떨어지고, 아내는 남편에게 벌레를 잡든지 나뭇가지를 치든지 하라고 요구함. 그러나 석규는 방에 틀어박힌 채 들은 척도 하지 않음.
ㅇ(무력상태) 석규는 개오동을 어떻게든 손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함. 이 장면은 신문사를 나온 뒤 생활 전체가 멈춰 선 석규의 상태를 그대로 드러냄.

나. 봉봉과 아침 산보
ㅇ(봉봉의등장) 석규는 집 안에 매인 개 봉봉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의식하면서 묘한 유대감을 느낌.
ㅇ(산보의시작) 석규는 봉봉을 데리고 아침 산보를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흐트러졌던 생활 리듬을 잠시 회복하는 듯함.
ㅇ(봉봉의사고) 그러나 봉봉은 트럭에 치여 다치고, 이후 더 이상 석규를 따라 산보에 나서지 않음. 석규의 생활 리듬도 다시 가라앉음.

다. 신문사를 뛰쳐나온 석규
ㅇ(퇴직배경) 석규는 단순히 실직한 기자가 아님. 그는 신문사의 선정주의, 왜곡된 기사 방향, 권위적인 조직문화에 환멸을 느끼고 회사를 박차고 나온 인물임.
ㅇ(초기태도) 그러나 석규를 처음부터 일관된 투사로 보기는 어려움. 그는 제작거부 농성 때도 생계 문제 때문에 백기를 든 심정으로 회사에 복귀한 경험이 있음.
ㅇ(조직변화) 회사는 기자들을 더 강하게 신문사에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변함. 전에는 기사 방향을 상의하는 여지가 있었지만, 이제는 데스크가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부장이 기자에게 반말과 욕설을 퍼붓는 구조가 됨.
ㅇ(핵심내용) 석규가 신문사를 나온 것은 순수한 영웅적 결단이라기보다, 생계 때문에 타협해 오던 사람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온 결과에 가까움.

라. 기사로 쓰이지 못한 사람들
ㅇ(취재지시) 석규는 남도 어느 해안 지방의 공업단지를 취재하여 르포 기사를 쓰라는 지시를 받음. 그러나 데스크가 원한 것은 저임금 노동의 실태가 아니라, 공장 새마을운동과 산업전사를 부각하는 기사였음.
ㅇ(문옥자와김진숙) 석규가 만난 이들은 홀어머니와 남동생을 부양하며 몸을 혹사하는 문옥자, 간염으로 공장에서 쫓겨나 영등포 사창가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가는 김진숙 등 산업전사로 포장할 수 없는 철저한 약자들임.
ㅇ(기사폐기) 석규가 쓴 기사는 부장의 손에서 욕지거리와 함께 쓰레기통으로 던져짐.
ㅇ(핵심의미) 작품은 언론이 약자의 현실을 기록해야 할 때조차, 조직의 이해관계와 이념적 틀에 맞지 않으면 그 목소리가 쉽게 폐기될 수 있음을 보여줌.

마. 파국과 퇴직 이후의 생활
ㅇ(폭발장면) 석규는 부장의 책상을 도끼로 부수고, 스스로도 심한 충격과 후유증을 겪음. 이는 더 이상 말로 저항할 수 없게 된 사람이 터뜨린 절망의 몸짓에 가까움.
ㅇ(퇴직이후) 회사를 그만둔 뒤 석규는 번역으로 생활을 이어가려 하지만 마르쿠제 번역은 진척이 없고, 신문을 읽는 일조차 괴로워짐.
ㅇ(생활불안) 석규는 술담배를 끊을 만큼 궁핍해졌고, 실직 생활은 점점 그를 방 안으로 밀어 넣음.
ㅇ(방세놓기) 아내는 생활비가 모자라자 자가 단독주택으로 보이는 집에 살고 있음에도 석규가 쓰는 방 하나를 세놓자는 말까지 꺼냄. 이는 생활의 압박이 집 안 공간까지 파고들었음을 보여줌.
ㅇ(핵심의미) 석규는 조직을 떠나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켰지만, 생활을 지키는 데에는 실패함.

바. 아내의 외출과 개오동 잔가지 치기
ㅇ(아내의외출) 석규가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아내는 밖으로 나가 보험회사 외무사원 일을 시작함.
ㅇ(수치와죄책감) 석규는 아내가 집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에 자신이 생활을 책임지지 못했다는 깊은 수치심과 자괴감을 느낌.
ㅇ(잔가지치기) 결말에서 석규는 부엌에서 식칼을 들고 나와 나무 위에 올라가 개오동의 잔가지를 쳐내기 시작함.
ㅇ(톱의필요) 석규는 큰 나무를 제대로 처리하려면 친구 완혁에게 톱을 사 오라고 부탁해야겠다고 다짐함.

3. 인물 분석

가. 석규
ㅇ(인물성격) 석규는 신문사의 부조리를 참지 못하고 회사를 나온 전직 기자임. 처음부터 굳건한 투사라기보다 생계와 명분 사이에서 흔들리던 인물임.
ㅇ(내면갈등) 그는 조직과 타협하지 않았다는 자존심과, 그 결과 아내에게 생활의 부담을 떠넘기고 있다는 죄책감 사이에서 갈등함.
ㅇ(핵심의미) 석규는 부조리에 분노하지만 생활 앞에서는 무너지고, 그 무너짐을 가장 가까운 아내에게 떠넘기게 되는 지식인의 모순적 한계를 띠는 인물임.

나. 아내
ㅇ(인물성격) 아내는 석규의 관념과 무력감이 내려앉은 집 안에서 벌레, 똥, 생활비, 남편의 침체를 모두 몸으로 겪으며 실제 생활을 감당하는 인물임.
ㅇ(생활담당) 아내는 개오동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하고, 방 하나를 세놓자고 제안하며, 결국 집 밖으로 나가 보험회사 외무사원 일을 함.
ㅇ(핵심의미) 아내는 석규의 구원을 기다리는 수동적 인물이 아니라, 무너진 생활을 실제로 떠받치는 현실적 인물임.

4. 작품의 핵심 주제

가. 양심과 생활의 충돌
ㅇ(양심의한계) 석규의 직장 이탈은 순수한 영웅담이 아님. 신문사를 박차고 나온 뒤에도 밥값과 생활비, 집안 문제와 가족의 생계는 고스란히 남음.
ㅇ(핵심의미) 작품은 옳은 선택이 곧바로 좋은 삶을 보장하지 않으며, 생활을 감당하지 못하는 양심은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현실적 상처를 남길 수 있음을 보여줌.

나. 1970년대 언론 부조리와 현실 왜곡
ㅇ(언론통제) 1970년대 유신체제의 언론 통제 속에서 기자 개인의 문제의식은 데스크의 위계적 질서 앞에서 꺾임.
ㅇ(약자의삭제) 언론 조직은 여성 노동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국가 주도의 산업전사 프레임으로 현실을 포장하며 약자의 목소리를 지움.
ㅇ(핵심의미) 언론이 권력과 조직의 논리에 종속될 때, 사회적 약자의 현실은 공론장에서 철저히 폐기됨.

다. 가장의 무력감과 생활 부담의 전가
ㅇ(가정의현실) 석규가 직장을 떠난 뒤 생활 부담은 아내의 노동으로 옮겨감.
ㅇ(행동의부재) 석규는 수치와 죄책감을 느끼지만 감정만으로 생활은 나아지지 않음.
ㅇ(핵심의미) 거대 조직의 부조리에 맞선 지식인의 좌절이, 결국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아내의 고통과 희생으로 떠넘겨지는 구조적 모순을 드러냄.

라. 개오동과 봉봉의 상징성
ㅇ(상징의대비) 벌레를 뿜어내는 개오동은 석규의 굳어버린 무력감을, 트럭에 치여 주저앉은 봉봉은 상처 입고 꺾인 석규의 자존심을 각각 상징함. 두 존재 모두 석규의 현신임.
ㅇ(잔가지치기) 석규가 식칼로 잔가지를 치는 행위는 자기 무력감을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 실천의 시작을 상징함. 그러나 톱이 아닌 식칼을 들었다는 점에서 아직 문제의 근원을 잘라내기에는 준비가 부족함을 보여줌.

5. 종합 평가

가. 작품의 의의
ㅇ(작품의의) 「아내와 개오동」은 1970년대 억압적인 언론 현실과 지식인의 좌절을 거창한 관념이 아닌, 밥벌이와 생활의 위기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잣대로 해부한 작품임.
ㅇ(문학적의미) 조직을 박차고 나온 기자의 영웅성을 기리는 대신, 방 안의 벌레, 읽히지 않는 번역서, 아내의 외출 등 생활의 구체적 붕괴 과정을 통해 양심과 생계 사이의 처절한 간극을 묘사함.

나. 최종 평가
ㅇ(종합평가) 이 작품은 생계 때문에 타협해 오던 인물이 끝내 폭발한 뒤, 생활의 자리에서 다시 무너지고 고립되는 과정을 날카롭게 보여줌.
ㅇ(최종정리) 개오동 잔가지를 치는 결말은 시대의 폭력 앞에서 무너졌던 지식인이 가정이라는 최소한의 생활 기반을 지키기 위해 다시 일어서려는 처절한 안간힘이자, 더 이상 아내에게 삶의 무게를 떠넘기지 않겠다는 윤리적 자각의 출발로 평가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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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독서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책을 펼치기만 하면 책장에서 마취성 기체가 피어오르는지 으레 눈이 스르르 감겼다. 눈을 아무리 부릅뜨고 책장을 노려봐도 활자들은 그저 생뚱생뚱하고 터진데로 물 새듯 졸음이 새어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적극적인 독서 방법으로 마르쿠제 번역을 해보는 것인데 그것 역시 별 효과가 없었다. 책은 안 읽히고 신문사에 복직되리라는 희망은 점점멀어져갔다.
그야말로 실직 칠개월은 수마(魔)와 싸운 세월이었다. - P176

모자라는 생활비를 충당하려면 번역 일감을 더 얻어야 할 텐데.
어서 완혁을 만나고 출판사들을 돌아다녀봐야지. 늘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외출은커녕 전화질조차 하지 않았다. 탈고한 원고를 갖다주고 새 일감을 받아오는 것도 아내에게 맡겼다. 기분전환으로 이따금 바깥출입도 할 만한데 내가 왜 이렇게 두문불출일까?
돈 쓰는 게 무서워서? 하기는 생활비에서 그가 용돈으로 축낼 여유는 없는 게 사실이었다. 한달 생활비 십일이만원이란 가장의 용돈없음을 의미했으니까. 그 때문에 술담배를 끊은 석규였다. - P177

하여간 석규가 개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의식한 것은 실직 후집에 붙어 있게 되고서부터였다. 보니까 개는 노상 매여 있는 것이었다. 아직 구속에 길들여지지 않았던지 죽을힘을 쓰며 몸에 매인자기 집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개를 보면 몹시 안쓰러운 생각이들었다. 그래서 걸핏하면 끈을 풀어놓기를 잘했는데 그 때문에 아내와 다툴 때가 여러번이었다. 개에게 ‘봉봉‘이라는 예쁜 이름까지몸소 지어준 아내가 저렇게 매정한 구석이 있었던가? 그러나 아내는 아내대로 억울하다는 듯이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 P178

"당신 기분은 다 알아요. 그렇지만 나까지 억압자로 몰진 마세요. 누군 개를 학대하고 싶어서 하나요? 온 집안이 더러워지니까그렇지. 아무 데나 똥을 싸고 개털이 온통 부엌에 날아드는데…………
"좋아, 그러면 똥은 내가 뉘지."
그래서 아침 산보가 시작되었다. 아침마다 규칙적으로 똥 누일 요량으로 산보길에 데리고 나갔다. 진돗개와 스피츠의 잡종인 이 개는 무척 석규를 따라서, 산보에 데려가려고 끈을 풀면 어떻게나 반색을 하는지 낑낑 앓는 소리를 내며 오줌을 질끔거리는 것이었다. - P179

이제 녀석은 제 아빠와 놀려고 들지 않는다. 아니,방에만 틀어박혀 있고 수염도 깎지 않은 제 애비가 오히려 두렵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엄마가 외출할 때면 (하다못해 시장에 갈 때라도) 녀석이 기를 쓰고 따라나서는 것은 아마 제 애비와 단둘이 있기가 싫기 때문이리라.
석규를 따르는 것은 오직 봉봉뿐이었다. 그는 아침마다 개를 데리고 강가로 나가 똥을 뉘었다. 아내는 이제 더이상 개를 붙잡아맬구실이 없었다. - P179

이렇게 시작된 아침 산보는 한편 석규의 정신건강에도 좋은 영향을 주어서 쇠락하기 쉬운 실직생활에 미미할망정 생활 리듬의 명맥을 이어가게 했다.
이 새벽의 눈부신 질주는 그러나 몇달 계속되지 못했다. 어느날아침 석규를 따라 강변도로를 횡단하던 봉봉이 트럭에 치이고 말았던 것이다. 개는 물 젖은 걸레뭉치처럼 아스팔트 위에 내던져져맥없이 깽깽거리고 있었다. 털가죽을 뚫고 흰 뼈가 튀어나오고 아스팔트의 황색 차선 위에 선혈이 번졌다.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랄까. 개는 뒷다리 하나가 으깨져 아주 못쓰게 되어버렸다. 그뒤부터 개는 아무리 잡아끌어도 산보길에 따라나서지 않았다. - P180

석규는 번역 일에 몰두하다가도문득, 자신의 목이 개끈으로 책상 다리에 붙들어매여 있는 게 아닌가하는 엉뚱한 망상에 사로잡혀 슬그머니 목을 쓸어보곤 했다. 어떤 때는 번역 원고지를 한칸 한칸 메꾸어가는 자신이 양계장의 닭과 동일시되기도 했다. 협소한 칸막이에 갇혀 열나게 알만 낳는 닭,
아내는 알을 낳자마자 거둬가는 양계장 주인이고...... 그러나 이젠알도 처음만큼 많이 낳지 못한다. 번역 일거리가 많이 줄어든 것이다. - P181

바람이 다시 불어와 오동나무 잎새들을 흔들어놓았다. 그 소리에 개가 설핏 눈을 떴다. 귀를 세우고 잠시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듣다가 이윽고 석규와 눈이 마주쳤다. 개 꼬리가 보일 듯 말 듯 두어번 맥없이 흔들렸다. 아마 반갑다는 모양이다. 그러나 개는 석규가 채 눈을 돌리기도 전에 먼저 눈을 도로 감고 앞발에다 턱을 묻어버리는 것이다. 개가 석규를 닮아가는 것일까, 석규가 개를 닮아良가는 것일까? 개도 분명히 제 주인처럼 병들어 있었다. - P181

"안되겠어요, 불면증까지 생기고, 이 방에 당신 혼자 내버려둬선정말 안되겠어요. 그러다간 정말 더 큰 병을 얻고 말아요. 이 방은썩은 늘 같애요. 그리고 나도 따로 자니깐 선머슴 닮아가는 것 같고………… 그래서 생각한 건데요, 이러면 어때요? 마침 생활비가 모자라 쩔쩔매는 처지이기도 하니, 방 하나 세놓기로 하죠. 이 방은 세古줘버리고 당신은 안방으로 건너오고...... 좋잖아요?" - P183

아내의 슬하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내가 말하는 불면증 치료 방법이란 묻지 않아도 뻔했다. 아내가 어느 여성 잡지 부록에서 읽었다는 것인데, 잠이 안 올 때는 방사가 약이라는 것이다. 아내의 합사 제의는 남편의 불면증을 위한다는 핑계를 세워 제 욕심을 채우려는 심사로 여겨졌다. 두어달 돌보지 않는 사이에 아내의 성(性)은 근지러워 참을 수 없을 지경으로 퉁퉁 부어오른 것이 아닐까?
석규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허구한 날 무력증에 빠져 있는 내가과연 아내의 분방한 성을 감당할 수 있을까? - P183

왜 이 더러운 미련을 털어버릴 수 없는가. 석규가 실직 칠개월동안 투쟁하여 이긴 게 있다면 그건 술담배 끊은 것과 신문을 끊은것이었다.
백해무익한 중독성의 기호물로서 요새 신문은 결코 술담배에 뒤지지 않는다. 저속한 주간지 스타일의 선정주의로 전락한 지 오랜일간지들, 여론을 선도하고 우둔한 독자를 준열히 꾸짖어야 할 언론이 오히려 독자의 천박한 기호에 영합하여 갖은 교언영색을 쓰며 구걸하는 꼴이라니! 석규는 퇴직금 받아가라는 통지를 받은 날,분연히 신문을 끊어버린 것인데, 그것으로 그가 다니던 신문사와의 마지막 연줄은 잘린 셈이었다. - P184

텅빈 편집실. 그림자가 얼룩진 책상과 의자들. 쓰다 만 기사 원고는 자다가 흘린 침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석규는 가슴이 답답하여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숨이 점점 가빠지고 온몸이 부풀린 듯팽창하는 느낌이더니 별안간 저돌적인 충동이 목울대로 치밀어올랐다.
그다음 순간 석규는 그 광기의 거센 폭풍 속에 휘말리고 만 것인데, 그 대목은 전혀 기억에 없었다. 다만 출입구 쪽 소화기가 비치된 코너로 달려가 벽에 붙은 소화용 붉은 도끼를 떼어낸 것만이 생각날 따름이었다. 의식이 싹 지워진 그 시간은 얼마 동안이었을까?
일분? 아니, 단 몇십초였을지 모른다.
잠시 후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는 눈앞에 벌어진 끔찍한 폐허를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부장의 책상은 처참하게 부서졌고 도끼는 뭉뚱한 뒤통수를 보이며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꽂혀 있었다.
전신에 땀이 비 오듯 했다.
혼신을 다하여 무섭게 도끼를 내리친 뒤 몇십초 동안의 무의식상태를 생각하면 석규는 지금도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날 생긴 오른쪽 눈 흰자위의 붉은 핏발은 오랫동안 삭지 않았고, 급격하게 몸을 혹사해서 생긴 어깨 근육통으로 그는 대엿새 동안 몸살을 앓아야 했다. - P188

그는 "젊은 친구가 안됐어. 틀림없이 머리가 어떻게되고 만 게야" 하고 짐짓 동정하는 투로 나왔으리라. 결국 석규는조울증 환자일 뿐이고, 부서진 책상은 새 책상으로 대치해버리면그만이었다. 파괴된 것은 책상 하나와 석규 자신뿐이었다. - P189

아, 그토록 외면해오던 자신이 다시 이념의 포로가 될 줄이야. 몇년 전 3월 제작거부 농성을 풀고 투항하는무리에 끼여 회사로 복귀했을 때, 그때 벌써 이념이나 대의명분 따위는 포기해버리지 않았던가. - P190

집에 있는 아내들은 그들대로 남편의부장으로부터 걸려오는 전화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드디어 누구누구가 부장을 만났더라는 소문이 나돌고, 누구누구는 건강 핑계대고 빠져나가고, 누구는 집에 잠깐 들렀다가 아내가 말리는 바람에 그냥 눌러앉아버렸다. 드디어 사주로부터 최후의 통첩이 오자투항자가 일시에 무더기로 생겨났다. 석규도 그 무리에 끼여 손들고 나갔다.
張您 - P191

그러다가 작년 10월에 부장 데스크로부터 남도 어느 해안지방의공업단지를 취재하여 르뽀 기사를 쓰라는 지시를 받았다. 데스크의 의도는 물론 저임금 실태를 문제 삼으려는 것이 아니고 공장 새마을운동에 입각하여 근로자들을 역경을 물리치고 분투하는 산업전사로 부각시켜보자는 것이었다. - P193

그녀가 부양해야 하는 가족 수는 홀어머니와 국민학교 다니는남동생 해서 단둘뿐이었지만 이렇게 식비라도 줄여야 자기 몫의적금을 부어나갈 형편이었다. 일년 만기 십오만원짜리 적금통장이그녀의 유일한 꿈이었다. 아니, 그 방엔 꿈이 없었다. 도무지 소녀다운 꿈이 없었다. 그녀의 악전고투는 차마 끔찍한 것이었다. 석규는 문옥자라는 이름의 그 여공을 역경을 딛고 분투하는 산업전사로 묘사할 수 없었다. 남의 집 쓰레기통을 뒤져 버린 생선 대가리를 주워 먹으면서까지 돈을 모았다는 어느 해의 여자 저축왕이고백한 소감 못지않게 그것은 소름이 끼치도록 끔찍한 사연이었다.
그녀의 입 가장자리에 퍼져 있는 마른버짐은 아마 비타민 부족 때문에 생긴 것이 틀림없으리라. 그러면서 그녀는 매일 하루 열두시간 노동을 해냈다. 실밥과 천조각에 파묻혀 불철주야 맥이 내려 틍퉁 부은 발로 미싱의 페달을 밟았다. - P195

그러나 이렇게 불철주야 작업에 혼신을 쏟는 옥자를 공장 새마을의 기수로, 산업전사로 묘사할 수 없는 것이 슬픈 일이었다. 그리고 두번에 걸쳐 산업훈장을 받은 바 있는 그녀의 고용주를 애국자로 묘사할 수 없는 것도 또한 안타까운 일이었다. 생산성을 높이고수출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그 고용주가 한 일이라곤 단지 옥자네를 싼 임금으로 고용해서 불철주야로 혹사시킨 것뿐이었다. - P195

석규도 전에 그런 공장데기 출신 작부를 독립문 근처 어떤 니나놋집에서 만난 일이 있었다. 그 여자는 한사코 술을 거절했는데,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른 작부가 그 이유를 귀띔해주었다. 그여자는 삼일 전 죽으려고 약을 먹었다가 주인아줌마한테 들켜 실패했는데 그때 먹은 독한 약 때문에 위장이 크게 상해 술을 못든다는 것이었다. 그때 석규가 받은 느낌은 과연 정확히 어떤 것이었던가. 그 말을 듣자 대번에 기분이 언짢아져 주흥이 깨지고 만 것인데 솔직히 말해서 연민의 정보다는 하필이면 이런 여자가 나에게 걸려들었나, 하는 재수없다는 생각이 앞섰다. 몸때가 되어 기저귀를 차고 나와 만져볼 수 없게 된 작부처럼. - P196

석규는 주소가 적힌 쪽지를 들고 영등포구 영일동으로 김진숙을찾아갔다. 알고 보니 영일동은 세상이 다 아는 영등포 역전 적선지대였다.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 하고 불길한 생각을 억누르며 찾아갔으나 예감은 그대로 적중되고 말았다. 의상실에 나간다는 것은거짓말이었다. 진숙은 융파자마 바람으로 툇마루에 쪼그리고 앉아제 발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 P197

그녀가 석규로부터 바라는 것은 옥자의 소식이 아니라 오직 잠깐 놀러 온 낮거리 손님이었다. 그녀의 의심 품은 눈빛은 "난 내 손님 앞에선 조금도 부끄럽지 않아요. 그런데 내 손님이 아닌 당신은 도대체 누구세요?" 하는 것 같았다. 석규는 결국,
어느 오쟁이 친구의 소개로 찾아간 낮거리 손님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방 안엔 손님들이 피우고 간식은 담배 냄새가 몹시 났다.
공장 새마을운동의 취재는 결국 옥자와 진숙이라는 여공의 이렇게 기구한 이야기를 곁들인 저임금 실태조사가 되어버렸다.
부장은 석규의 르뽀 기사를 두 손아귀에 꾸겨쥔 채 얼굴을 잔뜩붉히더니 심한 욕지거리를 해대는 것이었다.
"야! 너 누굴 놀리는 거야 뭐야? 이따위 기사를 써내는 저의가뭐야, 도대체!" 다음 순간 닷새 밤을 새우며 써놓은 백매 가까운 분량의 원고는 부장의 손에 발기발기 찢겨 쓰레기통에 처넣어졌다 - P198

데스크와 일선 기자 사이의 평형관계는 그 사건으로 여지없이 깨어지고 대신 주종관계로 탈바꿈했던 것이다. 부장은 걸핏하면 "나간 놈들 봐. 하나같이 별 볼 일 없이 빌빌거리는 꼴을, 자네, 그때내 말 듣고 기어들어오길 천번 잘했지" 하면서 노골적으로 은인 행세를 하려고 들었다.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네놈들이 지조를 꺾고투항한 주제에 밸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느냐고 아주 얕잡아보는것이었다. 그러나 석규는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른 분노를 꿀꺽 삼켜버렸다. 그럴 수밖에, 득세한 이데올로기의 화신인 부장은 도무지 불가항력이었다. 그에게 대든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자폭행위나 다름없었다. - P199

아내에게 죄스러운 생각도 없었다. 간염에서 온 진숙의 암담한수묵색 낯빛이 석규를 그런 감상에 빠뜨렸나보다. 썩어가는 그녀의 가슴을 건강한 자기 가슴팍으로 오래오래 눌러주고 싶었다. 그러나 진숙의 알몸에선 밤새도록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간염의말기 증상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후에 찾아갔을 때는 이미 그녀가 고향으로아주 떠나가버린 뒤였다. 진숙은 마지막 안간힘으로 붙잡고 있던끄나풀을 놓아버리고 경남 창원 고향땅의 따뜻한 흙 속에 검은 얼굴을 파묻으러 내려간 것이었다. - P200

아마 석규의 무력감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나보다. 이념은 그소유자를 파괴하는 법, 이념을 품는다는 것은 가슴에 시한폭탄을품은 것과 같아서 언젠가는 그 이념에 의해 스스로 파괴되고 만다.
석규도 오래가지 않아 그후 석달 뒤 부장 책상을 부수고 스스로 자폭하고 만 것이었다. - P201

이런 아내를 내보내놓고 빈집을 지키는 석규는 하루 종일 마음이 언짢았다. 아내를 시장에 내놓고 방매하는 느낌이었다. 진철이놈이 제 엄마를 따라다니니까 망정이지 그렇지만 않았다면 의처증이라도 걸릴 판이다. 안된다. 아내를 도로 불러들여 집 안에 앉혀놓아야지. 멀쩡한 남편을 두고 여편네가 가장 노릇을 하려 들다니! - P202

석규가 물러난 자리는 이미충원되어 있었다. 그 자리를 채운 사람은 다름 아닌 보이콧 사태 때 성명서를 초안하고 앞장섰던 초강경파 김충식이었다. 단단한 무쇠가 오히려 잘 부러진다고 하던가, 김의 투항은 완혁네들에게 큰 물의를 빚었던 모양이었다. 완혁은 이러한 사실을 전화로 알려주면서 몹시 분개했다. (석규는 여태 고집을 피워 완혁을 만나지않고 있지만, 그럼에도 완혁은 종종 전화를 걸어오곤 했다. 그는 석규에게 전화 거는 유일한 사람이자 유일한 뉴스원이기도 했다.) - P202

처외삼촌은 충분한 시간 여유를 줄 테니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언질은 육개월이 지난 지금도 유효했다. 그는 세월이 약이란 말을 믿는 느긋한 사람이었다. 다른 데도 알아봤으나, 꼬리표달린 전직 기자라는 걸 알고는 모두 한결같이 고개를 내두르는 것이었다.
이젠 더이상 버틸 수 없는 궁지에 몰린 것이다. 실직생활 막바지에 온 것이다. 이젠 별수 없이 처외삼촌 회사로 기어들어가게 되나보다 하는 각성이 폐부를 아프게 찔렀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지금 갑자기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고 결국 그렇게 낙착되고 말리라는 예상은 벌써 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도 무력증의 원인이었다. - P204

"진철이 거기 있죠?"
석규의 돌발적인 기세에 장모는 주춤하는 눈치다.
"아니, 진철이 놈은 별안간 왜 찾나? 그놈은 나하고 같이 잘 놀고있는데......"
역시 짐작대로구나. 눈앞이 어지럽고 귓속이 앵앵거리는 소음으로 가득 찼다. 진땀이 솟았다.
"진철이 엄마 어디 간다는 말 없었어요?"
"어딜 가긴 어딜 가, 이 사람아. 그놈의 빌어먹을 보험인가 뭔가때문에 나갔지. 하여간 극성이여. 취직한 지 보름도 못되는 제 동생한테까지 보험 들라고 성화를 안 부리나, 원."
"아니, 보험이라뇨?"
"자네, 여태껏 그걸 몰랐나? 그애가 요사이 보험회사 외무사원으로 싸돌아댕기는거."
"예?"
"어이구, 무심도 해라. 제 여펜네가 뭣 하면서 돌아댕기는지도모르고, 쯧쯧, 벌써 열흘도 넘었네." - P206

문득 경대 위에 걸린 달력에 볼펜 글씨로 울긋불긋 메모된 것이눈에 띄었다. 날짜가 쓰이고 난 여백에 뭐라고 잔뜩 씌어 있다. 뭘까? 자세히 들여다보던 석규는 흠칫 놀랐다.
이건 모두 내 친구들 이름이 아닌가. 14일: 산은 오문중 대리, 15일: 이인규 교수, 16일: 문수일 과장, 17일: 한웅섭 사장, 18일: 박순철 기자... 이런 식으로 30일까지 차곡차곡 메워져 있었다. 이게무슨 수작인가, 내 친구들과 만날 약속을 하다니.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힌 석규는 허둥지둥 경대 서랍을 열고 뒤져보았다. 다행히 거기에서 아내가 생명보험회사 외무사원이라는 증거가 나왔다. - P207

엎으라져 있던 봉봉이 놀라서 후달짝 일어났다. 나무 위로 기어오른 그는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렀다. 칼에 나무가찍히는 퍽퍽 소리와 흑흑 토해내는 숨소리가 동시에 일어났다.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들이 하나둘 잘려 아래로 떨어졌다. 장독대에떨어져 쨍그렁거리기도 하고 빨랫줄에 걸쳐 데룽거리기도 했다.
칼이 완전히 먹히지 않은 큰 나뭇가지는 몸을 실어 체중으로 부러뜨렸다. 땀에 흠뻑 젖은 러닝셔츠에 벌레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손아귀에는 초록빛 수액이 끈적거렸다. 이봐, 자네 외삼촌 회사가 아니더라도 내가 나서면 밥벌이할 곳은 있을 거야. 봉급이야 그만 못하겠지만, 참자. 이런 흉년의 시대에는 적게 먹고 가는 똥 싸는 법이야 이젠 돌아와! 인규 그 새끼 만나지 말고 그냥 와. 인규를 만날게 아니라 완혁이를 만나야 하겠어. 그놈처럼 살면 돼. 지금 당장전활 해야지. 전화하면 당장 우리 집으로 달려오겠지. 빌어먹을 자식, 얼마만이냐 삼년 만에 얼굴을 맞대는구나. 빌어먹을! 이놈의나무 질기긴 되게 질기군. 안되겠어. 완혁이한테 이따 저녁에 우리집올 때 톱 사오라고 부탁해야지. 숫제 밑동을 싹둑 잘라버려야겠어!
석규는 땀과 벌레로 뒤범벅이 된 러닝셔츠를 벗어던지고 나무위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놀란 봉봉이 제집 주위를 미친 듯 뛰어다니고 있었다. - P-1

복도 끝은 가파른 나무계단과 이어져 있다. 너는 잠깐 멈춰 서서계단을 굽어본다. 어서 바삐 이 병원을 떠나고 싶은 조바심 때문인지진한 콜타르 냄새를 흔들며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그 계단은 한층 위태로워 보인다. 금방 너의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뭔가속에서 휘딱 뒤집히는 듯 어지럼증이 심하게 일어난다. - P212

공장이 문을 닫은 지 벌써 석달. 공장장은 불황 때문에 당분간휴업하니 집에서 쉬고 있으면 연락하마고 했다. ‘당분간‘, 그리고
‘곧‘이라고 말했지만 그게 벌써 석달이 되어버렸다. 석달. 벌써 그렇게 됐나 하고 너는 놀라지만, 어제저녁 이 병원 수술실에서 너의배를 만져보던 의사도 임신이 석달쯤 된 게 아니냐고 말하지 않았는가. - P213

그때 위에서 계단 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포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 의사였다. 그는 상체를 꾸부리고 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창을 통해 들어온 노을빛에 둘러싸여 그의 몸 윤곽은 불붙고있는 듯하다. 의사는 너에게 무슨 용무가 있는 듯이 보인다. 뭘까?
응접실 금붕어를 죽인 사실을 눈치챈 걸까? 다시 수술실에 가두고벌거벗기려는 걸까? 너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간다. - P214

창녀 단골 의사인 저 남자가 두려웠다. 창녀 환자들 가운데서처녀 한명을 적발해놓고 그는 능청을 떨었던 것이다. "남자의 동의가 있어야지, 곤란한데" 하면서 너의 자초지종을 추궁했다. 비밀을파헤치고 말리라. 너의 아랫배에 잉태한 죄를 긁어내기 전에 죄의내력을 듣고 말리라. 너는 수술대의 써늘한 비닐 커버 위에 누워바들바들 떨었다. - P215

야근까지 하고 나면 사생활이라곤 전혀 없었죠. 이년 동안 노상 바쁘고 피곤했어요. 그러다가 공장 문이 덜컥 닫히자 갑자기 허망해지고만 거죠. 망연자실해서 괜히 실없는 웃음이 샐샐 새어나오고, 결국 옆자리에서 재봉일 하던 준식이와 같이 자고 말았어요. 열흘 뒤엔 같이 자취하던 동숙이 몰래 도망쳐나와 준식이와 합쳤어요. - P215

"참 허망한 얘기구먼. 공장 문은 닫히고 놈팽이는 군대 가고 돈은 떨어져, 또 고향엔 무조건 가기 싫지. 그럼 다 된 얘기 아냐? 조심하라구, 조심해. 이 동네 우리 단골 아이들 중에도 공장 출신이더러 있대지, 아마. 자, 이젠 마취약 기운이 퍼질 때도 됐는데.....
아가씨, 내 말 들려? 안 들려?" - P216

몽롱한 의식을 파먹는 포르말린 냄새. 의사의 말소리가 점점 불확실하게 멀어져갔다. 금속기구 부딪는 소리마저 먹먹하게 코 막힌 소리를 내고 골목길 쪽에 벌겋게 부풀어 있던 창녀 두어명의 웃음소리도 어렴풋이 멀어지고 통증. 아랫도리가 벗겨졌구나. 박속같이 마구 헤집어 우벼내버린다. 빡빡 긁어내버린다. 화끈거리는부젓가락으로 들쑤셔버린다. 난자당한 피투성이. 금붕어는 뽀드득밸이 터져 죽었어. - P216

진창을 조심하며 한참 걸어가다가 너는 제풀에 깜짝놀라며 멈춰선다. 거기가 준식이의 셋방으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벌써 디피점 앞까지 와버린 것이다. 내가 어느새 이 길로 들어섰나? 동숙이의 자취방을 찾아가는 길이었는데・・・・・・ 너는 슬며시 맥이 빠져버린다. 그렇다. 석달 동안에 이 골목길은 너의 무의식 속에 아주 찰거머리같이 달라붙어버린 것이다. 습관, 그 지겨운습관에 이제 너는 넌덜머리 난다. 어떻게 할까? 그 셋방은 오늘 판사람이 세 들었을 텐데.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주인집에 맡겨둔 옷가방을 찾아 나올까? 동숙이를 만나보고 모레쯤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가방을 들 힘이 있을지 몰라.  - P220

우린 석달 동안 방에 갇혀 맨날 그짓만 했단다. 정말 지겨웠어. 너한테로 얼마나 돌아가고 싶었다고. 이 골목에서 도망치고 싶었어. 그러나 그게 안되더라. 나중엔 될 대로 되라, 아주 자포자기였지. - P221

여중생 교복을 한 너의 얼굴은 사진관 주인에게 빼앗기고 그 진열장이 자리 잡은 시외버스 정류장앞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 그 얼굴은 수많은 시선에 뒤얽혀서 더러운 모욕을 받고 있었다. - P221

‘모친위독급히귀향바람부친‘. 전보 내용이 너무 엉뚱해서너는 믿지 않았지만 부친이 당장이라도 상경하여 들이닥치면 어쩌나 하고 노상 근심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사방에서 쑤군거리며 몰래 불러가는 너의 아랫배를 손가락질했다. 동숙이도 한패가 되어너를 비웃는 것 같았다. 너는 다시 그들에게로 돌아가고 싶었다. 준식이의 자취방에서, 이 골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 P222

그것은 밤마다 세번씩 준식이의 자취방을 뒤흔들던 소리였다.
아무리 그짓에 몰두해도, 한밤중 잠에 취해 있어도 허사였다. 벽에걸린 옷가지들은 유령처럼 춤을 추고, 턱은 덜덜 떨리고, 육중한 기차바퀴가 거침없이 굴러와서 허연 강철빛의 모서리로 너의 벌거벗은 가슴을 가르고 질주하는 것이었다. - P223

동숙이의 자취방으로 가는 길은 넓은 공터 가운데로 뚫려 있다.알싸한 쓰레기 냄새. 어둠속에서 연탄재들이 발에 툭툭 차인다. 동숙이를 만나면 먼저 무슨 말을 할까? 뭐라고 거짓말을 둘러대지?사실대로 말할까봐. 너무 피곤해. 거짓말할 힘도 없어. 따뜻한 아랫목에 동숙이랑 나란히 누워 언 등허리를 녹이고 싶어. 따뜻한 눈물을 흘리고 싶어. 동숙아, 나 많이 다쳤나봐 나 좀 만져줘. 이 겁먹은응어리를 으깨뜨려줘. 난 금붕어를 죽여버리고 말았어. - P224

"거기서 뭘 하지?" 주인아저씨였다.
"안녕하세요?"
"아이고, 오랜만이구먼, 인숙이."
"동숙일 찾아왔는데요."
"아니, 몰랐나? 이사 간 지 두달도 넘었는데." - P224

"혹시 시골 내려간다고 안 그랬어요?"
"그런 말은 없었는데…………… 아마 서울 어디에 눌러 있겠지."
너는 인사하고 돌아선다.
"공장도 쉬는데 시골이나 내려가지 않고...... 쯧쯧, 몸조심들 해야지."
뒤에서 주인아저씨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뜻에서몸조심하라는 말이리라. 몰래 눈물이 흘러내린다. 벌써 결딴나고말았어요. 몸이 결딴났어요. - P225

누군가 몸에 손을 댄다. 순간적으로 손바닥 감촉에 저항하며 전신이 뻣뻣해진다. 좀 옆으로 비켜선다. 그래도 손은 따라온다. 넓게편 손바닥이 바들바들 떨면서 꾸준히 움직인다. 손은 허리에서 허벅다리에 이르는 만곡한 선을 정확하게 더듬어 드러내고 있다. 부르르 경련이 일어난다. 다시 몸을 옆으로 움직인다. 그래도 손바닥은 따라왔다. 너는 지겨운 듯 축 늘어져버린다. 동숙아, 동숙아.
그러다가 너는 더 참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몸을 흔들어댄다.
남자 손이 떠났다. 그 흉측스럽고 뻔뻔한 얼굴을 찾으려고 고개를돌린다. 그러나 주위에는 모두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뿐. 그 엉큼한 손은 어디로 사라졌나? 승객들은 허공의 우연한 한점 혹은 앞사람의 뒤통수에 눈을 둔 채 멍청하게 굳어져 있다. - P227

"아가씨" 옆에서 귓전을 할퀴는 낮은 목소리. 조바심이 일어났다. 꿈결엔 듯 밀려온 이 목소리에 누군가 딴 사람이 대답해주기를기다린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선택한 건 역시 너다.
"핸드백이 열렸네요." 원통형의 털모자를 쓴 젊은 여자다. 정말 핸드백은 붉은 속을 내보이며 입을 아, 하고 벌리고 있다. 죽은 금붕어를 싼 흰 손수건! 얼른 스냅을 잠갔다. 딱, 하는 울림 소리. 누가 핸드백을 열어보았구나. 아까 그 사내다. 아까 몸을 만지던 그사내는 단순한 치한이 아니었구나.
"뭐 잃어버린 거 없어요?" 여자는 더 참견하려고 든다. - P228

동숙아, 난 금붕어를 죽이고 말았어. 젖꼭지는 까맣게 타버리고. 아기가 죽었어. 아랫배에 찬바람이 가득 찬 휑한 공동, 우벼낸 박속같이 텅 비어버렸어. 동숙아, 허전해 죽겠네. 이젠 버스를 내려야겠어. 어디 산으로 가서 이금붕어를 깨끗한 흙으로 묻어주고 올래. 그러나 몸은 점점 무거워졌다. 머릿속은 백열된 뇌수, 뇌수가 두개골 벽에 아프게 부딪치는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 P229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빛을 받아 아까 본 푸줏간같이 시뻘겋다. 실컷두들겨 부숴버렸구나. 아주 작살내버렸어. 도살칼로 마구 난도질한 거야. 흰 가운에 튄 핏방울이 또 활활 타오른다. 아랫배에 출혈로 새하얘진 공동, 그 죽어버린 폐허에 다시 깊은 통증이 왔다. 폐허다. 폐허다. 이 봄에 저 집터에 풀씨가 눈뜨기 전에 사람들은 피치로 봉해버릴 거다. 물샐틈없이 치밀한 아스팔트로 포장되리라.
거기엔 생명이라곤 눈곱만큼도 없게 되리라. 고무타이어와 피치가맨몸으로 부대끼는 곳, 세우지 못할 미친 속력만이 난무할 거다. 그건 또, 죽음이야. 젖꼭지는 거떻게 죽어버리고・・・・・・ 동숙아, 아기가죽었어...... - P231

"아가씨, 제발 저것 좀 집어줘. 내 목발......" 너는 무서워서 손을 힘껏 뿌리친다. 막 후닥닥 뛰어 달아나려는데 이게 웬일인가. 사내는 시멘트 벽에 등을 모질게 쏠리면서 허재비같이 모로 픽 쓰러진다. 텅 빈 바짓가랑이 한쪽이 허공에 펄럭거린다.
외발이었구나. 오금이 바싹 오그라든다. 발이 얼어붙은 듯 뗄 수 없다. 그때 굴다리 안으로 두어사람이 들어서는 기척이 났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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