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무서워 혼났구먼. 무슨 처녀가 그렇게 힘이 세어." 그는 목발을 양 겨드랑이에 끼더니 텅 빈 바짓가랑이의 무릎께를 득득 긁었다. 너는 외면하지도 않고 그 긁는 모양을 빤히 바라본다. 남자는 취중에도 익숙하게 목발을 떼면서 벽에서 나왔다. "조심하세요." 너는 돌아서서 가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몸이 훈훈하게 덥다. 그때 뒤에서 그 남자가 혼자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하필 여기가 가려울까? 환장하겠네." 아저씨, 아저씨, 혹시 거기서 새살 돋아나오려는 거 아녜요? 봄되니깐 베어낸 그루터기에서 싹 트려고 가려울 거예요. 아저씨 너는 굴다리 밖으로 나오면서 올봄에는 저 아저씨에게 미끈한 종아리가 진짜로 돋아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참, 나도 약방에 들러야겠다. 그 의사가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려면 테라마이신을 사 먹으라고 했다. 어서 빨리 새살이 돋아나야지. 너는 약방 앞 쓰레기통 속에다 손수건에 싼 금붕어를 미련 없이집어넣어버린다. - P234
못 닿는 고향 제대 말년에 내 친구 박진호 병장은 돌연 사람이 변해버렸다. 제대를 한달 앞두고 내무실 최고 고참 병장이 되던 날, 진호는내무실 관례대로 졸병들을 집합시켰다. 누구나 최고 고참병이 되면 그 의식을 수행할 권리가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강자의 군림을은연중 알리고 그 기념으로 졸병들에게 돌아가며 더도 말고 딱 주먹 한대씩 골고루 배급해주는 일종의 세례식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비공식 행사는 부대가 주저항선으로 이동해온 후 세번이나 거르고 그냥 지나갔다. 열달 전에 제대한 하순필 병장은 워낙 위인이 심약해서 그랬다 치더라도 그뒤를 이은 제법 담차고 성깔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던 홍민기 병장이나 최근수 병장도 감히 그 의식을 거행하지 못하고 제대하고 말았다. 사실 그럴 수밖에없는 것이 적을 앞에 두고 실탄을 수시로 만지는 주저항선이고 보니, 혹시 졸병들 중에 어느 간땡이 부은 놈이 끼여 있어서 총을 들이대는 날이면 그건 진짜 낭패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진호는 주저 없이 이 행사를 결행한 것이다. 그는 이날을위해 특히 풀기 빳빳하고 주름을 날카롭게 세운 군복으로 갈아입고 팔각모를 깊숙이 눌러썼다. - P236
"모두 아구창을 꽉 물어! 이빨 부러져." 이 의식에는 일절 말이 없는 게 상례였으나, 진호는 아직 멋모르고 눈치를 살피는 신병 두 놈을 위해 특히 주의를 주었다. 한사람에게 딱 한대씩만 돌아가는 주먹맛을 어떻게 하면 본때있게 보여줄 수 있을까? 팔의 스윙이 너무 커서는 안된다. 팔을 힘껏 휘둘러 쳤다가 턱뼈가 어긋나거나 이빨이 부러지는 날이면 진짜 낭패인 것이다. 그러니 쇼트 훅으로 짧게 먹여 쓰러뜨려야 하는데 그게 기술이다. 진호는 손에 짝 달라붙는 양가죽 장갑을 끼면서궁리를 했다. 솜씨가 서툴렀다간 망신만 당한다. 상대가 단 한번에나가떨어지지 않으면 그놈은 두고두고 다루기가 힘들어지는 법이야 - P237
진호는 신속한 동작으로 몸을 부렸다. 억눌린 비명이 잇따라 터지고 내무실 안은 일시에 낭자하게 무너졌다. 쓰러졌던 졸병들은김 병장의 구령에 따라 다시 재빨리 일어나 정렬했다. 신병 한 놈이 피거품을 물고 있었다. 이빨이 나갔나? 빌어먹을, 아가리 꽉 다물라고 했는데, 진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해산을 명했다. - P238
결빙되어 소대장은 날마다 혼자서 스케이트날을 번쩍이며 얼음을지쳤다. 이제 진호는 2종계 사무를 조수에게 맡겨버리고 스스로 완전히열외로 빠져나갔다. 대신 그가 자원해서 맡은 일이란 허구한 날 내무실을 지키는 것이었다. 석유난로의 석면 유리를 통해서 널름거리는 불길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바람에 벙커의 문짝이 덜컹거리는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과 - P239
겨우내 강바람에 부대끼는 이곳은 바람 많은 진호의 고향 제주날씨와 비슷했다. 겨울바람이 스산스럽게 쓸고 다니는, 돌담이 높아 낮에도 컴컴한 골목쟁이, 그 얼어붙은 진창에 굵은소금 뿌린 듯희끗거리는 싸락눈, 4·3난리 때 죽은 송장들을 파먹고 날아올라 겨울바람 타는 바람까마귀떼, 이마를 누를 듯이 나직이 드리워져 좀처럼 걷히지 않던 음울한 구름떼. 그것이 얼마 후에 진호가 돌아가야한 고향이었다 - P239
"맞다. 이건 누에고치다. 제대 날, 나는 한마리 아름다운 성충이되어 뚫고 나갈 거야" 하고 진호는 중얼거려보는 거였지만 그때는이미 자기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질곡에 잡혀버린 것을 깨달았다. 썰렁한 내무실에서 침낭 안의 온기는 언제나 넉넉지 못했다. 항시 으스스 춥고 안달이 났다. 손을 아래로 가져가 바지 단추를 열고 그 오죽잖은 온기를 조물락거려보기도 했지만, 전신을 옭아매는 몸살 같은 기운은 영영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한마디로 슬픔이었다. 진호는 슬펐다. 그렇지만 나는 왜슬퍼할까? 왜? 진호는 울먹거리며 생각해보았지만 종내 그 정체를알 길이 없었다. 아무튼 이 불가사의한 슬픔은 무슨 독약처럼 몸에 퍼져 진호를쓰러뜨리고 허구한 날 누워 지내게 만들었다. 밤에는 자주 가위눌리는 꿈을 꾸었다. 가위눌릴 때는 식칼을 머리맡에 두고 자라고 하던가? 궁리 끝에 언젠가처럼 실탄을 장전한 총을 매트리스 밑에 넣고 베개 삼아 자기로 했다. 악몽을 쫓는 데는 아무래도 식칼보다는더 무서운 총이 효과적이겠지. - P240
진호는 이렇게 그 슬픈 침낭 속에 뚤뚤 묶여 벙커 한구석에서 야릇하게 썩어가고 있었다. 단 한가지 분명해진 것은 고향에 돌아가기 싫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서울 같은 도회에 살고 싶은 것도아니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이었다. - P241
"짜식, 놀라긴, 순찰 좀 돌고 와야겠어." 거의 스무날 동안 한번도 초소 순찰을 나가지 않던 사람이 무슨바람이 불어서 저럴까? 양 상병은 헤드폰을 벗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진호를 올려다보았다. "제대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멋있게 순찰 돌고 와야겠어" 하고 진호는 방한복 위에다 탄대를 매면서 어설프게 씩 웃어 보였다. - P242
양 상병으로부터 그날 치 암호를 확인받고 나서 진호는 느닷없이 경비전화기를 붙잡았다. "각 초소는 나와라. 1초소, 2초소, 3초소. 좋아, 나 박 병장이다. 각 초소는 똑똑히 들어라. 2중대 쪽에서부터 고무보트로 보이는 검은 물체가 우리 쪽으로 이동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모두 자물쇠를 풀고 전방을 살펴라." - P242
진호는 그늘진 갈대밭을 벗어나 엄폐물 하나 없는 달빛 환한 갯벌 위 살얼음판을 우적우적 요란하게 밟으며 주저 없이 걸어왔다. 그가 십 미터 전방까지 다가오길 기다려 윤 상병이 벼락같이 정지명령을 내지르면서 동시에 조준한 총구를 약간 쳐들어 상대방 머리 바로 위에다 공포를 쏘았다. 순간 그는 흠칫 놀라며 그 자리에우뚝 멈춰 선 것인데, 초소병들은 그제야 달빛 속에 드러난 그 수염투성이 얼굴이 진호임을 알아챘던 것이다. 너무 어이가 없었다. 생포할 생각으로 공포를 쏘았기 망정이지 바로 쏘았더라면 어떻게될 뻔했다. 초소병들은 후에 두고두고 그 일에 치를 떨었다. 그런데 적반하장 격으로, 공포를 쏜 뒤 꽉 쥐었던 경계를 풀어주자 진호는 초소 안으로 펄쩍 뛰어들며 엉뚱한 욕을 해대는 것이 아니던가. "병신새끼들, 불과 십 미터 거리에서 사람 하나 제대로 못 맞혀? 금방 총 쏜 병신은 어떤 새끼야?" 그러고 나서 닷새 뒤에 제대를 했다. - P245
그렇다. 고향 가는 길은 정말 멀었다. 뿌연 새벽에 목포에 내린진호는 오후 다섯시 제주행 배를 타기 위해 하루 종일 기다려야 하고 그 배는 또 여덟시간 밤항해를 해야 할 판이었다. - P246
이렇게 배의 속력이 순식간에 떠들썩하던 선창가를 멀리 밀어내버리자 진호는 안달하면서 난간을 꽉 붙잡았다. 고향 간다는 생각이 실감으로 울컥 치밀어올랐던 것이다. 결국 고향에 가게 되는구나! 고향에 닿기 전에뭘 좀 생각해놔야 할 텐데... 이대로 그냥 갈 수는 없어. - P247
진호는 쇠줄 난간 위에 엎어져서 바다에다 으악으악 토악질을 시작했다. 뱃전을 기어오른 파도가 그의 등 위로 떨어졌다. 진호는 흠첫 난간에서 물러나면서 물 맞은 망아지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때 조타실로 가던 선원 한명이 진호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봐, 갑판에 나오면 위험해. 들어가라고!" 그러나 선원의 고함 소리는 파도 소리에 휩쓸려 아득하게 멀리들려왔다. 일단 시작된 토악질은 좀처럼 멎지 않았다. 그는 다시 쇠줄 난간에 엎어져서 토악질을 계속했다. - P249
삼십분쯤 후에 조타실에서 나온 아까 그 선원은 진호가 있던 자리에 훈련화 한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나흘 뒤 제주 산지 축항 제방 끝에서 멍석 한닢 깔아놓고 둥둥초혼굿이 벌어졌다. 무당은 진호가 남양호 갑판에 벗어놓았던 국방색 훈련화를 양손에 한짝씩 들고서 거친 겨울 바다를 향해 오래오래 흔들고 있었다.
넋이라도 돌아오라 넋이라도 돌아오라 구름에 싸여 오라 바람에 불려 오라 이신 신고 돌아오라 넋이여, 혼이여 넋이여, 혼이여 - P250
살 서울서 대학을 마치고 그해 고향의 모교에서 화학을 가르치던내 친구 익수가 가을 들어 이렇다 할 원인도 없이 별안간 병을 앓게 되었다. 머리가 그만 삐끗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하기는 마음만내키면 서울에서도 일류 회사에 얼마든지 취직할 수 있는 화공과출신이 낙향하여 훈장질을 시작한 것부터가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서울에서 내려온 그때 벌써 정신에 이상이 생겼지 않았나 하고 의심하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 P250
그러나 반년 남짓한 그의 교단생활은 짧았지만 별 탈 없이 지낸퍽 순조로운 것이었다. 그 반년 동안 그에게는 낙백(落魄)한 기미는커녕 오히려 신출내기 교사답게 남다른 정열로 충만해 있었다. 의욕 과잉으로 손찌검이 잦은 편이었지만, 학생들은 선배이기도 한 익수를 무척 따랐다. 그러니 발병은 어느날 느닷없이 닥쳐온 것이라고 한 그의 모친의말이 옳은 성싶다. 외딴 사람의 죽은 넋이 둘러씌인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발병의 조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무렵 익수는 내리 닷새 밤을 잠자리에서 가위눌리는 꿈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려고 베개에 머리를 뉘면 뒷골의 맥박이 전에 없이 팔딱팔딱무섭게 뛰놀았다. 그 맥박으로 베개 속의 메밀 껍질이 버석거리는소리가 귓속에 가득했다. - P251
이빨에 자신의 고환이 깨물리는 꿈. 그날밤도 잠들자마자 덜컥 그 이빨에 물렸다. 독아(毒)는 멀컹한 고환을 물고 조금씩 조금씩 깊이 파고들었다. 사력을 다해 버르적거리고 고함지르려고 애를 써도 전신이 생소금 맞은 갯지렁이처럼 흐물흐물 풀어져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손끝 하나 달싹할 수없는 무력감, 비명을 지르려고 바둥바둥 애를 쓰다가 간신히 잠에서 깨어났다. 외마디 고함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머니!" - P252
익수는 벌떡 일어났다. 고함 소리가 내 입에서 터져나온 것도 아니고, 잘못 들은 환청도 아니라는 것을 당장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것만 같다. 그래서 이 이상야릇한 동일시 현상에서 벗어나야만 해야겠다. 그때 어머니가 먼저 마루를 건너와 방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무서운 고함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어머니, 아까 그 고함 소리 들으셨죠? 이 동네 누가 미쳤나봐요. 그렇죠?" "아니, 그 고함 소린 네 방에서 났는데……… 네가 또 무슨 나쁜 꿈을 꾼 게로구나." 어머니는 걱정스럽게 익수를 바라보았다. - P253
"양병조 선생이라고요? 여기엔 그런 분 없는데요. "죄송합니다만, 한번 알아봐주세요. 혹시 다른 직장으로 옮기지않았나......" "잠깐 기다려보세요. 양병조 선생이라고, 여기서 근무한 적 있어요? 화학선생이라고 하는데." "아, 양병조가 아니라 양병주 선생인가본데 ・・・・・・ 그 전화 누굽니까? 월부장순가요?" "서울서 내려온 사촌누이래요." "사촌누이라고? 양병주 씬 죽은 지 삼년이 넘는데..... "예?" "부임한 지 두달 만에 자살해버렸어요. 저기 저 사라봉 자살바위에서 말이오. 육지 사람이었나본데…………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 사람이 양병줍니까, 양병줍니까? 예? 아, 그 사람 자살해버렸어요." - P255
그때부터 정말 육지 사내 양병주의 죽은 넋이 둘러씌었는지 익수는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냈다. 겉으로 보면 멀쩡한데 전에 없이 몹시 말을 더듬었다. 돌처럼 굳어지는 혓바닥을 누그러뜨려보려고 낮술을 걸쳤다. 술기운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교단에 설 수가 없었다. 교무실의 책상 서랍에는 항시 소주병이 가로누워 있었다. 심지어 다방 같은 데서 가까운 친구와 격의 없이 마주 앉아도 말을 더듬는 것이었다. 그래서 익수는 얘기 도중 잠깐 화장실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고 밖에 나가 몰래 소주를 마시고 들어오곤 했다. 갈수록 익수는 실어증의 진수렁에 깊이 빠져들어 허우적거렸다. 사람 만나는 것도 두렵다고 했다. 드디어 직장을 놓고 집에 들어앉자 익수는 완전히 자제력을 잃고 허물어져버렸다. 어머니가 불러다 해준 무당 푸닥거리도 소용없었다. - P256
그 절벽 끝에 널따란 자살바위가 돌출해 있었다. 그 밑을 이렇게밤새도록 서성거리다가 새벽에 돌아오는 그의 깎지 않은 수염에는언제나 성에같이 뿌연 바닷물 소금기가 올라 있었다. 이렇게 바닷가를 헤매던 어느날 밤, 익수는 사라봉 중턱 깎아지른 절벽 위의 그 자살바위로 기어올라 꽉 졸라맨 혁대 안에 두 손을 틀어넣고 허공에다 몸을 던졌다. 모래톱에 박힌 그의 몸뚱이는그렇게 두 손이 허리띠 속에 묶인 채 발견되었다. 아마 낙하 도중두 팔이 보기 싫게 허우적거리는 것이 싫어서 그랬으리라. - P257
버스정류장까지 거의 다 와서 인호는 택시를 타고 가자고 제의했다. 마침 빈 택시가 굴러온 것이다. 내가 얼른 반대할 구실이 떠오르지 않아 엉거주춤 망설이는데 인호와 상준은 눈 깜짝할 새에뒷좌석으로 굴러들어가 자리를 널찍하게 차지해버렸다. 자연히 운전사 옆 돈 내는 자리는 내 차지가 된 셈이었다. 저놈들이 택시요금을 나한테 떠맡길 작정이구나. 나는 일이 초장부터 어째 빗나가는 것같이 생각되어 기분이 언짢았다. 신길동까지 가려면 택시요금이 천원쯤 나올 텐데. 양일이 마련해달라고부탁한 만원 돈이 벌써 차질 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인호와 상준에게 할당해준 액수가 각각 삼천원씩이고 보면 나머지 사천원은내가 책임져야 할 몫이었다. - P260
가만있자, 궂은일이라..... 상준이 저놈은 이 말을 어디 딴 데서한 적이 있지, 아마 그렇지. 작년 겨울 눈길에서 교통사고로 죽은두진이 병원의 시체봉안실로 밤샘하러 가던 택시 안에서 지껄이던 소리다. 궂은일 보러 갈수록 택시 타고 가는 거라고. 나 혼자인 줄 알고 있다가 갑자기 셋이 나타난 걸 보고 양일은어떻게 느낄까?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그건 무척 기분 나쁜 일임에틀림없다. 아마 양일은 화가 나서 "이 새끼들 뭐야, 이 양일이가 죽었나 떼거지로 몰려들게" - P261
"너 양일이로구나" 하고 소리쳤던 것이다. 그렇게 양일의 출현은 나에게 반가운 노릇이던가? 하기야 사년 전에 이만원을 빌려간채 감감소식이던 녀석이 불쑥 나타나주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요즘 돈 이만원이라면 변두리에서 양복 한벌 맞추는 값밖에 안되지만사년 전엔 그것이 양복 두벌 값은 넉넉히 될 만한 돈이었다. 그러나 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 돈을 꼭 받아내겠다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결혼하기 전 일이니까 아내도 모르는 돈이다. - P262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드러내놓고 양일을 사년 동안착실히 죽여온 셈이다. 험담을 말아야지, 참아야지, 하고 다짐할수록 웬걸 가슴은 무슨 보람으로 뻑적지근해지고 자꾸 입술이 달싹거려지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그건 오장육부를 훑어내는 참기 어려운 가려움증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나는 그 돈을 빌려주는 순간부터 제발 갚지 말았으면 하고 은근히 바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아마 양일이 돈을 갚지 못할 지경으로 사정이 나빠지기를 소망했으리라. 그만큼 나한테는 붙잡고 늘어질 그의 약점이 소중했던 게 아닐까? 그는 일류 대학 출신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다니던 그 시골 학교에서 일년에 세명 배출할까 말까 한 대단한희소가치였다.1 - P263
이 해묵은 열등감, 그것은 고3 시절, 내가 양일을 상대로 벌였던무모한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양일과는 중2 때부터 가깝게 지내던 처지였는데 그게 그만 고3이 되자 여지없이 뒤틀리고 말았다. 학기 초 모의고사 때 저만치 뒤처져 있던 그가 여름방학 이후 나를앞질러버리자 내 눈에 불티가 일어난 것이었다. - P263
속살이 툭 튕겨나온다. 빌어먹을, 그래도 졸립다. 이번엔 집 밖으로나와 근처에 사는 양일네 집으로 염탐하러 간다. 대문 밖에서 기웃거리며 집 안 동정을 살핀다. 불기 한점 없이 집 안은 깜깜하다. 자식, 벌써 자는구나. 그제야 나는 비로소 안심이 되어 어둠속에서 배시시 웃는 것이었다. 두고 보자. 문턱 넘어갈 때가 중요한 거라구. 그러나 결국 일류대 지망에 멍든 것은 나였다. 두해 거푸 낙방맞고 겨우 낙착된 게 후기 대학 토목과였던 것이다. 그건 진짜 분통이 터질 노릇이 아닌가. 잠잘 것 다 자고 참견할 것 다 참견하던자식은 용케 합격하고...... 나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양일이이었혹시 날 속여가며 공부한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 P264
나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고향 친구들 모임에서 양일을 따돌릴궁리를 했다. 나의 주위 친구들 예닐곱이 모두 후기대 1, 2년생들이라 그 작업은 상당히 가능할 것같이 보였다. 게다가 나는 고3 때 반장을 지냈던 영향력을 십분 구사해서, 처음 몇개월은 그럭저럭 내의도대로 모임을 이끌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얼마나저열한 짓인지 그 당시는 미처 깨닫지 못할 지경으로 지독한 열패감에 시달렸던가보다. 따돌린다고 따돌려질 옛날의 양일이 아니었다. ‘일류‘의 힘은 실로 무서웠다. 밖에서 선배를 만나면 으레 우리는 도매금으로 양일의 동창으로 통해버렸다. 그가 우리 동기의 대명사로 우뚝 솟아버린 그 기정사실을 나는 도저히 뭉개뜨릴 재간이 없었다. 차츰 내주위 친구들은 하나씩 떨어져나가 양일을 옹위하기 시작했다. 몇개월 동안 공연히 나의 미친 편집증에 덩달아 휘말려들어 양일을배척하던 것을 후회하면서 말이다. - P265
이런 생각에서 아령을 시작했던 것인데 오히려 또 그게 화가 될 줄이야. 울퉁불퉁한 근육형은 십장이 제격이라고 위에서 생각했던지 나는 거의 이년 동안 지방의 현장을 전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시 서울 본사로 복귀되기는 했지만, 이미 지방에서 고생을 죽도록 한 터라, 나의 서울 근무는 자존심을 대폭 줄이는 것을의미했다. 부장 이하 일류대 출신들의 눈치 보는 일에 점점 이골이나자 내 팔뚝의 알통은 슬며시 맥 빠져 가라앉고 말았다. - P266
그때 별안간 양일이 눈에 띄었다. 나는 거의 무의식중에 철주 뒤로 가서 몸을 숨겼다. 내가 왜 그랬을까? 숨어 있다가 바로 코앞에불쑥 나타나 기습할 생각이었나? 아니다. 그게 아니었다. 비겁하게도 나는 양일을 아주 피해버린 것이었다. 그렇다. 양일은 터벅터벅걸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노란 헬멧을쓴 것도 아니고, 쇳녹물 먹은 작업복 입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이공사장 인부가 아닌 것이다. 때 묻은 와이셔츠를 바지 밖으로 너풀너풀 내놓고 맨발에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한길에서 슬리퍼를 끌다니, 혹시 저 녀석이 요 부근에 자동차 부속품상회를 가진 게 아닐까. 그런 가게가 요 근처에 즐비한데 - P270
그러나 역시 만날 사람은 만날 사람이다. 그날 그 자리만 모면했을 뿐, 양일을 만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오늘 또 어김없이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돈 만원을 가지고 신길동 진로주조 앞까지 나와달란다. 가래가 끓고 질긴 음색의 목소리. 나는 가슴이 섬뜩했다. 저 자식이 무슨 배짱일까? - P271
나는 생각다 못해 인호와 상준에게 전화를 걸어 원조를 청했다. 물론 억지로 그들을 끌어들인 것은 아니었다. 불원간 양일이 회사로 찾아갈 눈치더라고, 슬쩍 저들의 피해의식을 자극해주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겁주었더니, 그들은 툴툴거리면서도 미적미적 제발로 기어들어 이 일에 가담한 것이었다. - P272
"빌어먹을, 다방 말고 또 어데가 갈 데 있어?" 양일은 잠깐 주저하더니 거의 애원하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나 소주 딱 한잔만 사줘." 나는 그 절실한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이애가 정신 있나 없나, 돈이 필요한 건가 술이 필요한건가, 도대체. 이렇게 생각하다가 혹시 양일이 알코올중독이 아닐까 하는 예감이 불쑥 치밀었다. 아직 벌건 대낮인데 만나자마자 술부터 찾다니, 그저께도 대낮부터 술 취해서 비틀거리고 있었지 않은가. - P274
"아줌마, 여기 장사 좀 하시오!" 하고 인호는 여태 주문받으러오지 않는 주모에게 버럭 소리 질렀다. 저 자식이 술을 얼마나 팔아주려고 저렇게 큰소리지? 분명 물색 모르고 저 지랄은 아닐 테고필시 여기까지 끌려온 분풀이를 나한테 해볼 셈인가보다. 술값을왕창 나한테 뒤집어씌우려고? 어림도 없지. 술값은 절대 이백원을초과해서는 안되지, 안돼. 나는 이렇게 조바심이 생긴 나머지 다급하게 말했다. "아주머니, 그냥 간단하게 주세요. 이홉들이 소주 반병하고 오이좀 주세요." "히야, 많다. 소주 반병이라니." 인호는 내 속셈을 다 알겠다는듯 빈정거렸다. 상준이 탁자로 바싹 붙어앉더니 눈썹을 추켜올리고 양일을 건너다보았다. "너 어떻게 된 거야, 그 꼴이?" - P276
"그렇게 마시고 싶거든 내 것도 가져가." 인호가 술잔을 앞으로내밀면서 한술 더 떴다. 그러나 양일은 어색한 웃음을 흘릴 뿐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앞에 술잔이 없으니깐 괜히 허전해서 그래." 하긴 그렇다. 술좌석에서 술 떨어지면 일어날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만난 지고작 삼십분, 아직 할 얘기도 많고 약속한 만원 돈도 있는데, 술은금방 떨어져버리고 양일은 그것이 불안한 것이리라. "좋아, 그럼 더 먹지. 제기랄, 감질나게 소주 반병이 뭐야." 인호는 이미 양일이 쪽으로 밀려가 있던 술잔을 도로 찾아들고 홀짝 비우더니 주모에게 소리쳤다. "아줌마, 여기 쐬주 한병 더 가져오시오. 돼지갈비도 한대씩 구워주시고, 제기랄, 삼수갑산 가더라도 먹어야지." - P278
드디어 양일이 ROTC 장교로서 복무한 군대에서 불명예제대를한 사실이 드러났다. 우리가 까맣게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당직사관 하던 날에 보급창고 퀀셋에 화재가 났던 것이다. 불명예제대, 이 치명적인 불명예를 우리 앞에 털어놓자 모든 것은 자명해졌다. 그때부터 줄곧 내리막길, 파면이란 결격사유 때문에 취직은 안되고 사업은 실패하고 결국 이백만원 빚을 지고 숨어 지내다보니 이지경에 이른 것이다. - P280
그런데 웬걸, 거기에도 실패가 있었어. 한달 전인데 도로 확장 공사에 쫓아다녔지. 연도의 집을 때려부수는 작업이었지. 참 신나게도 일했구나. 시멘트블록 벽에다 루핑 지붕 한 것들 있잖아. 그따위 판잣집은 나 혼자서 단 삼십분 내에 완전히 작살낼 수 있었지. 난 상체를 벌거벗고 망치를 휘둘렀어. 블록 벽은 참 허망하더라. 풀썩풀썩 매가리 없이 잘도 허물어지는 거야. 내가 하도 신바람 나게 일을 하니깐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철거민들이 날 미친놈이라고 욕질했어. 나하고한조가 되어 일하던 인부가 창피해할 지경이었다니깐. 그러거나말거나 난 마구 때려부쉈어. 제미, 어디 집 같은 걸 갖고 얘길 해야지, 이건 코딱지 같은 게, 그것도 집이라고 헐린다니깐 아쉬워서 서성거리는 꼴이라니. 에잇 빌어먹을, 나는 핏대가 나서 더 기승을 부렸던 거야. 이제 우리 셋은 양일이 일으켜놓은 흥분의 소용돌이에 여차하면 말려들 아슬아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상준은 갑자기 위치가뒤바뀌어 경청하는 입장이 된 것이 불안했던지 끙 하고 헛기침을했다. 인호도 건성으로 얘기를 들어준다는 듯이 딴전을 보기 시작했다. - P281
"그 집 부수다가 그만 허리를 비끗해먹었어. - P282
"이젠 너희들처럼 취직이나 해야지." "아깐 불명예제대라고 하고선......" 인호가 물었다. "너네들이 다니는 큰 기업체는 몰라도, 조그만 직장에 기계 담당쯤이야 안 받아줄라구, 설마. 말만 잘하면 다 된다더라. 대학 동기들도 만나보고 교수도 찾아볼 생각이야. 그래서 꼭 만원이 필요한거야." 그 말을 듣자 나는 여태 양일이 일류대 기계과 출신이라는 걸까맣게 잊고 있던 것처럼 정신이 바짝 들었다. 술기가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하긴 그래. 일류대 출신이 그까짓 결격사유 때문에 취직못할라구.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괜히 마음이 허전해졌다. 금방까지도 아등바등하던 일이 어이없게도 너무 쉽사리 결말난 것이다. - P284
"할 수 없잖아. 술값 이천삼백원, 택시비가 팔백원이야. 깎자구" 하고 상준은 만원에서 육천구백원으로 깎아내린 것이다. 양일은석쇠 위에 까맣게 타 돌멩이처럼 굳어진 돼지고깃점을 바라볼 뿐아무 대답이 없었다. 찡그린 이마에 더러운 땀이 뻘뻘 흘러내리고있었다. 화를 참는 게 분명했다. 육천구백원, 육천구백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는 참다못해 만원권 한장을 꼬불쳐둔 비상금을 꺼내려고 도장주머니에 손가락을 찔러넣었다. 그러나 대번꼬깃꼬깃 접힌 새 돈의 딱딱한 모서리가 손끝을 따끔 찌르자, 나는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깝게 생각은 마. 이 술을 네가 산다고 생각하면 간단한 거야. 자, 이 돈 받고 네 손으로 술값을 지불해" 하면서 상준은 돈을 양일의 앞에다 놓았다. - P285
"너 정신 있어, 없어? 그 돈 가지고 술 먹겠다니. 나가자구, 다 끝났는데 왜 앉아갖구 그래?" 내가 이렇게 쏘아붙이자 양일은 무섭게 나를 노려보았다. 돈 만원에 친구를 팔아먹은 자식, 너는 유다야, 유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왕 일이 이따위로 어긋난 바에야 내 나름의 핑계가 없을 수 없다. 나도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이 새끼야. 이게 무슨 꼬라지야. 넌 자존심도수치감도 포기해버렸냐? 네가 오늘 분노를 느꼈다면 그거야말로다행한 일인 줄 알아. 너의 죽은 감정을 일깨워준 것만 해도 무척고맙게 생각하라구. 양일을 소줏집에 놔둔 채 먼저 나온 우리 셋은 택시를 타고 강건너 마포 공덕동 네거리에 다다르자 한시간 동안 맥줏집에 들렀다. 단단히 곤욕을 치른 뒤라 맥주 맛은 각별히 좋았다. 거기서 우리는 양일이 틀림없이 알코올중독일 거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니 취직 얘기란 것도 다 엉터리이고 돈 떨어지면 또 나타날지모르니 그땐 아주 매정하게 굴어야 한다고 서로서로에게 다짐하였다. 팁까지 합쳐 그 집 술값은 만이천원이었다. - P286
창가에 앉아 바둑책을 뒤적거리며 종일 누이를 기다리던 완주는설핏 잠들었다 깬다. 꿈에 그는 어떤 흰 길을 곧장 걸어가서 막다른 골목의 벽에다 가슴팍을 부딪쳤는데 잠이 깬 다음에도 그 흰길의 어슴푸레한 잔영이 눈앞에 얼찐거리면서 좀처럼 물러가지 않는다. - P288
그때 문득 골목 안에 인기척이 났다. 시멘트 포석을 때리는 야무진 구두굽 소리. 똑똑똑. 숨을 바짝 죄면서 발소리의 궤적을 좇는다. 혹시 누이가 아닐까? 그러나 발소리는 조금 다가오다 말고 모퉁이를 돌아 홀연 사라져버리고, 뒤미처 자전거 지나가는 소리가들려왔다. 치르륵, 자전거 체인 감기는 소리가 흐르는 물소리처럼급히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이윽고 앞마당에서 수돗물 트는 소리가 시원스럽게 일어나고 빨래를 물에 휘휘 헹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이 집에는 완주말고도 방 한칸씩 세 든 가구가 셋이나 되어서 수돗가는 저렇게 하루 종일 붐빈다. - P289
한달 보름동안이나 저렇게 빨랫감을 쌓아놓고 있는 것은 순전히 누이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이제나저제나 조바심 태우며 기다리는 누이 때문인 것이다. 빨래는 줄곧 누이가 도맡아 해오던 일이 아닌가. 심지어는 나와 약혼 사이던 인정이가 하겠다고 나서도, 결혼한 다음에실컷 할 걸 뭐 벌써부터 그렇게 덤비느냐고 빈정거리면서 막무가내로 마다하던 누이가 아니던가. 그런 빨래인데 낸들 어떻게 손을대랴. 누이를 기다리며 쌓아놓은 저 빨랫감을 만약 지금 새삼스럽게 들고 나가 빨아버린다면 그건 어쩐지 기다리다 못해 지쳐서 누이를 아주 포기하는 것처럼 불길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기다리기를 포기하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야. - P290
그런데 아무 소식 없이 누이의 발길이 끊긴 지 벌써 한달 보름이되었다. 막내 완석이도 인정이도 오지 않는 저 골목길, 심지어는 완석이의 행방 때문에 극성맞게 찾아오던 정보과 최 형사도 발이 끊겼다. 설마 누이마저 잃어버리는 건 아닐 테지. 완주는 불길한 생각을 떨쳐내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 P292
그런 사이란 너무 오래 질질 끌면 안 좋다지 않니."우리막내 완석이 건 때문에 결혼을 미루어온 것을 뻔히 알고 있는 누이가 왜 하필이면 그날따라 그런 말을 했을까? 이젠 다 큰 동생의 세탁물 뒤치다꺼리가 지겨워졌다는 뜻일까? 혹시 인정이와의 관계가 이미 거덜나고 만 사실을 지레짐작하고서 슬쩍 넘겨짚어보느라고 한 말은 아닐까? 그게 끝장난 것도 지난 8월이었으니까 벌써 두달이 다 되어간다. - P294
서울에 도착하는 대로 전화해요. 한번만 더 만나요. 완주의 손에서 떨어진 엽서는 뜨거운 창틀에서 오그라붙고 있었다. 그런데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엽서를 받고 나흘 후 사무실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리려는데 갑자기 전화번호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는 건지? 일년 가까이 줄곧 그의 손가락 끝에 매달려 있던 그 타성의 숫자를까먹고 말다니, 정말 그럴 수도 있는 걸까? - P295
인정이 또 겨울이 왔네. 남녀가 갑자기 가까워지는 계절이지. 사람 체온이 환장하게 그리운, 음탕하게 오슬오슬 추운 계절이야. 그래서 약혼한 사이들은 요즘 부쩍 결혼을 서둔다지 않아. 겨우내 꼭붙어서 지내려고 말이지. 남들은 그런데 우리는 어쩌다 일이 거덜나고 말았나. - P296
그러다가 별안간 최 형사의 발길이 뚝 끊어지고 말았다. 혹시 완석이가 잡힌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수사를 중단할 까닭이 없을 텐데, 이번엔 노상 피해 다니던 완주 쪽에서 오히려 안달나서최 형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뜻밖의 사실은, 완석이가 처음 지목됐던 것처럼 주동자가 아니라는 것이 조사 결과 밝혀졌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자수 형식을 밟고 자진출두하지 않는 한 끝난 일이아니므로 완석이가 돌아오거든 즉시 데리고 와달라는 부탁이었다. 완석이 놈이 직접 그 소요의 주동자가 아니라는 말에 완주는 안심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새로운 불안이 더럭 치미는 것이었다. 중이 두려워 도망 다니는 게 아니라면 도대체 녀석의 행방불명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나? 단순한 실종? 어디서 뺑소니차에 치여서한강물에 버려진 거나 아닐까?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렇게 섣불리 죽을 놈이 아니야. 일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완석이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게다가 이젠 완석이의 행방을 알려고 드는 사람도 없다. 최 형사도이젠 그 일에 흥미없다는 표정이고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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