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독서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책을 펼치기만 하면 책장에서 마취성 기체가 피어오르는지 으레 눈이 스르르 감겼다. 눈을 아무리 부릅뜨고 책장을 노려봐도 활자들은 그저 생뚱생뚱하고 터진데로 물 새듯 졸음이 새어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적극적인 독서 방법으로 마르쿠제 번역을 해보는 것인데 그것 역시 별 효과가 없었다. 책은 안 읽히고 신문사에 복직되리라는 희망은 점점멀어져갔다. 그야말로 실직 칠개월은 수마(魔)와 싸운 세월이었다. - P176
모자라는 생활비를 충당하려면 번역 일감을 더 얻어야 할 텐데. 어서 완혁을 만나고 출판사들을 돌아다녀봐야지. 늘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외출은커녕 전화질조차 하지 않았다. 탈고한 원고를 갖다주고 새 일감을 받아오는 것도 아내에게 맡겼다. 기분전환으로 이따금 바깥출입도 할 만한데 내가 왜 이렇게 두문불출일까? 돈 쓰는 게 무서워서? 하기는 생활비에서 그가 용돈으로 축낼 여유는 없는 게 사실이었다. 한달 생활비 십일이만원이란 가장의 용돈없음을 의미했으니까. 그 때문에 술담배를 끊은 석규였다. - P177
하여간 석규가 개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의식한 것은 실직 후집에 붙어 있게 되고서부터였다. 보니까 개는 노상 매여 있는 것이었다. 아직 구속에 길들여지지 않았던지 죽을힘을 쓰며 몸에 매인자기 집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개를 보면 몹시 안쓰러운 생각이들었다. 그래서 걸핏하면 끈을 풀어놓기를 잘했는데 그 때문에 아내와 다툴 때가 여러번이었다. 개에게 ‘봉봉‘이라는 예쁜 이름까지몸소 지어준 아내가 저렇게 매정한 구석이 있었던가? 그러나 아내는 아내대로 억울하다는 듯이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 P178
"당신 기분은 다 알아요. 그렇지만 나까지 억압자로 몰진 마세요. 누군 개를 학대하고 싶어서 하나요? 온 집안이 더러워지니까그렇지. 아무 데나 똥을 싸고 개털이 온통 부엌에 날아드는데………… "좋아, 그러면 똥은 내가 뉘지." 그래서 아침 산보가 시작되었다. 아침마다 규칙적으로 똥 누일 요량으로 산보길에 데리고 나갔다. 진돗개와 스피츠의 잡종인 이 개는 무척 석규를 따라서, 산보에 데려가려고 끈을 풀면 어떻게나 반색을 하는지 낑낑 앓는 소리를 내며 오줌을 질끔거리는 것이었다. - P179
이제 녀석은 제 아빠와 놀려고 들지 않는다. 아니,방에만 틀어박혀 있고 수염도 깎지 않은 제 애비가 오히려 두렵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엄마가 외출할 때면 (하다못해 시장에 갈 때라도) 녀석이 기를 쓰고 따라나서는 것은 아마 제 애비와 단둘이 있기가 싫기 때문이리라. 석규를 따르는 것은 오직 봉봉뿐이었다. 그는 아침마다 개를 데리고 강가로 나가 똥을 뉘었다. 아내는 이제 더이상 개를 붙잡아맬구실이 없었다. - P179
이렇게 시작된 아침 산보는 한편 석규의 정신건강에도 좋은 영향을 주어서 쇠락하기 쉬운 실직생활에 미미할망정 생활 리듬의 명맥을 이어가게 했다. 이 새벽의 눈부신 질주는 그러나 몇달 계속되지 못했다. 어느날아침 석규를 따라 강변도로를 횡단하던 봉봉이 트럭에 치이고 말았던 것이다. 개는 물 젖은 걸레뭉치처럼 아스팔트 위에 내던져져맥없이 깽깽거리고 있었다. 털가죽을 뚫고 흰 뼈가 튀어나오고 아스팔트의 황색 차선 위에 선혈이 번졌다.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랄까. 개는 뒷다리 하나가 으깨져 아주 못쓰게 되어버렸다. 그뒤부터 개는 아무리 잡아끌어도 산보길에 따라나서지 않았다. - P180
석규는 번역 일에 몰두하다가도문득, 자신의 목이 개끈으로 책상 다리에 붙들어매여 있는 게 아닌가하는 엉뚱한 망상에 사로잡혀 슬그머니 목을 쓸어보곤 했다. 어떤 때는 번역 원고지를 한칸 한칸 메꾸어가는 자신이 양계장의 닭과 동일시되기도 했다. 협소한 칸막이에 갇혀 열나게 알만 낳는 닭, 아내는 알을 낳자마자 거둬가는 양계장 주인이고...... 그러나 이젠알도 처음만큼 많이 낳지 못한다. 번역 일거리가 많이 줄어든 것이다. - P181
바람이 다시 불어와 오동나무 잎새들을 흔들어놓았다. 그 소리에 개가 설핏 눈을 떴다. 귀를 세우고 잠시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듣다가 이윽고 석규와 눈이 마주쳤다. 개 꼬리가 보일 듯 말 듯 두어번 맥없이 흔들렸다. 아마 반갑다는 모양이다. 그러나 개는 석규가 채 눈을 돌리기도 전에 먼저 눈을 도로 감고 앞발에다 턱을 묻어버리는 것이다. 개가 석규를 닮아가는 것일까, 석규가 개를 닮아良가는 것일까? 개도 분명히 제 주인처럼 병들어 있었다. - P181
"안되겠어요, 불면증까지 생기고, 이 방에 당신 혼자 내버려둬선정말 안되겠어요. 그러다간 정말 더 큰 병을 얻고 말아요. 이 방은썩은 늘 같애요. 그리고 나도 따로 자니깐 선머슴 닮아가는 것 같고………… 그래서 생각한 건데요, 이러면 어때요? 마침 생활비가 모자라 쩔쩔매는 처지이기도 하니, 방 하나 세놓기로 하죠. 이 방은 세古줘버리고 당신은 안방으로 건너오고...... 좋잖아요?" - P183
아내의 슬하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내가 말하는 불면증 치료 방법이란 묻지 않아도 뻔했다. 아내가 어느 여성 잡지 부록에서 읽었다는 것인데, 잠이 안 올 때는 방사가 약이라는 것이다. 아내의 합사 제의는 남편의 불면증을 위한다는 핑계를 세워 제 욕심을 채우려는 심사로 여겨졌다. 두어달 돌보지 않는 사이에 아내의 성(性)은 근지러워 참을 수 없을 지경으로 퉁퉁 부어오른 것이 아닐까? 석규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허구한 날 무력증에 빠져 있는 내가과연 아내의 분방한 성을 감당할 수 있을까? - P183
왜 이 더러운 미련을 털어버릴 수 없는가. 석규가 실직 칠개월동안 투쟁하여 이긴 게 있다면 그건 술담배 끊은 것과 신문을 끊은것이었다. 백해무익한 중독성의 기호물로서 요새 신문은 결코 술담배에 뒤지지 않는다. 저속한 주간지 스타일의 선정주의로 전락한 지 오랜일간지들, 여론을 선도하고 우둔한 독자를 준열히 꾸짖어야 할 언론이 오히려 독자의 천박한 기호에 영합하여 갖은 교언영색을 쓰며 구걸하는 꼴이라니! 석규는 퇴직금 받아가라는 통지를 받은 날,분연히 신문을 끊어버린 것인데, 그것으로 그가 다니던 신문사와의 마지막 연줄은 잘린 셈이었다. - P184
텅빈 편집실. 그림자가 얼룩진 책상과 의자들. 쓰다 만 기사 원고는 자다가 흘린 침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석규는 가슴이 답답하여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숨이 점점 가빠지고 온몸이 부풀린 듯팽창하는 느낌이더니 별안간 저돌적인 충동이 목울대로 치밀어올랐다. 그다음 순간 석규는 그 광기의 거센 폭풍 속에 휘말리고 만 것인데, 그 대목은 전혀 기억에 없었다. 다만 출입구 쪽 소화기가 비치된 코너로 달려가 벽에 붙은 소화용 붉은 도끼를 떼어낸 것만이 생각날 따름이었다. 의식이 싹 지워진 그 시간은 얼마 동안이었을까? 일분? 아니, 단 몇십초였을지 모른다. 잠시 후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는 눈앞에 벌어진 끔찍한 폐허를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부장의 책상은 처참하게 부서졌고 도끼는 뭉뚱한 뒤통수를 보이며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꽂혀 있었다. 전신에 땀이 비 오듯 했다. 혼신을 다하여 무섭게 도끼를 내리친 뒤 몇십초 동안의 무의식상태를 생각하면 석규는 지금도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날 생긴 오른쪽 눈 흰자위의 붉은 핏발은 오랫동안 삭지 않았고, 급격하게 몸을 혹사해서 생긴 어깨 근육통으로 그는 대엿새 동안 몸살을 앓아야 했다. - P188
그는 "젊은 친구가 안됐어. 틀림없이 머리가 어떻게되고 만 게야" 하고 짐짓 동정하는 투로 나왔으리라. 결국 석규는조울증 환자일 뿐이고, 부서진 책상은 새 책상으로 대치해버리면그만이었다. 파괴된 것은 책상 하나와 석규 자신뿐이었다. - P189
아, 그토록 외면해오던 자신이 다시 이념의 포로가 될 줄이야. 몇년 전 3월 제작거부 농성을 풀고 투항하는무리에 끼여 회사로 복귀했을 때, 그때 벌써 이념이나 대의명분 따위는 포기해버리지 않았던가. - P190
집에 있는 아내들은 그들대로 남편의부장으로부터 걸려오는 전화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드디어 누구누구가 부장을 만났더라는 소문이 나돌고, 누구누구는 건강 핑계대고 빠져나가고, 누구는 집에 잠깐 들렀다가 아내가 말리는 바람에 그냥 눌러앉아버렸다. 드디어 사주로부터 최후의 통첩이 오자투항자가 일시에 무더기로 생겨났다. 석규도 그 무리에 끼여 손들고 나갔다. 張您 - P191
그러다가 작년 10월에 부장 데스크로부터 남도 어느 해안지방의공업단지를 취재하여 르뽀 기사를 쓰라는 지시를 받았다. 데스크의 의도는 물론 저임금 실태를 문제 삼으려는 것이 아니고 공장 새마을운동에 입각하여 근로자들을 역경을 물리치고 분투하는 산업전사로 부각시켜보자는 것이었다. - P193
그녀가 부양해야 하는 가족 수는 홀어머니와 국민학교 다니는남동생 해서 단둘뿐이었지만 이렇게 식비라도 줄여야 자기 몫의적금을 부어나갈 형편이었다. 일년 만기 십오만원짜리 적금통장이그녀의 유일한 꿈이었다. 아니, 그 방엔 꿈이 없었다. 도무지 소녀다운 꿈이 없었다. 그녀의 악전고투는 차마 끔찍한 것이었다. 석규는 문옥자라는 이름의 그 여공을 역경을 딛고 분투하는 산업전사로 묘사할 수 없었다. 남의 집 쓰레기통을 뒤져 버린 생선 대가리를 주워 먹으면서까지 돈을 모았다는 어느 해의 여자 저축왕이고백한 소감 못지않게 그것은 소름이 끼치도록 끔찍한 사연이었다. 그녀의 입 가장자리에 퍼져 있는 마른버짐은 아마 비타민 부족 때문에 생긴 것이 틀림없으리라. 그러면서 그녀는 매일 하루 열두시간 노동을 해냈다. 실밥과 천조각에 파묻혀 불철주야 맥이 내려 틍퉁 부은 발로 미싱의 페달을 밟았다. - P195
그러나 이렇게 불철주야 작업에 혼신을 쏟는 옥자를 공장 새마을의 기수로, 산업전사로 묘사할 수 없는 것이 슬픈 일이었다. 그리고 두번에 걸쳐 산업훈장을 받은 바 있는 그녀의 고용주를 애국자로 묘사할 수 없는 것도 또한 안타까운 일이었다. 생산성을 높이고수출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그 고용주가 한 일이라곤 단지 옥자네를 싼 임금으로 고용해서 불철주야로 혹사시킨 것뿐이었다. - P195
석규도 전에 그런 공장데기 출신 작부를 독립문 근처 어떤 니나놋집에서 만난 일이 있었다. 그 여자는 한사코 술을 거절했는데,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른 작부가 그 이유를 귀띔해주었다. 그여자는 삼일 전 죽으려고 약을 먹었다가 주인아줌마한테 들켜 실패했는데 그때 먹은 독한 약 때문에 위장이 크게 상해 술을 못든다는 것이었다. 그때 석규가 받은 느낌은 과연 정확히 어떤 것이었던가. 그 말을 듣자 대번에 기분이 언짢아져 주흥이 깨지고 만 것인데 솔직히 말해서 연민의 정보다는 하필이면 이런 여자가 나에게 걸려들었나, 하는 재수없다는 생각이 앞섰다. 몸때가 되어 기저귀를 차고 나와 만져볼 수 없게 된 작부처럼. - P196
석규는 주소가 적힌 쪽지를 들고 영등포구 영일동으로 김진숙을찾아갔다. 알고 보니 영일동은 세상이 다 아는 영등포 역전 적선지대였다.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 하고 불길한 생각을 억누르며 찾아갔으나 예감은 그대로 적중되고 말았다. 의상실에 나간다는 것은거짓말이었다. 진숙은 융파자마 바람으로 툇마루에 쪼그리고 앉아제 발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 P197
그녀가 석규로부터 바라는 것은 옥자의 소식이 아니라 오직 잠깐 놀러 온 낮거리 손님이었다. 그녀의 의심 품은 눈빛은 "난 내 손님 앞에선 조금도 부끄럽지 않아요. 그런데 내 손님이 아닌 당신은 도대체 누구세요?" 하는 것 같았다. 석규는 결국, 어느 오쟁이 친구의 소개로 찾아간 낮거리 손님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방 안엔 손님들이 피우고 간식은 담배 냄새가 몹시 났다. 공장 새마을운동의 취재는 결국 옥자와 진숙이라는 여공의 이렇게 기구한 이야기를 곁들인 저임금 실태조사가 되어버렸다. 부장은 석규의 르뽀 기사를 두 손아귀에 꾸겨쥔 채 얼굴을 잔뜩붉히더니 심한 욕지거리를 해대는 것이었다. "야! 너 누굴 놀리는 거야 뭐야? 이따위 기사를 써내는 저의가뭐야, 도대체!" 다음 순간 닷새 밤을 새우며 써놓은 백매 가까운 분량의 원고는 부장의 손에 발기발기 찢겨 쓰레기통에 처넣어졌다 - P198
데스크와 일선 기자 사이의 평형관계는 그 사건으로 여지없이 깨어지고 대신 주종관계로 탈바꿈했던 것이다. 부장은 걸핏하면 "나간 놈들 봐. 하나같이 별 볼 일 없이 빌빌거리는 꼴을, 자네, 그때내 말 듣고 기어들어오길 천번 잘했지" 하면서 노골적으로 은인 행세를 하려고 들었다.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네놈들이 지조를 꺾고투항한 주제에 밸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느냐고 아주 얕잡아보는것이었다. 그러나 석규는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른 분노를 꿀꺽 삼켜버렸다. 그럴 수밖에, 득세한 이데올로기의 화신인 부장은 도무지 불가항력이었다. 그에게 대든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자폭행위나 다름없었다. - P199
아내에게 죄스러운 생각도 없었다. 간염에서 온 진숙의 암담한수묵색 낯빛이 석규를 그런 감상에 빠뜨렸나보다. 썩어가는 그녀의 가슴을 건강한 자기 가슴팍으로 오래오래 눌러주고 싶었다. 그러나 진숙의 알몸에선 밤새도록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간염의말기 증상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후에 찾아갔을 때는 이미 그녀가 고향으로아주 떠나가버린 뒤였다. 진숙은 마지막 안간힘으로 붙잡고 있던끄나풀을 놓아버리고 경남 창원 고향땅의 따뜻한 흙 속에 검은 얼굴을 파묻으러 내려간 것이었다. - P200
아마 석규의 무력감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나보다. 이념은 그소유자를 파괴하는 법, 이념을 품는다는 것은 가슴에 시한폭탄을품은 것과 같아서 언젠가는 그 이념에 의해 스스로 파괴되고 만다. 석규도 오래가지 않아 그후 석달 뒤 부장 책상을 부수고 스스로 자폭하고 만 것이었다. - P201
이런 아내를 내보내놓고 빈집을 지키는 석규는 하루 종일 마음이 언짢았다. 아내를 시장에 내놓고 방매하는 느낌이었다. 진철이놈이 제 엄마를 따라다니니까 망정이지 그렇지만 않았다면 의처증이라도 걸릴 판이다. 안된다. 아내를 도로 불러들여 집 안에 앉혀놓아야지. 멀쩡한 남편을 두고 여편네가 가장 노릇을 하려 들다니! - P202
석규가 물러난 자리는 이미충원되어 있었다. 그 자리를 채운 사람은 다름 아닌 보이콧 사태 때 성명서를 초안하고 앞장섰던 초강경파 김충식이었다. 단단한 무쇠가 오히려 잘 부러진다고 하던가, 김의 투항은 완혁네들에게 큰 물의를 빚었던 모양이었다. 완혁은 이러한 사실을 전화로 알려주면서 몹시 분개했다. (석규는 여태 고집을 피워 완혁을 만나지않고 있지만, 그럼에도 완혁은 종종 전화를 걸어오곤 했다. 그는 석규에게 전화 거는 유일한 사람이자 유일한 뉴스원이기도 했다.) - P202
처외삼촌은 충분한 시간 여유를 줄 테니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언질은 육개월이 지난 지금도 유효했다. 그는 세월이 약이란 말을 믿는 느긋한 사람이었다. 다른 데도 알아봤으나, 꼬리표달린 전직 기자라는 걸 알고는 모두 한결같이 고개를 내두르는 것이었다. 이젠 더이상 버틸 수 없는 궁지에 몰린 것이다. 실직생활 막바지에 온 것이다. 이젠 별수 없이 처외삼촌 회사로 기어들어가게 되나보다 하는 각성이 폐부를 아프게 찔렀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지금 갑자기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고 결국 그렇게 낙착되고 말리라는 예상은 벌써 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도 무력증의 원인이었다. - P204
"진철이 거기 있죠?" 석규의 돌발적인 기세에 장모는 주춤하는 눈치다. "아니, 진철이 놈은 별안간 왜 찾나? 그놈은 나하고 같이 잘 놀고있는데......" 역시 짐작대로구나. 눈앞이 어지럽고 귓속이 앵앵거리는 소음으로 가득 찼다. 진땀이 솟았다. "진철이 엄마 어디 간다는 말 없었어요?" "어딜 가긴 어딜 가, 이 사람아. 그놈의 빌어먹을 보험인가 뭔가때문에 나갔지. 하여간 극성이여. 취직한 지 보름도 못되는 제 동생한테까지 보험 들라고 성화를 안 부리나, 원." "아니, 보험이라뇨?" "자네, 여태껏 그걸 몰랐나? 그애가 요사이 보험회사 외무사원으로 싸돌아댕기는거." "예?" "어이구, 무심도 해라. 제 여펜네가 뭣 하면서 돌아댕기는지도모르고, 쯧쯧, 벌써 열흘도 넘었네." - P206
문득 경대 위에 걸린 달력에 볼펜 글씨로 울긋불긋 메모된 것이눈에 띄었다. 날짜가 쓰이고 난 여백에 뭐라고 잔뜩 씌어 있다. 뭘까? 자세히 들여다보던 석규는 흠칫 놀랐다. 이건 모두 내 친구들 이름이 아닌가. 14일: 산은 오문중 대리, 15일: 이인규 교수, 16일: 문수일 과장, 17일: 한웅섭 사장, 18일: 박순철 기자... 이런 식으로 30일까지 차곡차곡 메워져 있었다. 이게무슨 수작인가, 내 친구들과 만날 약속을 하다니.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힌 석규는 허둥지둥 경대 서랍을 열고 뒤져보았다. 다행히 거기에서 아내가 생명보험회사 외무사원이라는 증거가 나왔다. - P207
엎으라져 있던 봉봉이 놀라서 후달짝 일어났다. 나무 위로 기어오른 그는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렀다. 칼에 나무가찍히는 퍽퍽 소리와 흑흑 토해내는 숨소리가 동시에 일어났다.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들이 하나둘 잘려 아래로 떨어졌다. 장독대에떨어져 쨍그렁거리기도 하고 빨랫줄에 걸쳐 데룽거리기도 했다. 칼이 완전히 먹히지 않은 큰 나뭇가지는 몸을 실어 체중으로 부러뜨렸다. 땀에 흠뻑 젖은 러닝셔츠에 벌레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손아귀에는 초록빛 수액이 끈적거렸다. 이봐, 자네 외삼촌 회사가 아니더라도 내가 나서면 밥벌이할 곳은 있을 거야. 봉급이야 그만 못하겠지만, 참자. 이런 흉년의 시대에는 적게 먹고 가는 똥 싸는 법이야 이젠 돌아와! 인규 그 새끼 만나지 말고 그냥 와. 인규를 만날게 아니라 완혁이를 만나야 하겠어. 그놈처럼 살면 돼. 지금 당장전활 해야지. 전화하면 당장 우리 집으로 달려오겠지. 빌어먹을 자식, 얼마만이냐 삼년 만에 얼굴을 맞대는구나. 빌어먹을! 이놈의나무 질기긴 되게 질기군. 안되겠어. 완혁이한테 이따 저녁에 우리집올 때 톱 사오라고 부탁해야지. 숫제 밑동을 싹둑 잘라버려야겠어! 석규는 땀과 벌레로 뒤범벅이 된 러닝셔츠를 벗어던지고 나무위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놀란 봉봉이 제집 주위를 미친 듯 뛰어다니고 있었다. - P-1
복도 끝은 가파른 나무계단과 이어져 있다. 너는 잠깐 멈춰 서서계단을 굽어본다. 어서 바삐 이 병원을 떠나고 싶은 조바심 때문인지진한 콜타르 냄새를 흔들며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그 계단은 한층 위태로워 보인다. 금방 너의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뭔가속에서 휘딱 뒤집히는 듯 어지럼증이 심하게 일어난다. - P212
공장이 문을 닫은 지 벌써 석달. 공장장은 불황 때문에 당분간휴업하니 집에서 쉬고 있으면 연락하마고 했다. ‘당분간‘, 그리고 ‘곧‘이라고 말했지만 그게 벌써 석달이 되어버렸다. 석달. 벌써 그렇게 됐나 하고 너는 놀라지만, 어제저녁 이 병원 수술실에서 너의배를 만져보던 의사도 임신이 석달쯤 된 게 아니냐고 말하지 않았는가. - P213
그때 위에서 계단 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포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 의사였다. 그는 상체를 꾸부리고 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창을 통해 들어온 노을빛에 둘러싸여 그의 몸 윤곽은 불붙고있는 듯하다. 의사는 너에게 무슨 용무가 있는 듯이 보인다. 뭘까? 응접실 금붕어를 죽인 사실을 눈치챈 걸까? 다시 수술실에 가두고벌거벗기려는 걸까? 너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간다. - P214
창녀 단골 의사인 저 남자가 두려웠다. 창녀 환자들 가운데서처녀 한명을 적발해놓고 그는 능청을 떨었던 것이다. "남자의 동의가 있어야지, 곤란한데" 하면서 너의 자초지종을 추궁했다. 비밀을파헤치고 말리라. 너의 아랫배에 잉태한 죄를 긁어내기 전에 죄의내력을 듣고 말리라. 너는 수술대의 써늘한 비닐 커버 위에 누워바들바들 떨었다. - P215
야근까지 하고 나면 사생활이라곤 전혀 없었죠. 이년 동안 노상 바쁘고 피곤했어요. 그러다가 공장 문이 덜컥 닫히자 갑자기 허망해지고만 거죠. 망연자실해서 괜히 실없는 웃음이 샐샐 새어나오고, 결국 옆자리에서 재봉일 하던 준식이와 같이 자고 말았어요. 열흘 뒤엔 같이 자취하던 동숙이 몰래 도망쳐나와 준식이와 합쳤어요. - P215
"참 허망한 얘기구먼. 공장 문은 닫히고 놈팽이는 군대 가고 돈은 떨어져, 또 고향엔 무조건 가기 싫지. 그럼 다 된 얘기 아냐? 조심하라구, 조심해. 이 동네 우리 단골 아이들 중에도 공장 출신이더러 있대지, 아마. 자, 이젠 마취약 기운이 퍼질 때도 됐는데..... 아가씨, 내 말 들려? 안 들려?" - P216
몽롱한 의식을 파먹는 포르말린 냄새. 의사의 말소리가 점점 불확실하게 멀어져갔다. 금속기구 부딪는 소리마저 먹먹하게 코 막힌 소리를 내고 골목길 쪽에 벌겋게 부풀어 있던 창녀 두어명의 웃음소리도 어렴풋이 멀어지고 통증. 아랫도리가 벗겨졌구나. 박속같이 마구 헤집어 우벼내버린다. 빡빡 긁어내버린다. 화끈거리는부젓가락으로 들쑤셔버린다. 난자당한 피투성이. 금붕어는 뽀드득밸이 터져 죽었어. - P216
진창을 조심하며 한참 걸어가다가 너는 제풀에 깜짝놀라며 멈춰선다. 거기가 준식이의 셋방으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벌써 디피점 앞까지 와버린 것이다. 내가 어느새 이 길로 들어섰나? 동숙이의 자취방을 찾아가는 길이었는데・・・・・・ 너는 슬며시 맥이 빠져버린다. 그렇다. 석달 동안에 이 골목길은 너의 무의식 속에 아주 찰거머리같이 달라붙어버린 것이다. 습관, 그 지겨운습관에 이제 너는 넌덜머리 난다. 어떻게 할까? 그 셋방은 오늘 판사람이 세 들었을 텐데.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주인집에 맡겨둔 옷가방을 찾아 나올까? 동숙이를 만나보고 모레쯤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가방을 들 힘이 있을지 몰라. - P220
우린 석달 동안 방에 갇혀 맨날 그짓만 했단다. 정말 지겨웠어. 너한테로 얼마나 돌아가고 싶었다고. 이 골목에서 도망치고 싶었어. 그러나 그게 안되더라. 나중엔 될 대로 되라, 아주 자포자기였지. - P221
여중생 교복을 한 너의 얼굴은 사진관 주인에게 빼앗기고 그 진열장이 자리 잡은 시외버스 정류장앞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 그 얼굴은 수많은 시선에 뒤얽혀서 더러운 모욕을 받고 있었다. - P221
‘모친위독급히귀향바람부친‘. 전보 내용이 너무 엉뚱해서너는 믿지 않았지만 부친이 당장이라도 상경하여 들이닥치면 어쩌나 하고 노상 근심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사방에서 쑤군거리며 몰래 불러가는 너의 아랫배를 손가락질했다. 동숙이도 한패가 되어너를 비웃는 것 같았다. 너는 다시 그들에게로 돌아가고 싶었다. 준식이의 자취방에서, 이 골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 P222
그것은 밤마다 세번씩 준식이의 자취방을 뒤흔들던 소리였다. 아무리 그짓에 몰두해도, 한밤중 잠에 취해 있어도 허사였다. 벽에걸린 옷가지들은 유령처럼 춤을 추고, 턱은 덜덜 떨리고, 육중한 기차바퀴가 거침없이 굴러와서 허연 강철빛의 모서리로 너의 벌거벗은 가슴을 가르고 질주하는 것이었다. - P223
동숙이의 자취방으로 가는 길은 넓은 공터 가운데로 뚫려 있다.알싸한 쓰레기 냄새. 어둠속에서 연탄재들이 발에 툭툭 차인다. 동숙이를 만나면 먼저 무슨 말을 할까? 뭐라고 거짓말을 둘러대지?사실대로 말할까봐. 너무 피곤해. 거짓말할 힘도 없어. 따뜻한 아랫목에 동숙이랑 나란히 누워 언 등허리를 녹이고 싶어. 따뜻한 눈물을 흘리고 싶어. 동숙아, 나 많이 다쳤나봐 나 좀 만져줘. 이 겁먹은응어리를 으깨뜨려줘. 난 금붕어를 죽여버리고 말았어. - P224
"거기서 뭘 하지?" 주인아저씨였다. "안녕하세요?" "아이고, 오랜만이구먼, 인숙이." "동숙일 찾아왔는데요." "아니, 몰랐나? 이사 간 지 두달도 넘었는데." - P224
"혹시 시골 내려간다고 안 그랬어요?" "그런 말은 없었는데…………… 아마 서울 어디에 눌러 있겠지." 너는 인사하고 돌아선다. "공장도 쉬는데 시골이나 내려가지 않고...... 쯧쯧, 몸조심들 해야지." 뒤에서 주인아저씨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뜻에서몸조심하라는 말이리라. 몰래 눈물이 흘러내린다. 벌써 결딴나고말았어요. 몸이 결딴났어요. - P225
누군가 몸에 손을 댄다. 순간적으로 손바닥 감촉에 저항하며 전신이 뻣뻣해진다. 좀 옆으로 비켜선다. 그래도 손은 따라온다. 넓게편 손바닥이 바들바들 떨면서 꾸준히 움직인다. 손은 허리에서 허벅다리에 이르는 만곡한 선을 정확하게 더듬어 드러내고 있다. 부르르 경련이 일어난다. 다시 몸을 옆으로 움직인다. 그래도 손바닥은 따라왔다. 너는 지겨운 듯 축 늘어져버린다. 동숙아, 동숙아. 그러다가 너는 더 참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몸을 흔들어댄다. 남자 손이 떠났다. 그 흉측스럽고 뻔뻔한 얼굴을 찾으려고 고개를돌린다. 그러나 주위에는 모두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뿐. 그 엉큼한 손은 어디로 사라졌나? 승객들은 허공의 우연한 한점 혹은 앞사람의 뒤통수에 눈을 둔 채 멍청하게 굳어져 있다. - P227
"아가씨" 옆에서 귓전을 할퀴는 낮은 목소리. 조바심이 일어났다. 꿈결엔 듯 밀려온 이 목소리에 누군가 딴 사람이 대답해주기를기다린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선택한 건 역시 너다. "핸드백이 열렸네요." 원통형의 털모자를 쓴 젊은 여자다. 정말 핸드백은 붉은 속을 내보이며 입을 아, 하고 벌리고 있다. 죽은 금붕어를 싼 흰 손수건! 얼른 스냅을 잠갔다. 딱, 하는 울림 소리. 누가 핸드백을 열어보았구나. 아까 그 사내다. 아까 몸을 만지던 그사내는 단순한 치한이 아니었구나. "뭐 잃어버린 거 없어요?" 여자는 더 참견하려고 든다. - P228
동숙아, 난 금붕어를 죽이고 말았어. 젖꼭지는 까맣게 타버리고. 아기가 죽었어. 아랫배에 찬바람이 가득 찬 휑한 공동, 우벼낸 박속같이 텅 비어버렸어. 동숙아, 허전해 죽겠네. 이젠 버스를 내려야겠어. 어디 산으로 가서 이금붕어를 깨끗한 흙으로 묻어주고 올래. 그러나 몸은 점점 무거워졌다. 머릿속은 백열된 뇌수, 뇌수가 두개골 벽에 아프게 부딪치는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 P229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빛을 받아 아까 본 푸줏간같이 시뻘겋다. 실컷두들겨 부숴버렸구나. 아주 작살내버렸어. 도살칼로 마구 난도질한 거야. 흰 가운에 튄 핏방울이 또 활활 타오른다. 아랫배에 출혈로 새하얘진 공동, 그 죽어버린 폐허에 다시 깊은 통증이 왔다. 폐허다. 폐허다. 이 봄에 저 집터에 풀씨가 눈뜨기 전에 사람들은 피치로 봉해버릴 거다. 물샐틈없이 치밀한 아스팔트로 포장되리라. 거기엔 생명이라곤 눈곱만큼도 없게 되리라. 고무타이어와 피치가맨몸으로 부대끼는 곳, 세우지 못할 미친 속력만이 난무할 거다. 그건 또, 죽음이야. 젖꼭지는 거떻게 죽어버리고・・・・・・ 동숙아, 아기가죽었어...... - P231
"아가씨, 제발 저것 좀 집어줘. 내 목발......" 너는 무서워서 손을 힘껏 뿌리친다. 막 후닥닥 뛰어 달아나려는데 이게 웬일인가. 사내는 시멘트 벽에 등을 모질게 쏠리면서 허재비같이 모로 픽 쓰러진다. 텅 빈 바짓가랑이 한쪽이 허공에 펄럭거린다. 외발이었구나. 오금이 바싹 오그라든다. 발이 얼어붙은 듯 뗄 수 없다. 그때 굴다리 안으로 두어사람이 들어서는 기척이 났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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